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도청 앞에서 사격명령 내린 장교 없었다"

조갑제, 영화 '화려한 휴가' 공수부대 발포관련 사실 왜곡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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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북한군 특수부대 광주사태 개입했다”(06/12/20)
광주사태를 주제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가 당시 공수부대의 진압작전을 시민들에 대한 '집단 학살'로 묘사하는 등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는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재한 ‘화려한 휴가의 화려한 왜곡’이란 제목의 글에서 “영화 ‘화려한 휴가’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전남도청을 지키던 공수부대가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해 집단적으로 발포해 수십 명이 죽거나 다치는 대목이다. 이 영화를 본 국민들은 공수부대를 살인집단으로 생각할 것”이라며 영화 제작 의도에 문제를 제기했다.

조 전 대표는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사실에 근거해 극화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려면 사실을 본질적으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면서 “이 장면(공수부대 진압장면)은 사실을 왜곡하는 정도가 아니라 조작(造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공수부대 발포, 자위적 조건반사적 대응”

그는 영화에서 공수부대가 누군가로부터 사격명령을 받고 탄창을 M-16 소총에 일제히 끼운 뒤, 무릎 쏴 자세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해 아무런 경고도 없이 일제 사격을 가한 것을 예로 들면서 “그날 전남도청 앞에서는 그런 사격 명령을 내린 장교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조 전 대표는 지난 95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를 토대로 당시 “공수부대의 발포는 시위대가 탈취한 장갑차를 몰고 군인들을 향해 돌진, 공수부대원을 깔아 사망하게 한 사건을 계기로 자위적·조건반사적 대응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영화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시위대를 향해 공수부대가 집단 발포하는 장면에 대해서도 조 전 대표는 “공수부대가 대한민국에 대해 발포하는 듯한 상징성을 풍긴다”면서 이 때문에 “영화 관람자는 공수부대가 반란군이라는 인상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 전 대표는 “국방부는 이 장면에 대해 영화사에 항의하고 국민들에게 ‘그런 일이 없었다’는 해명을 했어야 한다”면서 “공수부대의 난폭한 몽둥이 진압이 광주 사태의 한 원인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실을 근거로 해서 공수부대를 ‘동족을 무차별 사살하는 살인집단’으로 그릴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고 지적했다.

“국방장관, 대통령 찾아가 사실왜곡 설명했어야”

계속해서 그는 “이 영화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이 영화는 사실과 다릅니다’라는 주의를 주어야 할 터인데 거꾸로 ‘사실에 근거해 극화했다’고 한 것은 2중의 왜곡이다. 이 영화를 노무현 대통령도 봤다고 한다. 국방장관은 노 대통령을 찾아가 이 영화의 이 장면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을 했어야 한다”고 질타했다.

한편, 우파시민단체인 국민행동본부는 10일 ‘영화 화려한 휴가의 터무니없는 왜곡에 왜 군(軍)은 침묵하는가’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영화 제작진의 광주사태 진압작전 왜곡을 비판했다.

단체는 성명에서 “80년 5월 21일 낮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가 발포한 것은 탈취한 장갑차와 트럭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공수부대를 돌진, 한 사병을 깔아죽이고 조건반사적으로, 자위적 차원에서 사격을 하게 된 것”이라고 지적한 뒤,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95년의 검찰 조사에서도 전남도청 앞에선 사격을 명령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밝혀져 공수부대 지휘관은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 전날 밤 전남도청 부근에서 시위대가 밀어붙인 버스에 깔려 네 명의 경찰관이 죽은 뒤에도 공수부대는 발포를 하지 않았다.”

국민행동본부 “진압과정서 27명의 군인·경찰관 죽어”

성명은 이어 “진압작전 초기 돌을 던지는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방패 등 진압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공수부대가 곤봉으로 과잉 진압한 사실이 있고 이것이 광주사태를 촉발한 한 원인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트럭·장갑차·버스 등으로 밀어붙이는 시위대를 향해서는 (군이) 발포하지 않고 인내한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성명은 “광주사태 진압과정에서 27명의 군인과 경찰관도 죽었다. 5.18재판에서도 책임은 정권장악을 위해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광주에 공수부대 투입을 결정한 신군부 인사들이 졌고,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처벌받지 않았다”면서 “공수부대도 역사의 피해자다. 국군을 매도하는 그 마음을 김정일에게 돌릴 것”을 촉구했다.

