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이 <다음>에 카페를 개설했다. 카페 이름은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이다.
뜻밖이다. 그동안 조선일보 칼럼 등을 통해 좌파정권과 정면에서 싸워온 투사가 만든 인터넷 카페의 이름이 <탐미주의 클럽>이라니? <류근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나, <자유주의 클럽> 같은 이름이 걸맞지 않을까?
<탐미주의 클럽>이란 이름을 붙인 이유에 대해 류근일 전 주필은 이렇게 설명한다.
“물론 사회과학적으로는 '자유주의 클럽'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까페는 사회과학(知)보다는 감성(美)의 모습을 띠고 싶었습니다. 지식이 많아도, 정의를 부르짖어도 나쁜 짓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反지성적으로 타락할 수도 없고, 反정의로 타락할 수도 없습니다. 美는 知와 義를 자동적으로 동반합니다. 탐미주의라고 한 것은 바로 그 뜻입니다. 진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독단과 독선을 휘두르는 데에 넌덜머리가 났습니다.”
지난 7월12일 개설된 이 카페의 회원은 8월1일 현재 90명. 회원들의 면면을 보면 우파운동의 일선에 섰거나, 우파 인터넷 사이트의 논객인 이들이 많다.
이 사이트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코너는 <류근일이 걸어온 길>. 이 코너에서 류 전 주필은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돌아보고 있다.
월북한 선친의 이야기, 자유당 말기 <대학신문>에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썼던 글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됐던 일, 5-16 이후 용공으로 몰려 7년여 동안 감옥살이 했던 일, 감방동기(?)인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과의 인연으로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된 일, 유신체제 하에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던 일, 김대중 정권의 언론탄압 등....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선친이 월북한 후 북에서 낳은 류 주필의 두 이복동생에 관한 이야기다. 류 전 주필의 선친이 월북 후 김일성대 등에서 봉직하다 숙청당했다는 얘기는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두 이복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따르면 남동생은 전기기술자로 일하다가 감전사고로 죽었고, 여동생은 동독유학을 다녀온 의사와 결혼했다가 이혼 당한 후 함경도로 쫓겨 가 거지꼴로 연명하다가 재미동포를 통해 도움을 요청해 온 적이 있다고 한다.
류 전 주필이 권위주의 정권 시절 용공으로 몰려 감옥살이를 할 때, 월북한 부친은 남조선 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했다는 것도 기가 막힌 얘기지만, 두 이복동생의 운명도 읽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아마 김정일 정권과 친북좌익에 대한 류 전 주필의 그칠 줄 모르는 분노는 그 가족사와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많은 애국우파 인사들은 좌파 정권 10년 동안 조선일보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조선일보 안에서도 좌파들과의 싸움에서 정말 목숨 걸고 싸운 분은 그리 많지 않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을 제외하면, 조선일보 내에서 좌파와 정면으로 싸운 진정한 투사는 류근일 전 주필 정도일 것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조차 '류근일 전 주필 글은 너무 날이 서 있어서 읽기가 겁난다'고 할 정도였다. 그것은 그만큼 류 전 주필이 이념전선에서 물러섬 없는 투쟁을 벌였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7순 나이에도 류근일 전 주필은 늘 '젊은 보수'들과의 소통을 소망해왔다. 이번 카페 개설은 그 첫 걸음일 것이다. 많은 분들이 류 전 주필의 카페에 가입해서 류 전 주필의 ‘자유를 위한 싸움’에 동참하기를 기원한다.
* 류근일 전 주필이 쓴 <류근일이 걸어 온 길> 가운데, 월북한 선친과 이북의 이복동생들에 대해 다룬 <아버지와 아들>을 전재한다.
(6장)아버지와 아들
내 가족사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한반도에서 산다는 것의 한 상징성을 보여주는 가족사입니다.
김영삼 문민정부 때인데, 하루는 탈북자 김현식 교수라는 분이 안기부 고위층의 안내를 받아 나를 신문사로 찾아 왔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북쪽 내 아버지의 기구한 인생유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본 산 증인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아버지는 결국 남쪽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김일성 대학에서 가르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인기도 좋았답니다. 얼마 후엔 교무처장직도 맡는 등 잘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59년인가 60년인가 남쪽 출신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의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당(黨)은 어느 날 학교 강당에 사람들을 집합시키더니 “류응호 동지 앞으로 나오시오!” 하더랍니다. 그리고는 인민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미제국주의의 간첩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모년 모월 모일에 대학을 방문한 외국인들과 통역을 통하지 않고 직접 영어 독일어로 이야기 했느냐? 당신이 영문 책자를 소장하고 있는 것은 불법 아니냐? 등등.
아버지는 완강히 혐의사실을 부인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숙청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로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 머나 먼 함경도 오지로 추방당했습니다.
말이 좋아 농사지, 움막에 거적때기 한 장 깔고 호미로 언 땅을 파먹고 사는 유배 신세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어떻게 새 부인을 만나 10년 가까이 모진 삶을 그렇게 이어갔다고 합니다. 아들도 하나 낳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기구한 것은 아버지가 북쪽에서 ‘반동’으로 그 고생을 할 때 나는 남쪽에서 ‘용공’으로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현식 교수가 러시아어를 가르치던 김형직 사범대학 교정에 전체 교수 학생들을 또 모으더라는 것입니다. 김현식 교수는 깜짝 놀랐습니다. 유배지에서 살아 생전 절대로 다시 나올 수 없게 되어 있는 류응호 교수가 느닷없이 연단에 올라서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 간부가 “오늘부터 류 동지가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되었소. 그리 아시오” 하더라는 것입니다.
