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영혼이 바로 국가이념

따라서 이념 없는 실용을 추구하겠다는 것은 정신 나간 나라를 만들겠다는 이야기이다.
대한민국의 영혼은 살아 있는가

趙甲濟 月刊趙鮮 기자


인간이든 조직이든 靈魂(영혼)이라 불리는 것이 있을 때 고귀한 존재가 된다. 靈魂은 국어사전에 따르면 '육체와는 다른, 그러나 육체에도 깃들이어 있어서 생명체의 제반활동을 지배하며, 죽은 후에도 없어지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는 정신적 실체'이다. 영혼이란 '영속성이 있는 최고의 정신'인 셈이다. 영혼은 이성과 감성을 아우르고 氣魄(기백)과 理想(이상)을 합친 높은 정신력의 실체이다.

위인들과 선진국의 행동에서 이런 魂의 實在(실재)를 느낄 때가 있다. 미국의 건국이념,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천년간 공화정을 유지해가면서 정치적 군사적 자주성과 함께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누렸던 베니스의 尙武(상무)정신, 李舜臣(이순신)과 朴正熙(박정희)의 최후, 그리고 신라 지도부의 對唐 결전의지가 그런 사례이다.
신라가 唐과 함께 손잡고 백제를 멸망시킨 뒤의 일이다. 唐이 여세를 몰아 신라마처 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태종무열왕은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한 신하가 唐과 싸우자는 강경론을 냈다. 무열왕은 '唐나라 군사가 우리의 적을 멸해주었는데 도리어 함께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소?'라고 했다. 이에 金庾信(김유신)이 말했다.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신라는 개, 唐은 주인으로 비유되고 있다. 신라는 唐에 신세를 졌고 그것에 감사하지만 唐이 신라를 우습게 여기면 그런 唐과는 정면 대결하여 정체성을 지켜내어야 한다는 뜻이다. 당시 唐은 전성기의 세계제국이었다. 신라 지도부는 그런 唐과 싸워서라도 지켜내어야 할 자존심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원동력이 된 국가적 氣魄, 즉 魂이었다. 이런 魂이 있는 나라는 어떤 모습인가.
唐軍의 최고 사령관 蘇定方이 귀국하여 唐 고종에게 보고하니 고종은 '어찌하여 신라마저 치지 않았는가'라고 추궁했다. 蘇장군은 이렇게 해명했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仁), 백성을 사랑하며(愛), 그 신하가 충성으로(忠) 나라를 섬기고(事), 아랫사람은 윗사람 모시기를 父兄(부형) 같이 하니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靈魂(영혼)이 있는 나라는 仁愛忠事, 즉 어짐 사랑 충성 섬김의 기풍이 있는 사회라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예에서 보듯이 한 국가의 정신력은 지도층의 어짐과 사랑이 백성들의 충성과 섬김을 불러낼 때 그 나라의 氣魄(기백), 또는 영혼으로 승화된다. 세계사에서 일류국가를 만들었던 민족은 이런 높은 정신력을 가졌다. 그런 나라의 쇠퇴는 이런 정신력의 쇠퇴와 함께했다. 미국의 魂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플리머스에 상륙했던 청교도 정신으로 상징된다. 메이플라워 정신은,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고 그렇게 얻은 자유로써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미국의 독립정신으로 발전되었다.

그리스의 인간중심 사상, 로마의 명예심, 프랑스의 인간존중, 네덜란드의 관용정신, 독일의 野性(야성)과 기율, 일본의 武士道(무사도), 영국 紳士道의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 신라 화랑도의 세속5계 가운데 특히 殺生有擇(살생유택)의 윤리가 이들 일류국가의 정신적인 表象(표상)이다.

통일신라에 이어 민족사상 두번째로 일류국가가 되려 하는 대한민국의 魂은 무엇인가. 지금은 폐기되었지만 영원히 유효할 국민교육헌장의 한 귀절이 생각난다.
<길이 후손에게 물려줄 영광된 통일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자유통일과 선진조국 건설이 역사적 사명임을 자각한 국민들이 신념, 긍지, 근면, 슬기로 무장하여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 한국인의 念願(염원)이다. 이 염원을 '이론화된 신념', 즉 理念(이념)으로 승화시킬 때 국가적 행동 윤리와 국민적인 正義感(정의감)이 나온다. 이 행동윤리의 중심에는 '反共자유'가 자리잡고 있다. 일류국가를 건설하는 길을 막고 있는 金正日과 從金(종김)세력을 치우고 남한에 이어 북한까지 민주화함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 그 자유속에서 행복한 삶을 함께 추구하자는 것이다.

국가의 魂(혼)은 국민 각자에게는 정의감과 희생정신으로 구체화된다.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의 두 副사령관은 각자의 아들(관창과 반굴)을 먼저 희생시켰다. 6.25 기습을 당하고도 자유의 신봉자가 되어 있던 국군은 후퇴할지언정 조직적인 항복이 없었다. 반면 북진 때 북한군은 조직 자체가 붕괴하여 부대 단위로 항복했다.
한 국가의 魂은 대통령 등 지도부에 의하여 표현된다. 훗날 역사는 李承晩, 朴正熙 두 대통령을 새로운 민족혼의 건설자, 金泳三, 金大中, 盧武鉉 세 대통령을 민족혼의 파괴자로 기록할 것이다. 李承晩의 국민국가 건설에 朴正熙의 근대화와 자주국방 의지가 채우지면서 한국인은 선진국 건설을 이상으로 내세울 만큼 기백이 높아졌다. 金泳三은 현대사의 총체적 부정으로써, 金大中은 민족반역자 金正日에 대한 굴종으로써, 盧武鉉은 저급한 言說로써 민족의 기백과 긍지를 깎아내리고 그 영혼을 더럽혔다. 물질적 수준은 일류국가 대열까지 왔으나 이 세 대통령의 무식하고 반역적이며 저질스러운 행동에 의해서 대한민국의 정신력이 망가지고 있다.

국가원수란 자가 동족 300만명을 사실상 굶겨죽인 독재자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고 노예상태의 동족에 대해서는 냉소적 태도를 취하는가 하면 이 독재자를 타도하려는 애국자들을 적대시해도 국민들이 행동하지 않을 정도로 '정신적 개판'이 되었다. 국가의 영혼은 교양 있는 국민들과 신념 있는 지도층의 합작품인데, 한국에선 지도층이 솔선해서 국민교양을 파괴하고 있다.

