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티베트

중국의 티베트 점령 과정을 보면 장차 중국이 한반도에 영토적 야욕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미국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중국에 대한 환상, 그것은 자칫하면 나라와 민족을 절멸(絶滅)의 길로 이끄는 선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만난 티베트

 

 티베트에서 다시 독립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그 기사들을 보면서 나는 몇년 전 티베트를 여행했을 때를 떠올렸다.

 

 한 외국인 소설가에 의해  '샹그릴라‘로 그려진 이래 현대 문명생활에 지친 이들에게 낭만적인 유토피아로, 혹은 이 시대의 정신적 스승 달라이 라마의 고향으로 여겨진 티베트.

하지만 내가 만난 티베트는 이상향도, 고양된 ‘정신세계’도 아니었다. 버스가 멈추면 달려들어 “기브 미 원 달러”를 외치는 새카만 어린애들, 달라이 라마의 궁전이었던 포탈라궁 앞에 휘날리는 오성홍기-거기서 나는 6.25 이후 가난했던 우리 조국의 모습과  식민치하에서 신음하던 일제 시대 우리 조국의 모습을 함께 보았다.  함께 여행을 했던 어르신들도 연방 '우리가 6.25 이후에 이랬어'라고 말씀하셨다.

'고산병으로 사람을 정신 없게 만드는 이 척박한 땅에 뭐 먹을 게 있다고 기를 쓰고 쳐들어 온 중국놈들도 정말 독다'는 생각과 함께, '그런 중국놈들 옆에 붙어 살면서 민족의 정체성과 독립을 유지해 온 우리 민족도 정말 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국에 대한 자긍심이 저절로 솟아올랐다.

 

티베트와 중국의 관계를 보면,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와 상당히 유사하다.


저족과 강족, 투보왕조


티베트는 5호16국 시대를 연 5호 가운데 하나인 저(氐)족과 강(羌)족을 말한다. 이들의 존재는 삼국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대(漢代)에 티베트 고원에서 할거하면서 중국의 서부 지역에 출몰하던 유목민인 저강계(氐羌系) 부족들은 7세기 초 투보(吐藩.토번) 왕조의 송첸감포(松贊干布)라는 걸출한 영웅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때 투보 왕조의 강역은 오늘날의 티베트는 물론 중국 청해성의 전부, 사천성․감숙성․운남성의 일부에 이르렀다 (이보다 나중의 일이지만 고선지 장군도 티베트의 투보왕조와의 싸움에서 활약했다).

송첸감포는 당나라 태종과 수차례 전쟁을 벌이던 끝에 당의 문성(文成)공주를 왕비로 맞이했다.

이 결혼의 의미에 대해 중국인들은 티베트가 당의 부마국(駙馬國)이 되면서 중국에 복속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티베트인들은 당황실이 공주를 티베트왕에게 내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티베트가 강성하고 자주적인 국가였음을 강조한다.

이는 마치 고구려가 중국의 역대 왕조들로부터 명목상의 관작(官爵)을 받았으면서도, 수나라나 당나라 등과 국가의 명운을 걸고 싸우곤 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그 후 9세기 이래  내분으로 혼돈을 거듭하던 티베트는 13세기에 원(元)나라에 정복되었다. 티베트와 몽골의 인연은 원나라 멸망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6세기 중앙아시아의 패자(覇者)였던 몽골의 알탄 칸이 티베트에서 가장 유력한 불교 종파였던 게룩파의 수장(首長)에게 ‘달라이(지혜의 바다)’라는 호칭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가 정교(政敎) 양면에 걸쳐 티베트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대외 진출에 소극적이었던 명대(明代), 티베트는 명과 형식적인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청대(淸代)에 들어와서는 건륭제(乾隆帝) 때 티베트 토호(土豪)들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중국 지방관을 파견하는 ‘개토귀류(改土歸流)’가 단행되는 등 중국의 영향력은 좀더 강화되었다. 

여기까지는 대략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면서도 내정에 있어서 자치권을 인정받았던 조선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물론 티베트의 경우가 조선의 경우보다 더 중국에 종속적이었지만).


