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문화의 化身 김유신論

한국형 군사문화의 化身 김유신

서기 660년 金庾信이 이끄는 신라군 5만 명은 황산벌에 도착하여 백제 장군 階伯의 5천
결사대와 대치했다. 여기서 일어난 일들은 三國史記에 실감 나게 적혀 있다. 초등학교 교과
서에서부터 많이 소개되어 있는 장면들이다. 6·25전란 후의 195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녔던
우리 세대는 階伯, 官昌의 장렬한 죽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흥분을 맛보았다. 아이들끼리
병정놀이를 할 때 너는 階伯 장군, 나는 金庾信式으로 별명을 붙여 일종의 연극을 하기도
했다.
기자는 당시 별명이 「階伯」이었다. 그런 이름을 갖고 나니 金庾信이 미워지고 百濟軍을
동정하게 되어 주로 그런 성향의 역사소설을 많이 읽었다. 지금은 金庾信을 「삼국통일로
한민족 형성의 출발점을 만든 민족사 제1인물」로 평가하게 되었지만 어릴 때의 彼我감정
이 퍽 오래 갔던 기억이 있다.
황산벌에서 일어난 장면들은 三國史記의 기록 덕분에 영화처럼 생생하게 想像(상상)할 수
있다. 소년기에 읽었던 플루타크 영웅전이나 三國志, 또는 일본 戰國시대 武士 이야기와 비
슷한 분위기였다. 황산벌 전투는 한국 군사문화의 絶頂(절정)을 보여준다. 그 이후의 한국
사에서 실종된 武士道와 男性美의 현장감이다.

階伯은 출정하기 전에 패배를 예감했던 듯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三國史記 列
傳).
『한 나라의 인력으로 唐과 新羅의 大兵을 당하게 되었으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가 없다.
내 妻子(처자)가 노비가 될까 두렵다』
그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출정했다.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는 10배나 많은 신라군을
네 차례 격퇴했다. 金庾信은 여기서 신라군도 決死특공의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되겠
다고 판단했다. 그 전 진덕여왕 시절 金庾信은 백제군과 싸울 때 苦戰(고전)하자 충직한 부
하 丕寧子를 불러 술을 함께 마시면서 부탁했다. 丕寧子는 『저를 알아주시고 또 이런 일을
맡겨주시니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丕寧子는 아들 擧眞을 데리고 출전했는데 걱정이 되어 종 合節(합절)을 불러 부탁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반드시 따라죽으려 할 것인데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거두어
돌아가 어머니를 위로해다오』
丕寧子가 적진으로 돌입하여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을 보고 아들도 뛰어들려고 했다. 종 합
절이 말리니 거진은 칼로 합절의 팔을 친 다음 달려가 전사했다. 합절도 『상전이 죽었는데
내가 죽지 않고 무엇하랴』면서 뛰어들어 죽었다. 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본 신라군이 분기탱
천하여 일제히 돌격, 백제군을 무찌르고 3000여명의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

계백과 대결할 때 신라군 사령관 金庾信은 부사령관 둘을 데리고 있었다. 부사령관 金欽純
은 金庾信의 동생이었다. 그는 아들 盤屈(반굴)을 불렀다.
『신하는 충성이 제일이고 자식은 효도가 제일이다.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은
忠孝를 다 완성하는 것이다』
반굴은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적진으로 돌입하여 장렬하게 전사했다. 다른 부사령관
品日(품일)은 아들 官昌(관창)을 데리고 출전했다. 品日도 아들을 백제군으로 돌격시켰다.
階伯은 사로잡힌 관창의 갑옷을 벗겼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것을 보고는 살려보냈다.
관창은 신라군으로 돌아와선 우물물을 움켜마시고는 다시 돌격을 감행하였다. 계백은 생포
한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아버지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붙들고 옷소매
로 피를 씻으면서 말했다.
『내 아들의 面目(면목)이 아직 살아 있는 것 같구나. 임금님의 일로 죽었으니 후회가 없을
것이다』
신라군은 이 두 소년장군의 죽음을 보고는 흥분하여 북을 두들기면서 진격하여 백제군을
격파했다는 것이다.

