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조국 근대화에 몸 바친 혁명가"

"한국 좌파 세계관, 관념적·폐쇄적 민족주의에 기초".. 이영훈 교수
김필재 기자 2007-09-06 오후 2:01:28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6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 에서 '박정희 모델의 특질과 역사적 배경'을 주제로 강연을 가졌다. 이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이날 강연에서 박 대통령이 주도한 근대화 혁명을 조선의 타락한 역사에 대한 '충절의 반역'으로 평가했다. 그는 박 대통령을 '근대화 혁명을 일으키고 그 혁명의 제단에 몸을 바친 혁명가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래는 이날 강연의 요약이다. <편집자주>

 
▲이영훈 서울대 교수.ⓒ 프리존뉴스
사람들은 흔히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끈 박정희 모델은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정희 모델은 정부가 시장을 대신해 투자와 경제발전을 주도한 것이다. 이제는 시장이 발전하고 성숙했다. 때문에 정부주도형의 박정희 모델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대개 이 같은 논리로 박정희 모델을 비판한다.

박정희 모델은 개발 정책의 형성·집행·점검 조정의 모든 과정에서 정부주도형 이상의 행동·조직원리와 정신적 가치를 내포했다. 박정희 모델이 성공한 것은 이 때문이다. 박정희 모델에 대한 비판은 이 점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박정희 모델의 성공을 가능케 한 정부의 행동·조직원리와 정신적 가치는 오늘날에도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오늘날의 세계경제는 민간부분의 재산권·자율성·창의성을 존중하는 신자유주의 사상과 정책이 지배적 풍조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역할은 선진국에서조차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것은 기술진보의 속도·생산·자본·유통의 세계화 속도가 워낙 빨라 민간부분의 능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급속한 변호가 몰아치기 때문이다.

박정희 경제모델, 실용적 민족주의에 입각

이러한 추세 속에서 한국의 정부 능력은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는 형편이다. 그 점을 반성하기위해서라도 역사에서 배운다는 자세로 고도성장의 한 세대를 이끈 박정희 모델의 특질을 진지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모델에서 가장 중요한 특질은 정부가 추구한 다양한 개발 정책이 하나의 중심원리로 통합됐다는 점이다.

그 중심원리는 바로 ‘수출주도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기 내내 이 중심원리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나 수정은 없었다. 흔히들 1973년부터 시작된 중화학공업화를 가리켜 방위산업의 육성을 포함한 수입대체형 개발전략으로의 전환으로 이해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중화학공업은 처음부터 해외시장을 겨냥해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기에 충분한 규모로 건설됐으며, 그 점에서 그것 역시 수출주도형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수출주도형 개발모형은 그것의 단초를 제공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라는 국제관계에서의 커다란 변혁을 통해 확립됐다.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는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이념적 난관이었다. 국교정상화를 위한 비밀교섭의 내용이 공개되자 지식인 사회와 대학가가 굴욕외교라고 소리치며 궐기했다.

‘빈털터리’로 세상을 하직한 박정희 대통령

그러나 일본정부가 제공하기로 한 무이자 3억 달러, 유이자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의 외자는 당시 수출고가 1억 달러를 조금 넘었던 한국경제의 입장에서는 종자돈으로서 실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녔다. 그만한 외자 도입이 무엇 때문에 굴욕외교인지는 처음부터 근거가 명확하지 않았다. 어쨌든 박정희 정부는 이 때문에 비판세력으로부터 저항에 봉착했다.

급직전 좌파이념의 재야세력과 그의 영향 하에 있는 대학가의 민족주의 세력은 박정희 정부의 수출주도형 개발전략이 한국경제를 다시 일본경제에 종속시킬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들의 비판에는 논리적이나 경험적 근거가 없었다. 그들의 국제 감각과 국가경제관은 세계경제의 동향과는 무관한 관념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주의에 기초했다.

 
▲'박정희 모델의 특질과 역사적 배경'을 주제로 한 이날 강연에는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을 비롯, 전직 정관계 고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프리존뉴스
그에 비해 박정희 대통령의 국제 감각과 국가경제관은 세계경제의 변화에 대한 시의 적절한 대응과 국익 추구의 실용적 민족주의를 기저로 했다. 박 대통령의 정신구조는 공(公)과 사(私)의 근대적 구분을 확연한 특징으로 했다. 재임기간 18년 동안 그는 직권으로 개인과 가족의 사익을 추구한 적이 없다. 그는 빈털터리로 이 세상을 떠났다.

동시기 비슷한 저치의 후진국 지도자로부터 이 같은 예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정신적 긴장과 그에 묻어나는 비장함은 그 기원이 군인정신에 있다. 재임 18년간 그는 근대화혁명을 일으키고 결국 그 혁명의 제단에 몸을 바친 혁명가로서 인생을 살았다. 그는 식민지로 떨어지고 만 우리 역사의 무기력함을 한탄했다.

‘억압’과 ‘차별’을 정당화시킨 조선왕조 정치철학

그는 인간정신의 타락을 상징하는 부정부패를 무엇보다 혐오했다. 그는 정신혁명을 추구했으며, 그것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경제성장도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재능과 수많은 정성으로 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것이 수출 100억 불의 고지였다.

전술한대로 결국 그것은 “우리 국민들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의 근대화 혁명은 당대의 모든 인간을 상대로 한 주의주의(主意主義)적 동원(動員)을 특징으로 했다. 19세기까지 조선의 역사는 타락했다. 조선왕조가 끝내 일제 식민지로 떨어지고 만 것은 타락한 역사에 대해 반역을 일으킬 지성과 용기가 결여됐기 때문이다.

거기(조선)서는 공과 사의 근대적 구분이 없었다. 거기서 공과 사는 억압의 질서였다. 나라는 임금의 나라였고, 조정은 양반의 조정이었다. 임금과 양반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존재였고, 그래서 공(公)의 세계를 독점했다. 상민과 노비는 비도덕적인 천한 사(私)의 존재였다. 사는 공에 의해 억압되고 차별됐다. 그것을 정당화 한 것이 조선왕조의 정치철학이었다.

타락한 역사로부터의 업보는 길고 깊었다. 그 업보는 식민지 통치를 거쳐 남북 분단의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다. 필자는 박정희 대통령만이 아니라 그와 역사관을 공유하면서 근대화 혁명을 주도하고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 구조를 민족의 역사에 대한 충절의 반역이라고 생각한다.

근대화를 향한 박 대통령의 충절, 역사의 필연

60년대 이후 근대화 혁명은 박 대통령의 공헌이 지대했지만 그의 개인적인 열정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근대문명에 대한 학습·기획·실행 능력이 사회에 두텁게 축적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세대가 추진한 근대화 혁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이 사회가 우수한 기업가를 배출할 능력을 결여했더라면, 나아가 ‘경제의지’(will to economy)로 충만한 국민 대중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근대화 혁명은 구호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근대화 혁명을 지지한 이 같은 전제조건은 그 역사적 기원이 식민 통치 시기를 초월해 한국의 전통 문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한 긴 역사의 관점에서 박 대통령과 그의 세대의 역사적 위치를 규정하자면, 우리의 전통문명과 외래 근대문명의 결합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그들의 근대화 혁명을 위한 반역과 충절의 역사는 한국 역사에 깊은 필연이었다.

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위 기사의 출처는 인터넷 프리존뉴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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