중국 학자가 보는 티베트와 한국

 

19세기, 영국이 티베트 진출을 꾀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중국 학자 왕귀 등은 “일본이 원래 중국의 외번(外蕃)이었던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청을 따돌리고 ‘조선의 독립’을 획책한 것처럼,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서장(西藏 ; 티베트)으로 하여금 자주케 하여’ 장차 서장을 조선과 같은 독립국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라고 강조한다.

섬뜩한 얘기가 아닌가? 조선의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외교를 실질적인 지배-종속 관계로 오인(誤認)하고, 일본에 의해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어처구니없지만, 그 말속에는 한반도가 중국의 지배로부터 떨어져 나간 데 대한 아쉬움이 녹아 있다.

이것이 대다수 중국학자들의 역사 인식이다. 중국의 역사왜곡도 일본 못지않은 것이다. 그러한 역사인식이 노골화된 것이 바로 소위 동북공정인 것이다.


공산중국의 티베트 침공


1912년 청나라가 붕괴되자, 제13대 달라이 라마는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40년 동안 중국 국민당 정부는 티베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티베트는 영국․몽골과 독자적인 조약을 체결하고, 1918년과 1930년에는 티베트 영내로 침입한 중국 군대를 격퇴하는 등 사실상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향유했다.

그러나 1950년 10월 중국군이 티베트를 침공하면서 티베트의 독립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때 티베트 침공 중국군의 정치위원이 등소평이었다). 새로 수립된 공산 정권으로서는 종교적 권위에 의존하는 티베트의 봉건적 통치체제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티베트는 UN과 영국의 지원을 기대하며 중국의 침략에 저항했지만, 한국전쟁에 여념이 없던 국제 사회는 티베트의 호소를 외면하고 말았다. 결국 4000여명의 희생자를 낸 티베트는 1951년 5월, 중국군의 강점 아래서 소위 ‘서장화평해방조약’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당했다.

이 때 중국의 행태는 덕수궁을 포위한 상태에서 ‘을사조약’체결을 강요하고, 이 조약을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 정부가 적법하게 인준하지 않았음에도 ‘국제법상 유효한 조약’으로 우겼던 일제와 다를 바 없었다. 중국이 ‘침공’을 ‘화평해방’이라고 강변하는 것도 ‘침략’을 ‘진출’이라고 호도하는 일제와 닮았다.

내가 티베트를 여행했을 때가 중국의 티베트 침공 5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경축 서장화평해방50주년’이라는 현수막이 도처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여튼 이 조약을 근거로 중국의 당(黨)․정(政)․군(軍) 기관들이 티베트에 주둔하게 되었고, 농노(農奴) 해방 등 사회주의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1959년 라사를 비롯한 티베트 곳곳에서 중국의 강점에 반대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 8만700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 봉기의 와중에 3월17일 제14대 달라이 라마(현 달라이 라마)는 수도 라싸를 탈출해 히말라야를 넘는 2600㎞의 대장정끝에 3월31일 인도로 망명했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 다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수립,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9년 달라이 라마는 중국 통치에 대한 평화적 저항과 세계적 종교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중국 점령하의 티베트에서 중국에 대한 무력 투쟁, 중국 정부의 농정 실패로 인한 대규모 아사(餓死), 문화대혁명기의 종교 탄압 등으로 인해 120여만명에 달하는 티베트인들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근래에 와서는 한족(漢族)의 티베트로의 대량 이주, 중국 본토와 티베트를 연결하는 철도 개설 등으로 티베트의 민족적 정체성은 더욱 약화되고 있다.


중국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 정부나 학자들의 티베트에 대한 태도를 보면, 등골이 오싹해 진다. 티베트의 경우는 북한이 정치-경제적으로 중국에 더욱 종속되거나, 한국이 한미동맹을 포기하고 친중정책을 쓰면서 중국에 종속될 경우, 장차 중국이 한반도에 영토적 야욕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국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중국에 대한 환상, 그것은 자칫하면 나라와 민족을 절멸(絶滅)의 길로 이끄는 선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