국가의 魂은 理想, 正義, 용기를 핵심가치로 한다. 그 혼을 지켜가야 할 대통령이 영혼의 오염자가 되고 있고 야당대표도 金正日에 대해서는 비판 한 마디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일류국가를 만들어낼 것인가, 우리의 고민은 실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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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관료: 착취형, 부패형, 식민지형(권력추종에 의한 권력남용),



하멜이 본 朝鮮人의 高試열풍
-'과거 시험에 매달려 늙을 때까지 공부하고 가난해진다'


1653년 동인도 회사 소속의 네덜란드 선박(스뻬르베르)이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출발하여 대만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제주도 남쪽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破船했다. 36명이 해안에 표착했다. 그 중 한 사람이 헨드릭 하멜이었다. 1666년 하멜 등 8명의 네덜란드 선원들은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탈출했다. 이들을 조사한 일본 당국은 朝鮮정부에 나머지 선원의 송환을 요청했다. 조선은 생존자 7명을 일본으로 보내주었다. 하멜 일행은 1667년10월 나가사키를 출항하여 바타비아로 돌아갔다. 하멜은 바타비아에 남았고 다른 7명은 하멜이 작성한 「하멜 보고서」 한 통을 갖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1668년 이 보고서는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되었다. 이어서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판으로 출판되었다. 유럽에 한국을 가장 소상히 알리는 책이 된 것이다.

하멜은 조선 땅에 도착한 최초의 네덜란드인은 아니었다. 1627년에 얀 얀스 벨떠프레이라는 네덜란드인이 동료 두 명과 함께 표착했다. 그는 朴淵, 朴燕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武科에 합격하여 훈련도감에서 관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 朝鮮女人과 결혼하여 조선땅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훈련도감에서 서양식 무기-홍이포와 조총을 개발하기도 했다. 하멜 보고서는 조선에 머물던 13년간의 밀린 봉급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 보고서는 일기체로 쓰여져 있는데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다. 하멜이 표류할 때부터 기록을 했고, 그 기록을 갖고 탈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보고서에 적힌 地名도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考證(고증)되었다. 하멜 보고서는 제주도에 표착하던 1663년8월15일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노를 내린 다음 즉시 닻도 내렸다. 그러나 파도와 수심 그리고 강한 바람으로 인해 닻을 바닥에 고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갑자기 배가 해안가에 세 번 정도 부딪히더니 산산조각아 나버렸다. 下갑판 선실에 있던 사람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갑판 위로 올라올 시간도 없었다. 갑판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은 배에서 뛰어내렸고 다른 몇몇은 파도 때문에 사방으로 휩쓸려 갔다. 해안에 닿은 사람은 15명뿐이었지만 대부분 알몸이었고 부상을 심하게 입었다. 바위 위에 앉아 있다 보니 난파선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차츰 들렸다. 그러나 너무 어두워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고 도울 수도 없었다>(「하멜 보고서」-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기획, 유동익 옮김, 중앙M&B 발간).

하멜 일행중 생존자는 36명이었다. 그들은 우선 제주목사의 관할로 넘어갔다. 그해 10월 조정은 朴燕을 통역으로 파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대 후반이었다. 하멜은 네덜란드 사람인 朴燕이 처음에는 네덜란드 말을 잘 하지 못했으나 함께 여러 날 있는 동안 모국어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朴燕은 하멜 일행에게 『귀하들은 이 땅에서 일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는 암울한 충고를 했다. 하멜은 『우리는 통역을 구했다는 기쁨이 곧바로 슬픔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하멜 일행은 서울로 불려 올라가 왕의 호위부대에 배속되었다. 2년 뒤 두 네덜란드 선원이 사고를 친다. 凊의 사신이 서울에 왔다가 떠나던 날 헨드릭 얀스, 헨드릭 얀스 보스라는 두 선원이 凊의 사신이 지나가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凊 사신의 말머리를 붙들고 본국으로 송환시켜줄 것을 간청했다. 조선 관리들에게 넘어간 하멜 일행은 곤장 50대씩을 맞았다. 시위를 한 두 선원은 투옥되었다가 獄死했다. 나머지는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하멜이 관찰한 조선인의 사는 모습과 관청의 하는 일도 아주 사실적이다. 하멜은 가난에 찌든 조선인의 생활상을 개탄하듯 서술하면서도 높은 學究熱(학구열)에 대해서는 혀를 내두른다.
<양반과 평민은 자식을 아주 잘 교육시키려고 한다. 그들은 밤낮없이 앉아서 글을 읽는다. 어린 소년들이 賢人들의 저서를 읽고 깨닫고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승진의 證書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많은 젊은 양반들이 늙었을 때는 가난해진다. 그들은 승진의 증서를 받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는데, 그들이 지불해야만 하는 기부금 마련에 때로는 재산이 부족하고, 그 비용은 지불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하멜은 조선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관찰기도 더러 남겼다.
<그들은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들은 온순하고 신앙심이 두텁다. 네덜란드 사람 벨떠프레이가 우리들에게 말하기를, 청나라가 얼음 위를 건너와서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숲속에 들어가 목 매달아 죽은 것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수가 적군에게 맞아죽은 것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싸우다가 누군가가 발 아래로 넘어지면 즉시 도망간다>

2003년은 하멜이 제주도에 기착한 지 350년이 되는 해였다. 2002년 한국이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사람 히딩크 감독 덕분에 세계적으로 새삼 유명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코리아를 세계에 알리는 데 네덜란드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맺은 것 같다. 물론 하멜의 조선과 히딩크의 한국은 완전히 딴 나라이다. 17세기는 네덜란드의 세기라고 부를 정도로 해외 진출이 왕성했다. 16세기에 시작된 스페인에 대한 독립전쟁에서 이긴 이후 놀라운 에너지가 폭발했던 것이다. 하멜과 朴燕의 한국 상륙은 그런 시대적 흐름의 한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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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세훈 시장이 2006代인가?


조선조 시절 515년간 漢城판윤이 1952명. 매관매직으로 망한 조선조의 재판이 대한민국의 관료+좌파 결탁체이다.
趙甲濟

1395년에 제1대 漢城판윤이 임명되었다. 이 자리는 요사이로 치면 서울시장이다. 1910년 조선조가 망할 때까지 515년간 1952명의 한성판윤이 있었다. 1인당 평균 석 달을 재직한 셈이다. 조선조 말기에 가면 賣官賣職이 성했다. 동래부사 자리를 돈을 받고 판 조정은 그가 부임하러 가는 도중에 또 다른 동래부사를 내려보냈다. 관리들은 최단기간내에 수탈을 하여 본전 이상으로 벌어야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한성판윤 시절까지 쳐서 2006대이다. 1948년 1대 서울시장이 임명된 후부터 쳐서 吳 시장은 33代이다. 평균 2년을 재직한 셈이다. 朝鮮朝 시절보다 많이 좋아졌다.

