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東源 회고록>은 거짓이다

'訓令 사건의 眞相' -도대체 그는 무엇을 생각하면서, 무엇을 쟁취할 목적으로, 이 같은 진실 왜곡을 고집하는 것인지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다.
 





남북고위급회담 訓令 사건의 眞相




李東馥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대변인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 제1특보 (당시)









 


▲훈령 조작 사건 = 1992년 평양에서 열린 제8차 고위급회담에서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씨 송환문제와 이산가족 문제를 연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해괴한 사건이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노부모 방문단 사업 및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ㆍ운영과 이인모 씨의 송환 문제를 연계시켜 풀되, 1987년 납북된 동진27호 선원 송환문제도 연계해 거론해 보기로 방침을 정했다. (①)


 


이 문제의 대북 협의는 당시 대표 중 한명이었던 임동원 통일부 차관이 맡았다. (②)


 


북측이 노부모 방문단 사업과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ㆍ운영에 동의하면서 이인모 씨 송환문제와 교환이 가능해졌지만, (③) 갑작스레 서울에서 “3개의 조건이 (모두)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전문이 날아들었다. (④)


 


합의는 도출되지 못했고 대표단은 이산가족 문제의 해법을 손에 쥐지 못한 채 서울로 귀환했다. 문제는 돌아온 서울에서, 북측이 2개항을 수용했는데 이 문제에서 왜 진전이 이뤄지지 못했는지에 대한 추궁이 이뤄지면서부터.


 


임 전 장관은 조사 결과 당시 대표단 대변인이었던 이동복 씨가 사적으로 안기부(현 국정원)의 기조실장에게 전문을 보내 “이인모 건에 관해 3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회신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이 요청에 따라 서울에서 평양으로 “3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전문이 발신됐다고 설명했다. (⑤)


 


그러나 서울에서 정해진 협상 전략대로 “2개의 조건만 관철되면 남북적십자 접촉을 즉각 재개하는 데 합의해 발표하고 돌아오라”는 별개의 ’진짜’ 전문이 보내졌지만, 이는 협상 당사자인 임 전 장관뿐 아니라 수석대표였던 당시 정원식 총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고 임 전 장관은 회고했다. (⑥)


 






필자는 최근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林東源 회고록: “피스메이커 - 남북관계와 북핵문제 20년”>을 읽지 않았다. 필자에게는 우선 저자가 책 제목에 사용한 ‘피스메이커’라는 용어에서 섬뜩한 느낌이 전달되어 온다. 그가 ‘메이크’하려 했다는 ‘피스(평화)’가 과연 어떤 ‘평화’를 말하는 것인지 겁이 덜컥 나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만, <연합뉴스>와 <조선ㆍ닷컴>이 문제의 ‘회고록’에서 발췌하여 보도한 내용을 읽었다. 그 가운데 아무래도 필자의 관심의 대상이 된 부분은 소위 “훈령 조작 사건”이라는 소제목 아래 수록된 내용이다. 이 사건은 필자와 그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讀後感이 쓰디쓰다. 실제의 사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내용이기 때문이다.




<조선ㆍ닷컴>이 발췌한 내용이 위의 박스의 내용이다. 그 가운데 밑줄을 친 부분(①ㆍ②ㆍ③ㆍ④ㆍ⑤ㆍ⑥)이 모두 실제로 있었던 사실과는 天壤之差로 다른 내용이다. 아무래도 이 같은 虛僞捏造가 眞實의 해를 가리도록 放任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그러한 생각 때문에 필자는 문제의 소위 ‘훈령 조작 사건’의 眞相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충동을 억누를 수 없다. 다음은 그래서 그 당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일어난 대로 기술하는 것이다. 읽는 분들이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 [2008년6월23일 李東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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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訓令 사건의 發端 - 북한의 李仁模 송환 요구


2. 제8차 고위급회담의 임무 - ‘기본합의서’의 ‘부속합의서’ 타결


3. 제8차 고위급회담과 李仁模 문제


4. 訓令 사건의 顚末


5. 林東源 주장의 虛構性


6. 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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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訓令 사건의 發端 - 북한의 李仁模 송환 요구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으로부터 시작된 남북대화의 전 과정을 통해 북측은 일관된 회담 전술을 고수해 왔다. 북측은, 어떠한 회담에서든지, 느닷없이 회담 주제와는 상관없는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회담 개최, 또는 회담 진전의 ‘전제조건’화 하는 전술을 반복하여 상투적으로 사용했다. 회담 때마다 북측은 회담 主題를 가지고 회담을 진전시키는 것은 副業이었고 주제 밖의 ‘전제조건’을 관철시키려 하는 것이 主業인 경우가 많았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경우, 북측의 회담 상대방인 남측은 회담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거나 아니면 회담의 결렬을 회피한다는 이유로 북측이 제시하는 ‘전제조건’의 일부 또는 전부를 수용하는 것이 例事였다.




이 같은 일이 남북대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951년부터 다음 해까지 판문점에서 진행된 한국전쟁 휴전협상의 유엔군측 수석대표였던 미 해군의 터너 조이(C. Turner Joy) 제독은 그의 名著 <공산주의자들은 어떻게 협상하는가>(How Communists Negotiate)에서 그가 경험했던 그 같은 북측의 협상 전술을 생생하게 재현시켜 놓은 바 있다. 지금은 베이징 <6자회담>이 그 무대가 되어 있지만 지난 18년간 진행되어 온 북핵 문제에 관한 미-북 협상의 전 기간을 통하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북측의 이른바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은 바로 그 같은 협상 전술의 壓卷이다. 1992년 <남북고위급회담> 과정에서 ‘李仁模 송환’ 문제를 위요하고 발생했던 소위 ‘訓令 사건’은 북측의 그 같은 협상 전술을 둘러싸고 발생한 해프닝이었다.




1990년에 시작된 남북고위급회담은 1991년12월10-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회담에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남북기본합의서>)의 내용이, 그리고 그해 12월31일 판문점에서 열린 ‘대표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공동선언>(이하 <비핵화선언>)의 내용이 각기 타결됨으로써 큰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남북 쌍방은 1992년2월18-21일 평양에서 열리는 제6차 고위급회담에서 이 두 합의문건을 서명하여 공표함으로써 공식으로 발효시킬 예정이었다. 




그때까지의 남북고위급회담에서도, 예비회담과 본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북측은 끊임없이 회담 의제 밖의 ‘전제조건’들을 들고 나와 남측을 괴롭혔다. 그러나, 1991년12월의 제5차 회담이 종료될 때까지 남북대화 석상에서 李仁模 문제는 거론된 일이 없었다. 그때까지 북측이 거론했던 ‘전제조건’의 단골 메뉴는 ①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반대, ② 한-미 합동 군사훈련 팀스피리트의 중지, ③ 文益煥ㆍ林秀卿ㆍ文奎鉉ㆍ유원호 등 불법 방북으로 인한 구속자 석방 문제 등이었다. 북측이 李仁模 문제를 처음 제기한 것은 1992년2월 평양에서 열린 제6차 회담을 앞두고 이 회담 준비를 위하여 판문점에서 열린 대표접촉에서였다.




아직은 북한의 관영 선전ㆍ선동 매체에서도 李仁模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아마도 그때까지는 북한에서도 李仁模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無名 인물 중의 하나였음이 틀림없다. 李仁模는 6.25 전쟁 기간 중 ‘인민군’에 종군하여 남하한 후 북으로 귀환하지 못한 채 智異山그 같은 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1952년 빨치산 토벌대에 체포되어 7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1959년 출소했지만 1961년 부산에서 ‘지하당’ 활동 혐의로 다시 검거되어 15년 형을 선고 받고 실형을 사는 등 모두 34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한 뒤 출소하여 경남 김해의 어느 과수원에 살고 있던 이른바 ‘轉向拒否 長期囚’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데, 남쪽 정부에서는 모르는 사이에, 金日成의 북한과 남한사회의 친북 세력 사이에는 남북대화에서 李仁模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李仁模는 1991년 남한의 左傾 月刊誌 <말>이 중국을 통하여 북한에 거주하고 있던 그의 부인(李仁模와의 재결합을 위해 再婚 생활 중이던 부인을 이혼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과 딸을 찾아내어 상호 편지를 주고받게 한 뒤 문제의 편지들을 1991년10월호에 대대적으로, 煽情的으로, 게재하면서 세간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북측이 남북대화에서 李仁模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북측은 1992년2월의 제6차 고위급회담 준비를 위한 판문점 대표접촉 때부터 李仁模의 송환을 회담 진전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군중집회’ 개최, 사회단체 성명 발표, 국제기구에의 편지 공세 및 관영 선전선동 매체의 집중적 보도 등의 방법으로 李仁模 송환 문제가 시끄럽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때까지 북측의 李仁模 송환 요구는 비교적 低强度였다.