한편, 영화 ‘화려한 휴가’의 사실 왜곡을 지적한 조 전 대표와 국민행동본부의 주장은 현재 인터넷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으며,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댓글’(9일 기준, 총 댓글 5,145개, 야후미디어 관련뉴스 9월 8일자)을 통한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조 전 편집장의 경우 현재(9일 20시 30분 기준) ‘야후미디어’ 국내유명인사 검색어 순위에서 신정아·이창호·진중권에 이어 4위에 등재됐으며, 상당수의 네티즌들(총 댓글 5145개, 야후미디어 관련뉴스)이 영화의 사실 왜곡과 관련해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네티즌 “상업영화도 철저한 고증 거쳐 만들어야”

일례로 아이디 samhwa5057의 경우 “군 진압부대에 총질한 것은 반정부 국가전복세력이외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경찰무기고를 탈취하고 군 장갑차를 빼앗는 그런 조직적 행위는 계획적인 폭동이었지 민주화운동으로 보기에는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이와 함께 아이디 beatoben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 광주사건도 재조명 될 것이다. 이제 좌익들의 시대도 십년이 다 됐으니 그들의 악다구니도 이제 잦아들 것”이라고 했으며, 아이디 kimyj8824는 “상업영화도 다큐멘터리처럼 철저한 고증을 거쳐 만들어야 한다”면서 ‘화려한 휴가’의 역사 왜곡을 질타했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아래는 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 (전남도청 발포 부분)


시위대, 광주시장에게 화염병 던져


전날 밤 시위대의 차량 공격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뒤 도로에서 교대로 假睡眠을 취한 공수부대는 5월21일 전남도청 앞 금남로 前面에 11공수여단이 61·62대대를, 노동청 방면에 63대대를, 광주천 방면에 7공수여단 35대대를 각각 배치하여 전남도청 방어를 준비했다. 동이 트자 시위대들이 금남로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5월21일 08시경 전남도청 앞에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死體 2구가 실린 손수레를 앞세우고 공수부대의 蠻行을 규탄하며 계엄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10시경 시위대 代表 4명이 7공수여단 35대대장의 안내로 전남도청에서 張炯泰 도지사와 면담, 공수부대의 철수·연행자의 석방·과잉진압의 사과, 계엄사령관과의 面談 주선을 요구했다. 張炯泰 도지사는 要求조건이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후 도청 앞에 마이크 설치를 기다리던 중, 먼저 具龍相 광주시장이 나가 시위대에 진정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시위대는 도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며 각목과 화염병을 던져 具龍相 시장은 연설을 하지 못했다. 11시경 張 도지사는 시위대 앞에서의 연설을 포기하고, 헬기를 타고 계엄군이 철수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으니 시민들은 자제하고 生業에 복귀해 달라는 방송을 했다. 시위대는 12시까지 공수부대가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시위대가 수만 명으로 불어나면서 카빈 총을 들고 있는 사람도 눈에 띄고, 장갑차를 비롯한 트럭·버스 등 수십 대의 차량이 시위대 前面에서 공수부대를 압박해 왔다. 위기의식을 느낀 11공수여단 61대대장(安富雄 중령)은 여단 본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필요한 대책강구를 건의했다. 여단 참모장은 宣撫活動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도청을 死守하라는 지시만 반복했다.

11시경 63대대장은 대대장 지프차에 보관하고 있던 대대 경계용 실탄을 중대장들에게 1인당 10발씩 지급하고,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시에만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12시경 공수부대는 장갑차 2대와 함께 도로에 횡대로 포진하여 시위대의 도청 진출을 저지했다. 시위대는 장갑차·트럭·버스·택시 등 100여 대의 차량을 前面에 내세우고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압박했다.

서로 10m 정도까지 접근, 긴장된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13시경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는 데 항의하며 시위대가 화염병을 투척하여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했다. 공수부대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부근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 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다.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死亡했다. (편집자 주: 당시 현장에 있던 11공수여단 소속 통신병 慶箕萬씨 증언에 의하면 시위대 장갑차 돌진으로 사망한 대원은 11공수여단 소속 권용문 상병이라고 한다. 권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月刊朝鮮」88년 7월호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참조)

장갑차의 갑작스러운 돌진에 놀란 계엄군 장갑차 소대장이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방아쇠를 건드려 空中發砲가 되었다. 도청 직원들이 宣撫活動의 일환으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를 방송하며 해산을 호소하는 가운데, 계속하여 시위대의 버스와 트럭이 도청 쪽으로 돌진해왔다. 뒤쪽에 있던 일부 공수부대 將校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發砲를 하여 버스 1대는 운전자가 사망하면서 도청 건물 좌측 건물과 충돌하여 정지하고, 장갑차와 다른 차들은 도청 앞 분수대를 돌아 나갔다.

