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에서 지역구 공천은 아무래도 ‘당선 가능성’이라는 현실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전국적인 명망가, 전문성을 인정받은 직능대표, 당에 기여한 바가 많은 당원이라고 해도 지역적 기반이 약해 당선 가능성이 낮다면, 공천을 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비례대표(전국구) 제도는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제도이다.
총선에서 각 정당의 비례대표 공천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각 정당은 비례대표 입후보자들을 통해 자기들의 이념이나 정치적 지향점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각 당의 비례대표 공천은 지역구 공천에 버금가는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24일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의 비례대표 공천이 발표됐다. 26명 내외의 당선을 기대하는 한나라당은 50명, 20명 내외의 당선을 기대하는 민주당은 40명을 비례대표 의원으로 공천했다.
한나라당의 비례대표 의원들 명단을 살펴본 느낌은 한 마디로 ‘한나라당스럽다’는 것이었다. 무슨 대표, 회장, 위원장, 교수, 박사, 변호사들이 그렇게 많은지…이미 청와대와 내각, 지역구 의원들을 그런 인사들로 채웠으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다시 같은 부류의 인간들로 채우는 것을 보면서, ‘한나라당은 역시 한나라당’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비례대표 1번으로 빈민운동가를 내세운 것도 좋고, 2번으로 장애인을 내세운 것도 좋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한나라당 전국구 후보자들 가운데 지난 10년 동안 좌파 정권에 맞서 싸워온 사람,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 온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한나라당 정권이 위기에 처했을 때, 거리로 나와 투쟁할 수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국회에서 야당과 몸싸움이 벌어졌을 때,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백병전을 벌일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면 북한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 온 이두아 변호사와 자유주의 이념을 전파하는데 앞장서 온 나성린 한양대 교수 정도랄까…이두아, 나성린 두 사람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도대체 저 사람이 왜?” 혹은 “저 사람이 언제부터 한나라당 당원이었기에?”라는 의문이 절로 드는 이들 뿐이었다.
여성에 대한 배려, 장애인이나 빈민 등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기 위해 급거 ‘징발’해 온 것이 빤한 인사들로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비례대표 입후보자들의 면면도 마땅치 않거니와, 한나라당이 이들을 통해 국민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인지는 더욱 요령부득이었다.
하기야 한나라당의 비례대표 공천은 항상 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금뱃지를 단 사람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어떻게 처신했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들은 당이 위기에 처했을 때 “앞장을 서 달라”고 하면, “나는 징발되어 온 사람인데…”라며 몸을 사렸고, 몸싸움에 앞장을 세울라치면 “이 옷이 얼마짜리인데 난 못 나가요”라며 꽁무니를 뺐다.
그런 작태를 한두 번 본 것이 아닐 텐데, 한나라당은 이번에도 그런 부류의 인간들에게 ‘전국구’ 뱃지를 달아줬다.
민주당의 여성 비례대표 후보들
통합민주당의 비례대표 의원들 명단은 달랐다. 한 마디로 그들의 ‘전투의지’가 물씬 풍기는 인선이었다. 재야운동이나 DJ당에서 투쟁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 국회에 나가서 ‘진보’진영을 대표해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들, 당과 ‘진보’진영에 대한 충성심으로 충만한 사람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일했던 사람들, 그것도 아니면 지연(地緣)이라도 확실한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예컨대 홀수번호를 받은 여성 후보들만 봐도 민주당 후보들은 한나라당 후보들과는 달랐다. 한나라당 여성 후보들의 면면을 보자. 분자생물학 박사, 호남향우회 여성회장, 행정학 박사, 미녀 변호사, 영양사협회 회장, 서울대 병원 간호부장, 교수… 모두 다 ‘훌륭하신 분들’이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이 부족하냐고? 민주당 여성 후보들을 보면 답이 나온다.
최영희 전 청소년위원장(3번). 청소년위원장이라고 해서 사회학이나 복지학을 전공한 교수나 박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1970년대 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에서 활동을 시작, 유명한 석탑노동연구원에서 노동운동으로 잔뼈가 굵었고, 도서출판 석탑 대표로 수많은 운동권 서적을 펴냈으며, 여성민우회 부회장으로 여성운동계에서도 이름을 날렸던 역전의 용사다. 거기에 내일신문 부회장,대통령정책기획위원, 청소년위원장으로 경영과 행정면에서의 경험도 쌓았다.
신낙균 전 문화관광부 장관(9번). 여성유권자연맹 회장 등을 지낸 대표적인 여성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 아태재단 자문위원,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문화관광부 장관 등을 지낸 김대중-이희호 사람이다.
