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의 전교조 와해 story

대통령의 일관된 원칙, 정부 역시 일관된 정책
6공화국에서 이뤄진 전교조 와해(瓦解)는 통치권자의 결단에 실무자들의 노력이 결합한 작품이었다. 당시 盧泰愚 대통령은 전교조의 극렬한 저항과 野黨과 在野의 공격 속에서도 「전교조 불법화」의지를 견지했고, 문교부와 청와대, 검찰은 전교조의 실체를 폭로하고 여론을 설득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전교조 탈퇴를 끝까지 거부해 해직된 1천5백여 명의 교사들은 金永三 정부 들어 복직되기 시작했고, 金大中 정부는 전교조를 합법화기에 이르렀다. 이후 전교조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親北·反美·反韓교육의 진앙지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89 5월28일 불법단체 전교조 설립>

전교조는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소위 「자주적 교원단체ꡑ결성을 목표로 9월27일 결성된「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을 모체로 했다. 전교협은 교사들의 노동3권보장 등 권익확보를 명분으로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이들은 어느 정도 勢강화에 성공했다고 판단하자, 1989년 5월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교원의 노조설립을 금지하는 교육관련 법령에 어긋나는 不法단체 설립을 강행한 것이다. 전교조는 기존의 노동3권 보장 外 이른바 「참교육」실현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盧泰愚 대통령은 전교조 설립이 現行法에 위배될 뿐 아니라 교육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관계부처에 대응책 마련을 지시했다. 당시 鄭元植 문교부 장관은 1989년 6월부터 각 교육위원회 관계관 회의를 연속적으로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전교조 가입교사 탈퇴를 설득하는 데 주력하고, 탈퇴 불응자에 대해서는 조속한 징계조치에 나설 것을 결정했다. 이로써 설득(說得)·종용(慫慂), 未탈퇴 교원에 대한 징계조치(懲戒措置)라는 강온 양책이 동시에 진행됐다.

<투신하는 고교생까지...고교생 집단행동, 교육계 혼란 속으로>

전교조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해직된 교사들은 각종 不法집회를 개최하고 출근투쟁을 전개해 학생과 현직교사들의 동정을 유발했다. 在野단체와 연계해 노골적인 정권타도 투쟁도 시도됐다.

교육계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전교조를 지지하며 집단행동에 나서는 고교생들까지 등장했다. 6월 광주 고려고, 광덕고 등에서는「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라는 이름을 내건 고교생들의 전교조 지지집회가 잇달아 열렸다.

7월22일에는 「참교육을 갈망하는 고등학생대책위원회」소속이라고 밝힌 男女고교생 10여 명이 성균관대에서 전교조를 지지하는 성명서와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들은 스스로『민주, 통일, 참인간화 교육 실천에 뜻을 같이하는 15개 고교 학생5백여 명으로 조직됐다』고 주장했다. 이틀 후 서강대에서는 이들 조직의 서울지역 대표자 협의회 결성식이 시도됐다.

자살을 기도하는 고교생까지 나왔다. 6월13일 서울 구로고 총학생회장 柳浩哲군은 직위 해제된 전교조 교사의 복직을 요구하며 3층 교정에서 투신했다가 척추를 크게 다쳤다. 이 학교 전교조 소속 金모 교사(25)는 6월21일 柳군이 입원한 고려대 부속병원에 찾아가 또 다른 물의를 빚었다. 편지에는 『그대의 숭고한 의지와 결단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호철군의 용단은 전교조의 역사에 길이 기록될 것이며 인류의 자유해방에 길이 빛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盧대통령, 『전교조 진상파악과 대응논리 개발』 특별지시>

7월 들어 전교조 혼란이 가속화되자, 盧泰愚 대통령은 청와대에 『전교조 진상파악과 대응논리 및 대처방안을 만들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尹汝雋 당시 정무수석비서관(前환경부장관·국회의원)은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태스크포스(TF)팀을 긴급 구성, 전교조 대처에 나섰다.