돌진하는 장갑차에 일제히 발포


시위대의 차량 기습 돌진에 놀라 散開하였던 공수부대원들이 다시 隊列을 정비하여 대형 화분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그 뒤에서 사격자세로 경계했다.

13시 30분경 시위대 쪽으로부터 장갑차 1대가 빠른 속력으로 도청 쪽으로 또 돌진하자 그 순간 경계 중이던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를 향하여 일제히 發砲하여 장갑차 위에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이 피격되었다.

공수부대의 發砲로 후퇴하였던 시위대가 다시 가톨릭센터, 한국은행 광주지점 부근에 모이고, 그 중 5~6명이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나오자 공수부대원들은 이들을 향해 發砲를 했다.

그 무렵 방송국 등의 警戒任務를 수행하다가 전남도청으로 철수해 있던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병력이 師團으로 철수하면서 경계용 실탄 200여 발을 7공수여단 35대대 군수장교의 요청에 따라 공수부대에게 넘겨주어, 35대대 장교들도 1인당 10발 정도의 실탄을 분배받았다.

한편 시위대는 軍輛(차량)을 이용하여 인근 광산·영광·함평·화순·나주·영암·해남·강진·완도·송주·고창 등지로 진출하여 武器를 확보, 武裝을 했다. 13시경 광산 하남파출소에 시위대 80여 명이 차량 3대를 타고 와 카빈 9정을 탈취했다. 고속버스·트럭 등 10여 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 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하여 群衆 示威를 벌이고 신광지서에서 총기 100여 정, 실탄 2상자를 확보했다.

13시35분경 화순 소재 4개 파출소에서 총기 460정과 실탄 1만발을 탈취했다. 14시경 나주 남평지서 무기고에서 카빈 20여 정과 실탄 7~8상자를 탈취했다.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 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경찰서에 진입, 군용 레커차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카빈 500여 정, M1 소총 200여 정, 실탄 4만6000여 발을 탈취했다.

15시35분경 화순광업소에서 카빈 1108정, 실탄 1만7760발, 화순 동면지서에서 M1 72정, 칼빈 296정, AR 1정, LMG 1정, 실탄 1만4000천여 발을 탈취했다.

그 밖에도 이날 하루 동안 일산방직·호남전기·연초제조창·영암경찰서·화순경찰서·지원동 석산 화약고·한국화약·강진 성전파출소 등을 습격하여 카빈·M1·AR·LMG 등 총기 4900여 정, 실탄 13만여 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을 탈취했다.

시위대는 이들 武器를 가져와 광주 공원과 학운동에서 분배한 후 銃器 사용 교육을 실시했다. 15시경 광주공원에서 銃器를 분배받은 시위대가 지프차를 타고 시내를 돌면서 상황을 전파했다. 17시경에는 광주공원에서 총기 사용 교육을 받은 시위대들이 組를 編成하여 정찰, 도청 감시, 외곽도로 경계 등의 임무를 부여 받고 시내 요소에 배치되기 시작하는 등 이른바 市民軍이라 불리우는 武裝 示威隊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4시50분경 시위대의 장갑차가 다시 전남도청 광장 쪽으로 돌진하다가 공수부대 장갑차에서 발포하자 후퇴했다. 15시경 남평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위대가 충금지하상가 사거리에 도착, 20여 정의 銃器를 분배했다. 화순 경찰서 등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위대도 학동 석천다리, 지원동에서 銃器를 분배하여 일부 武裝 侍衛隊는 전남도청 쪽으로 진출했다.

시위대와 공수부대 총격전 시작


14시 50분경 공수부대는 전남도청 본관과 신관, 전남일보, 水協 도지부, 상무관 등 인근 건물 屋上에 일부 병력을 배치하여 도청부근으로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하여 銃擊을 가하였다.

15시15분경 전남도청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우체국 쪽에서 시위대 2000여 명이 모여 일부 시위대는 카빈과 실탄을 휴대하고 전남도청 쪽으로 진출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15시 50분경 카빈을 휴대한 시위대가 전남의대 오거리에서 전남道警 쪽으로 사격을 하면서 이동했다.

