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61)씨가 베토벤 소나타 全曲 연주의 대장정에 올랐다. 그는 오는 14일까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을 단 하루의 휴식 없이 8회에 걸쳐 연주한다.
‘이 세대의 가장 탁월한 피아니스트의 한 사람’, 특히 라벨과 리스트 등의 뛰어난 해석가로 평가 받아왔던 그는 세계적인 음반사 데카(Decca)와 함께 2005년부터 3여 년에 걸쳐 진행해왔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全曲 앨범 녹음 작업을 마쳤다. 한 피아니스트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녹음한다는 것은 엄청난 프로젝트일 뿐만 아니라, 데카의 입장에서도 이 작업은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와의 작업 이후 30년 만의 큰 일이다. 앨범 작업 時 8일간에 대장정의 연주를 끝낸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백건우 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열 살 때 국립교향악단과 그리그 피아노협주곡을 협연하는 것으로 첫 무대를 가졌다. 열다섯 살 때 뉴욕으로 이주한 후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로지나 레빈을, 런던에서 일로나 카보스를, 이탈리아에서 귀도 이고스티, 빌헬름 켐프를 스승으로 삼았다. 뉴욕 데뷔 무대로 링컨 센터에서 모리스 라벨의 피아노 작품 전곡을 연주했으며, 카네기홀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 무대를 가지면서 국제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런던 위그모어 홀에서 세 차례의 연속 독주회를 가짐으로써 유럽무대에 데뷔했으며, 이후 세계 유수의 지휘자,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해왔다.
음악평론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박종호 씨는 백건우 씨에 대해 “그의 이름 석 자를 떠올리면 求道者的인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진지한 순례자의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말한다.
<…내가 만났던 여러 예술가들 중에서 그만큼 자신의 철학과 예술관이 분명하며 그것을 확실하고 진지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말에는 늘 겸손이 묻어 있는데, 그러나 거기에는 넘볼 수 없는 자신감도 내재되어 있다.
백건우는 이번에 환갑을 넘겼다. 그러면서 이제 자신의 세계가 분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그 동안 그는 그야말로 이것저것, 그의 말대로 다양한 예술의 세계를 섭렵해 왔었다. 그는 라벨, 무소르크스키, 스크랴빈, 리스트, 포레,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에프, 그리고 쇼팽 등의 예술가들을 순례하였다.
그가 한 작곡가에 관심을 가지면 그는 집중적으로 ‘팠다’. 이 사람 저 사람의 것을 한 두 곡씩 연주하기보다는 그는 한 작곡가의 세계를 천천히 그리고 깊이 성찰한다.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가진 예술적인 그릇 위로 자연스럽게 넘쳐흐르면, 그 때 그것을 콘서트나 음반에서 드러내는 듯하였다. 그리고 한 작곡가가 선정되면 보통이 전곡이며, 주로 그 작곡가가 피아노를 위해 남긴 대부분의 곡들을 다 연주한다. 그것이 그 동안 30~40여 년간 그의 행보였다.
그런 그가 이제 비로소 자신의 음악세계가 잡혀간다는 표현을 한다. 이제야 베토벤이 보인다고도 한다. 평생을 구도자적인 자세로 피아노와 함께 살아온 위대한 예술가로서는 너무나 겸손한 고백이다>
라벨, 스크랴빈, 무소르크스키, 리스트 등 이미 수많은 음반을 녹음한 그가 환갑이 넘은 지금, 베토벤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피아니스트에게 ‘베토벤’은 가깝고도 먼 고지다. 한 피아니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항상 가까이 있고 친숙하지만 그 무게와 위대성에 부담이 가고, 한없이 애정이 솟구치지만 쉽게 다룰 수 없는 걸작들”이다.
백건우 씨는 “평생 동안 늘 끊임없이 베토벤을 연주해왔지만, 사실 베토벤의 참 모습이 이제야 들어오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나이 탓인 것 같습니다. 베토벤은 14세가 되었을 때, 첫 피아노 소나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25세가 되니 이제야 비로소 베토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전에도 베토벤은 무수히 쳤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전에는 베토벤의 진정한 모습이 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베토벤이 서거한 것이 57세 때죠. 저도 그 때까지 그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들을 연주하였고, 어쩌면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3년에 걸쳐서 피아노 소나타 全曲을 녹음한 셈입니다. 즉 베토벤이 죽은 나이에 저의 녹음이 시작된 거죠.”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녹음하면서 백건우 씨가 느낀 베토벤은 어떤 사람일까? 보통 베토벤 하면 ‘광기’와 ‘투쟁’ 같은 남성적인 가치의 단어를 떠올리기 쉬운 게 보통이지만, 그는 베토벤을 ‘사랑’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했다.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사랑입니다. 그를 연구하고 연주하면서 그에게서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쇼팽의 음악에서 사랑을 말하고, 베토벤에게서는 투쟁 같은 남성적인 가치의 단어들을 떠올리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베토벤에게서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는, 쇼팽의 음악에 나타난 사랑은 개인이라는 ‘단수(單數)’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에 반해, 베토벤은 개인이 아닌 다수, 즉 ‘복수(複數)’라고 표현했다. 베토벤의 사랑은 쇼팽의 개인적인 사랑과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소통하는 다수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본인은 ‘쇼팽형’인가, ‘베토벤형’인가 하는 질문에, 그는 스스로를 ‘베토벤형’이라고 평가했다.
그가 추구한 베토벤의 연주는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베토벤의 연주를 통해 그는 흔히 말하는 베토벤의 억세고 고집스러운 성격 뒤에 숨어 있는 약함과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강하면서도 약하고, 공격적이지만 사랑스러운 베토벤의 느낌을 살려내는 것이 백건우의 베토벤 소나타 연주의 핵심이다.
32곡을 외우는 것이 힘들진 않지만, 다만 32곡을 본인의 내면에 늘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백건우 씨. 32곡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중 그가 뽑은 특별한 한 곡은 피아노 소나타 29번 B플랫장조 작품 106인 ‘함머클라비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