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는 이른바 데탕트(Détente)의 시대였다. 데탕트라는 佛語는 긴장완화라는 의미이다. 1970년대초 키신저가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닉슨과 브레즈네프가 시작한 데탕트 시기에 美蘇 냉전의 부분적인 완화가 이뤄졌다. 核전쟁을 피하기 위한 군축협상이 추진되고, 상호간 체제를 인정한다는 합의가 이뤄졌으며, 공산권과 자유진영 사이의 교류와 무역이 확대되었다. 소련도 自國民들에게 부분적인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72년의 전략무기감축협정, 1975년의 헬싱키 선언 같은 구체적인 성과도 거두었다. 美蘇 사이엔 핵무기에 의한 파괴 능력이 균형점에 도달했다. 이를 정책화한 것이 '상호파괴확인(mutually assured destruction:MAD)'이란 개념이었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미국과 소련이 다 멸망하도록 하는 구조였다. 이에 따라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를 실어나르는 상대의 미사일에 대한 방어망을 고의로 만들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래야 共滅의 공포로 해서 핵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 데탕트 기간중에도 공산권과 자유진영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월남전쟁, 제4차 중동전쟁, 그리고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美蘇는 편을 들어야 했다. 자연히 대리전 양상이 되었다. 1979년 중동에서 미국의 맹방 역할을 하던 이란이 호메이니 혁명으로 反美국가가 되었다.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은 정권을 잡은 뒤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여 직원들을 인질로 삼았으나 미국은 속수무책이었다. 1980년 봄 미국의 무모한 구출작전은 이륙도 하기 전에 실패했다. 1979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1980년 카터 미국 대통령이 對蘇 경제제재를 개시하고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그해 11월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는 데탕트에 비판적 자세를 취하여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데탕트 시대는 끝났다.
1980년대에 미국은 레이건의 지도하에 자신감을 회복하고 對蘇 군비경쟁을 강화했다. 레이건은 데탕트가 평화공존이란 美名下에서 악의 제국인 소련 공산세력을 존속시켜주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소련과의 공존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련 공산 체제의 존속으로 소련과 동구권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유를 속박당하고 제3 세계에서 공산주의가 팽창했다. 레이건은 소련 공산 세력은 역사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라는 확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을 통한 공산세력 붕괴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자유세계가 가진 장점, 즉 경제력과 자유, 개방과 자율의 힘으로, 평화적으로 惡의 제국을 해체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레이건과 미국만의 힘으로 공산권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레이건의 등장을 전후한 시기에 공산주의를 변화시키고 냉전을 끝장낼 만한 경륜과 용기를 가진 巨人들이 역사의 무대에 한꺼번에 등장했다. 영국의 대처 수상, 중국의 鄧小平,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폴란드의 자유노조 지도자 바웬사, 그리고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레이건과 함께 공산주의를 해체하는 데 협력했다.
鄧小平은 '쥐를 잡기만 한다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교조적 공산주의를 실용적 공산주의로 재해석했다. 중국을 개혁 개방으로 끌고간 그는 공산주의도 국민들을 먹여살릴 수 있는데, 다만 시장경제를 수용해야만 그럴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중국은 시장경제를 부정한 소련을 앞서가기 시작했다.
대처는 유럽식 좌파 사회주의에 볼모가 되어 경쟁력을 잃어가던 영국을 개혁하여 생동하는 경제대국으로 회생시켰다. 그는 규제완화, 작은 정부, 민영화 정책이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고 선거에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소련 공산주의에도 큰 타격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 의지하는 대중이 대처 같은 보수파의 개혁에 찬동한다면 마르크스 이론은 설 데가 없어지는 것이다. 대처 역시 데탕트에 비판적이었다. 스스로 하이에크의 제자였다고 부른 그는 침략적인 소련을 '짐승'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대처, 레이건, 요한 바오로 2세, 바웬사는 모두 신념에 찬 언어의 힘을 아는 지도자였다. 그들은 신념과 진실이 담긴 말의 힘으로 惡의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2차세계대전 때 영어의 힘을 동원하여 히틀러를 무너뜨린 처칠 이후 처음으로 名言과 名文들이 많이 나온 시기였다.