16시경 광주은행 본점 부근에 트럭이 도착하여 시위대에게 30여 정의 카빈을 분배했다. 일부 시위대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屋上에서 LMG 2정을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軍헬기를 향해 사격을 했다.

14시45분경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병력을 교대하기 위하여 61항공단 203대대장이 조종하는 UH-1H 헬기를 타고 전남도청 上空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의 對空 사격으로 6발이 헬기에 맞았다. 15시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宣撫放送을 하던 같은 機種의 61 항공단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다. 戰敎司로 복귀한 61연대장은 戰敎司에 병력 교체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보고했다. (이하 생략)
 
 

[세상을 밝히는 자유언론-프리존뉴스/freezonenews.com]

[관련기사]2006년 12월 20일자 프리존뉴스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의 탈북자 모임인 ‘자유북한군인연합’(대표 임천용·전 교도지도국 19여단 2대대· 계급 상위)은 20일 오전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80년 발생한 5.18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 개입의 실상을 낱낱이 공개했다. 아래는 이날 기자회견을 주최한 임천용 씨의 증언을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주>

 
▲ 임천용 대표. ©프리존뉴스 
김일성, 김정일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심복들에게 “연방제 통일은 평화적 방법으로 가능할지 모르나 남조선 혁명은 폭력적 방법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평화적 방법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해왔다.

남한 내 친북세력들이 미군 기지를 공격하며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집회나 4.19나 광주봉기처럼 민주·평화·자주를 외치는 격렬한 시위가 전국을 뒤 덮을 때 민주·애국투사들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무력 개입한다는 전략이다.

역대 남한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불행한 사건들에는 빠짐없이 북한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해왔다.

“북한군 특수부대 광주사태 개입 공공연한 비밀”

다른 것은 접어 두고라도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5.18광주민중항쟁의 경우에도 현역 북한군 출신들, 특히 특수부대 출신들은 북한군 정예 특수부대가 투입됐다는 정도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음은 김일성이 76년 8월, 그리고 80년 5월 대남공작원들에게 내린 비밀지령의 전문이다.

[비밀지령1]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 일어났습니다. 사북 탄광의 유혈사태는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입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 빈민 등 각계각층의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 투쟁을 조직 전개해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비밀지령2]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

“북한군 특수부대 5.18 당시 ‘완전 무장’ 상태로 대기”

김일성의 이 같은 비밀지령과 80년 5월을 전후한 북한군의 움직임 등 제반 상황은 광주사태에 분명히 북한군이 개입됐음을 보여준다.

 
▲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광주사태 직전의 북한 수뇌부 및 군부 동향, 북한군의 침투경로 및 인원, 봉기 전반에 대한 성격과 상황, 북쪽 자료 및 남측 자료 등을 공개했다. ©프리존뉴스 
5.18사태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우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 광주사태에 대해 긴급속보로 전해 들으면서 20여일 이상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부 비 편제 서기로 자주 동원됐던 나는 나중에야 당시 제10군단장이었던 여병남과 7군단 참모장이었던 김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었고 희생도 많았지만 공로가 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북한군 특수부대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광주에 특수부대 침투 했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로 나 돌았다.

또 북한군 4군단 70정찰대대 전투원으로 복무했던 이덕선 씨로부터 당시 정찰국 소속 정찰대대원들의 광주 침투 상황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특수부대 1개 대대 해상 통해 남파, 3분의 2가 희생”

이덕선 씨에 따르면 광주봉기 당시 2군단 정찰대대를 모토(motto)로 하고 각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중 3분의 2가 희생되고 나머지 인원이 모두 귀대 했다는 것이다.

이덕선 씨가 알고 있는 광주봉기 침투자는 조장이었던 4군단 70정찰대대 상좌 황종인, 부조장이었던 4군단 33사단 중좌, 조원으로 침투했던 4군단 정찰대대 작전집체조의 홍씨 성을 가진 참모였다고 한다.

 
▲ 임천용씨는 광주사태 당시 국군에 없었던 카빈 소총이나 M1 소총에 맞은 시신이 수십 여구였던 점, 봉기자(시민군)들이 정부군의 탱크와 장갑차를 탈취해 진압군을 공격했던 점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프리존뉴스 
통상 북한 당국은 남파돼서 임무를 수행하고 귀대하거나 임무수행 중 사망한 공작원 또는 전투원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와 함께 각종 훈장을 수여하는데 그 수는 1년에 불과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정도였다.

