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骨정신으로 거대한 에너지 만든 哲人

“朴대통령 비판 기사를 한 3~4년 써보니 아무리 깎아내려도 더 깎아내릴 수 없는 큰 사람임을 느꼈습니다”
이 글은 10월 12일 오후 6시 경남 창원시 교보문고에서 열린 ‘박정희 전기’ 著者 趙甲濟 기자의 전국 순회강연 '인간 박정희를 말한다' 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편집자 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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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만나 뵙게 되서 감사합니다. 책을 매개로 해서 이렇게 먼 곳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젊은 분들도 많이 계신데, 저는 책방에 오면 항상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져서 책방에 들어가면 시간을 많이 잡아먹고 외국에 가서도 항상 책방에 들어가면 꼭 나올 때는 책을 한 보따리 들고 나오게 됩니다. 오늘 오랜만에 여기 책방에 일찍 도착해서 이렇게 저렇게 구경 좀 했습니다.

오늘 창원에 오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창원’ 하면 제 머리에 뭐가 떠오르는가 하면, 1970년대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중화학공업 단장을 했던, 청와대 경제 제2수석 비서관을 했던 吳源哲(오원철)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이 지금도 70대 중반이 되는데 저는 아주 자주 만나 뵙고 옛날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창원 공단은 어떻게 보면 오원철 수석의 작품입니다. 오원철 씨는 원래 상공업 쪽 전문가입니다. 서울대학교 화공과를 나왔는데 상공부에서 국장을 하다가, 지금도 살아있고 그 앞에 상공부 장관을 한 金正濂(김정렴)씨가 1969년에 청와대 비서실장이 되면서 오원철 씨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래서 70년대에 우리 대한민국을 바꿔놓은, 그리고 지금도 우리 대한민국 경제의 기반이 되는 중화학 공업을 만들 때 이 사람이 실무 책임자였습니다. 지금도 만나면 아이디어가 아주 기발하고, 젊은 사람 같습니다.

이 분이 말하는 중화학 공업의 발전과정은 이런 겁니다. 1968년 1월 21일에 우리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고, 50대 이상 되는 분은 기억하시는 1․21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김신조가 내려와서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을 계기로 해서 박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전의 박대통령은 1961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오로지 경제개발에 전념을 했어요. 군사력 증강이라든지 이런 부분에는 오히려 등한시 했습니다. 국방비 지출이 60년대에는 별로 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68년 1월 21일에 김일성으로부터 기습을 당하니까 위기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또 북한은 1960년대에 경제개발을 별로 안하고 군사력 증강에 전력을 집중해서 全軍의 간부화, 全국토의 요새화 등등 4대 군사노선이라는 게 있었어요. 그러다보니까 1960년대 말에 가서는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 군사력을 능가하게 되고 이제는 몸이 근질근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68년 1월 21일에 특공대를 보내서 박대통령을 죽이려고 했는데 청와대 담 앞에서 중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두 사람 남겨놓고 다 사살되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군에 있을 때였기 때문에 그 때의 긴장된 분위기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1968년 1월 21일 사태를 계기로 박대통령은, 우리는 자주국방을 해야 되겠다, 그러려면 무기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만 해도 군대에서 가지고 있던 소총은 M1으로, 우리가 만든 무기는 하나도 없었어요.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키자는 게 아니라 우선 이 사람 머리에는 무기를 만드는 공장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방위산업체를 만들거냐 하는 게 머리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상의를 해보니까 이 무기라는 것이 무기만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기를 만들려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밀공업이 있어야 되고 이 중공업이 있지 않으면 무기를 따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무기 만드는 공장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중화학 공업을 건설하자, 이렇게 된 겁니다. 발단이 국방에서 나왔어요, 국방에서.
이때 좋은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이 오원철 수석입니다. 우리나라 같이 작은 나라에서 무기를 만드는 건 좋은데, 무기를 만들어서 무장할 수 있는 군인 숫자가 60만 밖에 안 되는데 공장은 크게 만들었다 이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을 운용할 거냐. 좀 어렵죠? 그래서 아이디어를 낸 게 무기만 만들 것이 아니라 民需用(민수용)을 같이 만들자, 그러니까 민수용, 군수용을 같이 만드는 공장을 만들자, 무기 만드는 데는 한 달만 가동하면 되니까 나머지 열한 달은 민수용 무슨 엔진을 만든다든지, 자동차를 만든다든지 하자. 그래서 창원에 있는 방위산업체는 민수용도 만들고 군수용도 만드는 공장이 된 겁니다.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경영이 잘 되게 돼 있습니다. 대부분의 외국 경우에는 군수 공장은 무기만 만듭니다. 그러면 무기수요가 줄어들고 요새처럼 東西 냉전시대가 끝난 다음에는 놀아요. 그래서 문 닫는 데가 많습니다. 이 작은 아이디어가, 작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근본적인, 상식적인 아이디어인데 그것이 창원공단을 지금처럼 살렸고 창원이란 도시를 우리나라에서 제일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었다, 그렇게 생각되었습니다.
내려오면서 통계를 보니까 작년에 창원의 수출액이 약 160억 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창원 국가 산업단지의 총 매출액이 한 35조 원 정도 되더군요. 이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규모냐 하는 것은 북한과 비교해보면 제일 쉬울 것 같아요. 북한이 작년에 수출을 20억 달러 정도 했습니다. 수입을 10억 달러. 합쳐서 무역액이 30억 달러밖에 안 돼요. 이에 비해 인구가 50만 밖에 안 되는 창원이 수출만 북한의 다섯 배를 한 거죠. 창원, 포항, 울산, 거제, 구미 또 전라도의 여천 석유과학단지가 70년대에 만들어졌습니다. 70년대에 만든 중화학 공업단지, 그것이 지금도 우리 경제를 돌리고 있는 근간이 되고 그것을 만든 사람이 오원철 수석이라는 것을 한 번 기억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오원철 씨 같은 사람은 창원 사람들이 길에 동상을 세워줘야 해요. 외국에 가면 다 그렇게 합니다. 외국에 가면 다 인물을 기리기 때문에. 보니까 시청 앞에 광장이 넓던데 거기에 박대통령 동상하고, 오원철 씨는 살아있으니까 동상 세울 필요 없지만, 돌아가시면 반드시 세워야줘야 됩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내어 봤습니다.

박정희란 분은 1917년에 태어나서 1979년에 돌아가셨으니까 만 62살. 제가 1945년생이니까 딱 지금 제 나이죠. 집권한 지는, 대통령이 된 지는 18년. 18년을 허비하면 세월이 빨리 갈 것이고, 18년을 건설과 생산에 투자하면 국가의 운명을 바꿔놓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람이 이 박 대통령이라는 분입니다. 박정희라는 사람의 이야기는 삼국지와 비슷해요. 삼국지를 저는 소년기인 5학년 때 삼국지를 읽기 시작했고 그 뒤에 중간에 한 번 더 읽어줬는데 나이 들어서는 아직 못 읽었습니다. 그러니 삼국지를 세 번 읽으라고 하는데 읽을 때 마다 보는 방향이 달라지죠. 그 사람이 성장하면서 겪은 경험을 가지고 그 책을 읽게 되니까. 처음에는 국민학교 때 읽을 때는 삼국지에 나오는 장군 중에서 누가 제일 싸움을 잘하느냐 랭킹을 매기기도 했고,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역시 삼국지에서 제일 인물이 조조구나. 그리고 제갈량.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을 하게 되고. 또 더 나이가 많으면 삼국지, 그게 사실일까? 이렇게 돼서 아 이게 소설이구나. 정사 삼국지는 따로 있었구나. 그래서 비교해서 읽기도 하고 또는 CEO의 관점에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사람의 인간 관리술이라던지 유비와 손권, 조조를 비교하기도 합니다. 박대통령도 마찬가집니다. 저는 박대통령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기사를 쓴 지가 벌써 근 25년 쯤 되는데 처음에 접근하는 방법과 지금 보는 시각이, 방향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권력자로서의 박정희를 보게 됐죠. 박정희 시대에 일어난 많은 권력투쟁이라든지 김대중 납치사건 같은 것이라든지, 김형욱 실종사건, 부마사태, 이런 권력자로서의 박정희를 보게 되다가 중간엔 CEO로서의 국가 경영 관리자로서의 박정희, 그리고 요즘은 사상가로서의 박정희 그리고 인간 박정희 이렇게 관점이 계속 바뀌고 있습니다.

