曲學阿世 '배운 무식자' 김용옥은 가라

북한에서 하루도 살지 못할 김용옥이 북한 어린이들을 착취한 '아리랑 공연'을 찬양하는 그 가증스러움!.
曲學阿世 '배운 무식자' 김용옥은 가라~

김용옥의 '아리랑'과 북한체제 찬양은 부덕과 무지의 극치

조영환 편집인

(교정중) 도올 김용옥의 곡학아세와 권력아첨은 이미 잘 알려져 있어서 새로운 뉴스거리가 아니지만, 이번 노무현-김정일의 평양회담에 동참한 뒤에 김용옥이 중앙일보에 발표한 '아리랑 공연' 관람기는 김용옥의 사회현상에 대한 곡학과 권력자에 대한 아첨을 가장 잘 표현한 자술서로 기록될 것이다. 김용옥은 북한 어린이들의 피땀을 착취한 '아리랑 공연'을 '찬탄을 자아내는 미학'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자유와 인권이 박탈된 주민들이 굶어죽는 북한사회를 '탐욕이 배제된 이상국가'라고 애둘러 표현했다. 북한 관람기를 중앙일보에 기고하면서, 김용옥은 플라톤의 이상국가에 비하면 북한은 훨씬 인간적인 사회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김용옥의 도덕수준, 지식수준, 판단능력, 정치성향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김용옥은 권력에 아첨하는 '요사스러운 지식인'이거나 군중을 선동하는 '배운 무식자(learned ignoramous)'라는 사실을 필자가 여러 번 주장했지만, 이번에 노무현을 따라 김정일을 알현하기 위하여 방북한 김용옥은 그러한 필자의 이전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잘 확인시켜주었다. 김용옥은 스스로 얼빠진 군중이고, 배운 무식자이고, 곡학아세의 간교한 지식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번 방북이 증명시켰다. 김용옥은 중앙일보에 기고한 자신의 '아리랑 공연' 관람기를 동하여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판단의 시각과 지식적 수준을 잘 드러내었다. 그는 이 관람기를 통하여 전체주의 찬양가로서 또는 군중선동가로서의 자질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김용옥의 '아리랑 공연' 관람기에 그의 김정일 우상화 노력과 전체주의적 정치성향이 잘 나타나 있다. 김용옥은 전체주의 집단을 이상국가로 보며, 남한체제를 거부하고 북한 전체주의를 찬양하는 집단선동극을 미학의 완성처럼 보는 자이다.

요사스런 지식꾼인 김용옥은, 마치 북한의 모든 음식, 문화, 예술의 우월성을 선전하려는 듯, 옥류관의 평양냉면이 맛없다고 비판 못하고, 아리랑 공연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찬사는 학자연하게 보이기 위해서 심지어 플라톤의 '공화국'을 근거이론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그는 플라톤의 '공화국'에 나오는 교육과정에서 어린 시절에 공동체를 위하여 체조와 음악을 강조한 주장을 북한의 '아리랑 공연'과 같은 집단체조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곡해하여 적용시켰다. 플라톤이 말한 체조와 음악을 통한 심성과 육체 단련교육은 젊은이들에게 공동체정신을 고양하기 위한 교육이다. 나이가 들면 그런 육체적 혹은 정서적 교육을 넘어서서 인식(과학)과 판단(논리학)과 표현(수사학)에 관한 교육으로 넘어가서 마지막엔 현실체험을 중시한 것이 플라톤의 교육이론이다. 북한의 국민교육은 어른이 되어도 청소년에게 적합한 집단체조와 군사음악에 머무르는 유치한 단계에 멈추어 있다.

김용옥이 찬양한 북한의 집단체조와 군사음악은 플라톤의 교육관을 전체주의자 김정일을 찬양하는 데에 곡학아세하여 적용한 것이다. 플라톤의 음악교육과 체육교육을 북한의 전체주의 교육을 찬양하거나 정당화하는 데에 변용하는 김용옥은 지식을 왜곡시켜서 악용하는 대표적인 지식조작자로 보인다. 청소년들에게 공동체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튼튼한 몸을 키우기 위한 정서교육과 육체단련에 음악과 체육을 잘 활용하라는 플라톤의 교육관을 김정일 우상화에 적용시킨 김용옥은 미국과 같은 자유사회에서는 어불성설인 선동을 남한사회에서 주장하고 있다. 김용옥이 북한의 아리랑 공연을 플라톤의 교육과정으로 풀이한다면, 미국의 교육학자들로부터 정상적인 이성을 가지지 못한 시대착오적 또라이로 취급될 것이다. 김용옥은 플라톤의 교육론을 인용하면서 체육이나 음악의 필요성만 강조하고 플라톤의 교육이론이 가진 전체적 의도를 곡해시켰다.

