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올림픽과 서울올림픽의 차이

월스트리트저널: “(지금 북경의 상황은) 1936년 히틀러의 베를린 올림픽이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비교될 만하다"
올림픽 관계자들이 중국의 2008년 올림픽 유치에 손을 들어줄 때 그들은 또다른 논쟁거리였던 한국을 가리키며 이를 정당화했다.

한국은 1988년 올림픽을 개최했을 때 군사독재였다. 그러나 올림픽은 한국 내 반정부 시위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 지도자들은 이에 굴복, 개헌 후 자유선거를 실시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베이징올림픽도 그런 정치적 변화를 야기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캐나다 IOC 위원인 딕 파운드는 말한다.

그러나 올림픽 개막을 4개월 앞둔 지금, 이런 변화에 대한 중국의 약속은 공허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이 국내적으로 반체제 인사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고 국제적으로 수단과 미얀마 등 억압 정권에 대한 지원을 계속 하고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 봉기는 중국 인권 침해에 대한 새로운 비판을 가져왔다.

파운드 위원은 “중국과 한국 사이에 역동성과 환경이 매우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은 올림픽 전에 `중요한 정치적 혼란`이 한창이었고 일본과 경쟁하기 위해 산업민주주의가 되길 원했다고 말했다. 중국에는 또 한국의 군부독재 종식을 가져왔던 대다수 국민들의 불만과 조직적인 야권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을 한국과 비교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지적한다.
위스콘신대 알프레드 센 교수는 “중국의 현 상황을 볼 때 1988년 서울은 중국의 비교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센 교수는 “1936년 히틀러의 베를린 올림픽이나 1980년 소련 모스크바 올림픽이 비교될 만하다”며 “당시 이 국가들은 전 세계 많은 나라들로부터 거부된 사회·정치적 정책을 가진 강력한 정권들이었다”고 지적했다.

중국 지도자들은 그런 비교를 거부하고 있다.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은 지난 달 중국은 북경 올림픽에 대한 선의의 제안과 비판은 환영하지만 중국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려는 것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권그룹과 외국정치가들이 올림픽을 정치화한다면서 이는 올림픽 헌장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계 최대 스포스 행사인 올림픽은 1896년 현대 올림픽 개막 이후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왔다.

러시아는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당시 그들이 통치하던 핀란드 선수들에 대한 별도의 메달 집계와 핀란드 국기 게양에 반대했다. 중국은 대만 선수들의 참가를 허용했다며 1956년 호주 멜버른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올림픽은 세계대전 중에는 중단되었고 다른 정치 투쟁 속에서는 지속되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은 경찰과 군인들이 수백 명의 시위자들을 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죽인 뒤 10일 만에 열렸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이스라엘 선수 11명과 코치를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올림픽의 정치적 여파는 한국 올림픽에서는 새로운 기원을 이룩했다. 한국 지도자들은 1970년대 올림픽 유치를 논의해 왔다. 그들은 올림픽 유치가 한국의 경제 건설과 북한 약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올림픽을 통해 다른 공산국가들이 한국을 인정할 것이라는 바람도 있었다.

한국은 1987년 6월 경기장, 고속도로, 운동선수 숙소 건설 완료 등 올림픽 준비를 예정보다 빨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서울발(發) 뉴스는 거리의 혼란이었다. 밤마다 수천 명의 노동자, 주부, 학생들이 민주화에 대한 토론을 중단시킨 당시 지배자 전두환 장군의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를 길거리에서 했다.

이 시위는 올림픽 관계자와 수억 달러를 투자한 후원자 및 방송국 관계자들을 기겁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이 올림픽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의심했다. 런던과 로스엔젤레스에서는 그들이 대신 올림픽을 할 수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전두환이 임명한 계승자인 노태우는 서울 올림픽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서울올림픽을 1936년 히틀러의 베를린 올림픽과 동일시했던 김영삼을 포함, 한국의 주요 재야 인사들을 만나 전두환을 압박했다.

김영삼은 6월 24일 전두환을 청와대에서 만났다. 김영삼은 “나는 그가 굴복하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갔다”며 “떠나올 때 그가 수긍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노태우는 5일 뒤 개헌과 선거 실시라는 시위자들의 요구를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그해 12월 노태우는 첫 번째로 민주적 선거로 당선된 한국 대통령이 되었다. 김영삼은 1992년 그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결정적인 발표가 있기 하루 전 전두환은 측근들에게 권력을 유지하는 것보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중국은 많은 이유로 한국과는 다르다. 한국에 있었던 대규모 지지, 조직, 리더십과 같은 변화를 위한 내부운동이 없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중국인들의 중국 정부의 사회정책 및 개인 삶에 대한 만족도가 2000년과 2007년 사이 급속히 증가했다.

외부적으로도 상황이 다르다. 중국이 올림픽을 유치하던 때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 다른 국가들은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고 중국의 정치·사회적 개선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지난 3월 티베트에서 시작된 봉기와 달리 그동안 중국에 대한 가장 큰 시위는 수단 등 중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것이었다.

정리/워싱턴=이상민 특파원 smlee@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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