또 요새는 대한민국에서 올해 대선, 내년 총선을 앞두고 민심이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박정희를 보는 눈이 또 달라집니다. 박정희라는 사람은 역사지만 그 박정희를 보는 우리는 지금 현실에 딛고 있기 때문에 현실과 과거의 대화가 박정희를 매개로 해서 이뤄지는 것이지요. 과거와의 대화, 역사와의 대화는 바로 이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새로 대통령을 뽑게 되는 이 마당에 여러 대통령을 놓고 비교하면서 또 박정희를 보게 되네요.

요새 돌아가는 걸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죽은 박정희가 살아있는 김대중과 노무현을 이기고 있구나. 죽은 박정희가 살아있는 김대중과 노무현을 김정일까지 포함해서 이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요새 여론조사를 하면 한국사회에서 많은 여론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쪽에 계신 분들이 거기에 해당될 것 같은데, 청․장년층 그러니까 20대, 30대, 40대가 脫좌파 실용화 흐름을 보이고 있습니다. 脫좌파, 反좌파가 아니고 진보세력으로 위장한 좌파세력들이 하는 정책이나 하는 일이 너무 막돼먹고 또 무능하다 보니까 일자리도 잘 만들지 못하고 국제적으로는 고립이 되고 하는 것을 보니까 자존심이 상했는지, 또는 스타일이 맞지 않았는지, 너무 촌스럽다고 느꼈는지, 지금 여론이 反노무현 이렇게 기울다 보니까 그럼 대안이 누구냐? 하다 보니 이명박이라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큰 기업체에서 성공적인 CEO를 하고 뭔가 저 사람은 유능한 사람이다. 또 서울에서 청계천 복원이라는 참 하기 힘든 것도 아주 쉽게 하고 그래서 그 사람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청장년층이 돌아선 거죠.

지금 여론조사를 해보면 20대, 30대 특히 20대의 이명박 지지율이 50대 이상의 지지율과 똑같아졌습니다. 이게 저는 혁명적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은 점점 더 보수적으로 가고 20대, 30대, 40대도 脫좌파 해서 실용화-실용화라는 것은 어떤 사물을 판단할 때 현실과 사실에 기초해서 사물을 판단하는 것을 실용화라고 하는데-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경제, 안보, 과학기술, 실리주의 이런 것이죠. 말장난이 아니고. 그래서 현재 우리 국민들 사이에 여론의 균일화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역감정이 상당히 완화가 되었습니다. 이명박 지지율을 보면 서울에서의 지지율이 경상도에서의 지지율보다 오히려 높아요. 이것이 뭘 의미하냐 하면, 이제 한국 사람들이 생각을 하는 데 있어서 과거처럼 말에 속지 않게 되었다. 명분에 속지 않게 됐다.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이 개혁주의자가 아니고 개혁을 실천하는 사람이 개혁주의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 그러다 보니까 이게 결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노선으로 다시 돌아간다기보다는 박정희 노선의 연장선상에서 우리의 사물을 보게 됐다. 이런 생각이 바뀌는 근본을 만든 사람이 박대통령이라는 겁니다.

그 근본이란 것은 뭐냐. 근대화라는 것은 하나의 혁명 과정인데 그것은 세 단계로 나눠서 이뤄집니다. 처음에는 물질적 근대화가 이뤄지고, 그러니까 경제발전이 있습니다. 그것을 딛고 그 다음에 정치 근대화가 이뤄집니다. 즉, 선거를 통해서 정부를 선택하는, 우리는 1987년 6․29선언 이후에 가능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고방식, 가치관의 변화가 뒤에 따라옵니다. 물질적 변화, 정치에서의 민주화, 그 다음은 가치관의 혁명, 이것을 의식혁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지금 바로 이 마지막 단계 의식의 혁명, 가치관의 혁명이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박대통령, 앞에 이승만 대통령 두 분이 만든 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제도 위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어요.

자유민주주의 제도. 즉 언론의 자유, 선거의 자유, 사유재산의 자유.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입니다. 그 다음에 법치주의. 북한의 법은 김정일의 입에서 나오는 게 법인데, 한국에서는 대통령도 헌법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고 헌법을 위반했다가는 국회에서 탄핵 의결을 해서 헌법재판소에 불려가기도 하는 사태가 납니다. 법치주의, 이런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누가 만들었느냐. 이승만 대통령이 만들었어요. 우리가 건국을 할 때 사회주의 독재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도입을 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박대통령 시절에 의해서 기업이 만들어지고 관료, 공무원 제도가 아주 단단하게 되고 그 다음에 군대가 근대화 되고 과학이 발달하게 돼서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적 부분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창원공단이 대표적인 예지요. 이렇게 되면 여기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생기죠. 그 먹고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중산층이지요. 즉 전문가들, 엔지니어들, 변호사들, 저 같은 기자들 다 전문직 직종사가 많아집니다. 이 사람들을 우리가 중산층이라고 해요.

박정희 시절에 벌써 중산층이 60%정도, 1970년대에 넘어오면 내가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때는 75%까지 올라갔습니다. 중산층이 만들어지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민주화가 됩니다. 이 중산층을 만들어내느냐 만들어내지 못하느냐가 어떤 나라가 발전하느냐 실패하느냐를 결정하게 돼요. 남미가 왜 저렇게 좋은 물질적 조건과 자연 환경의 조건이 있으면서도 발전하지 않느냐면 중산층을 만들어 내는 데 실패를 했기 때문입니다. 중산층이 생기지 않습니다. 과학자가 있어도 다 외국으로 나가 버려요. 중산층이 없으면 애국심이 생기지 않아요. 중산층은 모두 건전한 애국시민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 잃을 것이 있기 때문에. 나라가 혼란에 빠진다든지, 적이 쳐들어온다든지 혁명이 일어나면 내가 손해를 보기 때문에, 이 제도를 지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 사회의 무게 중심을 차지하는 거예요. 그것이 60%이상만 넘으면 그 나라는 민주화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중산층을 박대통령 시절에 만들어 냈습니다. 중산층이 없는 상태에서 민주화를 하니까 어떤 문제가 생겼느냐. 바로 4․19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다음에 장면 정부가 들어섰는데, 장면 정부가 들어섰을 때는 중산층이 약해졌습니다. 갑자기 자유를 주니까 사회가 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 경제가 불안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안보가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5․16쿠데타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박대통령 시절에 중산층이 만들어지도록 만든 것이 기업이죠. 기업, 관료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박대통령은 경제개발을 개방적으로 했다. 북한처럼 문을 꼭꼭 닫아놓지 않았어요. 지금 북한은 우리한테도 문을 열지 않아가지고 겨우 개성공단 하나 열어놓고 쩔쩔매는데, 박대통령은 아예 집권하자마자 문을 다 열어 젖혀버리고 수출로 간다는 개방적 경제개발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하죠. 사람이든, 조직이든, 나라든 문을 열고 당당하게 세계로 나가서 세계시장에서 겨루어야지, 문을 꼭꼭 닫고 골목대장 식으로 하다가는 발전이 없어요. 물건을 아무리 만들어도 불량품 밖에 안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1963년부터 수출입국 정책을 박대통령이 선택했습니다. 박대통령이 선택한 여러 가지 전략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수출입국 전략이었어요. 우리는 수출에 모든 것을 건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중소기업에서 손톱깎이를 만들 때 이것을 수출을 해야 하니까, 미국 사람들이 뉴욕에 사는 사람들이 그 손톱깎이를 쓸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야 되지요. 그렇지 않고 이것을 내수시장에 판다고 하면 손톱깎이를 적당히 만들지 않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경제 개발을 할 때인 1963년부터 우리가 만든 물건은 해외시장에서 팔리는 것이다. 남대문 시장에서만 팔리는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하고, 기술을 기발하고, 또 비용을 낮추기 위해서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온실에서 한 것이 아니라 寒帶(한대)에서 했다는 거죠. 얼마나 고생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국가가 뒷받침해줬습니다. 국가가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기술도 소개해주고 하면서 국가가 지도를 했어요. 지금은 기업이 공무원보다 훨씬 앞서 있지만 그때는 국가가 기업을 지도하면서 수출 산업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한국에서 만드는 공장은 전부 세계 경쟁력이 있는 큰 공장이다 이거예요. 그리고 최신설비를 갖추어야 되요. 그래서 그런 공장들이 1970년대에 중화학 공업 건설 붐을 타고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포항제철, 현대조선, 두산기계 같은 이런 것이 다 세계 최대의 규모 아닙니까? 그러다보니 한국이 덩치가 큰 나라가 되어버렸어요. 경공업국가에서 1970년대에 들어가면 중화학 공업을 하면서 한국이 큰 국가, 그래서 지금은 공업력으로만 따지면 세계에서 5번째 아니면 6번째일 거예요. 미국, 일본, 독일, 그 다음에 프랑스. 그 다음이 한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공업력에 있어서. 제철공업, 석유화학공업, 전자, 조선, 원자력산업 등 까지 다 치면. 이렇게 된 것도 바로 박대통령 시절의 기본적 전략 때문입니다.