한국 근해에는 고래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조선조 시절엔 포경업이 생기지 않았다. 바닷가에 고래가 표착하여 버둥대면 마을사람들은 몰려나가 고래를 바다로 밀어넣었다. 관리들이 알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고래를 잡게 하고 기름을 뺀다, 고기를 뜬다 하여 실컷 일만 시키고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란 기행문에서 '한국인들은 가난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돈을 벌면 다 뜯겨 버리니 일부러 부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이 비숍 여사는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 근방 한국인 村을 방문하곤 놀랐다. 마을이 깨끗하고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비숍 여사는 예언적 記述을 남겼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조선사람들이 조선조의 착취 시스템을 떠나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
1904년 이승만도 똑 같은 취지의 글을 썼다. 한국의 평민들은 세계에서 최고 수준이고 지배층은 下之下라는 것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조선조의 양반 전통을 계승한 관료세력이 약화되었다. 평민들의 에너지를 누르고 있던 용수철의 뚜껑이 날아가니 위대한 민족적 저력이 폭발했다. 그럼에도 조선조의 이런 지배층 생리가 모습을 바꾸어 한국에서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다. 일파는 좌익세력이 되었고, 다른 일파는 관료주의자들이 되었다. 김정일 정권은 조선조 지배 관료층의 진짜 후예이다.

우파가 정권을 도로 찾았지만 관료주의를 타파하지 않으면 5년 뒤에는 좌파+관료주의 결탁체에 빼앗기게 될 것이다. 한국 애국세력의 2대 敵은 공산주의와 관료주의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들과 싸울 때는 애국세력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하고 그렇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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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 음력 1월29일 남한산성에서 농성중이던 인조는 주화파 최명길을 淸軍 진영으로 보냈다. 최명길은 淸에 대한 강경론으로 병자호란을 부른 책임이 있는 오달제 윤집을 데리고 갔다. 청태종은 두 사람에게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의 盟約을 깨뜨리게 했느냐'고 물었다.

오달제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300년 동안 명나라를 섬겨왔소. 명 나라가 있다는 것만 알 뿐 청나라가 있다는 것은 모르오. 청국이 황제를 참칭하고 사신을 보내왔으니 諫官의 몸으로 어찌 화친을 배척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라고 했다. 윤집은 '우리나라가 天朝(명나라)를 섬겨온 지 이미 300년이나 되어 의리는 임금과 신하요, 정은 아버지와 아들이오. 더 할 말이 없으니 속히 나를 죽여주시오'라고 말했다.

두 충신은 말은 기개가 있으나 답답하기 그지 없다. 漢族 나라 明에 대한 충성과 일편단심만 보일 뿐 그들이 불러들인 전쟁으로 죽어나가고 있던 백성들에 대한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 망해가는 明에 대한 일편단심은 在野 선비가 해야 할 일이지 在朝의 관리가 할 일은 아니었다. 국제정세에 대한 무지, 외교와 군사에 대한 무지, 백성들에 대한 무관심만 보여주는 조선조 엘리트의 수준이다.

민족사의 극과 극을 이야기하라면 對唐 결전으로써 唐軍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민족통일국가를 완성한 문무왕, 김유신 등 7세기의 신라 지도부가 최상이다. 최악은 사대주의와 위선적인 명분론에 혼을 빼앗겨 할 필요가 없는 전쟁을 초대하여 王朝도 民生도 도탄으로 밀어넣었던 인조 시대의 집권세력이다.

신라 지도층과 인조 시절 지도층은, 같은 민족인데 어떻게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신라 지도층의 성격은 개방, 활달, 文武겸전, 풍류, 자주, 명예, 오기, 자존심, 품격으로 표현된다. 인조 지도층의 성격은 편협, 명분, 위선, 독선, 무능, 文弱으로 표현된다.

신라는 불교와 기능을 분담했다. 국가가 종교에 복종하지도 종교가 국가에 이용만 당하지도 않았다. 신라와 불교는 각기의 영역을 인정하면서 상호 협력하였다. 흔히 신라 불교를, 호국 불교라고 말하지만 통치 이데올로기화된 불교는 아니었다.

조선조 시대에는 주자학이 통치 이데올로기로 변했다. 정치가 주자학을, 주자학이 정치를 이용하면서 전례가 없는 수구성과 명분성과 위선성을 보여주었다. 정치와 철학이 결탁하면 정치는 생동감을 잃고 철학은 흉기가 된다. 황장엽 선생이 개척한 인간중심의 철학이 정치와 결탁하니 인간말살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정치와 주자학적 명분론의 합작품이 병자호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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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왜병에게 기습을 허용했던 조선은 그 35년 뒤 후금에게 다시 침략을 허용하였다. 丁卯胡亂이 그것이다(인조 5년). 인조는 그 9년 뒤인 1636년에 다시 병자호란을 막지 못하고 치욕의 삼전도 항복을 하고말았다. 어떻게 된 것이 40여년 사이 세 번이나 똑 같이 외부세력에게 선제공격을 당하고 말았느냐 말이다.

6.25 기습 남침 허용까지 치면 우리는 네 번이나 기습을 당한 셈이다. 김정일에게 다섯번째의 기습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이런 바보짓의 책임자들은 당시 정치를 담당했던 선비-양반 지배층이었다.

더욱 웃기는 것은 인조 조정이 할 필요도 없는 전쟁을 불러들였다는 점이다. 1636년 淸으로 이름을 바꾼 後金은 조선에 대해서 大淸皇帝라고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조는 明에게 사대하고 있는 입장에서 의리상 그렇게 못하겠다고 버티었다.

이때 明은 이미 망해가고 있었고 大淸은 떠오르는 세력이었다. 광해군은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정확히 읽고서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여 전쟁을 면했었다. 그런 광해군을 배신자라고 규정하여 쿠데타로 쫒아냈던 인조 조정은 明 황제 이외의 누구도 황제라 부를 수 없다는 명분론을 굽히지 않았다.

인조도 현실외교로써 청과 화친하고싶었으나 명분론을 들고 나온 斥和派 신하들의 반발 때문에 청과 대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한 10개월간 계속된 인조 조정의 내부 노선 투쟁을 들여다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명분론은 청군의 침입을 부르는 초대장임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명분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전쟁 준비론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대사간 尹煌이 임금에게 전쟁준비를 건의하면 그 부하들인 사간원에서는 이런 건의를 올린다.

'요사이 병란의 기미가 이미 생겨 화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데, 하늘이 크게 재앙을 내려 수해와 旱災가 거듭 계속되니, 팔도의 생령이 모두 죽게 될 지경입니다. 그런데 전쟁까지 하게 된다면 국가가 반드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전쟁을 하지 않으려면 청이 요구하는대로 그들 황제를 大淸皇帝라고 불러주면 된다. 그렇게 하자는 주화파 崔鳴吉에 대해선 明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규탄해마지 않던 척화파가 자신들이 부른 전쟁 준비를 하자고 하니 백성들의 고통 운운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대사간 윤황이 또 강화도의 무기와 전투식량을 평양으로 실어보내 평양에서 적을 막자고 건의한다. 비변사는 이 전쟁 준비 건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해야겠지만 民力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 못한다. 억지로 일을 시키면 내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국가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人心 때문이다.'

