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황우석 파동’이냐 ‘김대업 2탄’이냐

금융회사 출신의 BBK 의혹 요점 정리 및 해설.

본인은 2000년도 초에 BBK, Lke, eBank-Korea 와 유사한 금융회사에 몸을 담은 적이 있다. IMF 이후 이런 유기적인 형태의 신형 금융회사가 많이 생길 때였다. 특히 주식과 관련하여 동일한 자본금으로 상호간 펀드(자금)를 모집하고 굴리려면 3-4개의 유기적 금융회사가 하나의 그룹형태로 조직되고 움직여졌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좌파정권종식’이란 시대적 역사의식으로 BBK 문제를 파악하고자 한다. 본인은 누구보다도 한나라당을 사랑하고 지원했던 사람으로서 그 열정은 지금도 진행 중임을 밝힌다.

이 후보가 ‘거짓말’을 한다고 의혹을 제기하는 측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곡동 땅을 판 돈이 ‘다스’로 들어간 뒤, 그 돈으로 다스가 ‘BBK'에 190억 원을 투자하게 되고, BBK로 들어간 ’다스 투자금’이 ‘LKe’의 자본금으로 전용된다. 다스를 통해서 들어온 도곡동 돈이 BBK와 LKe의 자본금으로 둔갑이 된 뒤 이 돈은 다시 김경준이가 해외에 설립한 역외펀드인 MAF(마프)와 AM Papas(에이엠 파파이스)라는 유령회사(종이회사)의 펀드(자금)로 해외로 빠져 나갔다가 다시 eBank Korea(이벵크증권중개)라는 국내회사로 들어온다. 이 회사에 李 후보, 형 이상은, 처남 김재정, 김경준, 에리카 김 등이 주주로 참여한다. 지하에 있던 도곡동 땅 판 돈이 여러 투자자금과 함께 해외를 경유하면서 자연스럽게 ‘돈 세탁’이 되어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을 때는 해외 투자금이란 합법적인 외투를 입고 李 후보가 주주로 있는 모든 회사의 자본금으로 변신한다.>

지금 문제가 된 ‘옵셔널벤처스’의 주가조작에 주도적으로 이용된 돈과 계좌가 바로 BBK의 것이다. 때문에 만약 BBK에 李 후보가 ‘이면계약의 형태’로 회사 운영과 수익에 참여하였다면 李 후보는 ‘옵셔널벤처스의 주가조작’, ‘횡령’,‘돈 세탁’, ‘재산 은닉’, ‘탈세’ 등 지금 김경준이가 혐의를 받고 있는 모든 범죄에 공동 책임자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李 후보는 초지 일관 BBK와 무관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복잡한 것 같지만 李후보와 김경준의 그때 그때의 시대적 처지를 상상해보면 의외로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물론 검찰수사가 확인하기 전이므로 어디까지나 私見이다.

李후보와 에리카 김의 만남

李 후보가 에리카 김을 만난 것은 1994년 당시 신한국당 전국구 의원으로써 LA의 한 교회에서 신앙간증 차 방미했을 때이다. 이듬해 1995년 11월에 李후보는 서울에서 에리카 김의 자서전 ‘나는 언제나 한국인’의 출판기념회에서 케이크 커팅을 함께 한다.

1996년 李후보가 15대 총선에서 당선된다. 그러나 李 후보의 비서관이었던 김유찬씨는 1996년 9월 李 후보의 선거법 위반 혐의를 폭로, 두 사람의 ‘각별한 관계’가 불과 1년 4개월 만에 ‘악연’으로 변질된다. 김씨는 이명박 의원이 15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6억원대의 불법 선거자금을 썼다고 주장하여 재판을 받게 된다. 이명박 후보는 재판을 받는 와중에 스스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98년 MB, 선거법 위반과 사퇴

1997년 11월21일은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맞아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날이다.