그런데 항상 물질은 빨리 발달하지만 정치는 뒤를 따라갑니다. 정치나 사람의 생각은 항상 물질적 발전을 몇 십 년 뒤에 따라가요. 그래서 이 사회가 선진화되고 개방화되고 중산층이 생기고 하니까 이제는 정치도 좀 자유로워져야 되겠다. 박대통령은 마지막 두 번은 직선제로 당선된 게 아니라 장충체육관에서 거수기처럼 99.9%를 받는 식의 선거를 통해서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런 선거는 이제 관두고 이제는 우리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아야 되겠다하는 생각이 용솟음치기 시작했어요. 동시에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 되겠다. 대통령 비판도 좀 해야 되겠다. 자유를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80년대에 광주사태부터 여러 가지 일이 있었으나 결국 그 대세를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수용을 해서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로 바뀌었죠. 그 뒤부터는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고 정권을 교체하는 정치 민주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지금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명분주의에서 실용주의, 그리고 도덕주의에서 실리주의로 바뀌는 실용화 단계에 우리가 지금 들어갔다. 거기서 상징적인 인물이 나온 사람이 바로 그 시대에 맞는 사람이 이명박 씨가 되어서 지금 저렇게 자기 실력보다도 플러스알파가 되어서 지지율이 60%나 되고, 좌파 후보들은 모두 모아도 20%가 안 되는 우리나라 정치사상 대선을 70일도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서 초유의 사태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국민의 혁명,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혁명의 기반을 만든 사람이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러니까 박대통령이 김대중, 노무현을 이기고 있다 이런 뜻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두 사람은 민주투사 출신이죠. 민주화를 하는 데는 공이 있었으나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여러 가지로 자기들 편 사람들만 쓰는 바람에 국가에 분열이 일어나고 또 대북정책에서 끌려 다니다 보니까 퍼주기만 하고 얻는 것은 없고 또 여러 가지 말에서 사람들이 교양 없는 말을 하다 보니까 여러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해서 지금 한국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불행도가 높은 나라가 되어 버렸어요. ‘불행도’라는 게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여기가 행복하냐, 불행하냐” 이렇게 물어보면 의외로 가난한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그건 더러 있는 거지, 대충 경제 성장하고 같이 갑니다만 한국은 올 초에 국제적인 여론조사에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9%에 없어요. 왜 이렇게 됐느냐? 가만 보면 대통령 때문에 불행하게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제일 많아요. 대통령 한 사람 때문에 한국 사람의 80%이상이 불행하게 됐다. 거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런 지금 의식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의 기본을 만든 것은 박대통령이다.

제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이렇습니다. 저는 박대통령 시절에는 학생이었고, 기자였었죠. 처음에는 오히려 저는 학생 때는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보고 지지를 했으나 기자생활을 하다 보니까 역시 공무원들과 정권하고 부딪히기도 하고, 또 기사를 쓰다가 정보부의 압력 때문에 제가 기자직을 그만두기도 하는 것을 겪으면서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79년 10월 26일에 박대통령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저는 월간조선에 있으면서 박정희 시절의 비화를 많이 쓰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쓸 수 없었던, 박정희 시대 때의 언론탄압 때문에 쓸 수 없었던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김재규와 차지철의 암투라든지, 10․26사건과 부마사태죠. 김형욱 실종 사건이라든지, 이후락, 김종태 이런 사람들을 주제로 한 비판적인 관점에서 출발을 했어요. 한 3~4년 써보니까 박대통령이 아무리 깎아내려도 더 깎아내릴 수 없을 만큼 큰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1987년부터는 박정희라는 사람의 위대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87년부터 띄엄띄엄 이 전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잡지에 연재하기도 하고 신문에 연재하기도 하고 해서 한 20년 걸려서 썼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조선일보에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하는 제목으로 연재되기 시작한 것이니까 한 10년 정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13권이 되었는데 제가 생각하면 부족한 것 같아요. 더 쓸 게 많은데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은 저 사람이 너무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저 시절에 있었던 일이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박정희란 사람이 생사를 몇 번이나 넘나들고, 또 부인까지 그렇게 죽고 하는 박정희라는 개인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아주 흥미롭기 때문에 전기를 쓰기에는 참 좋은 사람이죠. 그러니까 13권을 써도 참 미진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을 쓰면서 결국 박정희라는 사람하고 저와의 대화를 계속해 왔다 이렇게 볼 수 있겠죠.

박정희란 어떤 사람이냐. 어떻게 보면 참 평범한 사람입니다. 일을 보면 위대한 사람이죠. 그러나 그 사람의 성격이라든지, 그 사람의 음식 먹는 것이라든지, 옷차림이라든지, 생각하는 것은 다 우리 세대의 생각. 우리보다는 우리 아버지 세대겠죠? 우리 아버지가 1912년생이니까, 우리 아버지․삼촌 세대의 전형적인 인물이 바로 박정희란 사람이다. 이렇게 보시면 알 것입니다.

박정희란 사람은 먼 데서 보시면, 사진을 보면 굉장히 딱딱하게 보이지만 굉장히 겸손한 사람, 인사를 잘 차리는 사람, 그리고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사람, 일기를 항상 썼던 사람, 편지를 아주 많이 쓴 사람, 이런 사람입니다. 즉 권력이라는 후광을 벗어던진 인간 박정희는 우리 곁에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그런 역사적인 일을 할 수 있었느냐. 첫째는, 이 사람이 군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였습니다. 박정희란 사람이 민간인이었으면 저렇게 큰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박정희는 대구 사범을 졸업하고 문경에서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한 3년을 하다 보니까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일찍 결혼을 했는데, 결혼이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주 자상한 교사였어요. 아주 모범적인 교사였습니다. 그 제자들이 지금도 문경에 살아 있는데 그 사람들이 기억하는 박대통령은 정말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그 산골에서 답답하게 지내면서, 그 답답함을 트럼펫을 불고하면서 달랬으나 결국은 만주 군관학교로 가게 되었습니다. 즉 장교, 육군사관학교로 간 게 된 거죠.

