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는 누구를 가장 자주 만났을까?

16년간의 청와대 접견日誌 분석: 유신 이후엔 면담자 격감. 丁一權이 가장 많이 만나

<대통령이 누구를 만났는지는 국정의 향방을 읽는 중요한 가늠자이자 키워드다. 月刊朝鮮 2월호는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보관해 온 朴正熙 시대의 대통령 접견일지를 토대로 대통령이 면담한 인사들을 시기별·분야별로 나누어 수치화하고 분석했다. 다음은 그 내용을 요약정리한 것이다(조갑제닷컴 유료존으로 들어가면「朴대통령 접견日誌」(1964. 1. 2~1979. 10. 26) 원본을 볼 수 있다).>


 대통령이 누구와 자주 만나는지를 관찰하면 국정의 방향과 통치행태, 정권의 성격 등을 파악할 수 있다. 王朝實錄(왕조실록)과 다름없는 朴正熙 시대의 청와대 접견일지에는 제3공화국 출범 보름 후인 1964년 1월2일부터 집권 마지막 날인 1979년 10월26일까지의 16년 동안 朴대통령이 만난 사람과 시간, 장소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 자료를 보면 그 시대의 實勢(실세)가 누구였고, 권력 이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수치로 흐르는 권력

  朴正熙 대통령이 16년 간 청와대에서 가진 접견 횟수는 총 3만9318회다. 이 통계는 朴正熙 정권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1964~68년을 제1기로, 1968~74년을 제2기로, 1975년~79년을 제3기로 구분해봤을 때, 각 접견 총 횟수는 제1기 1만7572회, 제2기 1만170회, 제3기 3551회로, 후반부로 갈수록 면담 횟수가 줄어든다. 


朴正熙 대통령의 16년간 총 접견횟수(1964~1979년)

  정권 초기에는 1964년(4042회)을 시작으로 매년 3000회를 넘는 횟수를 보이다가, 본격적인 유신체제로 접어든 1973년은 444회로 가장 적다. 이는 朴대통령의 권력이 强權(강권) 통치로 가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박정희 전기를 저술한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는 “이 자료를 보면 정권의 성격이 권위주의화하면서 사람을 적게 만났다는 게 드러난다”며 “박정희 권력의 흐름과 성격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자료의 가장 중요한 시사점인 것 같다”고 말했다.

  분야별로 보면, 행정부 관료를 만난 것이 1만1412회로 가장 많았고, 다음이 정치인(6420회), 청와대 비서(2226회), 군인(2045회), 중앙정보부장(2028회) 순이었다. 이 통계는 朴대통령이 정권의 기반이자 채찍인 군인과 중앙정보부장을 상당히 중요시했음을 보여준다.

 

朴正熙 대통령 면담일지 종합 통계(1964~1979년)

朴正熙 대통령의 주요 분야별 인사 면담 횟수

  정권 초기인 1964년 한 해 동안 朴대통령은 정치인을 1163회 만났다. 이는 16년간 정치인 전체 만남 횟수의 6분의 1이 넘는 수치다. 시기적으로 윤보선 씨가 ‘정신적 대통령’을 자처하며 강경한 反정권 투쟁을 전개한 직후라 民心 수습 차원에서 정치인들과의 만남이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치인과의 만남은 서서히 줄기 시작해 1977년이 되면 26회로 급감한다.

  재미있는 것은 만남의 횟수가 전반적으로 줄어드는 가운데도 군인들은 꾸준히 만났다는 사실이다. 반면 언론인은 유신체제 이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정권 중반에 접어들면 朴대통령은 정치보다 안보와 경제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안보와 경제는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정치는 지시하면 되니까 자연히 정치인은 뒷전으로 물러났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朴正熙 집권 8년째인 1971년에는 군인을 만난 횟수가 3분의 1 이상 줄어들었다. 반면 청와대 비서는 초기만 해도 10회 안팎이었던 것이 233회로 증가했다. 이는 권력의 중심이 5·16혁명 주도 인사들에서 최측근 인사 쪽으로 이동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陸英修 서거 후 대중과 괴리

  본격적으로 유신체제에 들어가기 시작한 1973년을 기해 대통령의 면담 횟수는 전체적으로 눈에 띄게 줄어든다. 1974년 8월15일에 있었던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총격을 받은 陸英修 여사의 서거 이후 대통령의 외부인사 면담이 급감한다. 피격 사건 직후 경호실장이 朴鐘圭(박종규)에서 차지철로 바뀌면서 경호가 더욱 삼엄해졌다. 차지철의 과잉 경호로 인해 접견 대상이 극히 제한되었고, 朴대통령은 대중들과 유리되었다.

  보직상 대통령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경호실장·비서실장·중앙정보부장의 연도별 면담횟수는 시대별 실세가 누구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지만 통계상으로는 중앙정보부장을 가장 많이 접견한 것으로 나타났다.

청와대 측근 면담 횟수

  정권 말기인 1979년에는 경호실장이 중앙정보부장이나 비서실장보다 더 자주 대통령을 만났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일정을 통제하고 독대가 아닌 이상 면담 시간을 배분하며 대통령이 검토할 사항을 선택하는 자리다. 때문에 대개는 비서실장의 파워가 경호실장보다 우위에 있다. 그러나 이 해에는 예외로, 경호실장이 대통령의 눈과 귀 노릇을 했다. 대통령에 대한 영향력이 비서실장보다 더 강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79년의 변화는 의미가 있다. 

