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필하모닉의 평양 '不協和音'

북한 주민에게 미국(외부세계)을 보여주는(개방하는) 것이 아니고 미국인들에게 조작된 북한을 보여주는 것.
<이 기고는 weekly chosun 1995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평양 연주를 보면서 뇌리에서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은 북한 주민의 비참한 생활, 엄혹한 정치적 탄압의 장면들이었다. 평양의 대형 공연장에서 턱시도 차림의 미국인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모처럼 나들이옷을 걸쳐 입었을 것으로 보이는 ‘엄선된 청중’들이 박수를 치며 그 무엇에인지는 모르겠지만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는 그 시간, 북한 전역에서 굶주림과 탄압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내내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동떨어진 불협화음이었다.

많은 논평자들, 많은 보도들은 뉴욕 필의 공연을 1970년대 초 미국과 중국 간의 핑퐁외교에 견주며 크게는 동토(凍土)의 해빙, 작게는 미·북관계의 개선 그리고 북한의 국제사회 참여의 시발로 보고 크게 환영하며 의미를 부여했다. 뉴욕 필의 지휘자인 로린 마젤 역시 “우리는 (북한의) 문을 조금 여는 데 기여했으리라고 본다”며 “그 초석이 놓여졌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자찬했다.

물론 북한의 해빙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진정으로 분단극복과 평화통일을 바라는 사람치고 북한의 정치·경제 환경의 개선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의 연주 하나로 그것이 북한을 개선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 자체가 환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세계 유명 공연단을 유치하여 문화환경을 즐긴다고 해서 우리 사회에 ‘그늘’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느 사회나, 심지어 뉴욕 필을 가지고 있는 미국, 그중에서도 뉴욕은 빈부가 크게 교차하는 곳이고 명암이 너무나 두드러진 도시다. 그래서 북한이 뉴욕 필을 초청해 공연을 하게 하는 것과 북한에 음울한 그늘이 존재하는 것은 별개의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북한의 ‘그늘’이 단순한 불우함이 아니라 세계에 유례가 없는 정치적 탄압과 폭력, 경제적 피폐, 반(反)인간적 기아의 암흑 그 자체라는 데 있고 그것이 김정일이 주도하는 그 체제의 산물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물어야 하는 것은 과연 뉴욕 필을 데려다 공연하고 기자들에게 쇼윈도에 전시된 ‘위장된 삶’을 보여주는 김정일의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세계 유명 교향악단을 초청해서 공연하는 것이 논평자들의 말대로 북한의 해빙과 문화의 개방으로 가는 신호탄이라면 그 신호탄이 노리는 궁극적 표적은 북한의 체제이어야 할 것이며 그것은 곧 김정일 체제의 이완(붕괴까지는 아니더라도)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김정일은 자신의 체제 이완을 노린 교향(오케스트레이티드)의 소리를 굳이 자청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김정일은 분명 북한이 독재로 똘똘 뭉친 ‘괴물’이 아니며 교향악도 즐길 줄 아는 ‘문화적 소양’을 지닌 나라이고, 그런 나라가 핵(核)을 가지고 세계를 소란하게 할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북한의 핵은 ‘자위용’이고 ‘생존용’이라는 것을 미국 국민과 위정자들에게 과시하고자 하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6자 회담의 성공 여부는 북한의 요구사항들을 끝내 물고 놓지 않는 미국 정부에 달려있음을 세계에 알리자는 의도일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김정일 자신의 생일(2월 16일)을 ‘축하’하는 미국의 저자세로 선전했을 것이다.

그 점을 지휘자 로린 마젤도 짐작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1959년 구(舊)소련을 방문해서 연주회를 가졌을 때 그것은 소련사람들에게 그들도 외부(또는 외국)기관과 교류할 수 있고 외국기관들이 소련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때 소련사람들은 이것이 양날의 칼이라는 것을 몰랐다. 나라 밖 사람들과 나라 안 사람의 교호작용을 허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나라 안 사람들은 권력에서 밀려나게 됐다. 그러나 그 경우를 오늘 북한에 적용하는 것은 여기(북한)에 살면서 예술을 하며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을 해치는 일(disservice)이다.” 마젤은 굳이 이런 기회에 북한지도층을 자극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판단해 1959년의 소련과 2008년의 북한을 비교하는 것을 삼갔겠지만, 교향악단의 연주 하나가 어떤 극적 변화를 가져오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음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에 칼럼을 쓰는 러시아인(人) 칼럼니스트 안드레이 란코브는 지난 2월 15일자 칼럼에서 “요즘 남한의 보수파 인권보호단체는 개성관광이나 개성공단과 같은 사업을 ‘이북 독재정치를 연장시키는 사업’이라고 비판한다. 이것은 심각한 오해다. 북한 독재의 기본 수단은 주민들의 고립과 무지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교류만큼 북한에서의 변화를 촉진하는 방법이 없다. 북한의 경제개방 및 정치자유화를 바란다면 개성공단이나 개성관광 같은 프로젝트를 환영해야 한다”고 썼다. ‘개성’과 ‘뉴욕 필’은 다르다. 뉴욕 필의 평양공연이 과연 북한 주민들의 고립을 풀고 무지를 깨우치는 프로젝트인가가 우선 의문이다. 비록 선정된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개성공단의 종사자들은 그래도 남쪽의 사정을 전해듣는 ‘귀’가 있고 그것을 다른 북한 주민들에게 전파할 ‘입’이 있다. 물론 ‘돈’도 그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뉴욕 필은 북한 주민에게 사치이고 원망의 대상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뉴욕 필 공연은 북한 주민에게 미국(외부세계)을 보여주는(개방하는) 것이 아니고 미국인들에게 조작된 북한을 보여주는 북한 지도층의 고차적 전략의 일환이다. 기아선상에서 헤매며 자유를 갈망하는 북한 주민에게 절실한 것은 교향악이 아니라 자유의 소리다. 때마침 한국으로 오려던 것으로 보이는 22명의 탈북 주민이 남쪽 친북자들에 의해 북(北)으로 되돌려 보내진 뒤 그들의 생사가 의문시된다는 기사가 겹쳤다. 그 시각, 뉴욕 필이 그 아름다운 선율을 탄압의 도시에서, 탄압 세력의 상층부를 구성한 선별된 청중에게 들려줬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것은 뉴욕 필의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도 안 한 것보다 낫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다만 우리는 뉴욕 필의 평양 공연을 굳이 대단한 일인 양 떠벌릴 이유도 없으며 마치 북한이 변화할 조짐이라도 있는 양 착각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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