북측의 李仁模 송환 요구는 1992년2월의 제6차 회담 이후 같은 해 5월5-8일 서울에서 열린 제7차 본회담을 전후하여 갑자기 高强度로 바뀌었다. 남측은 북측이, 적지 않은 수의 북한출신 ‘轉向拒否 長期囚’ 가운데서, 유독 李仁模 송환에 집착하는 북측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1992년4월15일 북한의 독재자 金日成의 80회 생일을 계기로 발간된 새로운 <金日成 회고록: 世紀를 위하여>가 그 미스테리를 해소시켜 주었다. 李仁模의 이름이 이 책의 제2권85쪽에 등장했다. “金日成의 叔父 金亨權이 함경북도 풍산군의 한 일본경찰 파출소를 무장 기습하여 일본인 경찰관을 처형했다”는 考證되지 않은 사건을 기술하면서 “李仁模가 현장에서 이 장면을 목격한 소년이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金日成 一家의 ‘항일 무장투쟁 경력’을 증언해 주는 金 一家 ‘偶像化’의 산 證人이 새로이 조작되었다. 북측이 어째서 李仁模 송환에 집착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졌다.




1992년5월 서울에서 열린 제7차 회담에서 북측은 남측이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내놓았다. <남북기본합의서> 발효를 축하하는 뜻에서 이해 8월15일을 기해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과 예술단의 서울-평양 교차 방문”을 “아무런 조건 없이 실시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남측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제7차 회담 후 6월부터 이 ‘합의’를 실천에 옮기기 위한 ‘적십자 실무대표회담’이 시작되자 북측의 태도는 돌변했다. “무조건 실시” 합의는 “언제 그런 것이 있었느냐”가 되었다.




북측은 다시 상투적인 ‘전제조건’ 놀음으로 돌아갔다. 북측이 제시한 “노부모 방문단과 예술단 교차방문”의 실현은 ‘무조건’이 아니라 李仁模 송환을 관철시키기 위한 ‘떡밥’이었다. ‘적십자 실무대표회담’에서 쌍방은 “① 방문단 규모는 각기 241명(이산가족 노부모 100명, 예술단 70명, 보도진 40명, 수행원 30명, 단장 1명)으로 하고 ② 실시기간은 8월25-28로 한다”는 합의에 일단 도달하기는 했지만 李仁模 문제 때문에 그 이상은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었다.




남측은 李仁模 문제를 고위급회담과 분리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992년7월7일 鄭元植 수석대표의 이름으로 북측의 延亨黙 수석대표에게 보내진 서한이다. 소위 ‘7.7 서한’이었다. 이 서한의 요지는 다음 박스 안 의 내용과 같았다.







 


○남북 쌍방의 餘生이 얼마 안 남은 高齡 이산가족 중 희망자에 대


   해 부양자나 배우자가 있는 쪽에 귀환하여 정착하는     것을 우


   선적으로 허용하자. [李仁模 문제도 이 범주에 포함    시켜 해


   결하자.] [但, 이 사업은 ‘인도주의 원칙’과 ‘상호주    의 원칙’


   및 ‘자유의사 확인 원칙’에 의거하여 추진하자.]


 


○他意에 의해 상대측 지역에 묶여 있는 이산가족들의 생사확   


   인과 相逢 및 귀환과 정착을 추진하자. [對象은 ① 6.25 기    간


   중 拉北된 인사들, ② 55년5월 - 87년10월 사이에 拉北    된 미


   귀환 어부들, ③ 69년12월11일 拉北된 KAL機의 미귀    환 승무


   원 및 탑승객, ④ 70년6월5일 西海에서 拉北된 해군    함정 승무


   원 및 1951년 월남한 장기려 박사의 부인과 2남3    녀 및 그들과


   유사한 환경의 이산가족 등]


 


○이산가족의 고향 방문을 전면적으로 정례화하고 판문점에     면


   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자.


 




북측은 이 같은 鄭元植 남측 수석대표의 서한에 대한 직접적 회답은 없이 7월13일 安秉洙 고위급회담 대변인 이름의 담화를 통해 鄭元植의 ‘7.7 서한’ 내용을 거부했다. 북측은 이어서 8월7일 판문점에서 열린 적십자 실무대표 회담에서 ① 李仁模 송환과 ② 북핵 문제에 관한 한-미 공조 중지 및 ③ 한-미 포커스 렌즈 합동군사훈련 중지 등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워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과 예술단’ 교환의 ‘무조건 실시’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2. 제8차 고위급회담의 임무 - ‘기본합의서’의 ‘부속합의서’ 타결




1992년9월15-18일 평양에서 열린 제8차 고위급회담의 主題는 제6차 회담에서 공표되어 이행에 들어간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정치>ㆍ<군사>ㆍ<교류협력> 등 3개 분야의 분야별 <부속합의서>에 합의하는 것이었다. 남북 쌍방은 5월 서울에서 열린 제5차 회담에서 합의사항의 이행을 담당할 대화기구가 될 <군사> 및 <교류ㆍ협력> 분야의 <공동위원회 구성ㆍ운영에 관한 합의서>와 <남북연락사무소 설치ㆍ운영에 관한 합의서>에 이미 합의했으나 보다 민감한 안건들인 <화해(정치)> 분야 <공동위원회 구성ㆍ운영에 관한 합의서>와 3개 분야별 <부속합의서> 내용에 관한 협상은 난항을 계속하는 상황 속에서 제8차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제8차 회담에서도 이들 민감한 미결 안건에 대한 협상은 여전히 난항이었다. 2일간 계속된 회담 가운데 첫날 회담을 끝낸 뒤 쌍방의 <분과위원회> ‘공동위원장’들은 16일 밤 9시부터 세 갈래로 진행된 분야별 단독회담에서 <부속합의서> 내용을 타결시키기 위한 심야협상을 벌였다. [3개 <분과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은 <정치>: 李東馥(남)ㆍ白南俊(북); <군사>: 朴庸玉(남)ㆍ金英哲(북); <교류협력>: 林東源(남)ㆍ金正宇(북)였다.] <군사> 및 <교류ㆍ협력> 분야 <부속합의서>와 <화해공동위원회 구성ㆍ운영에 관한 합의서>는 곧 타결되었으나 <정치> 분야 <부속합의서>는 이날 심야회담에서도 타결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17일 오전에 있을 예정이던 둘째 날 회담은 열리지 못한 채 <정치> 분야 <부속합의서>가 타결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17일 오전 회담은 오후로 미루어졌다. 그러나, 17일 오전 남북 쌍방의 <정치분과위원회> 공동위원장(남: 李東馥; 북: 白南俊)들은 끝내 합의되지 않는 4개 항목에 대해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附記하는 “未合意의 合意” 방식에 합의함으로써 <정치> 분야 <부속합의서>도 타결시켰다. 이에 따라 오후로 미루어졌던 17일의 둘째 날 회담은 합의된 문건들을 인쇄하는데 걸린 시간 때문에 오후 4시45분에야 열릴 수 있었다. 남북 쌍방은 <화해공동위원회 구성ㆍ운영에 관한 합의서>와 <정치>ㆍ<군사>ㆍ<교류ㆍ협력> 등 3개 분야별 <부속합의서>에 쌍방 수석대표가 각기 서명하여 발효시키는 절차를 끝낸 뒤 오후 6시25분 회담을 겨우 끝낼 수 있었다.




쌍방 대표단은 이어서 오후 7시30분부터 10시까지 木蘭館이라는 이름의 귀빈 전용 식당에서 楊亨燮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주최한 만찬에 참가하는 것으로 이날 일정을 모두 마쳤다. 이로써 제8차 회담은 사실상 모든 일정이 끝났다. 남측 대표단은 다음날인 18일 오전 10시 철도편으로 평양을 출발, 開城을 경유하고 板門店을 통과하여 서울로 귀환하게 되어 있었다.