金庾信의 조카가 되는 盤屈의 아들이 있었다. 金令胤이라고 했다. 문무왕 다음이 神文王인
데 이때 고구려의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명령을 받은 장군 金令胤은 출전할 때 아
버지의 명성을 의식했음직한 발언을 한다.
『나는 이번에 친척들과 친구들이 악평을 듣지 않도록 하겠다』
반란군과 대치할 때 金令胤의 동료 장수들은 『잠시 병력을 물렸다가 적이 피곤해진 뒤 공
격하자』고 건의한다. 金令胤은 그 건의를 거부하고 즉시 돌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從
者(종자)가 말렸다.
『장군들이 저렇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잠시 예봉을 거
두고 틈을 보자는 것인데 장군님만 홀로 나아가려고 하니 안될 일입니다』
金令胤은 이렇게 말했다(三國史記 列傳).
『싸움에 임하여서는 나아감만 있을 뿐 물러남이 있어선 안 된다. 장부가 일에 임하여 스스
로 결정할 일이지 衆意(중의)를 왜 따라야 하는가』
金令胤은 적진으로 쳐들어가 격투하다가 죽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神文王은 비통해하면
이렇게 말했다.
『그 아비가 없었으면 그 아들도 없었을 것이다』
金令胤은 신라사람들의 귀감이 된 아버지를 너무 의식하여 좀 무모한, 일종의 자살 공격을
했다는 것을 왕이 알았다는 느낌이 드는 말이다.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이 된 신라의 武士들은 忠孝를 일치시킨 도덕률을 항상 가슴과 머리에
새겨놓고서 생활했다. 화랑도는 동아시아에서 나타난 최초의 장교양성교육기관이다. 이들의
행동윤리는 臨戰無退로만 단순화되지는 않았다. 圓光 법사가 만든 화랑5계에 의해 殺生有
擇(살생유택)이란 인도적 배려가 따랐다. 반드시 이겨야 하되 쓸데 없는 살육은 하지 말라
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배려, 국가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가 3위1체로
통합된 것이 新羅武士 집단의 행동윤리이자 도덕률이었다. 화랑도의 대표인 風月主 출신이
자 신라무사도의 化身인 金庾信에게도 後日譚(후일담)이 있다.
그의 둘째 아들 元述은 唐軍과 싸우다가 패했다. 다른 장군들은 전사했고 그도 죽으려 했
으나 보좌관이 말리는 바람에 살아서 돌아왔다. 金庾信은 자신이 죽인 수많은 신라의 젊은
이들을 생각하였음인지 문무왕에게 원술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왕은 그러나 『원
술한테만 중죄를 물을 수는 없다』면서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원술은 시골로 도망해 있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 나타나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면담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부인에게는 三從(삼종)의 義(의)가 있다. 지금 홀로 되었으니 마땅히 자식을 따라야 할
것이나 원술 같은 자는 이미 남편의 자식 노릇을 못하였는데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는
가』
원술은 그 뒤 對唐결전의 최대 승부처였던 매소천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벼슬을 사
양하고 세상을 마쳤다고 한다.

金庾信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고려 때까지는 매우 높았다. 三國史記를 쓴 金富軾은 삼국의
제1인물이 金庾信이고, 삼국통일의 제1元勳(원훈)도 金庾信이란 평가를 깔고서 임금도 아
닌 그에게 가장 많은 紙面(지면)을 내주었다. 金庾信 列傳의 끝에서 金富軾은 이런 평을 하
고 있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함은 친근하여 틈이 없고, 위임하여 변함이 없었으며, 꾀를 행할 때
말을 들어주어 부리지 않는다고 원망치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유신이 그 뜻을 펼 수 있게
되어 삼국을 합쳐 한 집안을 만들고 공명으로써 일생을 끝마쳤다. 유신에 대해서는 지금껏
잊지 않고 士大夫(사대부)뿐 아니라 배우지 못하고 천한 사람들도 잘 알고 있으니 반드시
남다른 점이 있는 것이다」
국가와 장수가 삼국통일이란 목표를 두고 서로 믿고 한 덩어리가 되어 일했다는 표현이다.
국가(이 경우 왕이겠지만)와 신하 사이에 틈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신라와 통일주도층에 대
한 최대의 찬사이다. 이는 국가와 공직자, 국가와 군대 사이의 이상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
기도 하다. 金庾信은 兵權을 잡고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네 왕을 모셨지
만 반역을 꾀하지 않았고, 왕들의 의심도 사지 않았다. 역대 왕들은 金庾信의 욕심이 정권
이 아니라 통일에 있음을 알고 그를 믿어 그가 하자는 대로 밀어주었던 것이다. 그런 일은
金庾信의 인격에 대한 신뢰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런 金庾信에 대한 기억은 고려를 지나 文臣들이 정권을 잡는 朝鮮朝에 들어가면 잊혀지
고 만다. 朝鮮王朝實錄 CD를 검색해보면 金庾信에 대한 언급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군
사문화나 무사도가 사라진 세상에서 金庾信의 위대성을 알아줄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金庾信에 대한 기억은 국군이 세계적 强軍으로 성장한 지금도 희미하다. 기자는 군대나 예
비역 장성들 앞에서 강연할 때 金庾信에 대해서 자주 언급한다. 강연에 대한 호평도 있었지
만 비판적인 이야기도 많았다. 충격적인 것은, 金庾信이 외세인 唐과 손잡고 사대주의적인
통일을 한 민족반역자쯤으로 알고 있는 군인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육사의 별명이 화랑대
인데 그곳에서 공부한 사람이 대표 화랑 金庾信의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육
사의 역사 교육이 한참 잘못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삼국통일을 할 때 三國의 주민들은 비슷한 종족이었지만 민족은 아니었다. 민족이란 하늘
에서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고 같은 언어, 풍습, 종교, 제도, 국토를 오랫동안 공유한 결과
의 자연스런 産物이다. 따라서 신라의 입장에서는 唐도 백제, 고구려와 똑 같은 외국이었다.
민족의 출현 이전에 있었던 일을 민족주의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세종대왕한테 왜 영어
를 가르치지 않았느냐고 불평하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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