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의 검찰수사 규탄 촛불집회
퇴근길이었습니다. 어제 저녁 정동영이 연설하던 동화면세점빌딩 앞에서 오늘은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20여 년 전 대학 시절 정말 수없이 많이 들었던 노래, 바로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오늘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님을 위한 행진곡」은 약간 느릿한 곡조로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노찾사 버전이었습니다.
그 노래소리를 듣는 순간, 오늘 저녁 6시부터 그 자리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의 ‘BBK사건 검찰수사 규탄 촛불문화제’가 열린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오늘은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어 노래 소리가 울려퍼지는 동화면세점 빌딩 앞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당원티가 덜 나는 것 같았습니다. 정동영 캠프의 주황색 점퍼를 입은 사람들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스크린에서는 단상 위에 누가 엎드려서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정동영인 줄 알았습니다. ‘정동영이 바닥에 머리를 짓찧으면서 국민들에게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던 거죠.
그런데 단상에서 짙은 먹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가만히 보니 누군가가 머리카락을 풀어 먹물을 묻힌 후 흰 종이 위에 글씨를 쓰고 있는 것이더군요. 아마 ‘진실승리’라는 글씨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 뒤로는 김근태, 정대철 등 열린우리당, 아니 대통합민주신당 지도부가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모두들 시체처럼 굳은 표정들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스피커에서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쾅쾅 울려대고 있었습니다.
어이가 없더군요. 머리카락을 풀어 붓글씨를 쓰는 퍼포먼스라니....
그런 '생쑈'에 감동 받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단상 위에 선 면면들은 또 어떻습니까?
열우당 의장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김근태는 노무현 정권의 실패에 공동책임을 져야 할 인간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교조주의적 운동권’의 전형이기도 합니다. 정대철은 정치자금, 뇌물 수수 등으로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이었습니다.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깨끗하지도 않은 자들이 ‘진실’과 ‘정의’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것 자체가 코미디였습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수구좌파’임을 자인
그보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도대체 지금이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님을 위한 행진곡」이란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저들로서는 과거 이른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추억’을 어떻게 해서든 되살려 자기들의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그러는 것이겠죠.
그러나 오늘 저녁 울려 퍼지는 「님을 위한 행진곡」은 저들이 얼마나 시대의 흐름과 요구에서 뒤떨어져 있는 자들인가를 웅변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1987년 6월 사태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 지 20년,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이었던 YS가 대통령이 되어 ‘문민정부’ 수립을 선언한 지 15년, DJ가 대통령이 되어 구(舊)야당이 정권을 잡은 지 10년, ‘82학번 386’을 자처하는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지 5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과거 '민주투사'들의 무능과 오만에 질릴대로 질린 국민들이 '저 인간들로는 안 되겠다'며 정권교체를 외치고 있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제 ‘1987년 체제’를 넘어서자”는 논의가 확산되어 가는 시대에 「님을 위한 행진곡」이라니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전략 하나만 가지고 나와 거기에 올인하다가, 그게 안 되니까 ‘민주화 투쟁의 추억’을 되살리려 안간힘을 쓰는 저들을 보며 문득 ‘수구좌파(守舊左派)’라는 말이 떠오르더군요. 그야말로 저들에게 딱 맞는 말 아닙니까?
‘수구좌파’를 ‘역사의 무덤’으로 보내는 장송곡
솔직히 ‘저들이 생각이 있는 자들인가, 없는 자들인가’하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그 ‘잘 나고 깨끗한’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이 ‘의혹투성이’(?)인 이명박 후보는 물론, ‘차떼기의 주역’ 이회창 후보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국민들이 청와대에서 회식 후에 불끈 쥔 주먹을 내지르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대던 그 인간들은 이제 꼴도 보기 싫어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광화문 네 거리에서 들으라는 듯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꽝꽝 울려댔으니...
아마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시절 제법 돌 던지고 화염병 던지며 투쟁을 벌였지만, 지금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터를 오고가는 이들이 오늘 울려 퍼지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들었다면,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기보다는 혀부터 끌끌 차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들이 생각이 있는 자들이라면 ‘BBK’가 ‘헛방’으로 끝났으면, 재빨리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롭고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제시했어야 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들은 국민들에게 ‘미래의 꿈'을 보여주기보다는 ‘과거의 망령'을 불러내는 쪽을 택했습니다. 더욱이 국민들이 지극히 혐오하는 망령을 말입니다.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 없이 ‘BBK’라는 ‘헛방’에만 매달려 용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들의 ‘무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퇴행적이고 무능한 자들이 무려 10년 동안이나 내 조국을 능욕해 왔다는 사실에 화가 났습니다.
오늘 저녁 광화문에 느릿느릿하면서 장중하게 울려 퍼진 「님을 위한 행진곡」은 저들이 ‘미래’세력이 아닌 ‘과거’세력, ‘진보’세력이 아닌 ‘퇴행’세력, ‘통합’세력이 아닌 ‘갈등’세력임을 자인하는 선언이었습니다. 저들 ‘수구좌파’세력을 ‘역사의 무덤’으로 보내는 장송곡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