1998년 3월, 이 후보는 선거법 위반 혐의가 인정돼 주성영 검사(현 한나라당 의원)에 의해 징역 2년 6개월을 구형받았으며, 게다가 재판 진행 과정에서 김 씨를 해외로 도피시킨 혐의로 서울고등법원에서 벌금 400만원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던 이명박 후보는 고등법원의 판결에 대해 “법적 판결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판결로 보아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1998년 11월 의원직을 상실한 李 후보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객원연구원으로 공부하던 중에 LA를 방문했고, 이때 한 파티에서 에리카 김을 만난다. 당시 김경준은 「환은 살로먼 스미스 바니 증권」의 서울 지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그때까지 국내에 도입되지 않았던 신생 금융기법을 활용하는 펀드매니저로 통했다.

IMF 위기와 MB의 재기

1999년-2002년 당시 한국은 IMF 환란으로 전 국민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 원인이 뒤떨어진 금융시스템이라 선진기법을 빨리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 시대적 문제의식이었고, 동시에 DJ정부는 정보통신육성과 벤처산업을 국가 아젠다로 정하여 IT분야에 엄청난 지원을 하였다. 또한 코스닥 열풍에 너도나도 주식투자를 할 때였다.

당시 李후보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사업은 ‘인터넷상에서 이루어지는 증권중개(eBank Korea)’사업이었는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금융상품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BBK 회사와 ‘자산관리회사’인 LKe 회사 그리고 域外펀드로서 국내외 돈이 합법적으로 자유로이 올 갈 수 있는 해외 유령회사(페이퍼 컴퍼니) 등이 유기적으로 뒷받침을 해주어야만 하였다.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이런 형태의 금융회사는 최첨단 사업으로 각광받을 때였다.

화려한 재기를 노리며 와신상담한 李후보와 국제 금융통이었던 김경준 두 사람의 만남은 환상 자체였다고 짐작된다. 그런데 문제는 종자 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였다.

BBK 미스테리의 시작 - 사라진 1구좌 보험금

1995년 6월 당시 신한국당 전국구 의원이었던 李 후보가 처남 김재정에게 팔았던 도곡동 땅이 포스코 건설에 263억에 팔린다. 매각대금 가운데 양도소득세 등을 제하고 남은 돈 ‘200억’이 같은 해 12월 만기5년 조건으로 ‘3개’ 생명보험회사에 맡겨진다.



세간에서 제기되는 ‘BBK에 투자된 돈이 도곡동 매각대금이기에 BBK가 李후보의 것이다’라는 의혹을 푸는 열쇠는 1995년 12월 3개의 생명보험회사에 묻어 두었다고 하는 도곡동 땅 매각대금 200억 원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 있다고 본다.

李후보측에 따르면 도곡동 매각대금은 95년 12월 29일 5년 만기 보험상품에 가입되어 있다가, 2000.12.29. 만기 출금하여 김재정, 이상은 명의로 분배되어 각각 그날 조흥, 신한은행 등 각자의 계좌로 입금된 이후 현재까지 증권투자 등에 사용되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BBK에 투자한 다스의 190억원 중 180억원은 2000.4.27.부터 12.28.까지 지출되었다. 이 행위가 도곡동 매각대금의 보험상품 滿期 출금 전에 이루어져 무관할 뿐 아니라 BBK 투자금은 전부 다스 계좌에서 출금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스는 BBK로 2000년 한 해에 3회의 계약에 의거하여 6차례 190억을 나누어 송금했다. 1차 투자일임계약(2000.3.28.), 송금일: 4월 27일 15억, 5월 22일 24억, 6월 8일 11억, 2차 투자일임계약(2000.10.06.), 송금일: 10월 10일 50억, 3차 투자일임계약(2000.12.28.), 송금일: 12월 28일 80억, 12월 30일 10 억씩 나누어 송금된다. 이상이 한나라당 홈피에 나타난 李후보측의 설명이다.

