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紀行-회색의 知性

*이 글은 필자가 1996년에 월간조선에 연재했던 '몽골벨트를 가다' 중에서 뽑은 것이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매년 평균 약 1억의 관광객이 이 도시를 찾는다고 한다. 상당수가 독일·오스트리아 등 이웃 유럽국가에서 육로로 들어와 스치고 가는 관광객이라 숫자만큼은 관광수입이 많지가 않다. 프라하는 지난 6백년간 한번도 전화(戰禍)를 당하지 않은 도시다. 이 도시에서는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고도(古都) 속에서 현대가 눈치를 보면서 겨우 한구석에 붙어 있는 꼴이다.

모차르트의 일생을 그린 영화 「아마데우스」는 감독 미로쉬 포르만이 체코 사람인 이유도 있겠지만 비엔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도 프라하에서 촬영되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지오반니」가 초연(初演)된 극장도 아직 있고 그때처럼 지금도 공연중이다. 프라하가 이렇게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체코 사람들의 비겁함(?) 때문이다.

그들은 위기에 처하면 아예 항복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생존과 보존의 방도를 찾았다. 1938년 히틀러가 뮌헨 회담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농락함으로써 체코의 독일인 거주지 슈테트란트를 점령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히틀러는 슈테트란트만 먹은 게 아니라 내친 김에 체코까지를 점령하여 보호령으로 삼고 슬로바키아는 괴뢰국으로 만들었다. 이래도 체코에서는 조직적인 저항이 없었다.

1945년 소련군이 동쪽에서 접근해오자 프라하 시민들이 봉기하였다. 프라하 시민들은 독일군과 협상하여 도시를 보존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철수를 보장해주는 대신에 독일군은 도시를 파괴하지 않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소련의 위성국이 되어버린 체코에서는 공산당이 그렇게 악독하게 굴지 않았다고 한다. 1968년 체코 공산당이 민주화 정책을 추진하자 소련은 군대를 보내 이를 저지했다. 프라하의 봄은 소련군의 무력개입으로 「겨울」이 돼 버렸다. 이때도 소련군 탱크가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시위대는 조용히 사라졌다. 1956년 헝가리 사람들이 소련 탱크를 상대로 영웅적인 反共투쟁을 펼쳤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1989년의 공산정부 붕괴도 11월의 反共시위 1주일 후 공산정부가 자진 사퇴하는 것으로 아무 유혈사태 없이 조용히 이루어졌다. 1992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갈라설 때도 그 복잡한 이혼 수속을 조용히 품위 있게 마쳤다. 이혼이 너무 조용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직도 체코슬로바키아가 존재하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다.
(무혈 민주화 혁명을 velvet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우단처럼 부드러운 혁명이란 뜻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한 것을 velvet divorce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이 무혈혁명의 지도자는 희곡작가 하벨이었다. 그는 4년간 감옥생활을 한 인권운동가였다. 온건한 하벨 아래서 체코가 혁명과 分國의 과정을 무리없이 치른 것이다)

교양의 한 기준을 심각한 것을 조용히 처리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면 체코 사람들은 참으로 지성인들이다. 프라하 舊시가의 중심을 이루는 광장에는 종교개혁가 후스가 이단자로 몰려 화형을 당하는 동상이 있다. 체코 지식인 사회에서는 『후스냐 갈릴레오냐』하는 말이 있다. 후스처럼 지조를 지키면서 용감하게 죽을 것인가, 갈릴레오처럼 종교재판에선 항복을 하고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면서 자신의 일을 계속하여 후세를 기약할 것인가. 살아남아 인류의 공영에 이바지할 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갈릴레오의 삶과 같은 것이 바로 프라하의 회색 지성이며 파란 많았던 역사에서 터득한 기술인지도 모를 일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심리

프라하 교외에는 대우가 인수한 아비아(AVIA)라는 체코 자동차 공장이 있다. 이 공장은 1920년에 이미 비행기를 만들었던 곳이다. 金日成이 체코를 방문했을 때 서명한 방명록도 남아 있다. 이런 공장은 한국인이 맡아 돌려야 생산성이 살아난다는 것이 동구에서 실증되고 있다. 한국인이 가진 비교우위는 기술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고 교양은 더더구나 아니다. 거대한 기업조직을 장악하여 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줄 아는 생산관리 기술이 바로 오늘날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는 분야인 것이다. 생산관리 기술의 요체는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를 어떻게 다루고 부리느냐 하는 인간 경영술이다.

몽골인들이 어디를 가나 뛰어나게 잘했던 일이 바로 이런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였다. 해외에 나간 한국인이 현지 노동력을 장악하는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군대식 규율로 질서를 잡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솔선수범이다. 솔선수범이란 것은 결국 자기 희생이다. 한국인 간부들의 이런 자세가 현지인들을 인간적으로 감동시킬 때 비로소 공장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 어딜 가나 공통점이었다.

몽골族처럼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를 꼼짝 못하게 끌고가는 노하우를 오래 쌓은 사람들도 달리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전장에서의 무자비성과 통치시의 관용과 개방으로 타민족을 다루어갔다. 그런 경험은 전쟁과 식민통치를 통해 얻은 것이었다. 한국인이 어떻게 이런 거대 조직의 경영술을 체득했느냐 하는 것은 경영학자들의 논쟁 거리이기도 하다. 기자는 큰 전쟁을 치러본 경험과 군대생활의 경험, 그리고 몽골族으로서 타고난 천성이 결합된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국 사람들의 심리에 대하여 미국의 저명한 동양학자 루시안 파이는 「아시아의 권력과 정치」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죽은 친척과 친지들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죄의식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려 한다. 이런 생각은 위험에 처해서도 「나만은 무사할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변하고 어떤 모험도 감수하려는 공격적 태도를 갖게 한다. 한국의 공무원들과 민간인들 모두는 항상 자신들은 예외적으로 운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도록 운명지워진 인간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전쟁 체험은 그들에게 어려운 과업은 어떻게 조직적으로 대처하면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의무, 희생, 책임감에 기초한 군사문화의 효율성에 길들여진 가운데 한국인들은 살아남은 인간답게 무엇이든지 과감하게 생각하고 거창한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을 하도록 鼓舞(고무)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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