할 필요도 없는 전쟁을, 시대착오적인 명분론을 앞세우다가 초대해놓고는 전쟁 준비를 하겠다니 '그러면 백성이 고생하니 하지 말자. 백성들을 혹사하면 내란을 일으킬지 모르겠다'고 하는 판이니 대책이 없다.

실제로 제대로 된 방어책이 없었던 仁祖 조정은 청군이 서울로 들어왔을 때에야 강화도로 달아나려고 했으나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조로 하여금 그런 굴욕적 항복을 하도록 했더라면, 그리하여 수십만의 백성들이 청으로 납치되어가는 비극을 불렀다면 신하들 중에 책임지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인데 아무도 없었다. 현실론을 앞세워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만 욕을 먹게 되었다.

전쟁을 모르는, 전쟁준비도 할 줄 모르는, 책임질 줄도 모르는 구제불능의 이런 타락한 지도층. 지금 김정일의 핵공갈에 직면하여 범죄자인 김정일을 편들고 범죄자를 단속하려는 국제경찰 미국을 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칭 엘리트층은 이런 인조 지배층보다 나은 게 있을까. 의심스럽다.

인조 때의 사대적 명분론과 요사이 한국 좌파의 민족공조론이 똑 같은 위선이다. 이 위선은 민족에게 참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망해가는 명의 정권에 대한 의리를 중하게 여기고 조선조 백성의 안전을 소홀히 여긴 점, 망해가는 북한 김정일 정권을 동족이라 착각하고 그에 대한 의리를 앞세우면서 우방인 미국을 배척함으로써 7천만 민족의 안전을 소홀히 하고 있는 점이 같지 않은가.

국제정세를 오판한 명분론으로 병자호란을 불러들인 척화파 선비들은 충신이 되고 현실적 판단에 따라 화친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배신자로 치부 된 것이 조선조의 또 다른 비극이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영웅으로 만들어버리니 진정한 반성도 책임규명도 불가능해지고 그런 과오의 메카니즘은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체질로 살아남아 조선조를 망하게 하는 데 일조했으며 지금은 한국을 망치지 않을까 걱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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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자살의 사례 연구


조갑제

북한 핵무장에 대한 대한민국의 거의 유일한 대응은 韓美동맹 강화이다. 요사이 집권층의 일부 인사들과 일부 지지층이 보여주는 행태는 한미동맹 와해가 아닌가 의심된다. 이들이 나라의 주도권을 잡으면 북한의 핵무장과 한미동맹의 와해가 동시에 진행되어 한국은 최악의 경우 망하든지 金正日 정권에 예속될 위험성이 있다. 한국 역사에는 이런 국가적 자살이 大義나 평화의 이름으로 염치 없이 자행된 경우가 더러 있다. 병자호란이 좋은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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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역사를 연구할 때 우리가 꼭 배워야 할 부분, 철저히 반성하여 어처구니 없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할 대목이 있다.

1592년 왜병에게 기습을 허용했던 조선은 그 35년 뒤 후금에게 다시 침략을 허용하였다. 丁卯胡亂이 그것이다(인조 5년).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義를 맺는 것으로 타협했다. 인조는 그 9년 뒤 다시 병자호란을 막지 못하고 치욕의 삼전도 항복을 하고말았다. 어떻게 된 것이 40여년 사이 세 번이나 똑 같이 외부세력에게 선제공격을 당하고 말았느냐 말이다.

조선조는 19세기에 들어와서도 똑 같은 패턴의 실수를 거듭한다. 1884년 金玉均 등이 이끄는 소위 개화파는 내정개혁이란 명분을 내걸었지만 駐韓일본 군대의 힘을 빌어 政敵인 守舊派를 참살했다. 내정개혁이 아무리 좋다 한들 敵兵을 불러들여 동족을 쳐죽일 정도인가. 더구나 일본은 자선단체처럼 김옥균을 도운 것이 아니라 淸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개화파를 이용한 것이었다. 金玉均 등은 당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압도적 다수의 淸軍이 日軍과 개화파를 진압할 것이란 점도 예상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사건으로 해서 백성들 속에서 '開化'란 말은 신뢰를 잃었다.

그 10년 뒤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전주를 점령하자 조선의 조정은 淸軍을 불러들여 동족 진압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日軍도 한국에 대응출병하여 淸日전쟁이 일어난다. 동학농민군이 나라를 개혁하겠다고 일어났지 조정을 뒤엎으려 한 것이 아닌 이상 조정은 진압이 불가능하면 타협이라고 했어야 하는데 외세를 불러들인 것이다. 갑신정변이나 淸軍 요청의 공통점은 경쟁자나 도전자를 외적이나 외세보다도 더 싫어했다는 점이다. 친구를 치기 위해서 적을 불러들이려는 행태는 요사이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한국의 친북좌파 세력은 대한민국 주류층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 敵인 金正日 세력과 보조를 함께 하고 있다. 선의의 경쟁자를 敵보다 더 미워하는 마음은 내란을 유치한다. 전형적인 국가적 자살이다. 조선조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경향은 똑 같은 패턴의 安保 실수를 되풀이한 점이다. 이런 無반성에 기인한 국가적 자살 사례들은 조선조적 전근대 문화의 유전인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대한민국도 조심해야 한다.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에서 6.25 기습 남침까지 치면 우리는 네 번이나 기습을 당한 셈이다. 김정일에게 다섯번째의 기습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병자호란의 과정을 들여다 보면, 인조 조정이 할 필요도 없는 전쟁을 불러들였다는 점에 한숨이 나온다. 1636년 淸으로 이름을 바꾼 後金은 조선에 대해서 大淸皇帝라고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조는 明에게 사대하고 있는 입장에서 의리상 그렇게 못하겠다고 버티었다.

이때 明은 이미 망해가고 있었고 大淸은 떠오르는 세력이었다. 광해군은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정확히 읽고서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여 전쟁을 면했었다. 그런 광해군을 배신자라고 규정하여 쿠데타로 쫒아냈던 인조 조정은 明 황제 이외의 누구도 황제라 부를 수 없다는 명분론을 굽히지 않았다.

인조도 현실외교로써 청과 화친하고싶었으나 명분론을 들고 나온 斥和派 신하들의 반발 때문에 청과 대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한 10개월간 계속된 인조 조정의 내부 노선 투쟁을 들여다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명분론은 청군의 침입을 부르는 초대장임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명분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전쟁 준비론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대사간 尹煌이 임금에게 전쟁준비를 건의하면 그 부하들인 사간원에서는 이런 건의를 올린다.