체육과 음악 교육에 대한 플라톤의 강조는 전체주의적 김일성 체제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생긴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이나 고교 교련을 정당화시키는 데에 사용하면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의 교련을 철저하게 독재체제를 위한 체육과 음악교육으로 저주할 김용옥이 북한의 개인숭배적 전체주의체제를 위한 '아리랑 공연'은 플라톤의 교육이론을 끌어들이면서 찬양했다. 이는 김용옥이 품은 박정희 반대와 김정일 숭배의 본색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체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온 사회가 '아리랑 공연'과 같은 집단체조에 매달려서 포악한 독재자를 숭배하는 북한의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얼치기 지식인 김용옥은 플라톤의 교육론을 끌어들였다. 비록 플라톤의 '공화국'이 전체주의적 사회체제를 연상시키지만, 김정일의 독재체제를 정당화하는 데에 바탕이 될 정도의 부도덕한 정치이론은 아니다. 플라톤의 공화국은 철인(哲人)통치를 위한 초(超)도덕성을 요구한다.

아리랑 공연을 플라톤까지 뜰어들여서 천상의 체육교육과 정서교육으로 찬양한 김용옥의 인식과 판단은 아리랑 공연을 인권침해와 정치적 타락으로 해석하는 인터넷 네티즌들에 비해서 훨씬 열등하다. 김욕옥은 택시를 모는 일반 시민들보다 더 무식하다. 김용옥은 플라톤의 공화국을 들먹이면서도, 그 공화국의 통치자들은 철인통치자(philosopher king: 지혜자)들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간과했다. 김용옥의 눈에 김정일은 철인통치자인가? 김용옥은 아리랑 공연을 하면서 고생하는 어린 여학생의 손에 심판받아야 할 무식하고 악독한 전체주의 선동가는 아닌가? 온갖 분야들에 이러쿵 저러쿵 아마츄어의 시각에서 지껄여온 김용옥의 지적 행로는 최고 마지막에는 미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김용옥이 몇번이나 자신의 직업을 바꾸고 다른 직업에 기웃거리면서 스스로 붓을 꺾는다고 소란을 피운 것은 그의 정신상태가 미숙하거나 혹은 혼란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표현해준 것이다. 김용옥의 정치의식도 미숙하거나 혼란하다.

김용옥은 진중한 철학자가 아니라, 시대 추세와 특정 권력에 떠다니는 중우정치의 교조적 선동가에 불과하다. 오르테가 가세트가 말한 배운 무식자(learned ignoramous)의 전형이 바로 김용옥이다. 다 아는 듯 하지만, 다 모르는 무식자가 바로 김용옥이다. 김용옥처럼 시대와 권력에 아첨하는 지식꾼은 이미 '김정일은 절대로 옳다는 교조적 명제'를 전제로 사유하기 시작하기에, 그의 모든 지식에는 비판적 성찰이나 논조를 찾아 볼 수 없다. 김용옥이 노무현과 김정일에 대해서 하는 말의 기저에는 '절대 권력자는 절대로 옳다'는 암묵적 명제가 깔려있는데, 그에게 정치권력이나 정치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사유와 표현을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는다. 김용옥은 북한의 '아리랑 공연'이 가진 전체주의적 악마성과 민중의 고통은 보지 않는다. 김용옥에겐 히틀러의 횃불시위나 김정일의 '아리랑 공연'은 '전일한 목적을 위해 집체적으로 통합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위대한 체육과 음악 교육의 완성된 표현일 뿐이다.

