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칼럼]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둘러싼 논쟁

"한국 좌파는 경제력으로 세계 10위권까지 발전한 ‘명’(明)의 역사를 외면했다"
 
구로다 가쓰히로.ⓒ sankei.com
한국에서 새로운 역사 교과서 만들기가 시작됐다. 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가 바로 그것이다.

기존의 교과서에 문제를 제기해온 보수성향 학자들이 중심이 된 ‘교과서 포럼’이 편집한 이 책에 대해 좌파성향 언론들은 벌써부터 ‘한국판 후쇼사 교과서’라며 비난하고 있다.

이들이 후쇼사 교과서를 지목한 이유는 이 새로운 교과서 만들기가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운동을 닮아 있고, 그 내용도 일본에서 새로운 중학 역사 교과서를 발행한 ‘후쇼사’의 교과서처럼 역사를 왜곡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례로 한국의 대안교과서는 일본 통치 시대를 미화했으며 한국 현대사에서도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높게 평가하는 등 과거사를 왜곡·정당화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좌파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일본의 후쇼사를 꺼낸 것 자체가 여론의 비판을 유도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최근 KBS 방송의 아침 라디오·뉴스 전화 인터뷰를 받았다. 예상대로 대안교과서는 한국판 후쇼사 교과서와 같다는 비판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해 “후쇼사 교과서는 중학생을 겨냥한 통사로 질과 양에서 (대안교과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비슷한 점이 있다면 역사를 다각적으로, 그리고 균형이 잡힌 기술을 해 차세대 국민들이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 대해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 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한국에서는 80년대 후반 이른바 민주화 운동으로 좌익·친북 사상이 해금됐다. 특히 90년대 후반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하에서 각계에 이 같은 사상이 침투했다. 교과서도 당연히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좌익 민중 사관에 기반을 둔 이들은 국가·정부가 하는 것은 언제나 ‘惡’으로 그에 대한 비판, 반대, 저항은 ‘善’으로 규정했다.

그 결과 한국 현대사는 야당 탄압 등 정치적 독재 상황이나 반정부 투쟁 등 ‘암’(暗)이 강조되어 한국이 경제력으로 세계 10위권까지 발전한 ‘명’(明)의 역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하는 기술이 되어 버렸다. 말하자면 한국판·자학 사관이다.

예를 들어 대안교과서는 문화 부분에서 대표적 현대 영화인 ‘별들의 고향’이나 ‘서편제’ 등 명작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종래의 교과서는 한국전쟁 당시 친북·좌익 게릴라를 그린 ‘남부군’이나 반정부 투쟁인 광주 사건을 소재로 한 ‘꽃잎’ 등이 게재되어 있다.

라디오·인터뷰는 한층 더 ‘대안교과서가 식민지 시대를 미화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이에 대해 “그 시대를 일본 지배에 의한 억압과 수난, 그에 대한 민족적 저항으로 그린다고 하는 기본적 범위에 변화는 없다고 생각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그 시대에 경제성장이 있어, 인구가 증가해 신분 사회가 사라져 여성의 사회 진출이 시작됐고, 새로운 근대적인 사고나 생활 스타일이 퍼진 것 등 다양한 면이 새롭게 기술됐다. 한국인도 여유를 갖고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 것은 아닌가”

한국은 지금 당연한 교과서를 만들면서 서로(?)들 고생하고 있다.

[필자]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日 산케이신문 서울 지국장
[출처] 산케이신문 04/01

정리/프리존뉴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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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뉴라이트, 김일성 항일투쟁 부분인정
대안교과서 “(김일성), 1937년 항일 투쟁으로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
김필재 기자 2008-03-26 오전 12:36:42  
 

한국 근·현대사를 우파적 시각에서 재조명했다는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가 북한 독재자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부분 인정, 논란이 예상된다.

25일 시중서점으로 깔리기 시작한 대안교과서는 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이 모여 ‘교과서포럼’(공동대표 이영훈·박효종·차상철)을 결성한 2005년 1월25일로부터 3년 만에 나온 것.

대안교과서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바로 쓰다”라는 머리글 제목처럼 대한민국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국부(國父)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대안교과서는 “비타협적 반공주의는 인권이 부정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다”면서도 “대한민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올바로 잡는 데 동시대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 대통령이 주도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전시작전통제권의 이양에 대해서도 ‘한국의 자주권을 포기한 굴욕’이라는 기존 입장과 달리 ‘공산주의 세력의 공세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기 이한 선택’이었음을 강조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5·16을 군사쿠데타로 10월 유신체제를 ‘또 한 차례의 정변’으로 규정하면서도 각각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했다.