전교조 공방의 전환점은 이 TF팀에서 마련됐다. 전교조가 주장하는 소위 「참교육」에 관한 공세논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TF팀 관계기관 대책회의에 참여했던 高永宙 당시 대검공안연구관(前서울남부지방검찰청 검사장)은 회의석상에서 「참교육」의 이념적 실체를 지적하고 나섰다. 공안(公安)통이던 그는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NLPDR)」를 주장하는 「참교육」 책자들을 이적(利敵)표현물로 기소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NLPDR은 소위 주사파(主思派)의 혁명논리로 알려졌다. 82년 태동된 주사파는 소위 「투신(投身)」이라는 이름 아래 조직원들의 사회 각 분야 진출을 권유했는데, 그 중 가장 역점을 뒀던 분야가 교육계였다. 결국 주사파 출신들이 교직에 대거 진출하기 시작한 시점에 만들어진 전교조는 소위「참교육」교재에서도 NLPDR이라는 혁명논리가 배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다.

청와대 TF팀 대책회의 이후, 高永宙 연구관은 「참교육의 실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청와대를 거쳐 문교부에 보고 돼 팜플렛으로 작성됐고, 검찰은 이후 전교조에 대한 「공안(公安)」차원 대응에 나설 것을 선언한다. 이것이 89년 8월5일의 일이었다.

<전교조 참교육 公安 차원 수사 개시>

이날 주요 일간지들은 정부의 새로운 전교조 대응책을 대서특필했다. 『노조를 이끄는 핵심세력이 자유민주 체제를 훼손하려는 교육을 실시, 나이어린 2세들에 의한 현실변혁을 획책하고 있다』는 요지였다.

『검찰이 전교조의「민중교육 1, 2」등의 책자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전교조 결성주도세력이 체제부정을 참교육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전교조 참교육 公安차원 수사』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1면 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검찰은 5일 전교조가 교원의 노동운동을 불허하고 있는 국가공무원법과 사립학교법 등 현행실정법에 명백히 위반되기 때문에 이에 대해 단호한 사법조치로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은 특히 전교조가 목표로 삼고 있는 이른바 「참교육」의 이념인 「민족 민주 인간화교육(결성선언문에 명시)」의 실체가 지난 85년 全學聯 三民鬪사건의 三民이념(민주 민중 민족)과 동일하다며 참교육의 이념적 성격에 대해 정밀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李健介 대검공안부장은 5일 이 같은 검찰의 방침을 밝히면서 검찰이 관심을 갖고 있는 三民이념은 북한의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전략에 동조하는 利敵이념임이 법원의 확정판결에 의해 판명된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검찰 수사에 의해 「참교육」의 이념적 성격이 利敵이념으로 드러날 경우 관련교사들에 대해 대규모 국가보안법이 적용될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검찰은 『지금까지 수사결과 전교조가 이른바 민중교육을 통한 체제의 변혁을 기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정부의 노조불허방침이 분명한 만큼 앞으로도 노조활동을 계속하는 교사에 대해서는 비록 전교조 주도세력의 저의를 모르고 부화뇌동한 경우라도 사법조치의 예외가 될 수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公安수사 발표 후 삼일 사이 1천여 명 탈퇴>

전교조의 이념적 실체에 대한 폭로로 전교조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우선 수세에 몰려 온 여당(與黨)의원들의 공세가 이어졌다.

8월9일 열린 국회문공위에서 林仁圭 의원(민정)은 『전교조교사들이 참교육이란 이름으로 2세들에게 의식화교육을 하려한다』며 『전교조의 투쟁형태로 미루어볼 때 재야운동권과 밀접한 연대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咸鍾漢 의원(민정)은 『전교조가 궁극적으로 내세우는 목표는 체제변혁이기 때문에 현재의 입장에서 한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며 『전교조가 국가와 교육제도를 이념투쟁의 장으로 여기는 이상 정부는 체제모순으로 전복되든지 가입교사를 법으로 다스리든지 양자택일밖에 없다고 본다』고 했다.