'요사이 병란의 기미가 이미 생겨 화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데, 하늘이 크게 재앙을 내려 수해와 旱災가 거듭 계속되니, 팔도의 생령이 모두 죽게 될 지경입니다. 그런데 전쟁까지 하게 된다면 국가가 반드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전쟁을 하지 않으려면 청이 요구하는대로 그들 황제를 大淸皇帝라고 불러주면 된다. 그렇게 하자는 주화파 崔鳴吉에 대해선 明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규탄해마지 않던 척화파가 자신들이 부른 전쟁 준비를 하자고 하니 백성들의 고통 운운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대사간 윤황이 또 강화도의 무기와 전투식량을 평양으로 실어보내 평양에서 적을 막자고 건의한다. 비변사는 이 전쟁 준비 건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해야겠지만 民力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 못한다. 억지로 일을 시키면 내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국가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人心 때문이다.'

할 필요도 없는 전쟁을, 시대착오적인 명분론을 앞세우다가 초대해놓고는 전쟁 준비를 하겠다니 '그러면 백성이 고생하니 하지 말자. 백성들을 혹사하면 내란을 일으킬지 모르겠다'고 하는 판이니 대책이 없다.

실제로 제대로 된 방어책이 없었던 仁祖 조정은 청군이 서울로 들어왔을 때에야 강화도로 달아나려고 했으나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조로 하여금 그런 굴욕적 항복을 하도록 했더라면, 그리하여 수십만의 백성들이 청으로 납치되어가는 비극을 불렀다면 신하들 중에 책임지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인데 아무도 없었다. 현실론을 앞세워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만 욕을 먹게 되었다.

전쟁을 모르는, 전쟁준비도 할 줄 모르는, 책임질 줄도 모르는 구제불능의 이런 타락한 지도층. 지금 김정일의 핵공갈에 직면하여 범죄자인 김정일을 편들고 범죄자를 단속하려는 국제경찰 미국을 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칭 엘리트층은 이런 인조 지배층보다 나은 게 있을까. 의심스럽다.

인조 때의 사대적 명분론과 요사이 한국 좌파의 민족공조론이 똑 같은 위선이다. 이 위선은 민족에게 참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망해가는 명의 정권에 대한 의리를 중하게 여기고 조선조 백성의 안전을 소홀히 여긴 점, 망해가는 북한 김정일 정권을 동족이라 착각하고 그에 대한 의리를 앞세우면서 우방인 미국을 배척함으로써 7천만 민족의 안전을 소홀히 하고 있는 점이 같지 않은가.

국제정세를 오판한 명분론으로 병자호란을 불러들인 척화파 선비들은 충신이 되고 현실적 판단에 따라 화친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배신자로 치부 된 것이 조선조의 또 다른 비극이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영웅으로 만들어버리니 진정한 반성도 책임규명도 불가능해지고 그런 과오의 메카니즘은 그 뒤에도 살아남아 조선조를 망하게 하는 데 일조했으며 지금은 한국을 망치지 않을까 걱정인 것이다.


淸태종의 편지: 明軍으로 나를 막아보라
1637년 음력 1월2일 淸의 태종이 포위당한 남한산성내 조선왕 仁祖에게 보낸 편지는 그 내용이 직설적이고 당당하다.

<(前略)내가 요동을 점령하게 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쳤으므로 짐이 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정벌했던 것이다. 이것을 강대하다고 약자를 없신여겨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무엇 때문에 그 뒤에 너희 변방 장수들을 거듭 타이르되, '정묘년에는 부득이하여 잠시 저들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여 화약을 맺었지만, 이제는 正義로 결단을 내릴 때이니 경들을 여러 고을을 타일러 충의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지략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적을 정벌하는 대열에 따르게 하라'는 등등의 말을 했느냐. 이제 짐히 친히 너희를 치러왔다.

너는 어찌하여 지모 있는 자가 지략을 다하고 용감한 자가 종군하게 하지 않고서 몸소 一戰을 담당하려 하느냐.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국력으로 우리의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고, 우리의 영토 안에서 산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또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 두 사람이 짐에게 귀순코자 하여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러 그곳으로 갔을 때에도,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 화친을 애걸했을 때, 글이 오고간 상대는 그들이 아니고 누구였더냐. 짐의 아우나 조카가 너만 못하단 말인가. 또 몽고의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는데도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었지, 그들은 당당한 원나라 황제의 후예들인데 어찌 너만 못하랴!

원나라 때에는 너희 조선이 끊이지 않고 조공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어찌 하여 하루아침에 이처럼 도도해졌느냐. 그들이 보낸 글을 받지 않은 것은 너의 昏暗과 교만이 극도에 이른 것이다. 너희 조선은 遼, 金, 元 세 나라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대대로 臣이라 일컬었지, 언제 北面하여 남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편안히 지낸 적이 있었느냐.

짐이 이미 너희를 아우로 대했는데도 너는 갈수록 배역하여 스스로 원수를 만들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도성을 포기하고 대궐을 버려 처자와 헤어져서는 홀로 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설사 목숨을 연장해서 천년을 산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했다면 어찌 하여 몸을 도사려 부녀자의 처소에 들어앉아 있느냐. 네가 비록 이 성 안에 몸을 숨기고 구차스레 살기를 원하지만 짐이 어찌 그대로 버려두겠는가.

짐의 나라 안팎의 여러 왕들과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네가 이런 말을 우리나라 군신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대저 황제를 칭함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우면 필부라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라도 외로운 필부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방자하고 망령된 것이다.

이제 짐이 大軍을 이끌고 와서 너희 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버지로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를 두고볼 것이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된 자가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중생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네가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분명하게 고하라.

崇德 2년 정월2일>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폐부를 찌르는 직격탄이다. 명나라의 배경으 믿고 나를 황제라 부르지 못하겠다고 도발했으니 그 명나라의 구원병으로 나를 막아보라. 만약 明軍이 오지 않으면 너는 오만과 오판으로써 백성들을 파멸로 이끌고 들어간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충 그런 뜻이다.

청태종의 이 직격탄은, 淸 태종이 앞으로는 나를 황제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요구를 굳이 거부하여 참혹한 겨울 전쟁을 부른 인조와 그 신하, 특히 명분론의 인질이 된 척화파의 무능한 안보와 국방태세에 대한 조롱이다.

상황을 전쟁으로 몰고간 척화파 사대부들은 淸에 반대함으로써 자신의 지조를 높이는 데만 신경을 썼지 그런 외교가 전쟁을 불러 국가와 백성들을 파멸로 몰고갈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눈을 감았고 전쟁을 불러놓고는 전쟁 준비에도 반대했다. 구제불능의 이런 신하들은 패전한 뒤에도 존경을 받았고 애써 淸과 협상하려 했던 최명길 등은 대대로 욕을 먹었다. 이런 조선조는 병자호란 때 망했어야 했다.

