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라는 이름보다는 버마가 더 익숙한 나라가 있다. 양곤보다는 랭군이 더 친숙하다. 버마 하면 곧장 ‘아웅산 테러’라는 말이 연상된다. 1983년 金正日이 지시한 폭탄 테러로 독립운동의 영웅 아웅산 묘소를 참배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한국의 각료급 인사 17명이 죽었다. 이 나라의 민주투사 아웅산 수지 여사는 아웅산의 딸이다. 무자비한 군사독재가 계속되고 있는 미얀마는 한국과 여러 모로 비교되는 나라이다.
이 나라의 면적은 한반도의 세 배이지만 인구는 한국과 거의 같은 약5000만이다. 1960년대만 해도 미얀마는 한국보다 살기 좋은 나라로 인식되었다. 미얀마는 무엇보다도 자원이 풍부하다. 비가 많이 온다. 主業인 농업은 三毛作이다. 세계적인 쌀 생산지이다. 최소한 굶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이다. 1960년대 어떻게 하면 굶주리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國家大事였던 한국에서 보면 부러운 나라였다.
더구나 미얀마는 19세기 영국 식민지 시대부터 産油國이었다. 텔레비전에 비친 미얀마 사람들의 인상도 참 좋았다. 특히 군인들의 강건한 모습이 근사했다. 쌀, 기름이 많이 나고 국토는 넓고 사람들이 좋은 미얀마는 당연히 한국보다 더 잘 살아야 했다. 1962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네윈은 1960년대엔 국제적 인물이었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인도의 네루,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쿠바의 카스트로와 同格으로 제3세계의 자존심을 대표하고 있었다. 바싹 마른 朴正熙보다는 어느 모로 보나 나은 지도자로 여겨졌다. 그 미얀마가 지금은 어떤 모습인가?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어 있다.
資源富國이 왜 이렇게 내려 앉고 資源貧國은 왜 그렇게 올라섰는가? 간단하게 한 마디로 대답하라고 하면 ‘자유’이다. 한국의 自由가 한국인들을 마음대로 뛰게 만들었고 미얀마의 不自由가 국민들을 묶어놓았다. 미얀마와 한국의 체제경쟁을 권투에 비교하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미얀마 선수는 四肢(사지)가 묶인 채 링 위로 보내졌고 한국 선수는 마음대로 펄펄 날았던 것이다. 자유는, 인간이란 나무에 내리는 물과 같다. 물이 끊어진 나무는 줄기와 뿌리가 아무리 튼튼해도 시든다.
필자가 서울 중심부에서 달마다 첫째 토요일 오후에 열고 있는 ‘현대사 강좌’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들이 흩어지는데 한 신사분이 다가오더니 “내가 쓴 책인데 한번 읽어보고 書評을 써 달라”면서 가제본된 책을 건넸다. 필자가 月刊朝鮮의 편집장으로 일할 때 한 두 번 뵈었던 낯이 익은 박창현씨였다. 미얀마에서 사업을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귀국하여 충북 鎭川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다른 일로 미루다가 지난 주에 비로소 그가 주었던 책을 다 읽었다.
미얀마에서 10년 동안 사업을 하면서 목격했던 이야기가 생생하게 적혀 있었다. 학자들의 미얀마 연구서가 아니라 투지만만하고 정의감이 강한 전형적인 개발연대 한국인의 미얀마 체험 手記였다. 71세인 박창현씨는 부인과 딸이 불치병에 걸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미얀마에 사업차 갔다고 한다. 미얀마와 한국을 오가면서 간호를 했는데 두 사람의 救命에는 실패했다. 박씨는 미얀마에서 광고업, 보따리 장사, 한국어 학원 출강, 양계장 운영 등으로 돈도 벌고 37세 年下의 여성과 재혼도 하여 아이도 낳았다. 미먄마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 박창현씨의 手記에는 인생이 있다. 나라는 달라도 애환은 같다. 나라는 망해도 山河는 아름답다. 나라는 독재이지만 인간으로부터 행복은 빼앗아 갈 수 없었다는 것을 박창현씨의 책이 잘 보여준다.
이 책에 실린 미얀마에 진출한 한국인 사회에 대한 記述은 대체로 부정적이지만 “아, 이렇게 사는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사례도 소개되어 있다.
서울에서 살던 김모씨는 아이들을 다 출가시킨 뒤 부인과는 老年 별거를 한 뒤 무작정 미얀마로 와서 10평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출가한 세 딸이 돈을 모아 한 달에 30만원씩 보내준다. 집세가 월7만원이고 생활비는 10만원밖에 들지 않는다. 김씨는 여기서 20년 아래 여성과 결혼했는데 그 돈이면 食母까지 두고 생활할 수 있다고 한다. 박창현씨는 말한다.
<물가가 턱 없이 비싼 우리나라에서 노년기의 생활이 너무나 어렵다고 죽는 날만 기다리고 가만히 앉아 있겠는가? 매달 30만원만 만들면 따스한 국민들 속에서 여유 있게 살 수 있다. 여기에다가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인생은 즐겁다. 멀리 바라보면 길이 보인다. 좌절은 못난 이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박창현씨의 글에서는 애국심과 정의감이 절절하게 묻어나온다. 그는 미얀마를 두루 여행하고 나서 이렇게 개탄하다.