폴란드 출신의 두 사람, 요한 바오로 2세와 바웬사가 소련 공산제국의 붕괴의 주역이 된 점은 흥미롭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이 일어났고, 이 전쟁에서 인구의 20%가 사망한 곳이 폴란드였다(이 사망률은 독일이나 소련보다 더 높다). 나치 독일이 망했음에도 폴란드는 자유를 찾지 못하고 다시 소련 전체주의의 지배하에 남게 되었다. 폴란드 사람들의 해방이야말로 공산권이 붕괴해야 할 이유고 상징이었다. 서구의 지도자들은 폴란드의 자유화를 유럽문명의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1978년 10월16일 바티칸에 모인 추기경들은 58세의 폴란드 출신 한 추기경을 교황으로 뽑았다. 요한 바오로 2세로 불리게 된 이 사람은 132년만에 가장 젊은 교황, 455년만에 첫 非이탈리아인 교황, 그리고 최초의 슬라브인 교황이었다. 폴란드의 비극을 체현한 그는 자유노조 운동의 기수 바웬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폴란드에서 카톨릭은 공산당 이상의 정신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와 레이건은 일종의 '反共신성동맹'을 맺은 듯이 소련을 압박했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암살기도의 표적이 되나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교황암살기도의 배후엔 불가리아 정보기관과 소련이 있었고, 레이건 암살기도는 한 젊은이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던 여배우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었다.
폴란드의 자유노조는 공산당의 권력독점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1981년 브레즈네프가 이끄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폴란드에 소련군대를 보내 자유노조 운동을 탄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린다. 폴란드의 强者 자루젤스키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소련의 개입을 피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펴고 자유노조를 탄압하는 척했다. 1989년 6월 자루젤스키는 자유노조가 의회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했다. 자유노조는 압승하고 폴란드의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공산세계 최초의 이 평화적 정권교체를 막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989년 8월24일 공산권 최초의 민주정권이 선거를 통해 들어섰다. 이것이 냉전 종식의 선언이었다. 학자들은 이날을 공산권 붕괴의 신호탄이 오른 날, 냉전종식이 시작된 날로 규정한다. 연말까지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동독에서 공산당 세력이 밀려난다.
자유혁명이 유럽을 휩쓸고 있던 1989년 10월8일 오전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을 방문하여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회담했다. 이 대화록은 공산권의 민주화를 주도한 인물과 한국의 민주화를 주도한 인물과의 대화란 점에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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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통령 : 다시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시차도 많은데 잘 쉬셨습니까?
요한바오로2세 : 8시간 시차가 있는데 잘 쉬어서 괜찮습니다.
대통령 : 지난 1981년 겨울에 바티칸에서 저의 내외가 뵈온 적이 있는데, 그런 지 8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전과 똑같이 건강하신 모습을 뵈오니 기쁩니다.
교 황 : 바티칸에서 뵌 기억이 납니다. 저는 서울을 두 번째 방문합니다. 작년 서울올림픽에 이어 이번 성체대회도 서울에서 개최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대통령 : 성하께서 이렇게 방한하신 것 저와 우리 국민 모두가 감사합니다. 1981년 뵈었을 때는 제가 올림픽준비 책임자 자격이었는데, 그때 성하께서 한국을 위해서 축복하고 기도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북한과 김일성에게도 한국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시어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그런 것들이 원동력이 되어 올림픽도 성공하였고, 저도 나라의 책임을 맡은 대통령의 직에 오르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교 황 : 1984년도에 방한한 후 이번 성체대회로 오게 되니 5년이 지났는데, 남북한이 정치적으로 분단되어 같은 민족의 아들, 딸들이 나뉘어 있어 가슴아픕니다. 그러나 변화가 시작되고 있고, 어느 의미에서는 가능한 변화의 첫 징후가 보이고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 제도적 차이가 깊기 때문에 어렵겠지만, 하여간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라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중심지의 로마에서 극동의 끝에 있는 한국을 애정과 희망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섭리로 한국에서도 동구에서와 같은 변화가 이룩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의 상황은 동구와는 다릅니다.