辛卿植 의원(민정)은 『전교조의 참교육이 계급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참교육의 실상을 국민들이 잘 모르고 있는 만큼 국민에 대한 홍보와 이념교육을 강화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전교조에 동정적이던 언론의 보도태도 역시 달라졌다. 8월6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검찰의 발표대로 전교조의 참교육 이념이 북한의 혁명 전략에 동조하는 것이 밝혀진다면 관련자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며 『참교육의 이념이 계급투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받는 상황에서 그 실체를 밝혀서 학부모들이 납득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전교조에 대한 이념(理念)공세는 교사들의 대량(大量)탈퇴로 이어졌다. 8월5일과 7일, 삼일 사이 탈퇴한 인원은 무려 1천1백25명. 이로써 총 가입자 1만2천5백83명 중 80%인 1만70명이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1천여 명 참교육결의대회 등 전교조 거센 저항>

탈퇴교사가 늘어가면서 전교조의 저항은 거세졌다. 8월5일 전교조는 교사, 학생, 학부모 등 1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참교육실천을 위한 결의대회」를 갖고 『교사는 참교육을 굳건히 실천해 나갈 것, 학생은 참교육을 지켜낼 것, 학부모는 참교육을 요구할 것』이라며 전교조 사수를 결의했다.

전교조는 참교육이 이적(利敵)교육이 아님을 주장하는 소책자를 만들어 대량 배포하는 한편 주요 일간지에 의견광고를 게재했다. 8월11월 동아일보에는 『자유민주국가는 교직원노조를 인정합니다』라는 광고를 냈다. 이들은 『양심적인 교사들을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내쫓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냐』며 『친일작가의 작품을 가르칠 수 없다. 독재정치를 민주주의라 가르칠 수 없다. 사람됨보다 점수를 더 중요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전교조의 법정투쟁도 진행됐다. 그러나 대법원 형사1부(주심 안우만 대법관)는 이듬해 4월11일 전교조 元모 교사에 대한 국가공무원법 위반 등 선고공판에서 『공립학교 교사들에게 적용된 국가공무원법 66조1항(단체 행동금지)은 합헌』이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전교조활동이 교육민주화와 참교육실현을 위한 정당행위로 볼 수 없으며 공무원의 단체행동을 금지한 국가공무원법 66조1항은 헌법 11조(평등권) 등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전교조 불법』, 원칙이 만들어 낸 결과>

전교조는 조직 결성 이후 사태가 소강 국면에 들어선 9월 사이 모두 1백59차례의 각종 집회·농성·시위 등을 가졌고, 연인원 37만여 명을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85명이 구속됐고, 단축수업·단식수업·조기방학·학부모들의 집단항의 등 부작용이 빚어졌다.

盧泰愚 대통령은 전교조 사태를 통틀어 원칙(原則)을 견지했다. 탈퇴교원이 급증함에 따라 전교조 측이 정부에 대해 징계절차 진행을 중지하고ꡐ교원노조 실체 인정을 전제로 한 對話ꡑ등을 주장했을 때도, 「교원노조 해체 후 對話」라는 일관된 노선을 보여줬다.

90년 6월30일 盧대통령은 6ㆍ29선언 3돌을 맞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민과의 대화에서 『스승들이 노조를 만드는 것은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해직된 사람들도 생각을 고쳐 복직되길 희망한다』며 종래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대통령의 일관된 원칙 아래서 정부 역시 일관된 정책을 펴나갔다. 문교부는 전교조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교육감 회의 등 16회의 시․도 관계관 회의를 개최했고, 노조 가입 교사들에게 탈퇴하도록 설득키 위해 교육부 간부 직원들이 81개의 학교를 방문했다.

문교부 장관은 다섯 차례 談話를 발표했고, 5회에 걸쳐 직접 방송에 출현해 전교조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탈퇴를 호소했다. 장학실장과 교직국장들도 방송토론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 활동을 전개했다. 홍보자료는 89년도에 20종 총 1천4백만 부, 90년도에는 10종 44만 5천여 부를 제작하여 보급했다.

교원노조 활동의 실상과 법적 문제점, 국제적 동향 등에 관한 정보를 갖게 하기 위해 설득 활동의 주체가 될 교육전문직, 초․중등학교장 등 5천5백41명에게 연수를 실시했다.

교원노조에 반대하는 學父母들의 모임에 대해선 활동을 지원했고, 시․도별 「교육정상화 촉구 학부모대회」가 12개 교육위원회에서 15회 개최돼 1만9천3백80명의 학부모들이 참석했다.

89년 5월 말 1만2천명에 달했던 전교조 가입 교사 수는 89년 말까지 1천5백2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탈퇴했다. 未탈퇴 교원들은 1990년 초기까지 전원 징계 해직함으로써 전교조 조직은 완전 와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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