번 호 3136 조 회 903
이 름 조갑제 날 짜 2004년 1월 1일 목요일

남한산성 싸움/性理學的인 전투방식
문약에 빠져 북방민족에게 유린당한 중국 宋나라 때의 朱子가 집대성한 朱子學, 즉 性理學은 아주 논리적인 학문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이것이 현실 및 사실과 유리되어 관념의 유희가 될 때는 과학성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았다. 논리를 현실에 접목시키지 않고 관념으로만 다룰 때는 미신, 선동, 억지로 퇴화하는 것이다.

조선조 역사에서 병자호란은 성리학의 학생들인 인조의 척화파 인사들이 불러들인 전쟁이다. 이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도 지극히 非과학적이었다. 仁祖와 신하들이 군대를 이끌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포위한 淸軍과 대치하고 있을 때인 1626년 음력 12월28일 術士 몇 사람이 성안에 들어와서 방어작전을 책임지고 있던 김유에게 말했다.

'오늘은 和議를 하든 싸우든 모두 길한 날입니다.'
김유는 이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화의를 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아가 싸우려고 했다. '丙子錄'을 쓴 羅萬甲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싸우려면 싸우고 화의하려면 화의할 것이지 하루동안에 어떻게 화의하고 싸우고 한단 말이오. 이거야말로 한꺼번에 노래하고 울려는 것과 같소.'

김유는 城을 나아가 골짜기에 매복하고 있던 淸軍을 쳤다. 청군은 조선군 포로와 가축들을 버리고 물러났다. 이는 계략이었다. 김유는 이것도 모르고 전진을 명령했다. 進軍에 방해가 된다고 남한산성을 둘러싸는 형국으로 만들었던 소나무 목책도 불질러 없앴다. 조선군의 병력이 모두 산을 내려간 뒤 드디어 청군이 매복위치에서 튀어나오면서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후퇴할 때 의지가 되었을 목책도 없어져 조선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했다.

김유는 패전의 책임을 부하에게 전가했다. 기를 휘둘러 퇴군시켜야 했던 硝官이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목을 베었다. 北城을 지키던 원두표가 자신들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사형에 처하려다가 좌의정이 극력 변호해 포기했다. 전사자가 300명이 넘었는데도 40명인 것처럼 축소조작 보고를 올렸다.

이것이 성리학도들의 전쟁 방식이었다. 성리학의 정신에 따르면 도덕성이 높은 明나라에게 충성을 하는 조선군은 오랑캐 군대에게 이겼어야 했다. 명분을 좋아하는 이들은, 전쟁은 도덕성과 관련 없이 전쟁 기술에 의하여 승패가 갈린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理를 믿는 주자학도가 점쟁이가 하는 말에 따라 전투를 하고, 패전하니 책임도 지지 않고 허위보고나 하고.
오늘날 한국에서 권력을 장악한 주자학도는 명분을 즐기는 소위 민주투사 개혁주의자들이다. 이들이 나라를 경영하는 방식이 김유의 방식보다 낫다고 할 수 있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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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태종의 편지: 明軍으로 나를 막아보라


조갑제

1637년 음력 1월2일 淸의 태종이 포위당한 남한산성내 조선왕 仁祖에게 보낸 편지는 그 내용이 직설적이고 당당하다.

<(前略)내가 요동을 점령하게 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쳤으므로 짐이 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정벌했던 것이다. 이것을 강대하다고 약자를 없신여겨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무엇 때문에 그 뒤에 너희 변방 장수들을 거듭 타이르되, '정묘년에는 부득이하여 잠시 저들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여 화약을 맺었지만, 이제는 正義로 결단을 내릴 때이니 경들을 여러 고을을 타일러 충의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지략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적을 정벌하는 대열에 따르게 하라'는 등등의 말을 했느냐. 이제 짐히 친히 너희를 치러왔다.

너는 어찌하여 지모 있는 자가 지략을 다하고 용감한 자가 종군하게 하지 않고서 몸소 一戰을 담당하려 하느냐.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국력으로 우리의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고, 우리의 영토 안에서 산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또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 두 사람이 짐에게 귀순코자 하여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러 그곳으로 갔을 때에도,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 화친을 애걸했을 때, 글이 오고간 상대는 그들이 아니고 누구였더냐. 짐의 아우나 조카가 너만 못하단 말인가. 또 몽고의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는데도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었지, 그들은 당당한 원나라 황제의 후예들인데 어찌 너만 못하랴!

원나라 때에는 너희 조선이 끊이지 않고 조공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어찌 하여 하루아침에 이처럼 도도해졌느냐. 그들이 보낸 글을 받지 않은 것은 너의 昏暗과 교만이 극도에 이른 것이다. 너희 조선은 遼, 金, 元 세 나라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대대로 臣이라 일컬었지, 언제 北面하여 남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편안히 지낸 적이 있었느냐.

짐이 이미 너희를 아우로 대했는데도 너는 갈수록 배역하여 스스로 원수를 만들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도성을 포기하고 대궐을 버려 처자와 헤어져서는 홀로 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설사 목숨을 연장해서 천년을 산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했다면 어찌 하여 몸을 도사려 부녀자의 처소에 들어앉아 있느냐. 네가 비록 이 성 안에 몸을 숨기고 구차스레 살기를 원하지만 짐이 어찌 그대로 버려두겠는가.

짐의 나라 안팎의 여러 왕들과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네가 이런 말을 우리나라 군신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대저 황제를 칭함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우면 필부라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라도 외로운 필부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방자하고 망령된 것이다.

이제 짐이 大軍을 이끌고 와서 너희 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버지로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를 두고볼 것이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된 자가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중생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네가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분명하게 고하라.

崇德 2년 정월2일>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폐부를 찌르는 직격탄이다. 명나라의 배경으 믿고 나를 황제라 부르지 못하겠다고 도발했으니 그 명나라의 구원병으로 나를 막아보라. 만약 明軍이 오지 않으면 너는 오만과 오판으로써 백성들을 파멸로 이끌고 들어간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충 그런 뜻이다.

청태종의 이 직격탄은, 淸 태종이 앞으로는 나를 황제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요구를 굳이 거부하여 참혹한 겨울 전쟁을 부른 인조와 그 신하, 특히 명분론의 인질이 된 척화파의 무능한 안보와 국방태세에 대한 조롱이다.