그 때 만주에는 일본이 만든 하나의 괴뢰 제국으로서 만주국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서 2년 동안 공부를 하고 수석졸업을 했기 때문에 다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을 가서 일본에서 1944년에 졸업을 했고, 돌아와서는 일본 군대가 아닌 만주군 소속으로서 주로 모택동하고 싸우는 중국의 북쪽에 배치되어 있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요새 일부에서 박대통령을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방되었을 때 박대통령은 박정희 중위였습니다. 이 사람이 군복을 입고 한 행동을 보면, 물론 군복을 입었으니까 천왕한테 충성을 해야 됐겠죠. 또 일본 노래도 불렀겠죠. 일본 군가도 불렀겠죠. 그러나 마음 속에는 민족혼을 잃지 않았다. 진심으로 일본 사람한테 굴종하고 한 흔적은 없고, 더군다나 일부에서 엉터리로 주장을 하듯이 독립군을 잡았다든지 수사했다든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오히려 독립운동 조직을 도와주었다든지, 동정심을 표했다든지 그런 증언은 많아요. 그 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해방이 되니까 아주 초라하게 고향으로 돌아갔죠, 1946년 당시인 일제시대 때는 군인 세상이기 때문에 중위라고 하면 꽤 뻐기고 다녔는데, 이제는 패잔병이 되었기 때문에 돌아와서 한 5개월 정도 실업자 생활을 하다가 다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조선경비사관학교라 해서 지금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가서 육사1기로서 다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으로는 세 번째의 사관학교죠. 즉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 조선경비사관학교. 그래서 차렷 자세를 하면 이 사람 몸에서 아주 모범적인 자세가 나온다든지, 모든 것을 잘 정리한다든지, 일을 할 때는 항상 반듯하게 질서 있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분이 육군사관학교 교육을 세 군데서나 받고 군인이었기 때문에, 또 그 전에 5년 동안 다녔던 대구사범도 반 군사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본인의 특징으로서 사고방식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박대통령의 사진을 보면, 특히 군인시절의 사진을 보면 아주 기가 막히게 차렷 자세가 좋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위기에 빠지게 되죠. 박대통령은 형이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형이 1946년 10월 1일 대구 폭동에 연루되어 사살됐습니다. 그래서 박대통령은 이 군정에 대해서 원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잘 이용한 사람이 박대통령을 남로당으로 끌어들였고 박대통령은 남로당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48년 10월에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나니까 우리 군대를 숙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군 안으로 들어와 있는 남로당 프락치들을 잡아내는 수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가혹한 수사를 했고 몇 차에 걸쳐서 몇 백 명이 처형되었습니다. 그 과정에 박정희도 걸려 들어가서 고문을 받고 생사를 오고가고 하다가 정말 우연하게 살려주는 사람이 있었어요. 지금도 살아계시는 白善燁(백선엽) 당시 육군 정보국장이 수사 책임자였는데 이 사람과 밑에서 수사를 실무적으로 지휘했던 金昌龍(김창룡)이라는 사람-나중에 악명이 높은 특무부대장이 되었는데-이 두 사람이 박정희는 인물이 괜찮고 또 수사에 협조했으니까 살려주십시다 하고 이승만 대통령한테 건의를 해서 거의 박정희만 살아났습니다. 죽어야 될 사람이.

그러나 옷을 벗고 군대 문관으로 생활하면서 아주 비참한 생활을 꾸렸습니다. 이 기간에 이화여대 출신의 이 모 여인과 동거생활도 하고, 또 이 모 여인은 자기 남편이 빨갱이란 죄명으로 감옥에 가니까 견디지 못하고 가출을 하고, 자기 어머니도 죽고 하면서 1949년에서 1950년 6․25가 나기 전은 박정희 대통령 인생에 있어서 가장 우울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 박정희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인맥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즉, 육사 8기생들이 그 때 육군본부 정보국으로 많이 들어왔어요. 육사 8기생은 숫자도 많을 뿐만 아니라, 그 전에는 2,3개월 교육을 받았는데 그 사람들은 6개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엘리트 의식도 있고-金鍾泌(김종필) 씨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만-그 사람들이 비록 군복은 벗었지만 박대통령하고 같이 대화를 나눠보니까 참 존경을 하게 되었고 지도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육사 8기생과 박대통령의 인연이 바로 1949년에서 1950년 사이에 만들어지게 되었고, 결국 5․16을 성공시키는 것은 육사 8기생들이 가담을 했기 때문에 성공을 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 불행이 나중에 권력을 잡는데 있어서 밑거름이 됐다 이렇게 보여 집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생애를 가만 보면 가장 불행할 때가 오히려 그 사람의 성공을 준비하는 기간이라는 것을 우리가 흔히 알 수가 있고, 가장 잘 나갈 때가 망조가 들어가는 순간이다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한 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가 6․25가 났습니다. 6․25가 났을 때 박대통령은 고향에 내려가 있었는데 빨리 복귀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는 빨갱이니까 북쪽으로 갈 것이다 생각했는데 반대로 한강을 넘어서 철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장교가 부족하니까 다시 박정희를 소령계급장으로 달아서 현직 복귀를 시켰습니다. 이것도 참 재미있는 현상인데, 김일성의 남침이 없었으면 박정희는 그냥 민간인으로 끝났을 겁니다.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은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 그 중 한 사람은 김일성입니다. 즉 김일성의 남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김일성이 몰락하게 되는 것도 박정희의 경제개발이 성공해서였기 때문에 그런 것을 보면 정말 인간관계가 여러 가지 재미있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1950년대에는 군인으로서 소장까지 올라갔습니다. 군인시절의 박정희 대통령의 이야기가 제 책의 2,3권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기간은 육영수 여사를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고 군대에 있으면서 미국에도 6개월 동안 유학도 갔다 오고, 또 군대에 있으면서 조직을 경영하는 방법도 알게 되고 해서 지도자로서 준비가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기간에도 박대통령은 가장 깨끗한 사람이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5․16쿠데타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 교양, 그리고 권력 의지와 청렴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군 장교들은 많이 부패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면도 있습니다만, 별만 달면 다 썩어 빠진 놈이다 하는 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박대통령은 청렴결백하기 짝이 없어서 오히려 옆에 있었던 장교들이 자기들이 연탄 같은 것을 만들어서 집에 몰래 가져다주고, 알면 박대통령이 싫어하니까, 병적으로 결벽했다고 까지 보이기도 합니다. 사단장 부인이 육영수 여사죠. 육영수 여사는 대부호의 딸이지만 사단장 부인이 돈이 없어서 강아지를 키워 시장에 팔아 집 수리비를 댄다던지 이런 식의 생활을 했습니다. 청렴하니까 사람들이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쿠데타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5․16 쿠데타는 왜 일어났느냐? 국가를 개조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때 군인들 마음 속에 있었어요. 모두 30대의 젊은 군인들입니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박대통령은 44살, 김종필 씨는 37살. 30대, 40대가 일으킨 것이 쿠데타입니다. 청년 장교죠. 지금 말해서 30,40대면 계장, 과장이 될까 말까한 나이인데 이 사람들은 모두 중장을 달았습니다. 그 때 장도영 씨가 육군참모총장인데 39살이었어요. 다 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젊은 사람들 마음속에 나라를 개조해야겠다는 순수한 마음이 다 있었어요. 그것을 우리가 가끔 잊어버립니다.

쿠데타를 한 것이 권력을 잡기 위한 것이라고 이렇게들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박정희 세대는 어떤 세대냐? 일제 시대에 고생하면서 반드시 우리가 독립 국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욕망이 있었어요. 또 하나, 6․25를 거치면서 공산주의자는 안된다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50년대에 우리 장교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많이 갔습니다. 어느 정도로 유학을 많이 갔는가 하면 1960년대에 우리나라 군대가 한 60만이 되었는데 장교가 6만 명이 되었어요. 그 6만 명 중에 미국에서 유학하고 온 사람이 10%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외교관들보다도 장교들이 더 외국 경험이 많아요. 그러다보니 장교들의 시야가 넓었습니다. 또 그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1950년대, 60년대의 한국이라는 나라는 지금의 미얀마보다 더 못 살고 아마 아프리카 같은 나라였을 거예요. 냄새나고 더럽고 사람들은 약속도 안 지키고 제대로 굴러가는 것이 없고 이렇게 된 사람들이 가장 잘 사는 미국에 가서 교육을 받았다. 지옥에서 천당 가는 거죠. 거기서 바라보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한심하겠습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이 그런 걸 다 느꼈어요. 돌아가면 나라를 뒤집던지 해서 바로잡아야 되겠다.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꿈을 품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꿈을 꿨다 해서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죠. 쿠데타는 왜 일어났느냐? 4․19로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다음 장면 박사가 집권을 했는데, 국민들이 절대적인 지지를 해서 그 사람들이 장면 총리,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는데 갈라져버렸습니다. 자기들끼리 분열되어 버렸어요. 한국 사람들은 항상 분열하는 DNA가 있어요. 그것도 결정적인 순간에 분열하는. 분열을 해버리니까 공산주의자들이 지하에 있다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횃불 시위도 하고, 그 때 무슨 통일을 하자 해서 판문점으로 가자며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어요. 국민들이 보니까 불안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자기들 피를 흘려서 이 나라를 지켜낸 지가 불과 7~8년 전인데 등 뒤에서 빨갱이들이 설친다라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하고, 가만히 두었다가는 공산화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 또 이렇게 되니까 국민들이 왜 군인이 안 나오느냐. 이렇게 민심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육사 5기,8기들이 중심이 되어 쿠데타 계획을 했는데 그 쿠데타 계획을 알던 사람들도 신고를 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이걸 뒤집어야 하니까 나는 못하지만 옆에서 혁명 모의를 하고 있는 걸 알지만 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 위에 심지어 장도영이 까지도 박대통령이 쿠데타 모의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동원된 병력은 4000명 밖에 안 되죠. 1961년 5월16일 서울에 들어온 병력은 해병대가 제일 앞장서서 들어오고 포병단이 들어오고 해서 4000명이 서울에 들어와서 장악을 했습니다. 60만 부대가 얼마든지 이것을 진압할 수 있었는데 왜 진압이 안됐느냐. 진압을 명령해야 할 장면 총리는 수도원으로 도망을 가버리고 군대는 오히려 속으로 잘되었다 생각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주한미군 사령관이 앞장서서 진압하려고 해도 따라주지를 않고 드디어 군 통수권을 가진 윤보선 대통령도 진압을 반대를 해버렸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이 나중에는 박대통령의 반대노선으로 가지만 그 때는 박대통령의 쿠데타가 성공하는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집권을 했습니다. 군인이 집권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군인이 집권을 한 것은 800년 만에 처음입니다. 12세기에 정중부(鄭仲夫) 등 武臣(무신)의 亂(난)이 일어나서 군인들이 집권하게 됐습니다. 백 년 동안 무신정권이 있은 후 모두 글로 하는 선비들이 권력을 가졌다가 총을 가진 사람이 집권한 것은 800년 만에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군인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죠. 박대통령이 군인이 아니었으면 근대화도 되지 않았고 집권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800년 만에 처음 등장한 군인정권이었습니다. 요새는 조금 그런 생각이 덜 한지 모르겠지만 군인하면 사람들 머릿속에 ‘무식하다, 획일적이다, 때린다’ 이런 이미지가 지금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군인이 그런 사람들만은 아닌 거죠.

