정말 TV 뉴스를 보니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은 카메라가 비치는 곳에는 영락없이 나타났다. 국회의원들 중에는 TV에 나오고, 사진 찍히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 있는데 김 원장은 그들의 기량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이 정도면 그가 국회에 들어가도 심심찮게 신문이나 TV에서 얼굴을 볼 수 있을 듯하다.
김만복씨는 사교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386 측근들과도 사이가 좋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전임 국정원장이 김씨가 후임이 되는 것을 반대한 것도 그의 이런 정치성 때문이었을 것이고, 노 대통령이 김씨를 국정원장에 앉힌 것 역시 그의 이런 정치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김씨가 대한민국의 적(敵)에겐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고, 우리 국민에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공기 같은 사람이 될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역대 중앙정보부장, 안전기획부장, 국정원장 중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중정부장들과 안기부장들은 국내 운동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람들이었고, 김대중 정부 이후의 국정원장들은 대한민국 적(敵)의 간담을 간지럽게 한 사람들이었다. 김 원장도 전임자들처럼 야당 대선후보 뒷조사를 하고, 평양을 왔다갔다 하며 대통령 심부름을 했다. 김 원장이 아프가니스탄과 귀국 비행기, 인천 공항에서 보인 모습에 많은 사람이 어이없어했지만, 김 원장은 평소 하던 대로 한 것뿐이다.
정말 눈여겨봐야 할 것은 김 원장이 중정, 안기부, 국정원 통틀어 처음으로 나온 내부 승진 원장이란 사실이다. 김 원장은 대한민국 정보기관이 34년에 걸쳐 만든 사람이다. 김 원장을 보면 대한민국 정보기관과 대한민국 정보요원들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그것이 우리를 절망케 한다.
그렇게 드러난 우리 정보기관의 현주소가 바로 ‘선글라스 맨’이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현지어를 하는 국정원 요원이라고 한다. 국정원은 처음에 그의 신분을 보안 사항인 것처럼 설명했다. 그런 그가 TV 인터뷰하는 김 원장 옆에 떡 하니 앉아 있고, 공항에서도 보란 듯이 카메라 앞에 섰다. 나라의 정보 자산이 그날로 죽어버린 것이다. ‘선글라스 맨’은 김 원장의 행태가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보기관 체질의 문제이고, 앞으로 계속될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정보기관에서 일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정보기관의 존재 이유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 국정원 요원들이 자신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행태다. 국정원 요원이 지켜야 할 최우선 비밀은 자신이 국정원 요원이란 사실이다. 공개된 정보원은 정보원이 아니다. 역정보에 이용될 뿐이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가족 친척에게도 신분을 알려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보요원들은 TV 앞에 나선다.
주한 외교관 한 사람은 “한국 정보원은 금방 알 수 있다. 티를 낸다”고 했다. 베이징 식당에서 안기부 요원 둘이 술에 취해 자신들 신분을 떠드는 것을 목격한 사람도 있다. 외국 주재 대사관 근무자 중 누가 국정원 요원인지는 웬만한 교포들도 다 안다.
노 대통령이 국정원을 방문해 국정원 간부 수십 명과 단체 사진을 찍은 일은 상징적이다. 현직 간부급 정보요원들 얼굴이 일망타진되는 이런 사진을 찍는다는 발상 자체가 정보기관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 사진을 공개까지 했다. 미국에선 CIA 요원 한 사람의 신분이 누설된 문제를 갖고 부통령까지 정권 전체가 흔들거렸다. 국정원 간부 수십 명의 얼굴이 통째로 노출된 대한민국에선 청와대 사진사가 징계를 받았다.
‘선글라스 맨’이 탈레반과 협상을 마치고 사라졌다면 국민이 그의 공로를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공식적으로는 어디에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고 희생하겠다고 맹세한 정보요원의 숙명이다. 그것이 억울하고 안타까우면 정보요원을 그만둬야 한다. 소용도 없는 선글라스는 왜 쓰는가. 차라리 벗고 나서라.
차라리 선글라스도 벗으라
- 양상훈(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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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9-05, 23: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