상황을 전쟁으로 몰고간 척화파 사대부들은 淸에 반대함으로써 자신의 지조를 높이는 데만 신경을 썼지 그런 외교가 전쟁을 불러 국가와 백성들을 파멸로 몰고갈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눈을 감았고 전쟁을 불러놓고는 전쟁 준비에도 반대했다. 구제불능의 이런 신하들은 패전한 뒤에도 존경을 받았고 애써 淸과 협상하려 했던 최명길 등은 대대로 욕을 먹었다. 이런 조선조는 병자호란 때 망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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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반성


조갑제


1627년 음력 1월29일 남한산성에서 농성중이던 인조는 주화파 최명길을 淸軍 진영으로 보냈다. 최명길은 淸에 대한 강경론으로 병자호란을 부른 책임이 있는 오달제 윤집을 데리고 갔다. 청태종은 두 사람에게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의 盟約을 깨뜨리게 했느냐'고 물었다.

오달제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300년 동안 명나라를 섬겨왔소. 명 나라가 있다는 것만 알 뿐 청나라가 있다는 것은 모르오. 청국이 황제를 참칭하고 사신을 보내왔으니 諫官의 몸으로 어찌 화친을 배척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라고 했다. 윤집은 '우리나라가 天朝(명나라)를 섬겨온 지 이미 300년이나 되어 의리는 임금과 신하요, 정은 아버지와 아들이오. 더 할 말이 없으니 속히 나를 죽여주시오'라고 말했다.

두 충신은 말은 기개가 있으나 답답하기 그지 없다. 漢族 나라 明에 대한 충성과 일편단심만 보일 뿐 그들이 불러들인 전쟁으로 죽어나가고 있던 백성들에 대한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 망해가는 明에 대한 일편단심은 在野 선비가 해야 할 일이지 在朝의 관리가 할 일은 아니었다. 국제정세에 대한 무지, 외교와 군사에 대한 무지, 백성들에 대한 무관심만 보여주는 조선조 엘리트의 수준이다.

민족사의 극과 극을 이야기하라면 對唐 결전으로써 唐軍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민족통일국가를 완성한 문무왕, 김유신 등 7세기의 신라 지도부가 최상이다. 최악은 사대주의와 위선적인 명분론에 혼을 빼앗겨 할 필요가 없는 전쟁을 초대하여 王朝도 民生도 도탄으로 밀어넣었던 인조 시대의 집권세력이다.

신라 지도층과 인조 시절 지도층은, 같은 민족인데 어떻게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신라 지도층의 성격은 개방, 활달, 文武겸전, 풍류, 자주, 명예, 오기, 자존심, 품격으로 표현된다. 인조 지도층의 성격은 편협, 명분, 위선, 독선, 무능, 文弱으로 표현된다.

신라는 불교와 기능을 분담했다. 국가가 종교에 복종하지도 종교가 국가에 이용만 당하지도 않았다. 신라와 불교는 각기의 영역을 인정하면서 상호 협력하였다. 흔히 신라 불교를, 호국 불교라고 말하지만 통치 이데올로기화된 불교는 아니었다.

조선조 시대에는 주자학이 통치 이데올로기로 변했다. 정치가 주자학을, 주자학이 정치를 이용하면서 전례가 없는 수구성과 명분성과 위선성을 보여주었다. 정치와 철학이 결탁하면 정치는 생동감을 잃고 철학은 흉기가 된다. 황장엽 선생이 개척한 인간중심의 철학이 정치와 결탁하니 인간말살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정치와 주자학적 명분론의 합작품이 병자호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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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집권한 仁祖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定遠君의 장자였다. 생모는 啓運宮 具씨.
인조는 「私廟에 전례를 거행할 때 祭文의 앞머리 말에 生父를 무엇이라 부르느냐」로 고민했다. 왕이 된 아들이 왕이 아닌 아버지를 私的으로 제사지낼 때의 호칭문제였다. 李元翼과 鄭昌衍은 「정원군을 대원군으로 칭하되 전하가 말할 때는 정원군을 皇考라 부르지 말고 考라고만 할 것이며 전하를 孝子라고 하지 말고 孝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예학에 밝은 장령 金長生이 상소하여 「제왕의 예는 계통보다 더 엄한 것이 없으니 형으로써 아우의 뒤를 잇거나 숙부로써 조카의 뒤를 잇는 경우에도 아우와 조카를 父子의 도리로써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인조가 왕이 아닌 生父를 아버지로 대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인조는 「이렇게 되면 아버지는 없고 할아버지만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화를 내면서 金長生의 주장을 무시했다. 인조가 私廟에 참례하고 齋所에서 하룻밤을 지내니 사헌부에서 들고 일어났다. 「여염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일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인조의 숙부인 광해군을 정통에서 빼버리고 인조를 바로 할아버지인 선조로 연결시키려하다가 이런 예학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前정권의 정통성을 다 부정해버리니 그 정부가 우리 현대사에서 孤兒가 되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왕권의 정통론, 법통론으로 논한다면 할아버지인 선조가 아버지가 되고 生父인 정원군은 아버지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과거의 실존을 애써 무시하니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종묘사직의 법적인 정통성과 인간도리로서의 父子간 의리 중 어느 것을 더 중시하느냐 하는 논쟁이었다.

인조의 生母 계운궁 具씨가 죽자 喪服논쟁이 생겼다. 친부모가 죽으면 아들이 3년상을 치러야 하는 것은 상식인데, 문제는 인조가 임금이 되었고 선조를 바로 잇는 임금으로 행세하려면 선조의 부인들, 즉 할머니들을 어머니로 대우해주어야 하므로 生母인 계운궁 구씨가 법통상으로는 어머니가 아니란 점이었다.

社稷의 법통상으로는 할아버지인 宣祖가 아버지, 할머니인 선조의 부인들이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 역시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변칙이다. 영의정 이원익 등은 인조가 3년상을 치러선 안되고 不杖期, 즉 지팡이를 짚지말고 1년상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부제학 崔鳴吉, 그리고 부원군 李貴는 「廢主, 즉 광해군은 어미를 무시했는데 전하는 아비를 무시하란 말인가, 조정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거의가 아비를 무시하는 자들이다」고 반발한다. 인조는 이귀와 최명길의 편을 들어 3년상을 치르겠다고 나섰다.

대부분의 신료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선조는 조부이지만 아버지가 되는 도리가 있고, 전하께서는 손자이지만 아들이 되는 도리가 있다」고 하면서 「私親, 즉 사사로운 부모를 위해서 3년상은 안된다」고 주장했다. 인조는 자신의 뜻을 굽혀서 신하들이 하라는대로 기년상, 즉 1년상을 하기로 하는데 喪杖, 즉 지팡이를 짚고 삼베 옷을 입는 이른바 杖期로 하고 싶다고 한다. 신하들은 지팡이를 짚는다는 전례가 고전에 없다면서 이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인조는 이 반대를 누르고 장기를 강행했다.