영문을 모른 김현식 교수는 대학에 파견 나와 있는 정보부 사무실에 가서 웬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류 영감 아들이 남쪽에서 학생운동을 한답니다. 필요상 데려다 놓았으니 그리 아시오”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김현식 교수와 또 다른 두 사람을 아버지 감시원으로 지정 했답니다.
아버지는 일정한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도 금지되고, 정교수 자격도 못 받고, 교수식당에서 식사하는 것도 금지돼 짠지가 전부인 도시락 식사를 해야 했고 (이 문제는 김 교수가 나중에 해결해 줬다고 합니다), 학교 강당에서 교양 영화를 볼 때는 사람들이 의심 당할까 봐 아버지 곁에 앉는 것조차 꺼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김현식 씨가 남으로 내려와 펴낸 책 <나는 21세기의 유목민>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인생은 식물인생이었지요. 각종 남북회담이 열릴 때면 기자들이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한 두 번 그 쪽 안내원이 우리측 기자에게 다가와 “나는 류근일 부친의 제자인데 여기 잘 계시다”고 귀뜸하더라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류근일 이놈, 네 아버지를 우리가 인질잡고 있다”는 메시지를 넌지시 전한 것 같습니다.
민주화 후 언제인가 통일원 사람이 내게 전화를 해 왔습니다.
“아, 왜 부친한테 편지라도 하지 않습니까?”
“당신네 당국자들이 아버지 때문에 지난 세월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데 이제 와서 편지를 하라고? 또 국가보안법으로 잡아 넣으려고? 싫소이다”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편지 써서 우리한테 주세요”
그래서 반세기만에 처음 ‘주부님전 상서’라고 쓰고 편지로나마 ‘아버지’라는 말을 입밖에 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쪽 당국자가 환히 들여다 보는 편지일 터라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꼭 필요한 말만 적어 통일원에 냈습니다.
가는데 3개월 오는데 3개월 해서 6개 월 만에 드디어 ‘근일이 보아라’로 시작되는 아버지 답장을 받아 보았습니다.
김현식 교수 말에 의하면 나의 이복 동생은 반동의 자식이라 대학 진학도 못하고 전기 기술자가 돼 어느 공장에 다니다가 감전사고로 죽었다고 합니다. 평양으로 다시 불려온 뒤 사는 게 좀 나아졌을 때 딸 하나를 낳았는데, 당이 그 애를 동독에서 의과대학을 다닌 사람에게 결혼을 시켰다고 합니다.
아버지 편지는 이런 자세한 이야기도 못한 채 그냥 “며느리는 뉘집 딸이냐? 손자들에게는 인문 사회과학을 멀리하게 하고, 물리학 생물학 같은 자연과학을 공부시켜라” 하는 정도의 담담한 말씀만 전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아직 과부가 아니란 말이지?” 하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러기를 꼭 세 번, 이복 여동생의 마지막 편지가 왔습니다.
“아버님이 뇌 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부고도 못하고 장례도 못 치르고 제상 앞에서 실컷 곡(哭)도 못 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이불을 뒤집어 썼습니다.
몇 달 뒤, 하루는 신문사로 재미교포라고만 밝히는 사람의 전화가 왔습니다.
“함경도에 사는 누이 동생을 만나고 온 길인데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김포 공항에 있습니다. 혹시 북에 누이 동생이 있습니까”
“네 있지요”
“도와주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도와 줄 수만 있다면요, 그런데 왜 그러시지요?”
“함경도 기차 정거장에서 웬 다 죽어가는 거지 여자를 만났는데, 자기 오빠가 조선일보에 있다면서 소 식을 전해 달라 하더군요. 강제로 이혼당하고 함경도로 쫓겨와 어디 얹혀 있는데 곧 굶어 죽게 생겼더라구요…”
그리고는 전화를 끊어 버리는 거였습니다. 한 5분 쯤 지난 뒤에 그가 다시 전화를 해 왔습니다.
“아까 드린 이야기 없던 걸로 해 주십시오.”
“왜요?”
“내가 그런 소식 전했다는 것이 만에 하나 저쪽에 알려지면 내 누이가 큰일 당합니다.” ”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김정일 비판을 해대니까 반동의 딸, 반동의 동생을 그냥 놔둘 저들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불쌍한 인생입니다.
야박한 말이지만, 84세의 고령이기는 하셨지만 아버지는 아마도 더 이상 아들에게 멍에가 되기 싫으셔서 그 쯤 해서 인생을 마감하신 것이려니 생각합니다. 더 사셨다면 나의 논조 때문에 아버지는 그 연세에 다시 함경도로 유배당하셨을 게 뻔합니다.
“알았습니다, 아버지.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버지를 그렇게 학대한 김정일 일당과 목숨 바쳐 싸우겠습니다”
유유창천(悠悠蒼天)은 그러나 오늘도 말이 없습니다.
류근일의 탐미주의클럽 cafe.daum.net/aestheticismclub
"손자들에게는 인문 사회과학을 멀리하게 하고"
- 강철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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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8-01, 18: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