李후보는 다스가 BBK에 투자한 시점이 도곡동 매각대금이 5년 만기로 돌아온 2000년 12월 29일 이전이기에 절대적으로 독곡동 땅 판 돈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시점으로 보면 확실히 다른 돈이다. 그러나 지난 한나라당 경선 시 불거졌던 도곡 땅 의혹에 대해서 2007년 8월 13일 검찰이 발표한 수사 내용과 언론에서 발굴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행방불명된 돈에 대한 의문

2000년 12월 29일, 5년 만기가 된 처남 김재정씨 명의의 62억8800만원(원금 40억원)과 형 이상은씨의 94억6천만원(원금 60억원) 등 157억4800만원이 이상은씨 한 사람의 계좌로 들어왔다. 2000년 12월 29일에 이상은씨 계좌로 들어왔던 157억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2001년 6월에 이상은씨 계좌로 다시 147억이 입금된다. 단 10억의 차이가 날 뿐이다. 여기까지가 지난 한나라당 경선시 불거졌던 도곡땅 의혹에 대해서 2007년 8월 13일 검찰이 발표한 내용이다.

첫째, 95년도 3개의 보험회사에 묻어 둔 돈의 총 액수는 200억이었는데 5년 후 만기가 되어 돌아온 돈은, 2개의 상품에서 원리금 110억에 이자가 40 여억 원이 붙은 157억이다. 총 200여억원이었던 원금에 붙을 이자를 감안하면 150억원 정도가 부족하다. 나머지 돈은, 2000년 12월 29일 전에 해지를 한 것일까?

둘째, 李 후보는, 2000년 1월에 김경준을 만나 바로 한 달 후에 김씨와 20억짜리 자본금으로 LKe를 설립, 또 한 달 후에는 다스가 1차 투자일임계약서를 BBK와 체결하고 4월 27일에 BBK에 15억을 송금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다스의 자금 상황이 어떠했을까?

2000년 4월 25일 1차 투자금을 다스에서 넣기 이틀 전에 다스의 주택은행 주계좌를 보면 잔금이 63만원에 불과했다. 2000년 10월 10일에는 53억원의 어음을 할인해서 그날로 50억원을 BBK로 송금한다. 납품대금의 어음할인이라면, 회사의 순이익으로 투자한 것이 아니라 일단 제품 생산비와 인건비 등이 포함된 회사 운영비로 투자했다고 짐작되는데 그 뒤 50억 만큼의 투자금을 어떻게 충당했다는 것일까?

셋째, 당시 다스의 연간 수익은 30억 안팎인데 그것의 6배인 190억원을 갓 만들어져 별다른 실적이 없었던 BBK에 자동차 부품납품 회사가 빚을 내어 自意로 주식 투자했다는 말인가?

지난 8월 검찰 발표에 의하면 이명박씨의 처남 김재정씨의 도곡동 땅 매각대금이 다스의 출자금으로 사용됐었다고 밝힌 점을 고려하면 이명박씨의 형 이상은씨의 도곡동 땅 매각금 일부도 다스에 투자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000년 12월 29일에 이상은씨 계좌로 들어왔던 5년 만기 157억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157억이 입금된 다음 날인 2000년 12월 30일에 다스는 마지막으로 BBK에 10억을 송금한다. 157억이 사라졌던 1년 반 뒤쯤 지나서 2001년 6월에 이상은씨 계좌로 147억이 입금된다.

다스, 난생 처음 본 김경준 50억 계약서 작성?

李 후보의 큰형 이상은씨와 처남 김재정씨가 대주주인 ㈜다스의 BBK 투자 경위에 대한 설명에서 李 후보는 지난 6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나중에 문제가 된 뒤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李 후보는 2003년 4월 다스가 김경준씨를 상대로 낸 민사소송의 진술서에서 “다스가 자금운용에 대해 내게 자문을 청해 와, 평소 잘 아는 금융인(김백준)을 다스에 소개했다”고 밝혔다. 김백준씨는 BBK의 부회장이었고, 지금은 이 후보의 법정 대리인으로서 김경준과 소송 중에 있다.

김경준은 다스가 BBK에 투자한 190억의 계약과정을 설명하면서 “난생 처음 보는 젊은이가 50억 투자를 권한다면 20분 만에 도장을 찍겠나”라고 반문한다. 그는 1차 투자일임계약서 날짜가 2000년 3월 28일로 적혀 있는 한국어와 영어로 된 계약서를 가지고 다스를 처음 찾아갔었고 당일 도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속전속결.