다음은 누가 상주가 되는가인데 신하들은 다른 집안의 양자로 들어간 인조의 동생 능원군을, 그 양자를 파하고 宗系를 잇도록 한 뒤 상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조는 이 주장도 누르고 자신이 상주의 예를 갖춘다. 대학생 李行進 등이 상소했다. 「情이란 것은 인심의 사사로운 면이고 예란 것은 天理의 공정한 것이다. 정을 억제하고 예를 따르며 가벼운 것을 버리고 중한 것을 따른 연후에야 인심이 합치되고 천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인조한테 상주됨을 거두라고 맹공한다.

인조는 양보하여 능원군이 상주를 攝行, 즉 대리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여기에 대해서도 신하들은 반대하여 능원군의 양자를 파하고 다시 원래의 宗系로 돌린 다음에 상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인조는 이 주장에 결국 굽히고 만다. 그런데 인조의 3년상에 찬성했던 이귀가 다수 신하들의 부장기론을 비판하고 나서자 조정은 다시 한번 논쟁의 폭풍속으로 들어갔다. 영의정 이원익은 이귀의 비판에 발끈하여 도성을 나가 사의를 표하고 좌의정 尹昉 우의정 申欽도 사직할 뜻을 비쳤다.

사헌부 사간원, 즉 兩司는 이귀의 삭탈관직을 요구한다. 인조는 이귀를 옹호한다. 최명길도 이귀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조정에 가득한 名流들이 無父의 죄에 빠지고 말았다」고 신랄하게 공격한다. 대다수 신하들은 인조가 이귀와 최명길의 편을 드는 데 대하여 극렬하게 성토한다.
도승지 鄭蘊은 이런 상소문을 올렸다.

<임금이 독주한 결과 원로는 이미 지위를 버리고 산야의 사람이 되었으며 좌우 兩相도 사퇴할 뜻을 품고 있고 臺閣은 기세가 저상되어 있고 신료들은 해이해 있고 사대부는 서로 만나면 근심스런 안색을 하고 있고 閭巷의 쑥덕이는 말들은 함부로 전하의 마음을 헤아리는 여지가 있다>

返魂, 즉 죽은 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의식을 어디서 치를 것인가에 대해서도 임금과 신하가 대결한다. 인조는 인경궁에서 하려고 하고 신하들은 이미 능원군을 상주로 삼았으니 궁에서 返魂式을 올려선 안된다고 반대하나 인조는 이를 무시했다. 인조가 발인식에서 어디까지 따라갈 것인가가 논쟁점이 되었다. 인조는 산능, 즉 산소에까지 배행할 것을 주장했으나 신하들은 대궐문 안에서 곡송, 즉 곡을 하고 영구를 보내야 한다고 했다. 인조가 한 수 양보하여 교외까지 따라가서 하겠다고 하자 신하들은 이에 반대하고 궐문 밖에서 하는 것은 무방하다고 했다. 인조는 이를 무시하고 교외까지 따라갔다.

이런 논쟁과정을 살펴보면 이런 느낌이 든다.
첫째, 당시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상당히 보장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직책이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 사소한 것 같이 보이는 복상문제로 온 조정이 영일이 없고 결국 이 논쟁은 반대자를 처벌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넷째, 이런 논쟁은 당시 선비 정치인들에게는 참으로 신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패거리를 만들어 정교한 이론을 전개하고 왕에게 대어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매우 보람차고 정의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평소 연마해온 禮學과 朱子學에 대한 지식을 과시하는 기회도 되었으니까.

그런데 또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논쟁이 과연 국가의 번영과 백성들의 행복과는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외교정책이나 경제정책, 또는 군사정책을 놓고 싸우는 것도 아닌 사소한 초상절차에 대한 지리한 말싸움이 과연 政의 시간을 빼앗을 만큼 가치있는 것이었을까 하는 회의가 생기지 않는가.

당시 신하들은 말할 것이다. 왜 이것이 사소한 것이냐고. 종묘 사직에 관한 것이고 임금의 公私행동의 구별에 대한 논쟁이며 조정의 정통론과 관계되는 논쟁인데 절대로 사소한 것이 아니라고. 그런 면도 없는 것이 아니다. 일단 주자학의 정치이론에 빠져버리면 지금 우리가 구차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그들에게는 重且大한 문제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정교한 예의범절을 규정하여 이에 반하는 사람은 비록 임금이라도 혼을 내는 이런 꽉 짜인 사회에서는 활달한 기상이 일어날 수가 없고 창조적인 작업이나 개혁이 성공할 수가 없다. 이미 규정된 법도에서 한 치를 벗어나기도 어려운 판에 어떻게 판을 바꾸고 뜯어고치는 개혁이 가능하겠는가.

결국 조선왕조에서 말하는 臣權이니 언론의 자유란 것은 국가의 나아갈 길이란 본질적인 문제로 다투는 그런 것이 아니고 백성의 삶과는 유리된 채 벌이는 지배층 내부의 언론자유요 논쟁인 점이 강했다.

대사헌 李弘胄는 인조7년3월의 箚子(차자. 간단한 상소문)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국가가 변란을 겪은 나머지 사기가 시들어져서 이익을 앞세우고 의리를 뒤로 하는 의논과 公私를 등지고 자기 黨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세에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관직에 있는 자는 나라 일에는 뜻이 없어 오직 녹봉이나 유지하고 몸이나 지키려 하고 있으며 파직을 당한 자는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풀어보려고 틈만 노리고 있습니다>
선비들이 정교한 논리를 만들어 싸우는데 그것이 결국은 黨派的 이해관계 때문이란 지적이다.

인조는 8년8월 주강, 즉 낮에 하는 공부시간에 강사 김기종과 이런 문답을 주고받는다.
<예로부터 붕당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옛날의 붕당은 선한 자는 군자의 당이 되고 악한 자는 소인의 당이 되었는데 지금은 이와 다르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반드시 어진 임금이 나와야만이 이런 폐단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나같이 용렬하고 아둔한 사람이야 어떻게 조정에서 붕당이 제거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인조는 朱子를 비판하면서까지 朋黨을 비판한다.
<黨이란 그 글자가 비록 朱子의 말일지라도 나는 듣기 싫다. 朱子가 한 말은 黨을 비호하려고 한 말은 아닐지라도 나는 朱子가 실언했다고 생각한다. 신하는 임금이 옳은 길을 가도록 인도할 뿐이다. 임금을 끌어들여 黨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무리를 지을 뿐이지 당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다. 朱子는 대현인인데 공자가 말한 뜻을 어찌 모르고 감히 임금을 끌어들여서 당을 하라고 時相에게 권면했겠는가.>

위에 소개한 정치문화, 사소한 데 집착하여 남의 약점을 공격하고 목숨을 거는 정치행태, 그 원인은 자주국방을 안하고 안보를 대국에 맡겨버리는 사대주의를 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정치의 주제를 놓쳐버린 부작용은 사소한 데 목숨거는 치사하고 졸렬하며 속좁은 정치행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 정치가 이런 미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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