3. 제8차 고위급회담과 李仁模 문제




9월15일 제8차 고위급회담의 시작에 앞서서 북측이 보여 준 움직임은 이 회담에서 특히 李仁模 송환 문제를 ‘전제조건’화 함으로써 회담의 정상적 진행을 어렵게 만들려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남측에서는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회담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남측에서는 제8차 회담에 참가하는 대표단이 평양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인 9월14일 鄭元植(수석대표)이 주재한 고위전략회의에서 북측의 ‘李仁模 송환’ 요구에 대처하기 위한 ‘협상지침’을 마련하고 이에 대한 盧泰愚 대통령(당시)의 재가를 받아 대표단에게 부여했다. ‘협상지침’의 내용은 박스 안과 같았다.









 


<李仁模 문제에 관한 협상지침>


 


○일단 남북 쌍방이 “조건 없이 실시하기로 합의”했던 “이   


   산가족 노부모 방문단ㆍ예술단 서울ㆍ평양 교차 방문”은   


   합의한 대로 '무조건‘ 실시되어야 하며 李仁模 문제와 이   


   문제는 상호 연계시킬 수 없다.


 


○북한이 李仁模 송환 문제를 제기할 경우 이 문제는 다음   


   의 세 가지 조건과 교환 해결을 협상한다.


 


  ①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환 사업의 정례화


  ②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와 우편물 교환소의 상설ㆍ운      


      영


  ③ 납북 어선 ‘동진27호’ 선원 12명의 송환


 




9월15일 서울로부터 철도편으로 평양에 도착한 고위급회담 남측 대표단은 숙소인 百花園에서 오후 3시30분부터 5시45분까지 북측과 첫 번째 대표접촉(남측: 林東源ㆍ李東馥, 북측: 安秉洙ㆍ白南俊)을 갖고 제8차 회담 진행 절차를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북측은 예상했던 대로 李仁模 송환 문제를 거론했다. 이에 대해 남측은 “북측이 우선 제7차 회담 합의사항인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과 예술단 교차 방문의 무조건 실시’ 합의를 이행한 뒤라야 李仁模 송환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측의 반응은 거부였다.




남측은 또한 李仁模 송환 문제가 논의될 경우 송환의 代價로 서울로부터 가지고 온 ‘협상지침’의 세 가지 조건(①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사업의 정례화, ②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와 우편물 교환소의 상시 운영, ③ 동진호 선원 12명의 송환)의 수용을 요구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북측은 이 또한 거부했다. 反面, 북측은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과 예술단 교차 방문”의 “무조건 실시” 약속을 스스로 파기하고 이를 실시하는 代價로 남측에 대해 ①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 연계 정책 취소, ② 李仁模의 무조건 송환, ③ 한-미 포커스 렌wm 합동 군사훈련 중지 등을 요구했다. 이로써 李仁模 문제에 관한 협상은 결렬되었다.




16일 오전 7시30분 대표단의 朝餐 모임에서 鄭元植 남측 수석대표는 전날 있었던 대표접촉에서 李仁模 문제에 관한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렇다면,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고 이번 회담의 主題 안건인 <부속합의서>에 관한 협상에 주력하자”고 입장을 정리했다.




이날 저녁 11시20분경 百花園 1층 회의실에서 북측 상대방인 白南俊과 <정치> 분야 <부속합의서> 타결을 위한 협상을 진행시키고 있던 남측의 李東馥에게 남측의 평양 상황실장인 嚴益俊과 책임연락관인 金勇煥이 긴급 면회를 요청했다. 잠시 白南俊의 양해를 얻어 회담장 밖으로 나온 李東馥에게 嚴益俊이 한 장의 종이를 건네주었다. 그는 “이것은 林東源 대표가 ‘수석대표에게 허락을 받은 것’이니 ‘서울로 電送해 달라’고 요구한 請訓 電文”이라면서 “이 電文의 내용을 아느냐”고 李  대표에게 문의했다.




嚴益俊이 李東馥에게 이 같은 문의를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남북고위급회담의 남측 대표단에서 <국가안전기획부> 소속(‘부장 제1특별보좌관’)인 李東馥은 대표단 대변인에 더 하여 실무적으로 회담 전략을 총괄하여 수석대표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회담 전략에 관해서는 李東馥이 모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嚴益俊이 李東馥에게 건네준 林東源의 ‘請訓 電文’(全文)은 아래 박스의 내용과 같았다.









 


제목: 없음


수신: 통일원부총리, 안기부장,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내용:


 


   ① 금일 밤 쌍방 교류협력분과위원장 간 접촉에서 이산 가족


       노부모 방문단 교섭에 대해 북측 입장을 打診 한 바 북측


       은 핵문제 전제조건 철회와 李仁模 송환을 先行條件으로


       걸어 체면상 철회가 곤란하다고 하면서 새 방안으로 돌파


       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언급


 


   ② 이에 대해 우리측이 국무총리의 ‘7.7 對北書信’을 상기시


       키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동합의문을 검토해 볼 것을


       제시: “남과 북은 흩어진 가족ㆍ친척들의 相逢을 위한 판


       문점 면회소를 금년 내로 설치ㆍ운영하도록 하고 이의 실


       천을 포함한 이산가족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남북적십


       자회담을 즉시 개시하도록 한다.”


 


   ③ 북측의 반응으로 보아 제1차 면회 개시와 함께 李仁模 송


       환이 보장된다면 상기 내용의 합의가 가능할 것으로 사료


       됨.


 


   ④ 이 같은 상황을 총리께 보고 드린 바 서울에(청와대, 안기


       부) 즉각 請訓할 것을 지시하였음.


 


   ⑤ 同 문건에 대한 지급 회신을 요망함.  


 




林東源의 ‘請訓 電文’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로, 대표단이 서울로부터 지참한 ‘협상지침’에 의하면 북측과 李仁模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는 북측이 이미 남북간에 합의된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 및 예술단의 교차방문 무조건 실시'를 이행하는데 동의하는 것이 大前提인데 林東源의 電文은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둘째로, 그러한 ‘전제조건’이 충족되어 李仁模 문제를 논의하게 되더라도 대표단의 본래의 ‘협상지침’에 의하면 ① 이산가족 고향방문 사업의 정례화, ② 판문점 면회소와 우편물 교환소의 설치ㆍ운영, ③ 납북된 ‘동진27호’ 선원 12명의 송환 등 3개 조건을 代價로 하여 협상하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林東源의 ‘請訓 電文’은 이들 3개 조건 중 ‘하나(②)의 절반’에 불과한 면회소 문제와 李仁模의 맞교환을 제시하고 있었다.




셋째로, 林東源의 ‘請訓 電文’은 우리측 ‘협상지침’의 대폭적 수정을 의미하는 내용의 ‘잠정합의문’을 林東源 단독으로 만들어서 대표단 차원에서 아무런 사전 협의도 없이 임의로 북측에게 제시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었다. 




林東源의 이 같은 행동은 대표단 차원에서 용납될 수 없는 개인행동이었다. 李東馥은 북측 白南俊과 ‘停會’에 합의하고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는 鄭元植 수석대표에게 갔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李東馥으로부터 林東源의 ‘請訓 電文’ 내용을 보고 받은 鄭元植의 반응은 “내용이 그런 것인지 몰랐다”는 것이었다. 鄭元植은 “林 대표가 서울에 무엇을 물어보겠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을 뿐”이라면서 李東馥에게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李東馥은 “두 가지 방안 중 擇一”을 건의했다.  한 가지 방안은 “林東源의 전문을 서울로 보내지 않는 것”이고 또 다른 방안은 “그의 전문을 서울로 보내면서 동시에 (李東馥 이름의) 별도 전문으로 그것이 林東源의 개인적 행위임을 알리고 대표단의 기존 ‘협상지침’을 재확인 받는 것”이었다. 그러자, 鄭元植은 “林東源의 전문을 서울로 보낼 필요가 없겠다”면서 “내일 아침 대표단 조찬 모임 때 李  대표가 서울에 물어보니까 당초 가지고 간 ‘협상지침’에 따르라는 회신이 왔다고 보고하고 그것으로 이 문제는 마무리하라”고 지시했다. 李東馥은 嚴益俊과 金勇煥에게 수석대표의 지시를 전달하면서 “林東源의 전문을 서울로 보내지 말라”고 지시하고 다시 白南俊과의 회담 장소로 돌아갔다.