BBK, 2001년 4월 28일에 허가 취소

李후보측은 2001년 4월 18일을 기점으로 LKe의 대표이사직에서 사퇴하면서 김경준과 결별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4월 18일 이후 BBK가 28일 허가취소될 때까지 BBK-LKE 간에 35회, 288억원의 자금거래가 있었다고 다스가 미국 법원에 소송한 소명 자료에 나타나고 있다. BBK 문을 닫기 하루 전인 4월 27일 김경준이 옵셔널벤처스의 대표이사로 취임한다. 옵셔널벤처스에서 김경준이 횡령했다는 384억 중 45억과 54억은 김경준이 2001년 12월 20일 미국으로 도주하기 전에 이명박씨가 최대주주인 LKe로 입금된 사실이 있다. 근데 LKe는 지금도 존속하고 있으며 李후보가 여전히 52%의 주식을 보유한 최대주주이며 대표이사로는 자신을 대신하여 김경준과 소송을 벌이고 있는 김백준 전 서울 메트로 감사이다.

다스는 김경준이가 미국으로 도망친 후 1년이 더 지난 2003년 5월에야 투자금 반환소송을 제기한다. 김백준씨는 2004년 2월에 소송을 제기한다. 왜 이렇게 늦게 했을까?

◎ 李후보가 2002년 7월에 서울시장으로 취임하는 시간적 배경에서 그 지연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2001년 11월 서울시장 선거준비가 한창 일 때 BBK에 50억을 투자했던 李후보 동문 회사 심텍이 李후보와 김경준을 ‘사기죄’로 고소를 하여 2001년 12월 7일 검찰이 김경준을 긴급체포하지만 심텍이 고소를 취하함으로써 무혐의로 석방된다. 그리고 12월 20일 김씨는 미국으로 도주하게 된다.

◎ 2002년 3월 서울 시장선거가 한창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옵셔널벤처스 소액투자자 채권단이 김경준을 고소함으로써 검찰이 수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돈을 떼인 사람은 옵셔널벤처스 투자자처럼 소액이더라도 신속하게 채권단을 구성하여 도주한 김경준을 바로 고소하는 것이 상식이다.

李후보측과 김경준측이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한 시점은 이때부터가 아닌가 추정된다. 서울시장 선거로 정치적 再起를 꿈꾸는 李후보로선 설사 김경준의 피해자라고 할찌라도 선거에의 영향을 고려한다면 이 문제가 크게 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다스와 李후보는 옵셔널벤처스와는 어떤 외형적인 법적 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김경준이 옵셔널벤처스의 경영자로 4월 27일에 취임하기 한달 전까지 LKe의 공동대표였다는 점, 그리고 BBK가 옵셔널벤쳐스를 인수하는 데 다스의 BBK 투자금 190억이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자칫하면 채권단으로부터의 소송에 휘말릴 수 가 있기에 어떤 형태로든 김경준과 무관하거나 피해자라는 주장을 법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지 않았겠는가 가정된다.

◎ 김경준이 한국 검찰의 범죄인 인도청구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소환되고 재산이 몰수될 경우 다스와 李후보 역시 피해자라는 것을 입증해야지만 자신들의 손실금을 일부라도 건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을까 가정해 본다.

◎ 김경준이 2001년 4월 27일 옵셔널벤처스를 인수한 이후 7월부터 도주 전인 12월 11일까지 22차례에 걸쳐 384억원을 송금하는데 이중 184억원이 심텍(50억), 다스(39억), 오리엔스(104억) 등 주로 李후보의 친인척이거나 고대 동문들인 BBK 투자 피해자들에게 송금하였다. 그밖에 검찰 서류에 의하면 이아무개(20억8천만원), 박아무개(8억4005만원), 이아무개(5억) 그리고 라라자, 프라임 등 외국계 회사로 추정되는 곳에도 수십억원이 송금되었다. 미국 소송 기록에는 BBK 투자자 수가 17명으로 적혀 있다. 김씨는 주식회사인 옵셔널벤처스의 돈을 빼내 회사와 무관한 BBK투자자들에게 BBK 폐업으로 인한 피해를 갚았으므로 이것은 명백한 ‘횡령’이다.