군인이란 조직은 하나의 장점이 있어요. 어떤 장점이 있느냐, 목표를 정하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전 조직을 동원해서 밀고 나간다. 실패하면, 왜 실패했는가에 대해 연구 검토를 해서 다시 한다. 모든 일을 계획 하에서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조직을 만드는 데 그 조직이 아주 효율적인 조직인 조직이다. 이런 조직이 당시의 대한민국엔 없었어요. 공무원도 없었죠. 그러다보니까 대한민국 군대가 엄청 6․25 때문에 커지기도 했지만 거기서 인재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즉, 1961년에 공무원들보다도 군인들의 수준이 훨씬 높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바로 군 장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정권을 잡은 것은 무식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한국의 국가 엘리트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게 참 다행이죠.

무식한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무식한 군인이 정권을 잡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좋은 예가 바로 김일성 아닙니까? 김일성이 게릴라를 했든, 빨치산을 했든 정규 전쟁도 못해 본 김일성이가 정권을 잡았다. 무식 집단이 정권을 잡으니까 북한이 저렇게 되어버리고, 한국은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둘 다 당대에 가장 머리 좋고 가장 세계 정세를 제대로 보고 인간적으로 가장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한국의 행복입니다, 행복. 그 사람들이 선거를 했으면 절대 대통령이 될 수 없었겠죠. 이승만 박사는 예욉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선거를 통해서도 무조건 대통령 될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선거를 통해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군인들이 집권했다 하는 것이 박대통령의 성공이고 한국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박정희-全斗煥(전두환)-盧泰遇(노태우), 약 30년 간 군인 출신 대통령이 나오면서 한국이 발전을 했습니다. 30년 동안 민주화의 기초를 놓았죠. 또 민주화를 이룩한 사람도 군인 출신 대통령인 노태우 대통령 때였습니다. 이 세 사람이 경제발전도 성공시켰고, 자주국방도 성공시키고, 민주화도 이 사람들 손에 이루어 졌습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우리가 군사문화라고 해서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군인 출신의 군인들에 의해서 이뤄졌다. 그 군인들은 무식한 군인들이 아니고 엘리트 군인들이고 애국심이 있고 또 개방적이고 수출입국 전략을 바로 군인들이 세웠다-민간인들이 세운 게 아닙니다-하는 것을 본다면 우리가 군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잘 정리를 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 후에 군인들이 정치를 하기 시작하면서 국방보다는 정치에 더 신경을 쓰는 정치군인까지 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 국군의 역할은 우리 현대사에서 굉장합니다. 이렇게 해서 군인에 의한 근대화가 성공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1960년대와 70년대가 많이 달라요. 1960년대는 박대통령은 경제개발에만 전력투구를 했는데 경공업을 주로 발전을 시켰습니다. 섬유공업, 봉제,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이 잘 알고 계실 가발 수출 등을 많이 했어요. 경공업을 했습니다. 지금 북한의 개성 공단에서 하고 있는 정도보다도 훨씬 더 수준이 떨어지는 경공업을 했어요. 그러다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무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다 보니까 중화학 공업을 기반으로 구성을 해야 되겠다. 그래서 1970년대부터는 박대통령은 중화학 공업에 전력투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1970년대에 큰 위기가 하나 닥쳤습니다. 1973년에 4차 중동전쟁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시리아가 싸우는 과정에서 중동의 산유국들이 기름 값을 올렸습니다. 지금 배럴당 한 40,50달러 하죠? 그 땐 배럴당 2달러밖에 안했어요. 기름 값이 굉장히 쌌습니다.

그런데 기름 값을 갑자기 12달러로, 5배로 올렸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타격을 많이 받았겠어요. 지금도 우리가 기름을 수입하는 데 연간 400억 달러를 쓰는데, 당시는 아마 전체 수입액의 30%가 기름 사는 데 다 썼어요. 그런 기름 값이 다섯 배로 뛴 것이죠. 그런데 박대통령은 그때 중화학 공업 건설을 시작을 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돈이 많이 들어가죠. 고민에 빠졌습니다. 포기하느냐 마느냐. 이때 박대통령다운 선택을 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더 확실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고 해서 중화학 공업을 그냥 밀고 나갔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하늘은 우리를 도왔고 박대통령이 선택을 잘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아까 말씀드린 오원철 씨의 중요한 역할이 있는데, 기름 값이 올라서 산유국으로 돈이 몰리니까 산유국은 그 돈을 가지고 주로 건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항만도 만들고, 아파트도 만들고 해서 중동에 건설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근로자들이 그쪽으로 진출을 했어요. 기름이 나는 곳으로 가자. 말하자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중동건설 진출이 1974년부터 본격화가 되면서 1970년대 말에는 많이 나가있을 때는 우리 근로자가 중동에 30만 명 정도가 나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갈 수 있었던 배경이 있었습니다. 우연하게 된 게 아니에요. 세상에서 좋은 일은 우연하게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그 전 단계가 있었죠. 1960년대에 우리가 월남에 진출해서 우리나라 기업들이 현대건설이라든지 한진중공업, 대한항공 저런 회사들이 중동에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중동에서 건설공사를 해봤으니까. 도로도 닦아 봤습니다. 항만도 놓았습니다. 이 실력을 가지고 중동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회사 단위로 나갔습니다, 회사 단위로. 이게 중요합니다. 중동에 노동자로 가느냐? 아닙니다. 회사가 가는 거랑 천지차이죠. 우리는 회사로 갔는데 태국 사람, 필리핀 사람들은 그때 파키스탄 사람들을 포함해 가지고 다 노동자로 갔어요. 지금도 중동에 가보면 그 사람들은 노동자예요. 우리는 이미 모두 졸업을 해가지고 이제는 현지 사람들 쓰고 우리 사람들은 몇 사람 안 나가 있죠. 조직으로 가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조직으로 갔습니다. 이것이 중요하죠. 이게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박대통령이 시스템 운영의 귀재입니다. 박대통령은 조직을 어떻게 만들고 그 조직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지휘를 해가지고 단기간에 얼마나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느냐. 마감시간을 지키느냐. 어떻게 하면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느냐 하는 것을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라든지 조직을 다루는 이 시스템 운영의 귀재입니다. 귀신입니다, 귀신. 그러니까 중동에 진출할 때도 잘 조직된 회사가 나가고 거기에 나가있는 현지의 대사들이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고 또 우리 은행이 적극적으로 지불 보증을 해줘서 중동에서 돈을 벌기 시작해서 중화학 공업에 투자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1977년이 되면 중동에서 번 돈을 가지고 중동에서 기름을 사오고도 남게 되었습니다. 운이 따랐던 거죠. 그 운을 만들어낸 박정희의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는 중화학 공업의 연대인데, 동시에 정치적으로 말하면 유신시대에요. 1972년 10월17일에 박대통령이 갑자기 탱크를 끌고 와서 국회를 문 닫게 해버리고, 비상 계엄령을 선포해서 국법을 중단시켜 버렸습니다. 이게 10월 유신입니다. 두 번째 쿠데타라는 것이죠. 박정희는 두 번 쿠데타를 일으켰어요. 그래서 선거도 직선제를 하지 않고 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위원이라는 허수아비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가지고, 그것도 한 사람은 후보에 등록하라 해놓고 투표를 하니까 북한처럼 99.99%가 나오고. 이 시기가 1972년부터 1979년까지 7년 동안 박정희가 독재자였던 시기죠. 그 나머지는 독재자라고 볼 수 없어요. 선거를 통해서 당선된 사람이니까.