17일 새벽 12시30분경 白南俊과의 협상이 다시 결렬되어 숙소로 돌아가고 있는 李東馥에게 嚴益俊이 다가왔다. “상황실로 돌아가 보니까 林東源의 전문이 이미 서울로 발송되었더라”는 것이었다. 李東馥은 “그렇다면 기존 ‘협상지침’을 재확인해 달라는 내용의 내 이름의 별도 전문도 서울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李東馥의 이름으로 보낸 電文의 내용은 “李仁模 件 에 관하여 면회소 설치, 이산가족 방문 정례화, 동진호 사건 해결 등 3개 조건이 충족되어야 협의할 수 있다는 지침을 재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 7시경 대표단 조찬 장소로 향하던 길에 상황실로 간 李東馥은 嚴益俊이 한 손에 하나씩 두 장의 종이를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서울에서 회신이 왔느냐”는 李東馥의 물음에 대한 嚴益俊의 대답은 “아직 없다”였다. 그가 양손에 들고 있는 종이에 대한 嚴益俊의 설명은 “서울에서 올 회신을 可否(기존 ‘협상지침’의 ‘견지’ 또는 ‘변경’) 양쪽으로 예상해 평양에서 미리 만들어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암호화 된 문장의 電送과 암호 해독에 걸리는 시간의 절약을 위하여 상황실 사이에 늘 사용하는 慣行”이라는 설명이었다. 李東馥은 嚴益俊으로부터 “기존 ‘협상지침’을 고수하라”는 내용으로 된 ‘전문’을 받아가지고 대표단 조찬 장소로 가서 “서울로부터 온 전문”이라면서 그 내용을 읽었고 鄭元植은 “면회소와 李仁模를 맞바꾸는 대북접촉은 중지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대표단 차원에서의 이 문제에 관한 논의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날 오후 2시50분 평양 상황실에는 서울 상황실로부터 상황을 문의하는 電文이 왔다. 그 내용은 아래 박스와 같았다.









 


제목: 없음


수신: 평양 상황실장


발신: 지원본부장


 


○ 북측의 李仁模 송환 문제 거론과 관련 건의 경위 재확인


○ 우리측 대표들 중에서 李仁模 문제와 관련, 우리의 기본 입


    장에 異意 제기 여부


○ 李仁模를 송환 시 이산가족 교환사업을 계속적으로 하겠다


    는 것인지 아니면 단 한 번에 그치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북


    측 입장


 






이에 대하여 평양 상황실은 오후 3시30분 아래 박스와 같은 내용의 電文을 서울 상황실로 발송했다.









 


제목: 서울 상황실 문의에 대한 회신


수신: 지원본부장


발신: 평양 상황실장


 


○ 李仁模 문제는 어제 林東源 차관(통일부)이 북측 金正宇     와 협의 시 이산가족 교환사업 실현 돌파구로 9월16일     밤 보고된 ‘공동합의문’ 내용을 제시한 후 서울 훈령을      요청한 것임.


 


○ 이에 대하여 李東馥 대표가 검토한 결과 우리 방침(3개     조건 동시 충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총리(鄭元植     수석대표)와 상의 후 어제 보낸 내용으로 건의했음.


 


○ 李仁模 송환으로도 (노무모) 교환사업은 정례화보다는 1     회성 사업으로 국한될 것으로 판단됨.


 




이날 오후 5시경 평양시내 ‘人民文化宮殿’에서 제8차 회담 둘째 날 회담에 참가하고 있던 李東馥에게 평양 상황실 요원이 이날 오후 4시15분 서울 상황실에서 발송되었다는 새로운 ‘협상지침’을 담은 電文을 가져다주었다. 電文의 내용은 아래 박스와 같았다. 









 


제목: 李仁模 송환의 경우 관철시켜야 할 조건


수신: 평양 상황실장


발신: 서울 상황실장


 


○ 아래 세 가지 사업이 관철되는 조건으로 교섭하되 불가할 경


    우 ①+②항 관철, 최종적으로는 ①+③항 관철


 


   ①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사업 정례화


        - 시기: 설날, 8.15, 추석 등 년 3회 실시


        - 규모: 1회에 300-400명 정도


 


   ②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및 우편물 교환소 설치, 상설 운


       영


        - 설치시기: 쌍방 합의 후 1개월 이내


        - 운영방법: 이산가족 면회는 월 1회 100명 정도; 우편물


           교환은 週 1회


 


   ③ ‘동진27호’ 선원 12명 귀환


        - 시기: 합의 후 15일 이내


        - 방법: 李仁模와 동시 교환


 


○ 합의사항이 조건 없이 실현되도록 이번 8차 회담에서 남북


    총리가 서명하여 발표할 것


 


○ 실무절차 협의를 위해 쌍방 적십자간 접촉의 즉각 개최에 합


    의할 것


 


○ 고향방문단 규모, 이산가족 면회, 우편물 교환 등의 回數와


    규모는 융통성을 가지고 교섭 


 






이 電文이 평양 상황실을 통하여 李東馥에게 전달된 17일 오후 5시경 평양의 ‘人民文化宮殿’에서 열리고 있는 제8차 회담 둘째 날 회담은 막바지였다. 李仁模 문제는 이날 대표단 朝餐 모임에서 鄭元植의 지시로 북측과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회담의 主題 안건인 4건의 합의문건들의 내용이 가까스로 타결되어 오후 늦게 열린 회담 석상에서는 쌍방 수석대표들이 합의문건 별로 부산하게 서명하고 또 낭독하여 발효시키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서울서 온 電文의 내용은 본래 대표단이 서울에서 지참하고 온 ‘협상지침’을 훨씬 구체화시킨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電文이 회담 석상으로 끼어들 空間은 없었다.




둘째 날 회담은 오후 6시25분 종결되었다. 사실은 이것으로 제8차 회담의 전 회담 일정은 끝난 것이었다. 나머지 회담 행사는 오후 7시30분부터 木蘭館에서 楊亨燮(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주최로 열리는 만찬뿐이었다.  오후 6시25분 회담을 끝낸 남측 대표단은 서둘러 숙소인 百花園을 경유하여 만찬장으로 이동했다. 남측 대표단 대변인인 李東馥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회담 종료 후 북측 대변인 安秉洙와 함께 쌍방 취재 기자들과의 ‘뒤풀이’ 회견을 가진 뒤 대표단과는 별도로 뒤늦게 百花園을 경유하여 만찬장으로 이동했다. 李東馥은 만찬장에서야 겨우 鄭元植에게 이날 오후 서울에서 온 새로운 ‘협상지침’을 구두로 보고할 수 있었다.




鄭元植의 반응은 상식적인 것이었다. “내용이 그렇다면 이제 상황은 끝난 것이 아니냐”면서 “이제 그 문제는 다음 회담 과제로 가지고 가자”는 것이었다. 李東馥이 문제의 電文을 鄭元植에게 보여준 것은 밤 11시 쯤 남측 대표단이 만찬을 끝내고 百花園으로 귀환한 뒤였다. 鄭元植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다음 회담 몫이 되었으니 그 電文 내용은 내일 아침 대표단 조찬 모임 때 다른 대표들에게 알려 주라”는 것이 鄭元植의 지시였다. 다음 날은 남측 대표단이 평양을 출발하여 서울로 귀환하는 날이었다.




