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묘지에 다녀와서

4-19기념관에서 초등학생들에게 현대사 부정적으로 가르치는 교사들, 이승만-박정희기념관 서둘러야

4-19기념관의 이승만 폄하


아내와 서울 수유동에 다녀왔다. 수유동은 아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 4-19묘지(공식 명칭 국립4-19민주묘지) 근처에 만두를 잘 하는 음식점이 있다고 해서였다.


점심식사를 한 후 4-19묘지를 둘러보았다. 김영삼 정권 시절이던 1995년 대대적으로 정비되면서 국립묘지로 승격된 4-19묘지는 한 마디로 으리으리했다. 어린 시절 왔을 때 보았던 4월학생혁명기념비문 외에도 김영삼 정권 때 조성해 놓은 상징문, 수호자상, 자유의 투사, 정의의 불꽃, 민주의 뿌리 등 여러 조형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뒤로는 북한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인근 주민들에게는 참 좋은 공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서울서대문에 4-19혁명기념도서관이 있는데, 4-19기념관이 두 개나 있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4-19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문을 읽어보았다.

“경제-미국의 원조와 정부정책에 편승한 일부 독점자본의 형성. 산업시설과 민간부문의 경제기반은 불모지.”

“정치적 배경-이승만 정권은 부일배를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끌어들여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역사적 정통성 수립에 실패.”

“이승만 정권은 권력지향의 부일배들을 지도층에 등용하고 권력재생산을 위하여 부정부패와 시민의 탄압을 일삼았다”

 

  입맛이 썼다. 이승만 정권을 축출한 것을 기념하는 4-19기념관에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위의 설명들은  내용들은 부정확하거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생략되어 있는 것들이었다.

예컨대 1950년대 한국경제성적표는 분명히 좋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일제의 남농북공(南農北工) 경제정책, 분단, 6-25전쟁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1950년대는 우리가 1960~70년대의 도약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농지개혁, 사회간접자본확충, 공장건설, 원자력 연구의 시작, 보통교육을 통한 인력양성 등이 그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 청산에 실패했다는 설명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내각에는 항일애국지사들이 다수 참여했고, 이승만 정권 기간 동안 기용된 친일경력자들은 적극적인 친일파라기보다는 일제식민통치 아래서 양성된 근대적 기술관료의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은 부일배를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끌어들여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역사적 정통성 수립에 실패'운운하는 것은 역사를 너무 단순화시키는 얘기였다.

특히 이 문제는 단순히 이승만 정권의 정당성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과도 연결되는 문제였다. 4-19기념관은 국가가 건립하고, 국가보훈처가 관리하는 시설임을 감안하면,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신중한 언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여교사의 현대사 강의


기념관 한 편에서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한 여교사가 초등학교 3,4학년쯤 되어 보이는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이한열이라는 학생이 죽었어. 그래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어. 결국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가 ‘국민 여러분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면서 6-29 선언을 했어.”


어떻게 우리 현대사를 설명하나 싶어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를 했는데, 또 군인 출신인 노태우가 된 거야. 노태우는 전두환 친구였어. 친구끼리 대통령 자리를 주고받은 거야. 이게 말이 되니?”


순간 ‘군인이 하면 왜 안 되는데? 노태우는 직선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야. 전두환과 친구인 게 왜 문제인데?’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 교사의 강의는 계속됐다.

“우리나라에서 군인 아닌 대통령이 나온 것은 1992년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야. 그래서 ‘문민정부’라고 그래. 김영삼이 하나 잘한 것은 우리나라가 선진국들만 가입하는 OECD에 가입한 거야.

그런데 그 다음에 IMF사태가 났어.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어. 1997년에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는데, ‘국민의 정부’라고 그래. 2002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들어섰고...“


한 마디로 그 교사는 아이들 머릿속에 설익은 현대사 지식을 구겨 넣고 있었다. 교사도 그걸 느꼈는지 “머리가 빠개질 것 같지”라고 말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너희들, 김영삼 기억해? 못 하지? 그때는 너희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야. 민주화가 된 다음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너희들은 모를 거야.”


컴퓨터로 시청각 교육을 하는 2층에서는 앞에서 다른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승만은 네 번째로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왔어. 그때 야당에서는 조병옥이라는 사람이 나와는데, 이 사람도 병에 걸려서 병을 고치러 미국에 갔다가 거기서 그만 죽었어. 그래서 이승만은 그냥 대통령이 되게 된 거야.

그런데 이승만이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자유당에서는, 지금은 없는데 그때는 부통령이 있었어, 그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려고....