홍준표 의원은 '김씨가 설령 주가를 조작했다고 해도 무리하게 주가를 띄워 차익을 실현하는 '작전'은 없었기 때문에 김경준 사건의 본질은 '주가조작'이 아니라 '횡령'으로 봐야 한다'는 말한 바 있다.

김경준이 어차피 李후보와 2001년 4월 18일에 갈라섰고 BBK 역시 4월에 파산을 했는데 굳이 어렵게 주가를 조작하여 마련한 옵셔널벤처스 공금을 '횡령'하여 李후보측 피해자에게 끝까지 갚은 것이 김경준의 착한 심성인지 의리인지 도저히 상식으로 납득이 어렵다. 李후보측이 소송을 늦게 한 이유는 바로 이런 김경준의 의리나 됨됨이를 믿고 기다렸던 것이 아닌가라는 가정도 성립된다.

그러나 한나라당 공식 홈피의 ‘김경준의 예상진술과 모범답안 24개’에서는 위 4가지 가설과 조금도 근접될 수 없는 답안을 제시하고 있다. 다스가 소송을 도주 후 1년 3개월 늦게 한 이유를 “다스는 김경준이 도주한 것을 뒤늦게 알고 소재를 추적했지만 김경준이 이름까지 바꾸어 시간이 걸렸다”고 설명한다. 김경준이 007인가 ?

김경준을 잡아라

2005년 5월 미연방정부는 '김씨의 재산에는 사기와 횡령으로 만든 돈이 포함돼 있으니 이를 압류해달라'면서 연방지방법원에 김경준의 재산 압류 소송을 제기한다. 2007년 3월 연방법원은 ' 미국 연방정부, 다스, 옵셔널캐피탈(옵셔널벤처스 후신)의 주장과 달리 김씨가 사기를 쳤거나 횡령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 소송과정에서 일명 '김경준 자술서'가 제출된다. 김씨의 서명이 담긴 이 자술서에는 'BBK가 사실상 저의 영향력에 있는 100% 법인'이라고 적시되어 있다. 그러나 연방법원의 판결문에 의하면 “이 자술서는 진짜임을 증명하기 어려운 만큼 증거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적시되어 있다. 결국 김경준이가 소송에서 이겼다.

2004년 2월 김경준을 상대로 김백준씨가 李후보 대리인 자격으로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에 LKe의 자본금 35여억원을 횡령했다고 반환소송을 제기한다. 재미있는 현상은 3년 동안 무려 6번째 ‘소장 변경’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고소가 성립이 안 되어 아직도 링에 한 번도 올라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장이 변경되면서 청구액이 35억에서 180억원으로 달라졌다. 그 사이의 변호사 비용만 하더라도 몇 백만불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李후보는 이 비용을 어떤 식으로 충당하는지 궁금하다.

2004년 3년 5월 다스는 김경준을 대상으로 LA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한다. 다스는 ' BBK에 투자한 190억원은 자본금이 아니라 돈을 불려달라고 맡긴 투자자금'이라고 주장하면서 140억 가량의 반환소송을 낸다. 김경준은 법원에서 “BBK통장 기록엔 다스 돈이 투자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다스측이 제출한 ‘유해증거 배제신청’ 목록을 보면 요사이 제기된 ‘이면계약서’와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Ⅰ. 이명박이 실질적으로 BBK를 소유하고 운용했다는 증거를 김경준 쪽에서 제출하려고 하는데 이것의 증거 배제 Ⅱ. 김경준측의 ‘“다스가 이명박의 회사다“라는 증언의 증거채택 배제 등을 신청했다. 김경준이 이 두 가지를 집요하게 입증하려고 했다고 짐작된다. 2007년 8월20일 LA지방법원에서 김경준이가 이겼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 김씨가 다스의 경영진을 만나 투자를 유치할 때도 사기를 목적으로 했다고 볼 수 없으며 김씨가 BBK 자금을 운용한 거래도 불법적, 위법적 또는 사기성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밝혔다.