18일 오전 7시30분 대표단의 조찬 모임에서 李東馥은 문제의 電文 내용과 이 電文이 평양 상황실에 도착한 이후 처리된 경과를 설명했다. 그러자 林東源이 강하게 반발했다. 그의 반발 요지는 17일 그의 북측 상대역인 金正宇와의 대화에서 金正宇가 李仁模 송환을 조건으로 면회소 설치 문제에 대해 융통성을 보였을 뿐 아니라 18일 새벽 1시30분경 다시 그의 침실로 찾아온 金正宇가 李仁模 문제에 관한 논의를 요구하다가 돌아갔는데 “만약 그때 서울로부터 ‘새로운 협상지침’이 내려 와 있는 것을 알았으면 협상을 진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林東源은 金正宇가 그에게 “‘남쪽의 세 가지 요구 중 두 가지는 수용 가능하다’는 신축성을 보여주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林東源의 이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다. 왜냐 하면 17일 오후 서울서 내려 온 새로운 ‘협상지침’은 본래 서울서 대표단이 가지고 온 ‘협상지침’을 보다 더 구체화시킨 것일 뿐 완화시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새로운 협상지침’도 북측이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ㆍ예술단 교차방문” 합의의 “무조건 실시”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 남북간에 李仁模 송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양보할 수 없는 大前提라는 입장을 絶對化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같은 大前提가 충족되어 李仁模 문제를 논의하는 경우에도 “1차적으로는 ① 이산가족 고향방문 정례화, ② 판문점 면회소와 우편물 교환소 설치ㆍ운영, ③ 납북어선 ‘동진27호’ 선원 12명의 송환 등 3개 조건을 관철”시키되, “그것이 불가능하면 ①+②, 그리고 그것도 불가능하면 ①+③을 관철하라”는 것이었다.




북측이 이 같은 남측의 입장을 수용할 가능성은 全無했다. 그러나, 남측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그에게 했다고 林東源이 주장하는 북측 金正宇의 발언이 사실이었는지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李東馥은 鄭元植 수석대표의 허락을 얻어 남측 대표단 환송을 위해 이날 아침 百花園으로 온 延亨黙 북측 단장에게 “李仁模 문제에 관하여 확인할 일이 있으니 며칠 후에 쌍방 대변인 접촉을 갖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고 延亨黙이 이를 수락했다.




남측 대표단이 서울로 돌아 온 뒤인 9월23일 서울에서는 국무총리(鄭元植) 주재로 통일부총리(崔永喆), 경제부총리(崔珏圭), 국가안전기획부장(李相淵), 대통령비서실장(丁海昌), 통일원차관(林東源), 국가안전부 제1특별보좌관(李東馥) 등이 참가하는 고위전략회의가 열려 제8차 고위급회담 결과를 평가하고 향후 전략을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이산가족 문제와 李仁模 문제에 대한 향후의 대책을 아래 박스와 같이 결정했다. 









 


<이산가족 문제>


 


○ 제7차 고위급회담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ㆍ예술단 교차방문 무조건 실시” 문제는 합의된 대


    로 “무조건 실시”를 관철한다. [“李仁模 문제를 비롯하여


    그 밖의 어떠한 다른 문제도 이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


     다”는 기본 입장을 견지한다]


 


<李仁模 문제>


 


○ 기본적으로 李仁模 문제는


 


     - 이미 남북간에 합의된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ㆍ예술단


        교차방문”과는 관계없이 별개의 문제로 논의하고


     - 李仁模 송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에 대한 반대급


        부로 이산가족과 납북인사 문제와 관련하여 북측으로부


        터 가능한 최대한의 양보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다는 입장에 입각하여 검토한다.


 


○ 구체적으로는 李仁模의 송환을 다음의 세 가지 방침에 입


    각하여 북측과 협의한다.


 


   ① 李仁模의 신분이 ‘전쟁포로’임으로 ‘송환’의 대상이라는


       북측의 주장은 수용하지 않으며 다만 ‘他意에 의한 이산


       가족’의 범주에 포함시켜 상호주의의 차원에서 인도적 조


       치의 대상으로 고려한다. [鄭元植 국무총리의 ‘7.7 대북


       서신’에 언급된 “고령 이산가족 중 본인의 희망에 따라 부


       양자와 배우자가 있는 지역으로  귀환ㆍ정착시키는 경


       우”를 적용]


   ② 정부가 이미 결정한 1) 이산가족 고향방문 사업의 정례화


       (년 3회, 각 300-400명 규모), 2)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및 우편물 교환소 상설 운영(면회 월 100명, 우편물 교환


       週 1회), 3) 납북된 ‘동진27호’ 선원 12명 귀환 등 3개 항목


       의 반대급부를 북측에 요구하되 최종적으로는 ①+②항


       또는 ①+③항과 李仁模 송환의 교환을 관철한다.


 


○ 李仁模 송환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질 때는 북측이 송환 후


    의 李仁模를 정치적ㆍ선전적 목적에 이용하지 않는데 동의


    할 것을 요구한다.


 






이날 고위전략회의의 결정에 따라 직통전화를 통해 이루어진 남측의 공식 제의와 북측에 의한 수락으로 쌍방간에는 10월1일과 5일 두 차례에 걸쳐 판문점에서 대표접촉이 이루어졌다. 본래는 대변인접촉을 갖는다는 것이 남북 간의 합의였으나 남측에서 崔永喆(통일부총리)가 제8차 평양 회담에서의 李仁模 문제 처리 과정에 대하여 李東馥ㆍ林東源 두 대표 간에 의견 차이가 있는 것을 고려하여 문제의 판문점 접촉에 李ㆍ林 두 대표가 함께 참석할 것을 희망했다. 이에 따라 남측은 북측과의 직통전화를 통한 협의를 통해 남쪽에서는 李 ㆍ林 두 대표가, 북쪽에서는 安秉洙ㆍ金正宇 두 대표가 참가하는 대표접촉으로 접촉의 틀을 변경시켰다.




대표접촉에서 眞相이 가려져야 할 문제는 북측이 그에게 “남측이 李仁模만 보내주면 북측은 ‘이산가족 고향방문’과 ‘판문점 면회소 설치’ 등 남측의 두 가지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양보 의사를 밝혔었다”는 林東源의 주장이 과연 사실이냐는 것이었다. 林東源은 “李東馥이 16일 밤 자신의 ‘請訓 電文’의 발송을 가로막았고 또 17일 오후 서울에서 온 ‘새로운 협상지침’ 電文을 適時에 알려주기 않았기 때문에 북측의 양보를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판문점에서 있었던  10월1일과 5일 두 차례의 대표접촉의 결과로 林東源의 그 같은 주장은 事實無根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10월1일의 첫 번째 대표접촉에서 林東源은 “(북측이) 이산가족 문제는 7차 회담에서 약속한 것을 날짜를 재조정해서 지키겠으며 면회소 설치 문제는 협의할 수 있으니 李仁模는 돌려보내라고 말한 것이 맞지 않느냐”고 추궁하자 북측의 安秉洙는 “맞지 않는다”고 一蹴했다.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을 1년에 2-3번씩이라도 정례화 하는 방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고려할 의사가 없느냐” 는 林東源의 문의에 대해 북측의 金正宇는 “노부모 방분단 정례화 문제는 생각하지도 말라”고 되받았다.




이렇게 되자, 林東源은 그에게 錯覺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했다. 그는 “나는 우리 쪽에서 李仁模를 돌려주면 (북측은) 노부모 방문단 교환을 실현하고 면회소 설치 문제를 협의할 용의가 있으며 동진호 어부 송환은 반대한다는 것이 그쪽(북측)의 입장인 줄 알았다”면서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나의 解釋하고는 다르다”고 그의 錯覺을 인정한 것이다. 10월5일의 두 번째 ‘대표접촉’에서 북측의 安秉洙가 북측의 입장을 확실하게 정리했다. “면회소를 설치하여 우선 1차에 한하여 그곳에서 면회를 실시하고 동시에 李仁模를 돌려받겠다는 것이 우리(북측)의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4. ‘訓令 造作’ 시비의 顚末




林東源이 제기한 ‘訓令 造作’ 시비는 크게 보아 2개의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하나는 “당시 대표단 대변인이었던 李東馥이 사적으로 안기부(현 국정원)의 기조실장에게 전문을 보내 ‘李仁模 건에 관해 3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회신을 보내라’고 요청했고 이 요청에 따라 서울에서 평양으로 ‘3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전문이 발신됐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서울에서 정해진 협상 전략대로 ‘2개의 조건만 관철되면 남북적십자 접촉을 즉각 재개하는 데 합의해 발표하고 돌아오라’는 별개의 ’진짜’ 전문이 보내졌지만, 이는 ‘협상 당사자’인 林東源뿐 아니라 수석대표였던 당시 鄭元植 총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林東源의 이 두 가지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1992년9월17일 새벽 평양 상황실로부터 서울 상황실로 보내진 李東馥 명의의 電文은 林東源의 주장처럼 “私的으로 안기부(현 국정원)의 기조실장에게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에 앞서 보내진 林東源 명의의 電文과 똑 같이 “발신: 평양상황실; 수신: 서울상황실”로 되어 있는 李東馥의 電文도 실제 ‘수신인’은 통일원장관(崔永喆)ㆍ국가안전기획부장(李相淵)ㆍ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金宗輝) 등 3명이었다. 평양에서 열리는 회담 기간 중 평양 상황실로부터 서울 상황실로 보내지는 일체의 電文은 각기 3부씩 만들어져서 이 3명에게 동시에 전파되도록 內規가 만들어져 있었다.