이덕선 씨에 따르면 80년에 2군단 75정찰대대에서만 41명의 공화국 영웅이 배출됐고 타 부대들에서 21명, 도합 62명의 영웅이 나왔다고 한다. 북한의 경우 평화시기에는 남파간첩이나 전투원이 아니면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는 일이 거의 없음을 감안할 때 한 해 동안에 62명의 전투영웅이 탄생했다는 것은 대남침투관련 거대 작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군 광주사태 개입 확신, 진상 반드시 밝혀야”

이외에도 당시에는 국군에 없었던 카빈 소총이나 M1 소총에 맞은 시신이 수십 여구라던가, 봉기자(시민군)들이 정부군의 탱크와 장갑차를 탈취해 진압군을 공격했다든가,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이 있는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문제들이 너무나도 많다.

북한에서의 체험과 이상의 근거들만 가지고도 광주민주항쟁에는 분명히 북한군이 개입됐다고 확신한다. 대남적화통일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신성한 민주시위를 유혈 폭동으로 몰아간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제물로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5.18광주 민주화 영령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광주 사태의 진상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리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아래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자유북한군인연합이 공개한 광주관련 자료이다.


광주와 관련된 김정일의 발언

1.‘광주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이길 수 있었지만 결과는 진압됐다. 땀이 적었고 훈련부족이다. 교도지도국은 남조선해방의 전초병이다. 언제든지 나가라면 당장 나갈 수 있게 만단의 동원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1982년3월. 북한 특정여단 53.16.43.17.19.818.59여단들의 북부지구에서 벌린 쌍방 게릴라 훈련장에서 발언.

출처 : 현장. 자료보관:지도국 각여단 참모부 및 대대참모부

2.‘많은 사람들이 평화시기에도 조국을 위해 적들 속에 들어가서 피를 흘리고 싸우는데 후방에 있는 군인들이 이렇게 해이되면 되겠습니까. 인민군대가 너무 만성적으로 해이되고 있습니다. 사상투쟁을 진행해서 강한 규율을 세워야 합니다. 오늘 일을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1981년 6월21일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1군단 지구를 시찰하면서 군인들이 단추를 풀어놓고 무질서하게 다니는 현장을 비판하면서 한 발언

자료출처 : 인민군 각 사여단 참모부에 발송된 사상투쟁 교양자료

3.‘우리는 광주사건에서 많이 얻었지만 놓쳤고 놓쳤지만 내일을 위해서 남겼다.’ 출처 : 광주평록 1983년 판

광주사건 과정에 대한 남한 쪽 관계자의 진술

‘확실한 단서를 잡지 못해서 정확이 한다고 말할 입장은 아니다. 현장에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충돌이나 봉기군의 저돌적인 행동과정에서 절실히 개입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한 개 대대정동의 역량이 내려왔었다면 당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돼 있었기 때문에 육로로는 불가능 했다고 본다. 왔으면 바닷길이고 서해안으로 침투했을 가능성이 크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의심할 수 있는 증거는 충분하다.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윤전중장비와 각종 총기를 다루는 수법이나 방산 업체에 대한 습격. 총기 탈취. 방송국. 교도소를 비롯한 국가기관 전복과정에서 대표적으로 많이 노출되었다. 군복무를 했다고 해도 일반 봉기군의 능력으로 정부군을 상대해서 그 만큼 고도의 수법을 요하고 체질화된 행동이 필요한 특수적인 일을 수행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것이 지금까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다.”

“상당히 이상한 점들이 많이 발견됐다. 신원이 해명되지 않는 사람들과 병원에 실려 온 시체들을 부검하면 정면에서 맞아죽은 사람보다 뒤에서 맞아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진압군이 시위대의 등 뒤에다 대고 사격한 일은 장담하지만 없다. 이런일은 매우 심중하고 민감한 일이다.”

“진압군의 중장비가 쉽게 탈취당하고 봉기군의 수중에 장악되는 현상들이 만았다. 그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훈련되고 전문성이 필요한 일인데 북한 특전사들이 아니고 여기 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쉽게 할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훈련경험이 제한된 사람들이 한짓이라고 보기엔 석연치 못한 문제점이 너무 많다. 작년(2005년)에 미국에서도 광주사건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나러 사람이 왔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말하면 광주문제는 당시 정권의 책임소재에 대한 차원을 떠나서 본질적인 사안을 많이 놓치고 있다. 책임한계에 따른 한두 사람의 피해는 둘째 문제다. 북한에서 남한을 적ㅇ화통일 할 경우 광주봉기에서 자취를 감췄던 영웅들이 수없이 나타날 것이다. 그럴 경우 때는 이미 늦었다. 국가와 국민을 생각해서라도 이문제는 시급히 밝혀지는 것이 옳다.”