먼저 5.16에 대해 “급격한 경제성장은 한국인의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5·16 쿠데타는 근대화혁명의 출발점”으로 규정했고, 10월 유신체제에 대해서는 “절대 권력을 성립시킨 체제였지만 행정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해 자주국방과 중화학공업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에 대해서는 “1937년 항일 투쟁으로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유명해졌으나 북한정권 수립 이후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이 점점 심화하는 비극의 역사를 펼쳤다”면서 북한에 의해 조작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부분 인정했다.

북한은 그동안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를 역사적 사변으로 일컬으며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 가운데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겨왔다. 일례로 북한의 중학교 교과서는 ‘김일성이 1937년 3월 서강(西崗)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 계획을 제시하고 행동에 옮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교과서는 “경찰주재소, 면사무소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습격소탕하고 보천보 일대를 해방했다. 거리에 떨쳐나선 인민들은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환영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교과서를 유심히 읽어보면 이상한 구석이 발견된다. 이유는 몇 명의 전투원이 참가하고 몇 명을 사살했다는 등 구체적인 전과(戰果)에 대해서는 일절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보천보 전투를 통해 “조선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할 것을 외쳤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는 주장만 있다.

김일성 및 북한연구가들에 따르면,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38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이 주재소에 있었을 뿐이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은 90여명을 인솔하여 보천보를 습격했다. 우선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부터 공격했다.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며 들어가는 바람에 총소리에 놀란 경찰관들은 모두 피신했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등 뒤로 피하던 어느 경찰관의 딸이 총탄을 맞고 숨졌다.

김일성은 총기고에서 경기관총 1자루, 소총 6자루, 권총 2자루, 탄약 수백 발을 탈취했다. 이어 농사 시험장, 삼림보호구,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보천보 전투는 전과로 치면 미미한 전투였다. 적의 무기를 탈취한 것이 전과라면 전과지만 2명의 민간인도 희생됐다. 북한 교과서가 보천보 전투의 구체적인 전과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보천보 전투는 동북항일연군 1군 2사, 4사와 2군 6사(김일성 부대)의 연합 부대의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부대 단독 작전인 것처럼 조작되어 왔다. 한편, 보천보 전투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김일성 장군을 연구하다 수년 전 타계한 이명영 전 성균관대 정치학과 교수는 ‘김일성 열전’을 통해 북한의 이 같은 역사조작을 밝힌 바 있다.

이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1887년 태어난 일본육사 출신의 본명이 김광서라는 사람”이고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항일투쟁의 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 것은, 소련정권이 해방 후 북한의 공산정권수립에 용이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지명도 높은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당시 소련의 지휘 하에서 훈련받았던 만주의 공산유격대 출신인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로 북조선에 들어와서 처음엔 김영환(金英煥)이란 변명(變名)으로 행세했다.

이후 1945년 10월 11~12일,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각본으로 평양시내 ‘다미야’라는 일본 요리집 자리에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 멤버들에게 가짜 김일성은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이른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고 김성주로 하여금 김일성으로 행세케 해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것.

당시 현장에 있었던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전 평안남도지사 박인각씨는 “연설에 앞서 스티코프 점령군사령관(대장)이 그를 김일성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참석했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신의주가 고향인 전직 교장 이영훈씨는 “군중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파악한 스티코프는 여기 있는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김일성 장군이 맞거나 틀리거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잘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해 소련도, 김성주 자신도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성주가 항일투쟁의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언이 있다. 증언의 주인공은 ‘김일성 평전 속(續)’을 내며 김일성을 연구하고 있는 허동찬 고려대 교수.

재일동포로 조총련 전문가인 허 교수는 “보천보 전투 후 김일성장군을 뒤쫓던 일본군이 그해 11월 무송현에서 그가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다”며 “그 후 4개월 뒤에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다시 나타났는데, 이 사람이 평소 우쭐대기 좋아하는 성격의 김성주였다”고 말했다. (2002년 8월 27일자 미래한국신문 인용)

 

또 1945년 해방신문의 기자로 동란 후 월북, 북한 외무성의 국장까지 지냈던 박갑동(82)씨도 있다.

그는 “평양에서 있었던 김일성장군 환영식 사진을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다 일본군에게 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박달과 박금철에게 확인시켰더니, 사진 속 인물이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했다”며 “박달과 박금철에 관해서는 보천보전투의 일본 측 판결문인 ‘혜산사건 판결’에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결국 위와 같은 증언과 기록들은 모두 북한에서 주장하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이 조작임을 나타내고 있다.

프리존뉴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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