제8차 고위급회담 직전에 만들어진 이 內規는 그것이 만들어진 원인이 있었다. 남북대화 상황실은 여러 가지 기술적 이유 때문에 그 관리를 안기부가 맡고 있어서 그 동안은 상황실에서 처리되는 電文이 우선 안기부장에게만 보고되어서 통일원장관과 대통령외교안보수석은 안기부장을 통하여 電文에 접하게 되는 일이 관행화되어 있었다. 회담 전략을 실무적으로 총괄하는 입장이었던 李東馥은 이 같은 관행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李東馥은 “평양에서 서울로 보내지는 모든 電文은 세 사람에게 동시에 전파ㆍ보고한다”는 內規를 만들어 놓고 제8차 회담을 위해 평양 길에 올랐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이 시스템에 고장이 생기고 있었다. 당시 안기부의 ‘實力者’(?)는 嚴三鐸(기획조정실장)이었다. 제8차 평양 회담 기간 중 嚴三鐸은 서울 상황실에 대해 “모든 電文의 보고는 나를 경유하라”고 嚴命(?)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992년9월16일 밤부터 17일 오전 10시까지 嚴三鐸은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연락이 두절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17일 새벽에 도착한 林東源과 李東馥의 電文은 서울 상황실에서 처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 동안 평양에서는, 서울로부터 ‘訓令 電文’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17일 아침 7시30분 대표단 朝餐 모임에서 鄭元植의 지시에 따라 문제의 처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李東馥이 낭독한 “3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電文은 서울에서 발신된 것이 아니었다.




嚴三鐸이 출근한 것은 17일 오전 10시, 그는, 평양에서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시점에서, 평양에서 올라 온 2건의 ‘請訓 電文’을 보게 되었다. 嚴三鐸은 17일 오전 11시경 李相淵(안기부장)에게 “평양에서 李仁模 문제를 싸고 대표들 사이에 混線이 있는 듯 하다”면서 문제의 電文들의 접수 사실을 보고했다. 李相淵은 교통정리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울 시내 장충체육관에서 행사에 참가 중이던 崔永喆(통일부총리)을 전화로 연결하여 “현장의 대표들 사이에 混線이 있는 듯 하니 李仁模 문제에 관하여 ‘협상지침’을 좀 더 분명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당신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다. 崔永喆의 1차적 반응은 不快感의 표명이었다. “통일부총리가 어째서 그 같은 사실을 뒤 늦게 안기부장을 통하여 전해 들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崔永喆은 “무언가 지침을 좀 더 분명히 해 주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李相淵의 생각에 共感했고 “그러면, ‘새 협상지침’을 이렇게 평양에 알려주자”면서 그 순간 그가 머릿속에서 정리한 내용을 李相淵에게 口述해 주었다. 李相淵이 이를 받아 적었다. 그 내용이 이날 오후 4시15분 서울 상황실로부터 평양 상황실로 보내진 “李仁模 송환의 경우 관철시켜야 할 조건”이라는 제목의 ‘訓令 電文’이다. 崔永喆은 “청와대 쪽과도 상의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李相淵에게 “본래 가지고 간 訓令과 내용이 달라진 것이 없으니 우리 두 사람이 상의한 것을 평양으로 알려도 되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細心한 성격의 李相淵은 전화로 이 내용을 金宗輝(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에게 알렸고 金宗輝는 그 내용을 書面으로 받아서 盧泰愚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裁可를 받아서 李相淵에게 돌려보냈다. 문제의 새 ‘訓令 電文’은 이 같은 복잡한 과정을 거치느라고 17일 오후 4시15분이 되어서야 서울 상황실을 통해 평양 상황실로 電送되었다. 암호로 처리된 이 長文의 ‘訓令 電文’은 평양 상황실에서 解讀의 과정으로 거쳐 오후 5시 경에야 비로소 平文化되었다. 이때쯤 평양에서 제8차 회담은 거의 종료되고 있었다.




그보다도 문제는 “서울에서 정해진 협상 전략대로 ‘2개의 조건만 관철되면 남북적십자 접촉을 즉각 재개하는 데 합의해 발표하고 돌아오라’는 별개의 ’진짜’ 전문이 보내졌지만, 이는 협상 당사자인 林 전 장관뿐 아니라 수석대표였던 당시 鄭元植 총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는 林東源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捏造라는 데 있다. 林東源은 북측의 金正宇가 그에게 “李仁模만 보내주면 남측의 이산가족 고향방문과 판문점 면회소 설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했다”면서 마치 이것이 17일 오후 서울에서 온 새로운 ‘訓令 電文’에 부합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訓令 電文’이 자신은 물론 鄭元植에게도 전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같은 林東源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우선, 문제의 “李仁模 송환의 경우 관철시켜야 할 조건”이라는 제목의 새 ‘訓令 電文’의 내용과 이 電文이 17일 오후 4시15분에야 서울로부터 평양으로 발송된 경위, 이 電文이 도착했을 때의 평양의 상황, 그리고 평양에서 이 電文이 처리된 경위는 앞에서 기술된 바와 같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이 電文에 담겨진 새 ‘訓令’의 내용이다. 그것은 李仁模의 송환 代價로 최소한 ①+②항, 또는 ①+③항이 반드시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①항은 “이산가족 고향방문을 년3회(설날ㆍ8.15ㆍ추석), 매회 300-400명 규모로 정례화한다”는 것이고 ②항은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와 우편물 교환소를 常設하여 이산가족 면회는 월1회 100명 정도, 우편물 교환은 週 1회로 한다”는 것이며 ③항은 “납북 어선 ‘동진27호’ 선원 12명을 李仁模 송환과 동시에 귀환시킨다”는 것이다.




북측이 이 같은 남측의 조건을 수용할 가능성은 없었다. 金正宇가 그에게 말했다고 林東源이 주장하는 “남측의 이산가족 고향방문과 판문점 면회소 설치 요구 수용” 운운은 서울에서 온 새 ‘電文’에 담긴 ‘訓令’ 내용에 크게 미달할뿐더러 그나마도 林東源의 ‘희망사항’이었을 뿐 북측의 金正宇가 실제로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져서 林東源 스스로 그가 錯覺했음을 이미 인정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서는 “문제의 새 ‘訓令’ 電文이 시간여유를 가지고 평양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이 ‘訓令’에 입각하여 쌍방이 어떤 합의를 이룩했을 가능성은 없었다”는 것을 鄭元植도 監査院 감사관들에게 증언했다.




그뿐 아니었다. 당시의 盧泰愚 정부가 제8차 고위급회담이 끝난 뒤 9월23일 서울에서 열린 ‘고위전략회의’에서 “제7차 고위급회담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ㆍ예술단 교차방문 무조건 실시’ 문제는 합의된 대로 ‘무조건 실시’를 관철한다”는 기본 입장과 함께 “李仁模 문제를   비롯하여 그 밖의 어떠한 다른 문제도 이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는 사실은 당시 정부의 확고한 방침이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ㆍ예술단 교차방문 무조건 실시’ 약속의 ‘무조건 이행’이 없이는 李仁模 송환 문제는 거론될 수 없다”는 것이었음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李東馥이 아니었으면 남북간에 노부모 방문단 교환과 판문점 면회소 상설ㆍ운영과 李仁模 송환을 맞바꾸는 흥정이 가능했다”는 林東源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小說에 불과한 것이었다.    