1970년대를 경제적으로 보면 제일 발전이 많았고, 정치적으로 보면 제일 후퇴했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상관관계가 뭐냐. 제 책의 10권, 11권이 그 기간인데 박대통령은 왜 두 번째 쿠데타, 유신 쿠데타를 했느냐. 이 분이 1971년에 김대중 씨와 선거를 해보니까 이런 선거를 몇 번 하다가는 나라가 거덜이 나겠다. 다리 놔야 된다, 도로 닦아야 된다, 이런 공약을 막 말을 하게 되니까. 사람들이, 국민들이 또 잘 속고 하니까. 이런 선거를 해서는 나라가 망하겠다. 그래서 정치 코스를 확 줄여버리기 위해서 대통령 선거를 아예 없애버렸죠. 그 대신 선거에 의해서 비효율성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죠. 모든 공장을 가장 효율성이 높은 지역에 배치를 하고. 그런데 정치를 하면 그렇게 안 되죠. 정치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원자력 발전소는 반드시 바닷가에 들어서야 되는데 저 내륙지방에 누가 정치적으로 센 사람이 있으면 이놈의 원자력 발전소가 저 낙동강 상류에 설치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나 정치코스를 줄이면 경제 논리로 갑니다. 효율성의 문제죠. 1970년대 유신시절에 한국이 가장 효율적인 경제성장을 했습니다. 정치인들, 언론들의 간섭을 별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기간 중에 중화학 공업 투자가 성공을 해서 한국이 경량급 국가에서 미들급 국가로 올라갔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리가 있었죠. 박대통령이 집권한 지 18년이 되고 하니까 학생뿐만 아니라 중산층도 이제는 좀 뽑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게 1979년입니다.

그때 또 위기가 들어왔어요. 위기는 항상 안팎으로 같이 연결이 됩니다. 이란에서 호메이니라는 사람이 혁명을 일으켰는데 집권을 하는 과정에서 이란이 기름 생산혁명을 해서 기름 값이 또 올랐습니다. 제2차 석유 파동입니다. 그게 1979년인데 석유 값이 두 배로 올랐습니다. 또 우리는 물가가 10%, 20%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당시 야당에 김영삼이란 사람이 야당 총재로 당선되어 가지고 정권과 투쟁을 세게 합니다. 종교인들도 거기 같이 합니다. 부산에서 학생들이 남포동으로 나와서 시위를 하니까 시민들이 거기에 빵 사주고 콜라 사주고 그래요. 시민들이 가세를 합니다. 이게 민란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상계엄령이 내려졌습니다. 김재규 정보부장이 내려와서 보고 ‘아, 민심이 박대통령을 떠났다.’ 이렇게 판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강경책을 하나 꺼내가지고 서로 싸웁니다. 이러다가 10월 26일 날, 궁정동에서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차지철과 박대통령을 죽입니다.

10월 26일 날 일어난 사건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30년을 결정지었습니다. 그 날 하루 일어난 사건이. 즉, 박대통령이 죽음으로서 18년이 끝나고, 그날 밤에 전두환 보안 사령관이란 사람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이 사람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을 했습니다. 그 때 중심을 잡았어야 했을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과 최규하 대통령, 그때 국무총리는 조금 믿음직스럽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권력에 진공이 생겼어요. 진공이 생기면 공기가 들어가죠.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정규 육사 출신이라는 배경이 있었습니다. 정규 육사 출신들은 그 앞에 나이 많은 사람들을 상당히 무능한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단결이 잘 되어 있었어요. 정규 육사 출신들을 등에 업었고, 또 이 정규육사 출신들을 박정희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옹호해 줬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이 사람들이 대령 시절에도 대통령이 수시로 불러가지고 밥도 사주고 특별히 관리를 해서 키웠습니다. 이 사람들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광주 사태가 발생을 하고 여러 가지 유혈이 있었습니다만, 하여튼 전두환-노태우 정권이 10월 26일 날 그 날 밤에 그 싹이 트여졌다. 이렇게 본다면 18년이 끝나고 새로운 13년을 만들어 내는 그 사건이 바로 10․26 사건인데 제가 쓴 책의 마지막 권이 10․26, 10월 26일 날 하룻밤에 일어난 사건을 아주 정밀하게 분초 단위로 다루었어요. 저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제일 재밌는 사건이 10월 26일 사건입니다. 아마 세계에서도 저렇게 재밌는 암살 사건이 없을 거예요. 그래서 아마 저 부분이 제일 읽기는 쉽고 재미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여기까지가 간략하게 소개한 박대통령의 생애라고 볼 수 있는데, 오늘날의 시점에서 박대통령을 보는 시각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해 본다면, 우리가 다시 재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우리가 지금 국가의 목표를 어디에 잡고 있는가 하면, 이번에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들이 다 일류 국가 만든다고 그러죠. 일류 국가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모두 하고 있어요. 이 말을 우리가 90년대에 들었으면 전혀 실감이 안 났을 것이고, 80년대에 일류 국가를 만들겠다고 누가 들고 나왔으면 그건 좀 웃긴 거고, 60년대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잠꼬대고, 50년대에 대한민국이 일류 국가가 돼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은 그건 미친 사람이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불과 30년, 40년 전에 잠꼬대 아니면 미친 사람이 할 이야기가 이제는 누구나 가능하다 이렇게 돼있습니다.

일류국가, 일류국가 만들자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웃긴다는 생각이 듭니까?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죠.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60년 동안에 대한민국의 역사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나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류 국가가 그게 아무나 되는 게 아니죠. 일류국가는 어떤 나라여야 되느냐. 기독교 국가라야 일류 국가가 됩니다. 유럽에서 생긴 국가여야 됩니다. 유럽에서 생겼다가 이사 간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럽 국가, 기독교 국가 아닌 나라에서 일류 국가가 된 나라는 한 나라밖에 없어요. 일본이죠. 일본은 아시아에 있으면서도 한국이나 중국과는 다른 역사를 밟아온 나라입니다. 그것은 아시아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의 역사의 발전 과정을 보면 오히려 유럽에 가까워요. 봉건제도가 있었고 군 지배가 오래 있었습니다. 군인 지배가 오래간 나라가 항상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산업이 발전합니다. 선비가 오래 지배한 나라는 항상 쇠퇴하고 과학, 경제가 발전하지 않아요. 그래서 식민지로 가 버립니다. 일본만이 아시아에서 식민지가 되지 않았어요. 그 일본이 일류 국가가 되었는데, 이제 일류 국가가 되겠다는 나라가 세 나라 아닙니까. 한국, 이스라엘, 대만. 이 세 나라는 1인당 국민 소득이 2만 달러에다가 민주화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안보상 굉장히 큰 문제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한 나라가 일류 국가가 될 것인데, 한국은 김정일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핵문제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이 통일의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류국가가 될 수 있느냐 마느냐는 통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의해서 결정 될 것입니다. 통일을 안 하고 일류국가가 될 수 있느냐,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한 나라의 반은 노예로 살고, 한 나라의 반은 자유민으로 살고. 어느 나라에 같은 민족인데 남한 사람들은 평균 키가 남자가 173.5cm고, 저 북쪽으로 올라가면 160cm도 안 되고. 평균 수명은 북한이 남쪽보다 12년이나 짧고. 이런 상태에서 우리만 잘 먹고 잘 산다고 해가지고 일류국가가 될 수 있느냐, 불가능하죠. 반드시 북한을 자유화 해서 노예를 해방하고. 링컨이 흑인노예를 해방하기 위해서 남북전쟁을 했듯이 우리는 북한이 우리 동포 2300만을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뭘 해야 돼요? 그것이 바로 자유통일이죠, 자유통일. 우리가 자유통일을 하면은, 자유통일을 할 만한 용기가 있고, 그만한 희생정신이 있고, 그만한 슬기가 있고, 그만한 국력이 있으면 반드시 자유, 약간의 조정기를 거쳐서 일류국가로 반드시 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식으로 남북분단 상태가 오래가면은 만날 이 이념문제로 티격태격 하면서 분열해 가지고 싸움만 하다가 힘이 쫙 빠져가지고 다시 삼류 국가로 돌아갈 것이고, 적화통일이 되면 그건 야만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되겠죠.