3명,4명씩 묶어서 투표를 하게하고, 완장을 두르고 투표소에 지켜 서서 ‘할머니, 누구 찍어야 하죠?’라고 물었어.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잘 모르잖아. ‘응, 이승만...’ 그러면, ‘맞아요. 제가 잘 찍게 도와 드릴게요. 투표지 이리 주세요.’라면서...“


그때 한 어린이가 물었다.

“말 안 들으면 죽였나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귀여운 녀석...’

교사가 대답했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아주 못 살게 굴었어. 그 때는 그런 시절이었어.”


‘반쪼가리 현대사’를 가르치는 교사들


그 교사들의 설명이 특별히 좌경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4-19기념관에서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겠지’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현대사는 분명 반쪽 현대사였다. 그들의 현대사  강의 속에는 대한민국이 지난 60년 동안 이룩한 성취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들의 가르침 속에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독재와 부정부패만 있었다. 정치적 민주화를 위해서는 물질적 기반이 먼저 구축되어야 하고, 그들이 이룩한 경제적 성취 위에서 정치적 민주화가 비로소 가능했다는 얘기는 없었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4-19는 이승만 정권의 성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1945년 해방 당시 13세 이상의 인구의 80%가 어떤 형태의 교육도 받지 못했었다. 이승만 정권은 극심한 빈곤과 전쟁의 와중에서 예산의 10% 이상을 교육에 투입했다.  1959년에 이르러서는 1945년과 비교할 때 초등학생은 2.6배, 중학생은 10배, 고등학생은 3.1배, 대학생은 무려 12배가 증가했다.

이렇게 교육받은 국민들, 교육받은 젊은이들이 바로 4-19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승만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였다.

하지만 4-19기념관에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온 여교사들의 강의 속에는, 그런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4-19와 5-18과 6월 항쟁을 이야기하고, 김영삼-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정권의 역사를 이야기했지만, 1987년 노태우의 당선은 여야가 합의한 직선제 헌법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노태우 정권 하에서 상당한 정도의 민주화가 진전되었기에 그 이후 문민정권들의 등장이 가능했다는 이야기는 빠져 있었다.


이승만-박정희 기념관을 짓자


4-19기념관을 돌아보면서, 두 여교사가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반쪼가리 현대사’를 지켜보면서, 나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지만, 애국우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해야 할 것은 이승만기념관, 박정희기념관 건립이다. 솔직히 4-19기념관이나 5-18기념관에서 이승만, 박정희에 대해 올바로 가르치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 이승만기념관, 박정희기념관이라도 제대로 지어, 4-19기념관, 5-18기념관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역사의 다른 반면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초등학교 과정에서부터 균형 잡힌 역사교육을 하는 것이다. 필리핀이나 미얀마, 태국은 물론 아프리카 가나보다도 훨씬 못 살던 나라를 이렇게 선진국 문턱에 진입한 잘 사는 나라로 만든 분들이 누구였는지, 우리의 조부모님, 부모님들을 격려하고 함께 피와 땀을 흘리면서 대한민국을 세우고 일으킨 분들이 누구였는지, 대한민국이 얼마나 위대한 성취를 이룩했는지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는 교과서를 만들고, 386운동권의 역사인식, 전교조의 역사인식에 물든 교사들을 다시 가르쳐야 한다.


4-19묘지를 나서면서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가슴이 콱 막혀왔다.

서대문에는 으리으리한 4-19기념도서관을 지어놓고(얼마나 크게 지어놨는지 그 공간을 다 활용하지 못해 그 일부는 재수생학원에 빌려주고 있다), 4-19국립묘지에는 있는 대로 공을 들여 놓으면서도, 건국대통령의 사저이자 건국의 산실(産室)인 이화장은 비가 새도 손을 못 대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던 백범은 웅장한 기념관을 갖고 있고 남산에 동상도 있지만,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경우는 공공장소에 변변한 동상 하나 없다.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던 백범이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를 제치고 10만원권 지폐의 인물이 됐다.

과거 재야인사 시절에는 북한과 밀통했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반역적인 6-15선언을 통해 국기(國基)를 허물고 김정일 체제 존속에 이바지한 김대중은 번듯한 ‘김대중도서관’을 갖고 있지만,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은 9년째 표류하고 있다.


이것이 건국6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 일은 기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을 기리고 존경하는 국민들이 나서야 할 일이다. 정부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과거 정권의 고관대작들에게 기대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정부에게 오불관언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제는 정부도 나서서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기념사업에 힘을 보태야 한다. 최소한 4-19묘지나 5-18묘지, 4-19기념사업이나 5-18기념사업에 정부가 지난 10년간 돈을 쓰고 공을 들인 정도의 성의는 보여줘야 한다.

이것은 우리 후손들에게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균형 잡힌 역사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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