김용옥이 '아리랑 공연'을 '찬사받을 미학'으로 규정하고 북한은 '무욕의 유토피아'로 규정한 중앙일보의 기고문을 보면서, 김용옥이 돌아도 한참 돌았고 잔인해도 한참 잔인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김용옥은 '거대한 경기장을 안방 파리처럼 날아다니는 교예사들의 아슬아슬 곡예는 간담을 서늘케 하지만 그 절제 있는 동작의 미학은 찬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쇼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 유토피아의 삶이며 역사며 가치이며 희망이다'라 묘사하면서 '아리랑 공연'을 호평했다. 또 김용옥은 이 글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왔다. 성과의 조목도 매우 구체적이다. 전일한 목적을 위해 집체적으로 통합된 사회!'라고 주장하면서, '아리랑 공연'과 북한사회를 찬양했다. 아리랑 공연을 본 후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고 호평하는 김용옥을 보면서, 그의 지적, 도덕적, 정치적 정체성이 분명해지는가?

김용옥의 북한전체주의에 대한 찬양은 자신을 아리랑 공연에 안내한 북한 안내원의 입을 통하여 표현된다. '잘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올바르게 사는 것이 목표입네다.'라는 북한 안내원의 말을 인용하여, 김용옥은 경제가 망한 북한을 망한 나라로 보지 않고, '올바르게 사는 나라'로 이상화했다. 북한은 김용옥에게 올바르게 사는 나라의 목표를 완성한 나라였다. 그러면서 북한을 탐욕이 배제된 지성이 실현된 '이상국가'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김용옥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탐욕이 배제된 지성(nous)이 실현되는 나라였다'는 말을 둘러댄다. 김용옥은 차마 자기 입으로 북한을 이상국가로 찬양하지 못하니까, 북한의 안내원과 플라톤을 끌어들이는 비굴하고 간교한 지식꾼이다. 김용옥에게는 북한의 아리랑 공연은 유토피아를 이루게 만든 미학의 완성이었고, 북한은 플라톤이 꿈꾼 유토피아였다. 김용옥은 인권, 진실, 정의, 지성, 양심, 자유, 행복이라는 단어가 작동되지 않는 두뇌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김용옥은 그 이상국가 북한을 버리고 탐욕과 추악함으로 얼룩진 남한에 왔을까? 불행하게도 북한에서 하루도 살지 못할 김용옥과 같은 무책임하고 방자한 배운 무식자를 남한에서는 지식인으로 섬겨준다. 북한에서 하루도 살지 못할 김용옥이 북한 어린이들을 착취한 '아리랑 공연'을 찬양하는 그 가증스러움! 남한에서 좌익선동을 하는 김용옥, 조정래, 김지하 등은 좌익정권 하에서 좌익세력의 아지트가 된 대학들에서 석좌교수로 자리를 잡아, 얼치기 지식을 젊은이들에게 심어주어 타락시키고 있다. 정권이 교체되면, 왜 특정 종교나 단체에 예속된 대학들에 좌익 지식분자들이 많이 침투되었는지도 조사를 해야 할 것이다. 김용옥, 조정래, 김지하, 황석영 등 군중선동에 나선 배운 무식장이들은 지적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얼치기인지 아닌지 판가름되어 한국의 지식계에서 정리되어야 한다.


[도올고함(孤喊)] 유기적으로 통합된 북한사회, 그 최고선의 목적은 무엇일까?

둘째 날, 3일 저녁 대부분의 특별수행원들은 지쳐 있었다. 안숙선 명창은 떠날 때부터 감기 기운이 심했는데 빡빡한 일정으로 몸살이 심해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게다가 재수 없게도 비는 죽죽 내리고 있었다.

옥류관에서 점심으로 냉면을 먹었는데 기대한 것처럼 감동적인 음식은 아니었다. 과연 서울 을지면옥의 냉면보다 옥류관 냉면을 더 맛있는 음식이라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많은 사람을 일시에 대접해야 하는 서빙 방식의 한계도 있겠지만 조미(調味)에 분명한 문제가 있었다. 정세현 의장이 목이 칼칼하다면서 식초를 많이 치는 바람에 나도 흉내를 냈다가 잇몸이 다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식초를 치는 것도 법도가 있다. 면을 먼저 젓가락으로 꺼내 올려 면에다 직접 식초를 부은 다음, 다시 주전자에 담긴 국물을 부어 먹어야 한다. 나는 실수를 자인하고 한 그릇을 다시 시켜 먹어 보았으나 기본 맛의 느낌은 대차가 없었다.