박대통령 설명하다가 남북관계를 놓쳤는데, 박대통령이 1961년에 집권했을 때 김일성가 박대통령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식량 원조를 하겠다. 단, 조건이 있다. 당신들이 미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는 다면 우리는 식량을 지원해주겠다”라고 제안을 합니다. 얼마나 건방집니까. 그런데 그 당시엔 건방진 게 아니에요. 그 때 시멘트 생산량, 전력, 모든 부분에서 북한은 남한보다 10배 정도 앞서고 있었습니다, 10배 정도. 그런데 북한은 왜 망하고 우리는 왜 올라갔느냐. 북한은 60년대에 군사력 증강에 전력을 투입했어요. 그러니까 국력이 소모가 되는 것입니다. 70년대에 들어오니까 아 이래가지고는 곤란 하겠다 해서 경제를 일으키려고 하는데 이미 국가는 부도가 나고 생산시설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해서 외국에서 빚을 많이 가져왔어요. 외채를 갚지도 못하고 해서, 완전히 부도가 나버렸습니다. 부도 국가가 되어 버렸어요. 1970년대에. 그러니까 군사력 건설을 먼저 하고 그 후에 경제력 건설을 하려고 하니까, 경제력 건설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5, 6살 먹은 애를 아버지가 욕심이 과해서 권투선수로 챔피언으로 시킨답시고 6살, 8살 먹은 애를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애가 안 자라버리죠. 그것보다는 15살까지는 잘 먹고 잘 키워서 한 15살 때부터 집중적으로 권투를 시키면 그 사람이 챔피언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바로 그랬죠. 1960년대에는 경제성장, 1970년대는 중화학 공업 건설과 동시에 자주 국방 건설을 했습니다. 그러나 자주 국방 건설도 낭비가 돼서는 안 된다. 그래서 창원처럼 민수와 군수를 같이 섞는 아주 좋은 콤비네이션을 만들어서 슬기롭게 진행하다 보니 어느덧 우리의 덩치가 막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970년대부터 무기도 만들고 하면서 1970년대부터 남․북한의 국력이 역전이 되어버렸죠. 역전되어 버렸습니다. 1980년대에 와서는 우리가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니까 북한에서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김현희를 보내 저 중동에서 3년 만에 돌아오는 노동자가 탄 KAL 858편을 폭파시켜가지고 115명이 죽게 만드는 짓도 했습니다. 또 자기들도 뭘 만들어야 되니까 1989년에는 평양축전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세계 청년 축전을 주최한다고 50억 달러를 때려 넣었습니다. 모두 낭비성으로 가 버렸죠. 항상 사람이 마음을 악하게 먹으면 망할 짓을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다가 1989년부터 동구 공산권이 무너지니까 뒤에 받치고 있던 것이 없어졌고, 그렇게 되니까 ‘아이고, 우리 생존이라도 해야 되겠다’ 해서 핵개발을 하게 됐죠. 그러니까 식량이 부족해져서 사람들은 굶어 죽게 됐습니다. 우리의 성공은 국가대전략으로 박대통령이 선 경제건설, 후 군사건설을 선택했기 때문에 성공을 했습니다.

박대통령, 이 분은 참 희한한 사람입니다. 돈을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청렴결백하죠. 그러나 이 사람은 한국 사람들을 가장 돈을 많이 벌게 만든 사람입니다. 돈에는 무관심한 사람인데, 경제는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경제의 무서움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경제만 커지면 군사문제도 해결이 되고 민주주의 문제도 저절로 해결이 된다. 배가 부르면 사람은 자유를 갈구하게 된다, 민주주의에 반대하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의 민주주의는 그 껍데기다, 우선 부자가 돼야할 게 아니냐, 빵이 먼저다, 그래서 욕을 하든 말든 나는 경제를 먼저 발전시킨다, 민주주의는 나 다음에 하라, 하는 이런 자세로 국가를 경영을 했는데 그것이 정확하게 들어맞았습니다. 이제 세계에서 어느 누구도 민주주의를 먼저 하고 경제발전을 하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 식으로 해서 성공한 나라는 한 나라도 없습니다. 실패한 나라는 많죠.

필리핀 같은 나라는 실패했죠. 1950년대, 60년대부터 민주주의 잘 했어요. 우리보다 잘 했습니다. 지금의 파키스탄, 1인당 국민 소득이 300달러, 400달러도 안 되는 저 위험한, 실패한 국가 파키스탄도 민주주의는 잘 했어요. 우리보다 훨씬 잘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민주주의거든요. 가난한 사람이 민주주의를 하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민주주의에는 비용이 들어가요. 민주주의는 반드시 돈이 듭니다. 또 민주주의를 하면 경제발전이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성공한 케이스가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폴 등의 경우인데 가장 모범 케이스가 한국이죠, 한국. 그래서 중국이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할 때 한국을 참고삼아 이용을 한 것입니다. 즉, 권력을 아주 튼튼하게 안정시켜서 장악을 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안보를 튼튼히 한 다음에 경제는 개방적으로 한다. 수출 쪽으로 하는 이런 전략이죠, 지금 중국의 전략이. 중국의 전략이 크게 보면 박정희 전략하고 틀린 게 아니죠.

1인당 국민 소득이 3000~4000달러를 넘어가면 그 때 이제 민주화를 하게 됩니다. 그때 민주화를 하면 성공해요. 1987년의 민주화는 성공했는데, 왜 1961년의 민주화는 실패했느냐. 그것은 1961년의 한국은 가난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고, 1987년의 한국은 부자였기 때문에 때문입니다. 부자라는 것이 뭡니까? 잃을 것이 많죠. 대통령도 잃을 것이 있고 남대문 상인도 잃을 것이 있으니까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혁명을 바라지 않아요. 그러면 말로 하는 수밖에 없죠. 선거를 하는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해서 1987년에 군인들과 민주화 세력이 타협을 하는 식으로 해서 6․29선언이 나오고 그 해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이 됐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상당한 민주화를 하고. 그 후에 김영삼-김대중-노무현까지 이어지게 됐죠.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20년 동안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고 있습니다. 20년 동안, 얼마나 기적적인 일입니까.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는 60년 밖에 되지 않는데 이 정도 수준에 이르렀다.

