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권을 공부하기 위해 방한한 동경대 재학생들, 탈북대학생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 동안 숙연함 감추지 못해]
일본인 납북자 문제와 관련해 김정일 정권을 압박하고 있는 일본에서도 앞으로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폭될 것으로 보입니다.
17일 일본 최고의 명문대로 손꼽히는 도쿄(東京)대학 재학생 수십 명이 한국을 찾아 탈북대학생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일본 내에서의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의 확산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만남에 앞서 일본 측 대표인 가와히토 히로시(川人博) 변호사는 “도쿄의 대학교들은 지금 방학 중이라 그 기간을 활용해 북한 인권을 공부하러 한국에 왔다”고 방문의 취지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 날 도쿄대 학생들이 엇비슷한 나이의 탈북대학생들과 만남을 가진 곳은 신촌의 모임전문공간인 토즈인데요. ‘도쿄대학교 학생과 탈북자의 학술교류회’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번 행사에는 특별히 한국 대학생들도 대거 참여해 일본 대학생들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2006년 이후 북한상황 개선되었다는 건 거짓이다. 내 친척도 한 달 전 굶어죽었다]
첫 번째로 증언에 나선 전북대 재학생 안연홍(女.가명)씨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살다 지난 2003년 8월 탈북한 탈북자입니다. 그는 북한에서의 자신의 경험들을 담담히 이야기하던 중 그 날의 참상이 떠오른 듯 감정에 북받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는데요. 가슴으로 눈물을 삭히며 읽어 내려간 그의 증언 내용들을 들어보겠습니다.
“북한에서 사는 동안 ‘내가 왜 여기서 살고 있는가’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누구나 한번쯤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을 질문일 것입니다. 밀수 등으로 생계를 꾸릴 수 있어 그나마 형편이 나은 국경지역과는 달리 내 고향 청진은 굶어죽은 시체들이 난무했었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보고들은 실상입니다.
나는 청진시 라남구역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에는 기업소들이 많았는데 정작 가동되는 곳은 없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석탄을 훔쳐 장마당에 내다팔아 어렵게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수도 등에 빠져죽은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하루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굶어죽어 나갔습니다.
한국에서는 일부에서 2006년 이후로 사정이 괜찮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불과 한 달 전에 고향 소식을 들었는데 청진항에 살던 친척이 배급도 끊기고 월급도 못 받아 결국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지금 솔직한 심정은 이 한 몸 북한으로 다시 들어가 대북지원 식량이 인민에게 단 한 톨도 돌아가지 않고 있는 실상을, 굶어죽는 실상을 사진으로 찍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북한의 실상은 여러분이 보고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며 평생을 김정일의 꼭두각시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바른 말은 곧 죽음으로 연결됩니다. 국제사회가 협력적으로 북한 인권문제를 대처한다면 반드시 개선되리라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를 위해 힘써주시리라 믿습니다”
증언이 진행되는 동안 경청하던 일본 대학생들 또한 숙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는데요. 이어서는 역시 지난 98년 북한을 탈출하여 2001년 입국한 한양대 재학생 강원철씨가 증언에 나섰습니다. 현재 북한인권탈북청년연합의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한 그의 증언 내용을 들어보겠습니다.
[중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고통, 하지만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고난의 행군으로 300만이 굶어죽은 당시 나는 북한에서 살았었고 고향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학교에 정작 학생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유는 공부보다도 먹는 것이 당장 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반의 정원이 42명인데 심지어 고작 7명만 출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회적 혼란 속에 굶어죽은 친구들도 많았고 접경지역인 탓에 중국으로 탈북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당시 고향에는 북한에는 죽도 없어 나무나 풀뿌리를 벗겨먹는 실상인데 중국에는 먹을 것이 많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이런 소문에 이끌려 우리 가족도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내 나이 16살이었습니다.
처음 도착한 중국 연길(延吉)에서 길 가에 줄지어 늘어선 식당들을 보며 별천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몰랐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태극기를 중국에서 TV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한국을 거지의 나라, 미국의 식민지라고 교육합니다. 하지만 그 때부터 우리가 잘못 배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으로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줄로만 알았던 기대와는 달리 실상은 정 반대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중국 공안이었습니다. 그들은 탈북자를 불법월경자로 간주해 잡아다 북송시켰습니다. 우리도 중국 공안을 피해 한국 대사관에 진입을 시도했으나 불행히 실패하여 북송된 뒤 청진 집결소에서 4달간 수감되었습니다.
집결소에서 지내는 동안 영양실조로 13명이 죽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장면을 지켜보며 나도 저렇게 되지 않을까하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오직 이 곳에서 벗어나기만을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중국으로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석방된 제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북한이라는 거짓된 사회를 벗어나 그나마 조금은 자유가 있는 중국으로 다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탈북에서 한국선교사를 만나 한국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북한 인민들이 미얀마처럼 봉기하지 못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과 ‘수용소’ 때문]
여기까지 스스로의 인생을 담담히 풀어나간 그는 이어 북한의 생생한 인권실태를 일본 대학생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북한 인권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공개처형입니다. 약 2년 전 일본에서도 보도된 바 있는 공개처형은 사람들이 많은 시장 등지에서 진행됩니다. 당시 저도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 처음 접한 것은 14살 때였습니다. 어느 날 오전 수업만 마친 교사가 오후에 행사가 있다며 학생들을 어디론가 데려가 공개 처형을 보여주었습니다. 불과 50미터 앞에서 12발이 사격되는 것을 보고 어린 나이에 많은 공포심을 느꼈습니다.
또 심각한 인권 문제는 정치범 수용소입니다. 그곳에 수감된 사람들은 오로지 김정일 체제를 비난했다는 이유만으로 잡혀간 사람들입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왜 북한 사람들은 미얀마나 티베트처럼 민중 봉기를 하지 못하느냐고 묻는데 이유는 내가 말 한마디 잘못하면 나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원인은 자유로운 이동을 억압하는데 있습니다. 난 평양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을 평양을 ‘또 다른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얘기들은 밤을 새도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일본에도 납북자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 문제의 원인은 바로 김정일 정권이라 생각합니다. 일본이 납북자뿐만 아니라 인권 문제에도 많이 참여해주시길 바랍니다”
증언이 모두 끝난 뒤에는 한일 대학생들 간에 북한인권의 문제점을 토론하고 일본인 납북과 북한 인권의 연계성을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일본 학생들은 살아있는 증인들인 탈북대학생들의 증언을 듣는 동안 북한 인권문제의 심각성을 가슴 깊이 느낀 듯 일본에 귀국한 뒤에도 북한 인권을 위한 활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날 모임을 방문한 일본 유력 일간지 요미우리(読売) 신문의 마에다 야스히로(前田靖廣) 기자는 일본 내에서의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 확산을 위해 언론보도에 주력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오주한 기자 ohjuhan@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