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년 만에 태극기가 펄럭일 것인가

2008년 3월 평양에서 남북간 월드컵 예선전이 벌어진다. FIFA의 규정대로라면 애국가를 연주하고 태극기가 게양돼야 한다.
1990년 10월 23일 잠실 올림픽 스타디움. 전반전 종료 휘슬이 울리자 관중석의 분위기가 묘하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우리가 손님 대접을 너무 못하는 것 아냐. 저 사람들이 우리한테 섭섭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어쩌면 속으로 우리를 얕볼지도 모르지.

남·북 축구 국가대표팀이 사상 최초로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벌인 역사적인 이벤트인 ‘남북통일 축구대회’. 관중들의 머릿속엔 10월 11일 평양 능라도 경기장에서 벌어진 1차전의 영상이 남아있었다. 경기 시작 네 시간 전부터 스탠드를 가득 메운, 무려 15만에 달하는 관중이 ‘응원일꾼’들의 지시에 따라 미리 나눠준 나무딱딱이를 두드리며 일사불란하게 고함을 지르던 광경 말이다.

‘대~한민국’을 외치는 붉은 악마 응원단이 출현하려면 아직도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했던 시절. 잠실벌의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시킨 건 한 사람의 천재였다. 무선마이크를 들고 경기장 한가운데로 나간 사나이는 “북쪽에서 오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얼굴 못생긴 것 하나로 먹고 사는 희극인입니다”라고 말문을 텄다. 그리고 “전반전 응원이 부실해서 놀라셨지요. 연습을 한 번도 못해서 그렇습니다”라고 뒤를 달았다. 폭소가 터지면서 관중들의 마음이 봄날처럼 풀어졌다.

고(故) 이주일 선생은 “2층은 제일 싼 3등석, 1층 골대 뒤는 그 다음으로 싼 2등석, 1층 한가운데는 특별석입니다. 그 위는 특특별석입니다. 자, 특특별석에 앉아계신 분들부터 먼저 일어나서 응원해 봅시다. 물결!”이라고 외쳤다. 물결은 스타디움을 다섯 바퀴나 돌고 또 돌았다. 물결이 일렁이는 곳마다 함성이 울리고 개중에는 눈물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제동원과 사전연습 없이 오직 자발적 참여에 의해 이뤄진 거대한 함성. 그것은 내 생애 가장 감동적인 파도타기 응원이었다.

2005년 8월 14일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남북이 다시 만났다. 타이틀은 광복 60주년 남북 통일축구. 1990년과는 달리, 여론이 흉흉했다. 8월 17일 한국은 서울에서 사우디와, 북한은 13시간을 날아가 바레인과 월드컵 예선 마지막 경기를 치러야 하는데, 일정 자체를 끼워맞춰 선수들에게 무리를 강요했다는 지적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문제는 6만5000석의 입장권을 특정 시민단체와 대한축구협회를 통해서만 배포했다는 사실이다.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민족대축전 공동준비위원회’라는 긴 이름을 가진 주최측은 비난여론이 일자 뒤늦게 3등석 7000장을 인터넷을 통해 나눠주었다. (문제가 커지자 대한축구협회는 협회 몫으로 배정된 1만장 중 7000장을 경기 당일 장당 2000원에 추가로 판매하며 급한 불을 껐다.) 주최측은 특정 시민단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도 민족 구성원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족과 그들이 알고 있는 민족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북한 집권층 또는 남쪽 특정 시민단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민족의 일원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지, 지금이라도 그 방법을 알려주기 바란다.

이것만이 아니다. 이 행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태가 거듭 벌어졌다. 경기 전날 주최측이 “행사 참석인원 5000명이 연세대에서 먹고 자기로 했으니 그렇게 알라”고 대학 측에 일방통보, 사회 곳곳에서 잡음과 혼돈과 충돌을 양산한 것이 그 하나다. 다음으로, 경기장 안팎에서 태극기를 둘러싸고 적지 않은 실랑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최측은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려는 관중들을 일일이 제지했다. 보다못한 우익단체 회원들이 경기장 밖에서 태극기를 나눠주자 물리력을 동원해 백발이 성성한 노병들을 강제해산시키기도 했다. 해산 과정에서 수천 장의 태극기가 찢겨나갔고, 깃발은 조각조각으로 갈라져 넝마처럼 바닥에 뒹굴었다.