소송 과정에서 다스는 투자액 190억 가운데 2000년 12월 28일에 투자했다는 80억의 출처를 밝히는 자료를 끝내 제시하지 못했다.

MB, BBK 설립과 무관한가 ? - 열쇠, 이 후보가 김경준을 언제 만났느냐

한나라당 홈페이지 <그것이 알고 싶다, 김경준의 황당한 허위주장과 사건의 진실> 시리즈 中 ‘허위주장 6: BBK가 망한 것은 李후보의 정치행보 때문이므로 김경준은 피해자이다’편에서 “김경준의 황당한 주장 : 김경준은 잘 나가는 펀드 매니저였는데 李후보가 스카우트했다 VS 사건의 진실 : 김경준은 99년 2월 외국계증권사에서 해고된 후 BBK를 설립했다. 이 후보에게 김경준이 접근했다.'

11월 20일 김경준 부인 이보라씨는 기자회견에서 “ 김경준이 李후보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李 후보의 2000년 1월 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1999년도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라고 했다.

李후보는 미국 체류 중이던 1999년에 4-5차례 귀국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논란이 되는 99년 2~3월에는 27일(2월22일~3월20일)간 한국에 머물렀다. 김경준씨는 이 기간 서울프라자호텔에서 이명박 후보를 만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울프라자호텔은 이 후보가 국회의원·서울시장 시절 손님들과 식사 등의 목적으로 자주 이용했던 장소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후보는 홍준표 의원에게 '99년에 김경준을 만난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되고 있다.

李 후보측이 지금까지 초지 일관으로 BBk 설립과 무관함을 주장하고 있는 근거로 BBK가 설립되는 1999년 4월 27일에는 이 후보가 그해 12월에 귀국하였기에 국내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경준 역시 2000년 1월에 처음 만났기에 자신은 BBK 설립과 전혀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1주의 주식도 소유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종의 알리바이 주장이다.

한나라당은 에리카 김의 ‘3월 최초 만남설’를 반박하기 위해서 김경준이 2000년에 작성하였다는 메모와 편지(2000.2.9)를 공개하였다. 2000년 1월에 만난 두 사람이 약 한 달 뒤인 2000년 2월 18일에 자본금 20억 짜리 회사 LKe 를 만들었다. 홍준표 의원은 건설통과 금융통 선수들끼리 만났으니 한달 만에 20억 짜리 공동회사설립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식으로 설명하면서 “이명박과 김경준이 만난 시점이 중요하지 않다”고 강변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상식적으로 가정을 해보면 김과 李 후보의 주장중 어느 측이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 있게 들릴까?

김경준의 누님 에리카 김에 따르면 두 사람(이명박, 김경준)은 99년 3월에 만나 의기투합이 되어 한달 후인 4월에 자본금 5000만원 짜리 회사(BBK)를 만들고 6개월 후에 추가로 30억원의 유상증자를 한 셈이 된다.

李 후보측 주장에 따르면 2000년 1월에 노회한 사업의 달인인 李 후보가 젊은 사람을 한 두 번 보고, 한 달만에 20억 원을 LKe 설립에 투자했다는 이야기이다. 어느 쪽이 자연스러운가?


李후보는 1993년 3월 27일 당시 처음으로 신한국당 전국구로 정계 입문을 한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도곡동 땅을 처남 김재정 명의로 은닉한 사실이 재산공개신고에서 누락되었다는 ‘재산은닉 의혹’에 시달린다. 그 문제의 땅 ‘도곡동 실소유주 의혹’이 14년이 지난 지금 한나라당과 이명박 후보의 발목을 다시 잡고 있다.

만약 李후보와 한나라당의 주장이 ‘거짓말’로 밝혀질 경우 ‘제2의 황우석 파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날은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李후보 말을 믿고 따랐던 한국 보수층에게도 葬禮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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