영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몇 년이에요? 마그나 카르타가 1215년이죠? 계산하면 영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800년입니다. 가장 나이 어린 민주주의라고 해도 모두 200년짜리는 돼요. 그런데 우리는 60년짜리입니다. 그런데도 이 정도 수준에 와있다는 것이죠. 왜 이렇게 성공을 했느냐 되돌아보면, 첫째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의 간판을 내 걸었다. 자유민주주의 제도, 헌법. 비록 처음에는 그게 부실했지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경제의 뒷받침이 이루어지니까 지금 잘 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되고 있다. 그 다음에 우리 국민들이 워낙 뛰어난 사람들이라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미국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꼽을 수 있죠. 한미동맹을 만들어 낸 이승만 대통령의 도움. 미국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이 남침하지 못했다. 또 해외로 나갈 때, 냉전시대 때 미국이 나갈 수 있는 데는 다 한국도 나갈 수 있었다. 미국이 동생처럼 한국을 잘 보호해 줬다. 과학 기술도 많이 도와줬다. 물건 만들면 많이 사줬다, 이거죠. 핵문제가 일어나면 한국 대신 미국이 앞장서서 해결해주기도 하고 그 다음에는 역시 이승만, 박정희라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다. 이 네 가지입니다. 네 개 요소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정도의 나라로 만들어 준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박대통령의 성공은 박대통령만의 성공이 아니고 전 단계와 후 단계가 다 있습니다. 박정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급인력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직도 취직 못한 사람들. 얼마나 똑똑했겠습니까. 또 이 사람들이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고 싶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한테 일자리를 주니까 막 날아다니죠. 불철주야로 일을 하죠. 해외에 나가면 영어를 못하더라도 날고 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960년대에. 그 인력을 누가 만들었느냐.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 때도 국민들은 전쟁을 하지만, 대학교만 다니면 징집을 면제해 주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살아남아서 열심히 일하라고. 또 이승만 시절에 학교가 얼마나 늘었습니까? 지방에 가 보면-저도 청송이 고향인데-경북 청송에 가보면 그 때 중학교 같은 학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개교 55주년, 이런 학교가 많아요. 거의 다 1950년대에 만들어진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학교를 만든 사람이에요. 군대도 만든 사람이지만, 학교를 만들었어요. 교육혁명이죠. 또 토지개혁도 했잖습니까?

이러다 보니까 박정희가 성공한 기반은 이승만 대통령이 닦았어요. 한미동맹까지. 그러니까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가 가능했고 볼 수 있죠. 또, 박정희가 죽고 나서 나라가 엉망이 되어버렸으면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을 텐데 전두환 대통령이 1980년대에 그 사후관리를 아주 잘 했습니다. 오히려 1980년대의 우리 경제 성장률이 1970년대보다도 높고, 1960년대보다도 높아요. 1980년대 10년 동안 우리 경제 성장률은 10.1%로, 세계 1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경제 성장률이 지금처럼 4%대에, 학생들이 실업자가 되어버렸다면 이렇게 되면 민주화가 되겠습니까? 민주화 하려고 데모하면 사람들이 욕하고 그러면 군대가 또 한 번 나왔을 수도 있는데, 경제가 잘 되었기 때문에 1987년의 민주화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앞사람과 뒷사람을 잘 만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남․북한을 비교를 해 보면 지도자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딱 두 사람이 있었고, 남한은 지도자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바뀔 때마다 남한에서 혼란이 일어났죠? 대통령이 총을 맞아 죽기도 하고, 학생 시위로 위대한 건국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서 외국에서 죽어가지고 시체로 돌아오기도 했죠. 그러나 국민들은 그만큼 잘 살게 되었습니다. 즉 북한은지도자 한 사람만 행복하고 나머지 인민들은 다 불행하게 되었는데, 남한은 거꾸로 지도자는 불행했지만 국민들은 행복하게 됐다는 말이죠. 오늘날 남․북한의 차이는 요약하면 이승만, 박정희 대 김일성, 김정일의 차이다, 이렇습니다.

왜 이렇냐? 이승만, 박정희는 모두 배운 사람들이고 머리도 좋고 마음이 좋은 사람이다. 해외 물을, 바깥 물을 먹은 사람입니다. 즉 이승만, 박정희는 해외 개방파이고 김일성, 김정일은 국내 폐쇄파입니다. 이승만은 친미 유학파를 주체 세력으로 삼아서 건국을 했고, 김일성은 항일 게릴라들을 주체 세력으로 삼아서 소련의 꼭두각시가 되어가지고 정권을 수립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싸워서 건국을 했어요. 박정희는 정규 육사교육을 받아서 조직 경영에 정통한 사람인데, 김일성은 게릴라 전법으로 비정규적인, 즉 규칙이 없는 전투에는 정통한데 제대로 나라를 이끄는 데는 무능한 사람이다. 이승만, 박정희는 최고급 정규 교육을 받았고, 김일성, 김정일은 그런 교육 경험이 없다. 무식과 유식의 대결이었다. 이승만, 박정희는 미국과 일본을 친구로 삼았고, 김일성, 김정일은 소련과 중공을 친구로 삼았다. 어떤 나라든지, 개인이든지 친구를 어떤 사람을 두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 운명이 달라지죠. 미국과 일본이라는,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나라와 한국이 친구가 되었다 이거죠. 그런데 북한은 세계에서 제일 엉터리 살인집단이 경영을 하던 소련, 중국과 친구가 되었으니까 뭘 배우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남․북한은 운명이 달라졌습니다.

이 분이 1963년, 그러니까 44년 전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의 제일 뒤 문장을 보니까, 이 분이 어떤 사람이다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게 하는 맨 뒷문장이 있었습니다. 맨 뒤입니다. ‘나의 갈 길’ 이렇게 되어있어요. 뭐라고 써놓았느냐.「경상북도 선산군, 이 곳이 본인이 태어난 곳이다. 20여 년간의 군대생활, 그리고 소년 시절에도 본인은 자립에 가까운 생활을 배워왔다. 그만큼 가난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인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환경이 본인으로 하여금 깨우쳐 준 바 많았고, 결의를 굳게 하여주기도 하였다. 이같이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은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24시간은 스승, 은인과 관련 있는 일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동시에 이것은 본인의 생리인 것이다. 본인이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사회를 증오하는 소이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본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본인이 직접 쓴 만큼, 박 대통령이라는 사람을 잘 드러내는 문장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 분은 자기 스스로 평을 했다시피 소박한 사람입니다. 행동에서도 그렇고 옷차림에서도 그렇고, 사치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죠. 또 이 사람이 가장 싫어했던 것이 특권의식입니다. 박정희란 사람은 참 재밌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대통령이 안 되었으면 아마 민주투사가 되었을 거 같아요. 이 사람은 반골적인 사람입니다. 돈이 있다고 해서, 권력이 있다고 해서 뻐기는 것을 못 보는 사람이에요. 반골정신이 투철한 사람은 대충 좌파로 가게 돼있습니다. 이 분도 좌파로 가긴 갔죠. 그러다가 죽을 고비를 겪고 나서 다시 우파로 돌아와서도 마음 속에는 좌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 사람은 그것을 노무현 대통령처럼 이상한 식으로 표출시키지 않고 그것을 나라를 발전시켜서 가난을 없애는 쪽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좌파적 에너지, 반골 정신을 가지고 거대한 에너지를 만들었습니다. 한을 풀자. 가난의 한을 풀자. 그러기 위해서는 부자를 뜯어 놓는 게 아니라 부자는 더 부자로 만들고,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야 가난한 사람도 부자가 되는 거 아니냐. 노무현 식으로 부자를 더 내려 앉혀야 가난한 사람이 더 부자가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실제 정책을 해보니까 가난한 사람도 더 내려 앉히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나 박대통령은 그 특권의식과 부자에 대한 반감을 바로 생산적 에너지로 만들어내서 자기 혼자만 열심히 뛴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관료 조직 그리고 일반 서민들까지 ‘잘 살아보세’ 하는 정신으로 정신없이 일을 하도록 만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참 조용한 사람, 말이 없는 사람, 수줍은 사람, 부끄럼타는 사람, 인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 격변기 속에서, 우리 2000년의 역사상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천지개벽의 60년 중 18년 동안 최소의 희생으로서 최대의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박정희로 해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몇 되지 않습니다. 이 정도의 변화를 북한에서 이뤄낸다면 어땠겠습니까? 말을 만든다면 북한은 그 동안 700만 명이 죽어도 아직도 그런 근대화를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터키 같은 곳에서는 근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그것도 이민족들 몇 백만 명을 죽였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이가 한 4000만 명을 죽이고 나서야 정신차려가지고 좀 뭘 해 보려고 했죠. 박정희 시절에 박정희가 명령해가지고 야당당수를 죽인 적이 있습니까? 사상범 같은 사람들이 사형된 것을 빼면 최소의 희생으로서 최대의 발전을 이룩했다고 봅니다. 따라서 박정희를 인권 탄압자로 본다던지, 독재자로 매도하는 것은 사실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 역사상 인간의 인권을 가장 크게 향상시킨 사람을 들으라면 저는 이승만, 박정희 두 사람을 듭니다.

이것으로 저의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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