경기장 안에서도 문제는 이어졌다.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을 외치지 말라는 안내방송이 이어졌다. 모두가 북한 대표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한마디로 말해, 김정일의 눈치를 보고, 이 폭군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하기야 이 주최측이라는 사람들은 14일 오후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당국대표단 행사에서 북한 측 단장이 “경애하는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평양을 방문한 정동영 특사를 친히 만나주시고 모든 현안문제들을 대범하게 풀어주시어 온 겨레에게 제2의 6·15의 기쁨을 가져다주시었다”고 말하는데도, 즉 김정일에게 극존칭을 쓰며 대한민국 전체가 김정일보다 격이 낮다고 대놓고 발언하는데도 항의 한 마디 없이 열렬히 박수를 보냈던 위인들이니, 북측의 요청이 없는데도 먼저 나서서 태극기를 찢고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 말라고 국민들을 윽박지른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하나 생겼다. 2010년 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 예선에서 한국과 북한이 한 조에 편성된 것이다. 사전에 발표된 일정표에 따르면 2008년 3월에는 평양에서, 10월에는 서울에서 경기가 열린다. 1990년, 94년 월드컵 예선에서 이미 두 번이나 승부를 겨뤘으니 월드컵 예선 남북 대결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태극기다. FIFA는 98년 월드컵부터 “모든 지역 예선은 홈 앤드 어웨이로 열려야 한다”는 강제규정을 신설하고, 상대국의 국기를 게양하고 국가를 연주하지 않으면 해당 경기를 정식 국가대항전으로 공인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다. 일부 국가가 종교적 혹은 정치적 신념 때문에 축구장에서 상대 국가를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90년 평양-서울 교환방문 경기 당시 남북은 상의의 국기를 모두 떼어낸 채 경기를 치렀다. 앞서 언급한 2005년 8월에 상암경기장에서 열린 통일 축구도 국기-국가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공식기록 상 국가대표팀 간 경기로 집계하지 않는다. 남쪽에서야 이런저런 자리에서 인공기를 게양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북한에서는 태극기의 게양은 고사하고 소지 자체가 사형으로 다스려지는 중범죄다. 이번 3월 평양에서 열리는 월드컵 예선은 따라서 6.25 이후 57년 만에 북한 군중 앞에서 애국가가 연주되고 태극기가 휘날린다는 역사성을 지니는 뜻깊은 이벤트다. 2005년 8월 태극기의 게양을 막고 대-한민국의 연호를 금지했던 집단은 FIFA의 규정앞에서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없을 터이다. “축구가 생기기 전 모든 깃발은 헝겊에 지나지 않았다. 축구가 생기고나서 모든 헝겊은 깃발이 되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북한 당국이 ‘평양의 일반 시민들 앞에서 힘차게 펄럭이는 태극기’라는 상황을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을는지, “대-한민국”을 목청껏 외치는 붉은악마 응원단을 몇 명이나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또 다른 경기 외적 관심사다. 그 이전 경기에서 고의로 난동을 부려 홈경기 개최권을 박탈당하거나-이 경우 북한의 홈경기는 북한이 요청한 복수의 제3국 후보지 중 FIFA가 승인한 곳에서 열린다-극단적으로 예선 자체를 보이콧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선전선동에 능한 북한당국은 누구 못지않게 깃발이 지닌 상징과 파괴력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태극기만큼 두려운 물건은 없을 터이다. 애국가만큼 무서운 노래는 없을 터이다. 대-한민국을 외치며 마음껏 애국심을 발산하는 우리 응원단의 자유로운 모습만큼 두렵고 무서운 것은 다시없을 터이다.

사족: 2005년 행사를 주관한 인물은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다. 다음 기사는, 정 장관이 두 어 해 뒤에 벌어질 일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지난 14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통일축구대회에 이명박 서울시장이 초청 받지 못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를 두고 서울시가 관리·운영하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행사에 해당 기관장인 서울시장이 초청조차 받지 못한 것은 의전 관행상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서울시 고위 관계자는 16일 “서울시에서 관리하는 장소에서 행사를 하면서 정작 이명박 시장은 부르지 않았다. 이는 관례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장소를 빌려주고 행사 진행에 협조한 서울시 입장에서는 매우 언짢은 모양새가 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행사 주최측에서는 의전상의 실수였다고 하지만, 남북 관계에서 의도적으로 이 시장을 제외하는 일종의 ‘이명박 죽이기’ 아니겠냐”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8.15 민족대축전 공동준비위 이재규 부대변인은 “전혀 들은 바 없다. 서울시에서 하는 행사면 다 이명박 시장을 초청해야 하나”라고 17일 밝혔다.…지난 14일 축구경기에는 8.15 민족대축전 남측 대표단장인 정동영 통일부장관을 비롯, 백낙청 남측준비위원회 위원장,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열린우리당 배기선 의원, 유홍준 문화재청장 등이 참석했다.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의 관리, 운영 및 사용허가 등은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에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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