5. <林東源 회고록>의 虛構性




평양에서 제8차 고위급회담이 진행된 1992년9월을 전후하여 林東源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북측의 ‘意圖’에 관하여 결정적 ‘誤判’과 ‘錯覺’을 하면서 그 같은 ‘誤判’과 ‘錯覺’에 입각하여 李仁模의 송환을 실현시키는 문제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집착을 보여주었다. <조선ㆍ닷컴> 2008년6월8일자에 발췌ㆍ소개된 <林東源 回顧錄>에서 그는 “당시 노태우 정부는 노부모 방문단 사업 및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ㆍ운영과 李仁模 씨의 송환 문제를 연계시켜 풀되, 1987년 납북된 동진27호 선원 송환문제도 연계해 거론해 보기로 방침을 정했다”(①)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회고’(?)는 사실과는 다르다. 1992년9월의 제8차 고위급회담에서의 남측의 목표는 3건의 <부속합의서>들과 <화해(정치) 공동위원회 구성ㆍ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타결시키는 것이었지 林東源이 <회고록>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노부모 방문단 사업 및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ㆍ운영과 李仁模 씨의 송환 문제를 연계시켜서 풀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남측의 관심은 북측이 ‘李仁模 송환’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워서 <부속합의서> 타결을 가로막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었다.




남측은 그 동안의 남북대화 과정과 특히 鄭元植의 ‘7.7 서한’에 대한 북측의 부정적 반응으로 미루어 볼 때, 북측이 남측의 ‘노부모 방문 정례화’와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및 우편물 교환소 운영’, 그리고 ‘동진호 선원 귀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판단하고 있었다. 남측은 그 같은 판단에 입각하여 북측이 수용할 것을 예상한 것이 아니라 ‘李仁模 송환’ 문제를 ‘전제조건’화 하여 <부속합의서> 타결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할 목적으로 문제의 ‘노부모 방문 정례화’ㆍ‘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와 우편물 교환소 운영’ㆍ‘동진호 선원 귀환’ 등을 요구한 것이었다.




더구나, ‘동진호 선원 송환’ 문제에 관한 남측의 입장이 “연계하여 거론한다”는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은 제8차 고위급회담 前夜인 9월14일과 회담 직후인 9월23일 있었던 국무총리 주재 고위전략회의에서 논의된 내용과 9월17일 오후 서울에서 평양으로 내려 보낸 “李仁模 송환의 경우 관철시켜야 할 조건”이라는 제목의 ‘訓令’ 내용(이미 앞에서 記述)이 웅변해 준다. 제8차 평양회담에서 ‘李仁模’ 문제를 둘러싼 남북간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부속합의서>들과 <화해> 분야 <공동위원회 구성ㆍ운영에 관한 합의서> 협상이 타결된 것으로 이 회담에서의 남측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었다.




<조선ㆍ닷컴>이 발췌한 <林東源 회고록>의 “이 문제(李仁模 송환)의 대북 협의는 당시 대표 중 한명이었던 임동원 통일부 차관이 맡았다”(②)는 대목도 사실과는 크게 다르다. 당시 고위급회담 대표단 안에서 林東源이 맡은 일은 <교류ㆍ협력분과위원회> ‘공동위원장’에 불과했다. 회담의 전반적 전략ㆍ전술을 통제하는 것은 실무적으로 李東馥의 소관이었다. 특히 李仁模 문제는 ‘轉向拒否 長期囚’라는 문제의 성격상 국가안전기획부가 다루고 있어서 이 문제에 관한 林東源의 역할은 글자 그대로 ‘自願裨將’의 그것이었다. 이 때문에 제8차 고위급회담 이후 소위 ‘訓令’ 문제가 제기되자 당시 그의 上司였던 崔永喆(통일부총리)은 “제8차 평양회담에 앞서서 林東源에게 ‘李仁模 문제는 안기부에서 주로 다루는 문제이니 당신은 그 문제에 간여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면서 제8차 회담 기간 중 평양에서 집요하게 이 문제에 집착한 林東源의 行步에 대하여 “도대체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疑訝해 했었다.




“북측이 노부모 방문단 사업과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ㆍ운영에 동의하면서 李仁模 씨 송환 문제와 교환이 가능해졌지만”(③)이라는 대목의 虛構性은 앞에서 이미 충분히 論證한 바 있다. 북측이 “노부모 방문단 사업과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ㆍ운영에 동의한 일이 없다”는 사실은 1992년10월1일과 5일 두 차례에 걸쳐 판문점에서 있었던 ‘대표접촉’에서 북측 대표(安秉洙ㆍ金正宇)들에 의해 확인되었고 林東源 스스로 이 자리에서 자신이 ‘錯覺’하고 ‘誤解’했었다고 시인했다는 것이 앞에 기술되어 있다.




“갑작스레 서울에서 ‘3개의 조건이 (모두)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電文이 날아들었다”(④)는 대목도 사실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電文’은 “서울에서 날아든 것”이 아니라 그 전날인 16일 밤 11시30분경 李東馥의 문제 제기를 통해 林東源이 대표단 차원에서 아무런 협의 없이 서울로 보낸 ‘請訓 電文’ 내용이 대표단이 서울로부터 가지고 온 ‘訓令’ 내용을 중대하게 변경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鄭元植의 지시에 따라 조치하는 과정에서 서울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평양 상황실에서 작성한 것이었음을 앞에서 記述한 바 있다. 따라서 “林 전 장관은 조사 결과 당시 대표단 대변인이었던 李東馥 씨가 사적으로 안기부(현 국정원)의 기조실장에게 전문을 보내 ‘李仁模 건에 관해 3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회신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이 요청에 따라 서울에서 평양으로 ‘3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전문이 발신됐다고 설명했다”(⑤)는 대목도 사실과 다르기는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서울에서 정해진 협상 전략대로 ‘2개의 조건만 관철되면 남북적십자 접촉을 즉각 재개하는 데 합의해 발표하고 돌아오라’는 별개의 ‘진짜’ 전문이 보내졌지만, 이는 협상 당사자인 林 전 장관뿐 아니라 수석대표였던 당시 鄭元植 총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고 林 전 장관은 회고했다”(⑥)는 대목도 사실이 아니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별개의 진짜 전문’은 1992년9월17일 오후 4시15분 서울 상황실에서 평양 상황실로 보낸 “李仁模 송환의 경우 관철해야 할 조건”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협상지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협상지침’이 그가 말하는 것처럼 “2개의 조건만 관철되면 남북적십자 접촉을 즉각 재개하는데 합의해 발표하고 돌아오라”는 것이 아니었음은 앞에 제시된 電文의 全文과 9월23일의 ‘고위전략회의’ 논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9월17일 오후 5시경에야 암호문이 해독되어 겨우 진행되고 있는 회담 석상의 李東馥에게 전달된 문제의 ‘電文’이 평양에서 처리된 경위에 대해서는 앞에서 記述한 대로이다. “협상 당사자인 林 전 장관뿐 아니라 수석대표였던 당시 鄭元植 총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는 대목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더구나 林東源이 스스로를 가리켜 ‘협상 당사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千不當萬不當하다. 그와 李東馥이 9월15일 평양 도착 직후 북측의 安秉洙ㆍ白南俊과 가진 ‘대표회담’에서 李仁模 문제를 해결하는데, 예상했던 대로, 실패함에 따라 鄭元植은 다음날인 17일 대표단 朝餐 모임에서 “李仁模 문제는 더 이상 북측과 논의하지 말라”고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의 과정을 보면 林東源은 끈덕지게 특히 북측의 金正宇와 李仁模 문제 논의를 계속했다. 사실은 이 같은 林東源의 행동이야 말로 대표단의 차원에서 용납될 수 없는 개별행동이었다.     




林東源은 제8차 회담을 마치고 서울로 귀환한 뒤 “이산가족 문제 협상경위와 내용(요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盧泰愚 대통령에게도 보고되었다. 林東源은 이 보고서에 9월18일 새벽 1시50분부터 2시10분까지 百花園의 침실로 그를 방문한 북측의 金正宇가 “판문점 면회소를 연내에 설치ㆍ운영하도록 하며 이를 위하여 적집자회담을 즉각 재개하자. 합의내용을 공동으로 발표하자. 李仁模 송환 문제는 공동발표문에 포함시키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쌍방 대표들 사이에 합의각서로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주장은 그가 꾸며낸 하나의 虛構였음이 그로부터 며칠 뒤에 판명되었다. 10월1일과 5일 판문점에서 열린 ‘대표접촉’에서 북측의 安秉洙와 金正宇가 그 같은 林東源의 주장을 펄쩍 뛰면서 부정한 것이다.