대통령 : 말씀 감사합니다. 성하의 기구로 우리 세대내에 바람직한 변화가 꼭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작년 서울올림픽의 구호가“조화와 전진”이었습니다. 분단된 한국에서 세계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을 성공시키자는 우리의 호소가 전세계의 공감과 지지를 받아 훌륭한 대회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성하의 기도의 뜻을 새겨서 우리는 더욱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올림픽이 끝난 후 저는 유엔에 가서 연설하면서 앞으로는 한반도의 긴장과 적대감을 불식하고, 화해와 이해를 이룩하겠다는 결의를 다짐했는데, 북한을 고립상태로부터 국제사회로 개방토록 유도하겠다는 우리의 노력에 대하여 동구권을 포함한 모든 나라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는데, 세계 여러 나라들이 환영하고 있는데 반하여 북한만은 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두드리라,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말과 같이 계속 노력하면 언젠가는 북한도 이에 응해 오리라 믿습니다. 성하께서 이러한 우리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 황 : 폴란드, 헝가리 등 동구권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공산체제가 붕괴하고, 특히 경제파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모국인 폴랜드에서는 특히 솔리다리티라는 강력한 자유노조의 압력도 작용했습니다. 그에 따라 공산당은 그 절대다수의 결정으로 원탁 정치협상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고, 그 결정에 따라 완전한 것은 못되지만, 처음으로 자유선거가 이루어져 자유노조가 절대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새 정부의 수상도 비공산당원인 천주교도가 되었고, 각료의 다수도 공산당원이 아닌 비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습니다. 아직 완전한 민주정치라 할 수는 없지만, 큰 진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새로운 정부는 전의 공산정권의 실책으로 인한 경제파탄을 어떻게 수습할지 큰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만, 서방의 협조와 전 국민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헝가리도 비슷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고, 최근 동독에서도 체제 자체에는 변화가 없지만, 국민간에는 큰 동요가 일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체제자체는 경제적 낙후로 바꾸어지겠지만, 그 동안 그 체제 밑에서 살아온 국민의 사고방식(mentality of people)을 바꾸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북한이 동족이라지만, 40년 이상 비민주적이고, 부자유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사고방식이 그에 젖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젊은이들에 희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개방적이고, 변화를 희구하며, 진리와 선과 자유에 민감합니다. 최근 중국에서 우리는 그 실례를 보았습니다. 앞으로 공산권의 변화는 정치체제의 변혁과 아울러 인민의 체질(human composition) 개선이 큰 과제가 될 것입니다. 공산국가 중에서도 동구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기초가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변화가 이룩될 수 있는데, 쿠바나 북한 같은 나라는 사정이 다릅니다. 동구권에서도 루마니아, 체코와 동독은 아직도 개혁을 거부하고 있는데, 앞으로 공산세계 개혁이 어떻게 될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통령 : 전세계 특히 동구의 변화를 분석하시고, 민족분열과 갈등이 상존하는 한국문제 해결의 실마리에 대하여 갚은 관심을 가지신데 감사드립니다.
우리 나라는 과거 이조 500년의 전제왕정과 근 40년의 일제통치가 있었고, 2차 대전이후 비로소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는데, 그간에 많은 변화와 시행착오를 경험해 왔습니다. 오랜 권위주의 통치에 대하여 국민들이 분노하고 민주화를 요구했으므로 저는 1987년에 6.29 민주화선언을 하였고, 그 이후 민주화과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라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자유, 개방과 함께 사회각계의 욕구가 분출하여 법질서까지 문란하게 되어 국민생활과 민주질서를 해치는 사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국민수준이 높기 때문에 국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국민수준이 높기 때문에 국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다행한 것은 우리 나라 기독교의 큰 영향입니다. 천주교도는 1984년에 약 200만 명이었는데, 성하께서 방한하신 후 그 수가 늘어서 현재는 250만에 이르고 있고, 그 외 신교도는 약 1,000만 명 정도입니다. 그들의 종교적 신앙은 민주질서를 유지하고 물질만능주의의 폐단을 시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국내정치는 민주화의 궤도에 진입했으니 앞으로 계속 발전할 것입니다. 가장 큰 우리의 문제는 역시 북한입니다. 성하께서도 아시겠지만, 북한에는 아무런 종교의 자유도 없습니다. 이번 성체대회에도 초청했지만, 그들의 대표는 오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복음의 전파로 개방을 촉진시켜야 될 것입니다. 성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젊은 세대에 기대를 걸어야겠습니다. 최근 그들간에도 동요의 기미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해외에 나와 있는 외교관이나 유학생들이 자유를 찾아 이탈하고 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이 변화하되, 지나치게 급격하게 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나친 변화는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단계적으로 변화되기를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체대회의“그리스도-우리의 평화”라는 메시지가 북한에도 전파되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 황 : 기독교의 모든 종파 특히 카톨릭이 그러한 변화에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 기회에 더욱 그러한 역할을 하게 되기 바랍니다. 이번 성체대회에는 전 교회가 참여했고, 이를 통해서 한국교회와 한국 사람들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것입니다. 한국과 한국의 민주화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전번 방한시 각하의 전임자께서 저쪽에 있는 지도를 가지고 서울과 휴전선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고르바쵸프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무력 위협은 계속 경계해야 합니다.
대통령 : (교황을 지도 있는 곳으로 안내하고) 이곳이 서울이고, 여기가 휴전선입니다. 이 휴전선 양쪽에 100만명 이상의 중무장한 병력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다시 자리에 돌아와서) 고르바쵸프의 영향이 중국에까지는 도달한 것 같은데, 아직은 북한에는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소련은 북한에 대하여 MIG-29기 등 신예무기를 공급해 주고 있는 형편입니다. 장 신부께서도 잘 아시지만, 북한의 종교실상은 참담합니다. 그들의 국어사전에 보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고, 죄악이라고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여러 가지 드릴 말씀은 많으나, 시간이 다 되어 나가 보실 시간이 된 듯합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좋은 여행하십시오.
교 황 :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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