맛있는 것은 냉면이 아니라 '에스키모'였다. 에스키모란 '얼음보숭이'를 보다 컨템퍼러리하게 고친 이름이다. 에스키모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외래어이지만 쓸 수 있단다. 그것은 아이스크림의 북한 통용어이다.

옥류관 냉면을 먹은 후에 우리는 바로 보통강호텔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요번 여행에서 가장 활달하게 말을 많이 한 문정인 교수가 갑자기 을밀대(乙密臺)라도 한번 들러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냈다. 통전부의 담당관리는 예정에 없는 일정은 소화하기 어렵다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여러 사람이 재청을 하자 가주겠다고 은혜를 베풀었다. 안 명창은 호텔로 돌아가 쉬어야 한다고 안절부절못했는데, 결국 호텔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운 팀의 차도 우리 버스를 따라왔다. 을밀대에서 바라본 평양시내는 비구름에 깔려 음산했다. 난 걱정을 했다. 비 오는데 무리하게 아리랑공연을 강행했다가 공연자가 미끄러지는 불상사라도 나면 어쩌나!

을밀대를 들른 덕분에 우리는 쉴 시간이 없었다. 바로 만수대창작사(화가들의 작업실)로 직행했고, 또 3대혁명전시관 중공업관을 참관했다.

저녁 7시반쯤, 여의도처럼 대동강을 양안에 끼고 있는 능라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5.1경기장에 도착했다. 다행히 비가 그쳤다. 우선 경기장의 규모에 놀랐고 주변 난간에서 최후 일순간까지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어린 학생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입장 통로에 비치는 카드섹션의 모습이 너무도 현란했고 순간적으로 귀를 때리는 막대한 출연진의 제창 함성이 뼛속까지 울려퍼졌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전율! 8시쯤 대망의 '아리랑'은 막이 올랐다.

플라톤은 '이상국가'를 말한다. 그가 사용한 단어는 '폴리테이아'인데, 그것은 스파르타를 모델 중의 하나로 삼은, 최고선(The Supreme Good)을 구현하기 위하여 엄격히 통제된 정체(政體)를 말한다. 인간의 출생부터 우생학적 고려를 거쳐 집체적으로 교육되는데,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실은 사유재산의 부정을 위해 가족까지도 파괴된다는 것이다. 이상국가에는 '엄마' '아버지'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북한 사회는 플라톤의 이상국가에 비하면 훨씬 더 인간적이다.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영국의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가 처음 쓴 말인데 그것은 우(ou)라는 부정사와 토포스(topos)가 합쳐진 희랍어로서 '아무 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북한은 사실 이 지구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기 어려운 정체를 가진 나라임에 틀림없다. 아리랑에 출연하는 5만여 명의 동작이 변검(變)의 탈처럼 순식간에 변하여 일초일촌의 오차도 있을 수 없다. 거대한 경기장을 안방 파리처럼 날아다니는 교예사들의 아슬아슬 곡예는 간담을 서늘케 하지만 그 절제 있는 동작의 미학은 찬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쇼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 유토피아의 삶이며 역사며 가치이며 희망이다. 이러한 집체적 훈련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은 교육을 받고 의식화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도 가장 중요한 교과목은 용맹스러운 음악과 집체적인 체조였다.

'보지 않으면 몰라. 좌우지간 보고 말해야겠구먼.' 민노당 천영세 의원의 소감이다. 해석은 자유다. 남한 사람들의 해석을 북한 사람들이 강요할 수는 없다. 단지 우선 보아야 하고, 우선 정확히 그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왔다. 성과의 조목도 매우 구체적이다. 전일한 목적을 위해 집체적으로 통합된 사회! 과연 그 최고선의 목적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불변의 고정적 목적일 수는 없다. 변증법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의 기대는 이러하다. 집체적으로 통합된 에너지를 과연 그들은 '경제강국'이라는 목표를 위해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단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은 물질적으로 잘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를 안내한 조평통의 여성 동지가 말한다 : '잘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올바르게 사는 것이 목표입네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탐욕이 배제된 지성(nous)이 실현되는 나라였다. <도올 김용옥 기자: http://news.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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