광주봉기에 직접 참가했던 북한군 관계자들의 증언

A씨 현재 북한군 중장. “내가 알기로는 봉기군 쪽에서는 3분의 2정도 는 못 왔다고 본다. 시위대 쪽에서 움직였던 사람들이 인명피해가 많았다. 괴뢰군 쪽에 들어 있던 우리사람들한테 직접 맞아 죽은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혼잡한 판에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괴뢰군 애들 군복입고 논 사람들의 피해가 적었다. 우리도 그쪽에서 움직였으면 인명손실이 적을 수도 있었지만 임니까 어쩔 수 없었다.”

A씨 “각자 분담된 임무에 따라 조별로 행동했으니까 그건 나도 정확히 모르는 일이다. 담당했던 대생물이 다르고 임무성격도 틀렸다. 내가 참가했던 조는 시위대 쪽에 편임되어 행동했다. 반반씩 나뉘어 절반은 시위대 쪽에서 움직였고 절반은 계엄군 쪽에서 활동했다. 대충 짐작으로 일개 대대정도는 되지 않을 가 생각한다.” “우리대대에서 나갔던 사람들중에 창석이(당시 중대장)고아만이(정치지도원)을 포함해서 세명만 돌아왔다.”

A씨 “생사람 죽이는 일을 처음 해봤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내손으로 죽였다고 생각하니 끔찍할 정도였다. 정말 힘들었던 것은 남조선 사람들하고 일체 말을 못하게 하는 것 이었다. 도망가는 여자들 등에다 대고 방아쇠 당기는 것이 정말 떨리는 일이었다.”

A씨 “그쪽 애들 장비가 우리보다 좋았다.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괴뢰군 애들의 전투능력은 우리하고 많이 차이가 있어 보였다. 겁이 좀 많아 보였다. 괴뢰군 애들보다 남조선 인민들의 정신이 더 좋았다. 시위대쪽에서 죽는 숫자가 많아지니까 오히려 그들이 계획대로 잘 따라 주었다.”

B씨 현재 북한군 대좌.“우리도 죽었지만 남조선 사람들이 정말 많이 죽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 총알에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것이다. 양쪽을 교란하고 싸움을 붙이기 위해선 어쩔수 없는 일이 였다. 죽어야 될 사람들이 죽었을 뿐이다. 시위대들이 많이 죽지 않으면 일이 그렇게 커지기도 불가능하였다. 괴뢰군이건 시위대건 양쪽에 피해가 생겨서 서로의 마찰이 커져야 의도대로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런 분위기를 조장시켜야 하고 적당하게 죽여야 되는 것이 임무였다. 맨 정신으로 사람을 죽이기 힘들다는 것을 광주에 나가서 절실히 체험했다.”

C씨 2003년 당뇨병으로 제대. “우리도 알 수 없는 별도의 특수조가 움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은 우리행동과 좀 다르게 현장의 분위기를 만드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내용은 우리도 구체적으로 모른다. 오래전 일이라서 잘 생각나지 않는다.” 2006년9월 증인 발언 아들 호위사령부 중대장으로 있는 무제로 탈출실패.

C씨 “ 우리가 갈 때는 공해상에 그쪽 애들 두 척의 뜨랄선이 마중 나왔는데 사복을 입었고 밤이 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 할 수 없었다.”

D씨 “ 우리는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한다는 명령을 따라야 했다 남조선 사방에서 들고 일어나서 지원세력이 몰려오면 될 수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 자체는 조직적인 단합이 없고 동네 패거리 싸움식이였다. 우리가 정면에 나설 경우 전면전으로 갈수 박에 없게 되고 그러게 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것이다. 우리가 드러나게 되면 일이 커지게 되어있고 봉기의 성격이 바뀌었을 것이다.”

D씨 “일일이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지 못한 사람들이 백 프로 죽었다고는 장담하기는 어렵다. 긴박한 상황에서 철수 했기 때문에 합류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사망한 것으로 처리 된 것으로 안다.”