김상희 전 여성민우회 공동대표(11번). 여성민우회에서 활동을 시작해 공동대표까지 지냈고,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위원, KBS 이사를 거쳐 장관급인 지속가능발전위원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박선숙 전 청와대 공보수석(13번).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민청련 여성국장, 민족민주연구소 부소장, 여성단체연합 정책위원을 거쳐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한 인물. DJ의 총애를 받아 30대 후반의 나이에 청와대에서 1급 공보기획비서관을 지냈으며, 이후 40대 초반의 나이에 청와대공보수석비서관, 환경부 차관을 지냈다. 15번을 받은 김유정 민주당 국장, 19번 유은혜 공동 부대변인 등은 당에서 궂은 일을 하면서 성장해온 당료 출신들이다.
일견 직능대표 같아 보이는 여성 후보들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다 내막이 있다. 전혜숙 경북약사회 선임감사(5번). 그냥 약사 대표가 아니다. 열우당 국민참여본부장을 지냈고, 그 덕에 노무현 정권 시절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감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전현희 대한치과의사협회 고문변호사(7번)도 마찬가지다. 치과 의사 출신으로 변호사가 되었다 해서 화제가 됐던 그는 민주당 최재천 의원과 같은 변호사사무소에서 일했고 2004년 열우당 공천심사위원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17번을 받은 김진애 KAIST미래도시연구소 겸임교수는 30대 무렵부터 국내외적으로 크게 주목받았던 여성건축가다. 그러나 그는 김대중 정권시절 제2건국위원회에 참여한 이래, 열우당 발기인, 동 과학기술특위 위원장, 2004 총선 공동선거대책위원장, 신행정수도특위 추진단장을 거쳐 노무현 정권 시절 대통령자문건설기술건축문화선진화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한 마디로 해서 ‘전문성’과 ‘코드’를 함께 갖춘 인사들인 것이다. 이념, 당이나 진영에 대한 충성심, 경력, 정치적 투쟁력의 측면에서 한나라당 여성 후보들이 이들을 당해낼 수 있을까?
한나라당은 ‘명사’, 민주당은 ‘투사’를 공천
남자 비례대표 후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위원장 출신인 최문순 전 MBC사장(10번), 농민운동가 출신인 박홍수 전 농림부 장관(16번), 오랫동안 DJ를 따라다니며 정치를 해온 김충조 민주당 최고위원(12번) 등은 그쪽 동네에서는 ‘역전의 용사’들이다. 4번을 받은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은 노무현 정권 시절 청와대 안보실장, 외교부 장관으로 ‘코드외교’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인사다.
일견 장애인 배려 케이스인 것 같아 보이는 박은수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이사장(2번)은 일찍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판사 임용이 거부되자 소송을 벌여 판사 임용을 쟁취한 `투사`다. 이후 여성-장애인 관련 시민운동을 하다가 열우당에 참여해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2004년에도 열우당 비례대표 공천을 받았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 빈부격차시정위원회 위원과 장애인고용촉진공단 이사장을 지냈다.
서종표 전 3군 사령관(8번), 김학재 전 법무부 차관(18번)은 각각 군부와 검찰 내 호남인맥과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는 호남 출신 인사들이다.
민주당 비례대표 입후보자 가운데 순수하게 직능대표성을 인정할 만한 사람은 1번을 받은 이성남 전 금융통화위원(여성)과 6번 정국교 H&T대표이사 정도다. 그나마 정국교씨는 손학규 대표의 열성 지지자다.
민주당은 비례대표 공천을 통해 소위 ‘민주평화개혁세력’의 가치를 분명히 지켜 나갈 것을 선언하는 한편, 자신들과 ‘코드’를 맞춰온 사람들이나 충성을 다 해온 사람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 주었다. 그들 모두는 국회에 나가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인사들이다.
반면에 한나라당은 어떤가?
보수우파를 대변할 만한 사람도, 야당과 몸싸움을 할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그 가운데 정권교체를 위해 헌신해온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잘난 사람들’의 사교모임이라고나 할까.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모두 ‘~사’들을 공천했다. 한나라당은 박사, 변호사, 교수 같은 ‘명사(名士)’들을 공천했고, 민주당은 ‘투사’들을 공천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 결과가 제18대 국회와 2012년 대선에서 어떻게 나타날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한나라당은 마지막까지 애국우파를 실망시켰다.
독립신문 http://www.independent.co.kr/
한나라당은 `名士`, 민주당은 `투사` 공천
- 강철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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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3-26, 14: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