통계자료에 예고된 10·26의 비극

  당시 경호실장은 1974년부터 죽 자리를 지켜온 차지철이었고, 비서실장은 1978년 12월에 있었던 인사이동으로 막 부임한 김계원이었다. 차지철이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전임 비서실장 김정렴 씨와는 달리, 김계원씨는 사람은 좋지만 실무에는 약했다.

  강력한 견제 세력이 없어지자 차지철이 청와대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그동안 김정렴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나름대로 유지해 온 평형이 깨지게 됐다. 차지철의 득세로 소외감을 느낀 김계원과 불만을 품은 김재규는 동료의식을 갖게 된다. 두 사람의 공조(?)下에 朴대통령이 시해되었다는 점에서 10·26의 비극이 이때부터 배태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하루’의 접견日誌

  1979년 10·26 전날인 1979년 10월25일자 접견일지를 보면 차지철이 비서실장인 김계원이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보다 우위에 있었음이 드러난다. 박대통령은 이날 아침 가장 먼저 차지철을 만났고, 김재규는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접견했다.

  朴正熙의 ‘마지막 하루’인 다음날은 오전 9시40분에 이발을 하고, 역시 차지철을 만나 정가 소식을 들었다. 오전 10시27분에는 전용헬기를 타고 농수산부 장권 수행下에 삽교호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청와대를 출발했다. 오후 12시10분, 당진 송신소 행사에 참석한 후 12시45분에는 도고호텔에 도착해 오찬을 했다.

  오후 1시53분 전용헬기를 타고 청와대로 출발, 오후 2시32분에 도착했다. 이후 오후 6시 궁정동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朴대통령의 접견일지는 오후 7시50분 궁정동 만찬 중에 서거했다는 것으로 16년 동안의 기록에 마침표를 찍는다.  

인물은 丁一權·金炯旭·金鍾泌 순

  면담일지 분석 통계 자료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인물별 면담 순위다. 통치기간 16년 동안 100회 이상 만난 사람은 총 50명으로, 1위는 990회를 면담한 정일권이다. 그는 박정희 시대 최장수 국무총리(1964년 5월~1970년 12월)를 지낸 인물로, 국무총리(뒤엔 국회의장)를 오래 했기 때문에 접견 횟수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2위에 오른 김형욱 정보부장의 대통령 접견은 전반기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1969년 정보부장에서 물러나는데, 1972년 이후에는 단 한번도 면담일지에 등장하지 않는다. 3위를 차지한 김종필은 朴대통령을 꾸준히 만났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는 「朴正熙 전기」에서 “이후락 정보부장이 물러난 1973년 12월부터 약 2년간 김종필 국무총리는 역대 어느 총리보다도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김종필과 마찬가지로 정권 초기부터 말기까지 꾸준히 접견한 인물은 차지철, 신직수, 김정렴, 최규하, 김재규 다섯 사람이다. 모두 朴정권 시절 쉬지 않고 현직에 있었던 이들이었기 때문에 자주 면담한 것으로 보인다.

기간별로 중복 인사 없어

  접견일지에 자주 등장하는 상위 20인을 시기별로 나눈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朴正熙 시대 권력의 흐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제1기(1964~68년)에는 김형욱(789회), 제2기(1969~74년)에는 이후락(443회), 제3기(1975~79회)에는 김정렴(295회)이 가장 많이 면담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들은 그 전 시기나 다음 시기에는 20위 안에 들지 않았다. 1, 2, 3기에 걸쳐 모두 상위 20위에 든 인물은 김종필, 신직수, 최규하 세 사람뿐이다. 이는 박정희가 권력이 어느 한 사람에게 몰리는 것을 경계한 데서 비롯된 듯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체적으로 경제인은 그리 많이 만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상위 20위 안에 든 기업인이라도 많아야 1년에 평균 1, 2회 정도다. 순위를 보면 정주영(현대그룹)이 42회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박태준(포항제철) 39회 순이다. 朴대통령은 기업인 중 정주영과 박태준을 특별히 아꼈던 것 같다. 

후반기로 갈수록 거리 둔 언론과 정치

  박정희 대통령은 정권 초기 외에는 언론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16년 동안 朴대통령이 접견한 언론사는 30여 개 社이고, 총 627회를 만났다. 가장 많이 접촉한 언론사는 서울신문사(133회)이며, 다음이 한국일보(80회), 국제신문(70회), 문화방송(51회), 조선일보(47회) 순이다. 전체적인 특징은 언론인 역시 1973년부터 거의 만나지 않았다는 점인데, 심지어 1975년부터 1979년까지는 한 해에 1명씩 면담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정치인으로는 길재호(공화당 사무총장)가 총 457회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김종필(455회), 김성곤(401회), 차지철(319회), 김진만(241회), 백남억(192회) 순이다. 야당 정치인 중에는 김영삼과 박순천이 민중당 시절에, 고흥문·정해구·김영삼·김은하가 신민당 시절에 1, 2회씩 만났을 뿐 거의 왕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통계 자료를 보면 당시 여야 간의 대화가 얼마나 단절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후반기로 갈수록 사람들을 적게 만나면서 측근들과 함께 하는 만찬은 자주 가졌다. 1978년에는 66회, 1979년에는 70회의 만찬을 가졌다. 이렇듯 만찬이 많아진 데는 육영수 여사를 잃고 혼자 된 몸이어서 쓸쓸한 마음을 달래고자 했던 것 같다. 가족이 아닌 참모들과의 반복된 만찬은 후반기의 폐쇄적 국정운영의 실태를 보여주는 증표이다.  유신 이후 정치활동이 제약되자 朴대통령은 안보·경제문제에 집중하여 자신의 시간을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月刊朝鮮 2008년 2월호 (정리 金秀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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