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라도 만나서 긴긴 정담 나눕시다

민통선 안 고향 옛터에 세운 박한진 예비역 대령의 望鄕碑文(망향비문).
민통선 안 고향 옛터에 세운 박한진 대령의 망향비문


道昌古墟(도창고허)

이곳은 5백년 넘게 살아 온 우리들 고향 도창의 옛터전입니다.
뒷동산 황산에 진달래 붉게 피면
어머니는 꾀꼬리 우는 바른골 무쇠정골 지나
길잔등 넘어가서 나물해 오시고
아버지는 우묵골 마른생골의 뻐꾸기 소리 들으면서
밭가래비 가락 흥겹게 등너머 봄밭을 갑니다
점심광주리 옥이는 돌봉산의 흰꽃 한 송이 따 머리에 꽂고
정자나무 아래 행주치마 고운 점심을 차렸지요
호데기 밭골 이스밭골 안산골 절터골로 새새끼 찾아 다니던 꼬마들이
주나무 밖을 달려나가 웃보 아랫보에서 멱감고
소케서 천렵국 끓이며 씨름할 때
오월의 그네에선 누나들의 비단댕기가 너울댑니다
맑게 흐르는 큰골 옹장골 독장골 물에 빨래하며 가재 잡고
큰 우물 작은 우물의 바가지물 떠다 가사 챙기는 사이
먼 들에 황금물결 치면 큰고개 작은고개 너머 학교 가서
코스모스 예쁜 가을운동회 뛰었습니다
단풍 아름다운 시엉골에서 한제당 제사떡 나눠먹고
건너 산에서 매사냥했지요
시렁골 피난골에서 겨울 나무지게 푸짐히 지고 오면
짧은 겨울 햇살 자지봉을 넘고
장에 가신 어른들을 비낭끼미로 강아지 안고 마중나갔구요
국수집 연기가 밤공기에 흐르고
아련한 도드락 뚝닥 다듬이 소리마저 감싸며
야경꾼의 딱대기가 하얗게 눈덮인 온 동네를 잠재웠습니다
정월 대소사 보낸 매서운 바람에 등너머서 액맥이연 날려 보내고
알돌봉 서낭당에 주먹돌 던지며 행복을 빌고 살았는데…그랬는데…
8·15해방으로 민주 공산 나뉘더니
6·25전쟁 때는 골짜기마다 생명의 방공호에 숱한 죽음을 묻고
이웃 사촌 혈육 모두 남북으로 거미처럼 흩어져서
잿더미 된 동네는 집도 사람도 개도 없는 적막강산 됐습니다
오매불망 헤어진 부모형제 이웃님들 그리우나
철조망이 가로막아 만날 날 기약이 없어
이렇게 이름 석 자 새겨놓고 기다리니
못 오시면 꿈에라도 만나서 긴긴 정담 나눕시다

(비문 아래로는 마을 사람들 명단이 새겨져 있습니다)

*박한진 예비역 대령의 고향은 강원도 김화군 서면 도창리로 지금은 민통선 안의 흔적없는 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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