결국, 이 ‘대표접촉’에서 林東源이 스스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정확하게 한다면 林東源 자신은) 이렇게 感을 잡았었다. 7차 회담에서 합의한 이산가족 방문단 문제는 (북측이) 날짜를 (다시) 정해서 약속을 지킨다. 이런 전제로 한 것이다. 李仁模를 돌려보내 주면 그쪽에서는 노부모 방문단 (교차방문을) 실현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면회소 설치 문제는 협의할 용의가 있다. 이렇게 알았었다. 그런데 (노부모 방문단 방문도) 이러저러한 조건이 아니면 안 한다. 이렇게 말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6. 後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로 그리고 무엇을 목적으로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李仁模 송환’ 문제에 대한 林東源의 執着은 지속되었다. 그 증거가 제8차 고위급회담 종료 후일뿐 아니라 9월23일의 제8차 고위급회담 ‘뒤풀이’를 위한 9월23일의 국무총리 주재 고위전략회의 후인 9월28일 통일부 산하 <민족통일연구원>에서 행한 林東源의 講義 내용이다. 다음 박스 안의 내용은 이날 林東源의 講義 내용 가운데 ‘李仁模’ 관련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그 다음에 이산가족 문제인데 이산가족 8.15 노부모 방문단 교환, 이것을 북한이 그 동안 공개적으로는 세 가지 조건을 걸고 지연, 무산시켰죠. 하나는 핵문제, 두 번째는 李仁模, 세 번째는 포커스렌즈, 그런데 이번에도 기조연설에서 핵문제하고 李仁模를 얘기했죠. 延亨黙 총리가. 그러나 핵문제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실제로 여기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리얼 인텐션은 李仁模 돌려보내달라는 겁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기도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어렵지만, 그래서 이 사람만 보내주면 이산가족 방문단 문제 다 해결할 수 있다 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본래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제가 이 문제를 직접 관여를 해 왔기 때문에 지난날의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지난번에 제가 여기서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산가족 방문단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남북간에 경제협력, 그리고 남북간의 관계개선의 돌파구를 내자 하는 생각을 그쪽에서 가졌는데, 이것과 관련하여 祖平統 보수파들이 李仁模와 연계시켜서 그 문제를 제기하자 했을 때 金正日이 ‘불리하다. 이산가족 방문단은 무조건 해 준다고 하는 걸로 하라, 그러면 남측에서도 당연히 무조건 李仁模를 돌려보내 줄 것이다’ 해서 공개적으로는 무조건이고 비공개적으로는 李仁模와 연계시켰던 것입니다. 아주 교묘하게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측에 요구를 했기 때문에 우리 대표들이 검토해 보겠다. 이럴 때는 이미 上部에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前向的으로 검토하라는 지시가 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내부에서 검토해보겠다 했는데 검토해보겠다는 것을 북측 사람들은 肯定的으로 받아들였죠. 근데 그 동안 내부검토 과정에서 뒤집혀지고 말았죠. 그 바람에 이 문제가 복잡해지고 이산가족 방문단 문제가 霧散되고 이리 됐다, 제가 협상에 임했습니다만 이번에도 李仁模만 보내 주면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곧 실현하자, 우리는 알려주지 않았는데, 자기네들은 130명 다 선정해 놓고 본인들에게 알려 줬더랬는데 곤란하게 됐다 하는 주장이고 그리고 판문점의 면회소 설치 문제도 앞당겨서 10월달부터 할 수 있다. 李仁模만 돌려보내 주면 하겠다는 것이 북측의 입장입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 <조선ㆍ닷컴>에 발췌된 내용에 의하면 林東源은 그의 ‘회고록’에서 그의 捏造된 허구적 주장을 다시 들고 나와 필자를 誹謗하는 엉뚱한 行步를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생각하면서, 무엇을 쟁취할 목적으로, 이 같은 진실 왜곡을 고집하는 것인지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다. 그는 1998년 金大中 씨가 이끄는 ‘좌파’ 정권이 이 땅에 처음 수립되었을 때 여기에 가담하여 ‘햇볕정책’이라고 일컬어진 金大中 씨의 대북유화정책의 오른 팔이 되는 變身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金大中 정권에서 ‘대통령 외교안보 수석비서관’ㆍ‘통일부장관’ㆍ‘국가정보원장’ 등의 요직을 涉獵하면서 2000년6월 金大中 씨의 평양방문을 수행하고 <6.15 남북공동선언>의 傳道師가 되었다.




1992년9월28일 <민족통일연구원>에서 그가 행한 講義 내용은 그가 북한의 ‘어느 누구’와 끊임없이 물밑에서 ‘접촉’하고 ‘대화’를 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시사해 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그 같은 ‘접촉’과 ‘대화’를 통하여 파악하는, 그 자신이 ‘리얼 인텐션’이라는 영어 단어를 동원하면서까지 설명하려고 하는, 북한의 ‘입장’에 대해서는,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無知’의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심각하게 ‘誤判’하고 또 ‘錯覺’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그의 그 같은 ‘誤判’과 ‘錯覺’에 입각하여 지난 10년간 두 개의 ‘좌파’ 정부가 국정을 관리하는 동안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친북ㆍ반미’적인 대북정책의 추진을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국가 정체성과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을 주도해 왔다. 오늘날 남쪽의 많은 사람들은 林東源이 대한민국의 국가이익보다는 金正日이 이끄는 북한 독재정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남한사회 내 ‘친북ㆍ좌파’ 세력의 首長이라는 疑惑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햇볕정책’에 관한 그의 설명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는 문제의 ‘햇볕정책’이 “미국이 1970년대 유럽에서 수행했던 데탕트 정책을 한반도에서 수행하려는 것”이고 “북한에게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개방’과 ‘체제변화’의 과정을 밟을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여 줌으로써 북한을 변화시켜 보자는 것”(1999년9월17일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초청연설 내용 중에서)이라고 주장했었다. 金大中의 ‘햇볕정책’이 과연 林東源의 설명대로였다면 그것은 그들이 입만 열면 아니라고 排斥해 마지않는 ‘흡수통일’의 變形임에 다름없었다. 북한이 당초 金大中의 ‘햇볕정책’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북한은 격렬하게 반발했었다. “우리 공화국을 얼려 넘기려는 기만정책”(1999년2월4일 金正日이 <조선노동당> 책임일꾼들과 가진 담화 “인민군대를 강화하면 군사를 중시하는 사회적 기풍을 세울 데 대하여”에서)이며, “화해․협력의 미명아래 우리의 사회주의제도를 이질화시켜 저들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흡수․통일시키자는 악랄한 반북 대결모략 책동”(1999년9월27일 뉴욕에서의 白南淳(남북고위급회담에서 李東馥의 상대역이었던 白南俊의 本名) 북한 外相의 ‘미국의 소리’와의 회견발언에서)이고, “가짜 대화와 독 묻힌 교류를 통해 공화국 북반부를 사상적으로 와해시키고 정신적으로 무장해제시킴으로써 북침통일 야망을 이루어보려는 총포성 없는 북침전략”(2000년3월15일자 <노동신문> 논평)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은, 이 때 이 같은 북의 視角은 예리한 것이었다. 요컨대, 북의 입장은 ‘햇볕정책’을 과거 미국이 구 쏘련의 붕괴를 목적으로 추진했던 이른바 ‘평화적 이행전략’과 같은 것, 즉 북의 ‘체제붕괴’를 노린 ‘공작성 정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북한의 ‘햇볕정책’觀이 2000년 金大中의 평양방문과 <6.15 선언> 발표를 전환점으로 하여 180도 달라졌다. 필자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 북한의 ‘햇볕정책’觀의 이 같은 急旋回를 초래했느냐는 것이다. 문제의 <林東源 회고록>을 읽는 사람들이 과연 그 책 안에서 이 같은 궁금증을 풀어주는 열쇠를 찾아 낼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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