광주사건과 관련한 김선일의 발언

“형님 생일날(김정일 지칭) 큰아버지가(김일성) 광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셧다. 김대중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셨다. 나도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광주사건에 대해서 알았다. 형님은 성공한 작전이라고 말했지만 큰아버지는 정말 아쉬 워 했다. 우리 쪽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고 여러번 말씀 하셨다. 훈장을 내신하고 영웅으로 배려해주라고 형님께 지시 하셧다 광주의 일로 김대중 선생의 힘이 커질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출처:김선일

“광주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선물입니다. 수렁님의 노고를 덜어드릴 수 있다면 지구를 깨는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수령님께서 죽으라고 명령하시면 우리는 죽는 시늉이 아니라 무조건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수령님의 전사들입니다.”출처:김선일

5.18광주봉기 전후의 북한 수뇌부 상황자료

1979년 10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과 12.12 전두환 정권 수립으로 남한에 복잡한 상황이 조성되자 김일성은 오랫동안 대남 공작을 총괄하다 퇴임하여 당시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던 현북한노동당 비서 김중린을 개별적으로 불러 한국내의 현 정세를 이용하여 비밀공작 조직을 더욱 활발히 움직일 데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한편 김일성은 표면상으로는 1980년 초(2월6일)에 남북한 총리회담개최. 남북 간의 직통전화 개설 등의 평화제스처를 취하는 한편 남한 내의 혼란스런 정세를 이용하여 내부 교란작전을 구상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한국내의 비밀공작 조직들을 통해 광주에서 대규모 항쟁이 준비되고 있다는 정보를 보고 받고 김중린을 불러 광주항쟁에 대비한 북한군의 지원 작전을 지시하였고 김중린은 북한 정찰국 및 특전사부대들을 광주봉기에 투입할 것을 당시 북한군 정찰국장으로 이씨던 장성우와 정찰국 5부장 이하일에게 추체적인 지시를 하달하였다.

1980년 5월 초. 김일성은 루마니아 대통령의 초청으로 루마니아방문이 예정되어 있었고 5월 말까지 루마니아에 이어 구라파 방문일정을 소화하게 되어있었다. 루마니아 방문 출발 직전에 김일성은 김정일과 김중린을 불러 장차 한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태에 대응할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김중린의 증언을 사적인자리에서 직접 청취하였음)

김일성은 광주사태로 인한 향후 한반도의 정세변화에 대비하여 5월말까지 예정 되었던 루마니아 방문일정을 단축하고 5월 13일 귀국하였다. 광주에 투입된 북한 특수부대들의 실무 작전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5월10일 북한군 정찰국 소속의 황해북도 신천군 주둔 제1321부대(일명 신천복수대대)의 인원 300명이 폭풍명령을 받고 남포시 와우도 인근 지역에 집결하였다.

신천보구여단 300명을 포함하여 남파된 특수부대인원 총600명이 남포에서 출발하였다고 부분적으로 기록이 있으나 광주에 침투되었던 증인들의 자료에 따르면 신천복수연단 외 타 여단들에서 차출된 300명의 인원은 동해안의 루트를 이용했으며 함경남도 신포시 마양도 잠수함기지에서 출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남포에 집결한 전투인원들을 환송하는 연회장에 김정일을 배동하여 김중린.이하일이 참가했으며 김정일은 당시 전투원들과 기년사진을 찍고 그들을 고무하였다. 이날 환송에서 김정일은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으며 그 자료는 현재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2동 대남 사적관 지하전시실 2관에 보관되어있다. 환송회를 마친 남파 인원들은 1천의 대형 뜨랄선에 승선하여 남포항을 출발하였다.

당시부터 남파된 부대의 전체 지휘는 정찰국 5부장 이하일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남포루트를 통해 침투되었던 당사자들은 공해상에서 탄광복같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남한 서해안의 백암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들어갓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총책 이하일은 공해상에서 광주현장에 침투된 무장인원들을 지휘하였다.

현장을 총괄 지휘하던 이하일은 계엄군에 의해서 광주정세가 연전되자 인원들의 철수를 지시했으며 1980년5월25일. 부상인원을 포함한 약 400명 정도의 남파되었던 인원들이 1차로 남포항으로 도착했고 나머지 인원70여명은 광주에서 죽은 40여명의 시신에서 일부 부위만을 채취하여 중부전선인강원도 철원군 상요리 일대의 전선을 넘어 귀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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