<그림 같은 산야의 저녁노을, 손때가 묻지 않은 자연환경, 끝도 없이 바라보이는 광활한 땅, 순박한 눈빛, 惡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볼 수 없는 고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인데 길모퉁이에서나 찻집에 앉아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저 많은 실업자들, 이 세상에서 할 일 없이 놀고 먹는 자가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다>
1년 차를 두고 집권했던 네윈과 朴正熙의 차이가 바로 일자리를 만든 지도자와 있던 일자리도 죽인 독재자의 차이일 것이다. 한국의 1950년대, 6.25 戰後의 황량한 도시 골목 골목마다에서도 할 일 없이 노는 사람들의 허황한 群像이 있었다. 그런 한국인들에게 의욕을 주고 일자리를 주고 세계 무대에서 능력껏 경쟁하도록 만든 것이 朴正熙 대통령이었다.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열심히 땀 흘리도록 만드는 지도자는 어디서든 위대하다.
朴正熙의 시대를 살아보았던 박창현씨는 권력을 독점하고서도 사회주의식 독재로써 경제도 인간도 망치고 있는 미얀마 군인들에게 분노를 쏟아놓는다. 박정희에게 점수를 주고싶지 않은 한국의 지식인들은 “그렇게 장기집권하면 누구나 그 정도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漫談 수준의 이야기를 한다. 군대가 45년째 장기독재를 한 미얀마와 父子가 代를 이어 60년 넘게 독재를 하고 있는 북한을 옆에 두고도 그런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고 있는 이들이 학자이고 교수이다. 이런 자들에게서 배운 우리의 아들, 딸, 손자, 손녀들을 교정해야 할 책임을 진 것이 한국의 개발연대 사람들이다.
박창현씨의 手記를 읽어보면 미얀마는 군사독재 체제임에도 생활질서가 무너져내렸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개탄한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한 힘을 가진 군사정부에서 왜 좀도둑 하나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하면 나를 밀어제치고 젊은 놈들이 잽싸게 올라탄다. 노약자는 언제나 맨 나중에 탄다. 빈 자리가 보여 앉으려고 하면 젊은 놈이 잽싸게 뛰어와 자리를 차지한다. 노인, 임산부, 어린아이, 아녀자도 도움을 받지 못한다. 누구든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눈감아 버리면 그만이다>
1990년대말 북한의 大飢僅 때도 그랬다. 제일 많이 굶어죽은 것이 5세 이하 어린이들과 60세 이상 노인들이었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면 인간은 정글의 생리로 복귀하여 適者생존, 弱肉强食의 원리가 지배한다.
박창현씨는 2005년 한국무역협회가 마련한 ‘무역의 날 기념 해외동포 수필 공모’에 응모했다. 제목은 ‘배가 고파 立稻先賣’였다. 미얀마 수도 양곤에서 북쪽으로 한 500km를 가면 산간지대 스칸 깡이란 지역이 있다. 여기엔 비가 많이 오지 않는다. <논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먼지만 펄펄 날리는 들녘에는 하얀 깨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강원도 봉평에 가면 하얀 메밀꽃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데, 미얀마의 스칸깡 깨꽃은 함박눈이 내린 것처럼 온 사방 천지를 뒤덮고 있다. 해마다 5월중에 파종을 하면 7월에는 깨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깨꽃이 만발하면 중국상인들이 대거 몰려와 그때부터 立稻先賣가 시작된다>
미얀마의 시중에서는 참깨가 한 가마당 한국돈으로 쳐서 6만원인데 농민들이 받는 立稻先賣(입도선매) 가격은 1만원이다. 농민들은 두 달만 견디면 제 값을 받을 터인데 배가 고파 그 두 달을 못견디고 헐값에 판다. 박창현씨는 이런 실태를 보고 흥분했다.
<정부는 무엇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무이자나 저금리로 융자해주지 않으면 이런 악순환은 되풀이 될 것이다. 길을 닦아주든지 다리를 놓아주어 차가 다닐 수 있게 해주어도 이렇게 헐값엔 팔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의 비참한 생활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네들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군사정부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 수필이 박창현씨의 운명을 바꾸어놓는다. 한국으로 부친 이 수필이 군사정부의 검열에 걸린 것이다. 군 수사관들이 朴씨의 사업장-양계장과 비디오방을 덮쳤다. 수필 내용이 군사정부를 비방했다는 혐의였다. 수사관들은 朴씨의 금고를 뒤져 돈도 압수해갔다. 이들은, 朴씨의 부인은 미얀마 국적임으로 국내법으로 구속시키겠다고 통보했다. 朴씨는 계산해보았다.
“아내가 붙들려가면 8년형은 살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딸은 누가 돌 볼 것인가, 내 나이 70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탈출을 결심했다. 출국이 정지되기 전에 튀어야 한다. 그는 슬리퍼만 신고 아내와 딸만 데리고 공항으로 향했다. 방콕行 비행기를 탔다.
<제 놈들이 아무리 수사망이 발달하였다고 해도 태국에까지 쫓아와서 아내를 끌고 가지는 못할 것이다. 돈이 없어 좀 불편한 생활을 하겠지만 이제 자유의 몸이다. 홀가분하다. 방콕의 눈부신 아침 햇살이 공산국가에서 탈출한 우리 가족에게 환하게 비쳐주고 있다. 새 출발의 신호이다>
그는 머리글을 이렇게 끝마치고 있다.
<2006년 10월31일 미얀마 군사정부의 최고실력자 탄슈웨 元帥 딸이 결혼식을 올리는데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다. 신부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호화찬란한 빛깔의 다이아몬드로 분칠을 하고 있었다. 밤거리에선 굶은 사람들이 범죄자로 돌변하여 외출을 할 수 없는 곳이다. 군사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폭탄을 터트리고 있다. 하루빨리 안개가 걷히고 태평성대가 오기를 기대한다>
박창현씨는 독재를 비판하다가 탄압을 받고는 자유로의 탈출을 감행했다. 그의 正義感이 부른 재난이다. 이 재난은 머지 않아 축복이 될지 모른다. 미얀마에 자유가 돌아온다면.
미얀마 체험 10년, 그 白晝의 암흑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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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9-24, 10: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