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 국군포로송환요구를 '냉전수구세력의 방해'라고 표현

좌익들이 쓰는 용어로써 애국자를 비난하는 사람이 對共정보수사기관인 국정원의 원장이었다.
햇볕정책의 핵심 집행자 중 한 사람이고 對北불법송금 사건에도 일정한 책임이 있는 林東源(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피스메이커'라는 회고록을 썼다. 중앙books에서 나온 이 책의 474 페이지엔 이런 대목이 있다.

<(2000년) 8.15 이산가족 교환방문 후 9월 초 우리 정부는 화해의 상징으로, 북한에 돌아가기를 원하는 비전향장기수 63명 전원을 판문점을 통해 무조건 송환했다. 분단피해자들의 인권을 존중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성숙한 자세를 과시한 것이다.
당연히 냉전수구세력의 송환반대와 방해가 극심했는데, 이들은 '가치관의 혼란 우려' '북측의 체제선전에 이용당할 우려' 등을 들먹이며 '탈북자 및 국군포로 문제와 연계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송환 반대 여론을 조성했다. 7년 전 이인모 노인을 비롯한 비전향장기수 송환을 반대할 때 들고나온 논리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씨의 용어선택에 문제가 있다. 63명은 비전향장기수이기도 했지만 북한정권을 위해 복무한 간첩과 빨치산 등이었다. 양심수가 아니었다. '화해의 상징'이란 말도 맞지 않다. 간첩과 빨치산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것은 한국과 국민이다. 가해자는 이들과 북한정권이다. 화해는 가해자가 사과함으로써 시작된다. 피해자가 가해자한테 서비스하는 것은 화해가 아니라 굴종이다. '화해의 상징'이 아니라 '굴종의 상징'이란 말이 정확할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분단피해자들의 인권을 존중하겠다면 분단피해자들이 누구인지 定義할 필요가 있다. 임씨는 간첩질과 빨치산 행위를 하여 조국을 뒤엎고 적화혁명을 하려 했던 반역자들을 '분단피해자'로 보고 있다. 이는 북한정권이나 남한 좌익들의 시각과 비슷하다. 정상적인 국민들중 간첩과 빨치산들을 '분단의 피해자'로 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건전한 국민들은 6.25 납북자들, 휴전 이후의 납북어부들,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들을 북한정권의 피해자로 본다. 임씨는 이 피해자들의 인권을 생각하는 이들을 '냉전수구세력'이라고 호칭했다. 그는, 간첩 빨치산을 북송하려면 국군포로를 송환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주장을 한 국민을 '냉전수구세력'이라고 불렀다. 이런 용어사용법은 북한정권이나 남한좌익과 일치한다.

한편, 납북자와 국군포로 등 自國民의 인권을 외면하고 主敵의 부하들 인권만 챙겨주는 행위를 임씨는 '인권을 존중하는 정부의 성숙한 자세'라고 정의했다. 김정일 편에 선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임동원씨가 '냉전수구세력'이라고 표현한 국민들은 자유와 헌법을 소중하게 여기는 애국자들이다. 임씨는 이 애국자들에 대하여 냉소적인, 아주 감정적 표현을 했다. '들먹이며' '방해가 극심' '고스란히 반복'이라는 말이다. 특히 '들먹이며'라는 단어는 비아냥거릴 때 쓰는 말이다. 북한이 불법으로 억류하고 있는 국군포로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애국자들을 비아냥거리고 있는 사람이 체제수호 기관의 책임자였다! 좌익들이 쓰는 용어로써 애국자를 비난하는 사람이 對共정보수사기관인 국정원의 원장이었다.

임씨가 국군포로 송환을 요구한 애국자를 비아냥거리려면 최소한 북한으로부터 국군포로를 한 사람이라도 데리고 나왔어야 했다. 김대중 정부와 임동원씨는 김정일한테 국군포로를 돌려달라는 말 자체를 꺼내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가 북송한 63명 중엔 일본인을 납치해갔던 辛光洙라는 거물 공작원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2002년에 그 2년 전에 북송된 辛光洙를 인터폴을 통하여 국제수배했다. 신광수는 일본인을 납치한 범인이 밝혀진 유일한 경우이다. 신광수는 안기부 조사에서 김정일로부터 직접 납치 지령을 받았다고 자백했었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가 신광수를 일본으로 넘기지 않고 김정일 품안으로 보내준 것은 결과적으로 김정일의 범행 物證을 인멸한 셈이다. 김대중, 임동원씨가 양심이 있다면 납치범 신광수를 보내주면서 납치된 일본인을 돌려 달라고 하든지 生死라도 확인해달라고 요구했어야 했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 윤리가 아닌가?

임동원씨의 논법에 따르면 납치된 사람은 외면하고 그 납치범을 돌려보낸 행위가 '인권을 존중하는 성숙한 자세의 과시'가 된다. 그는 김정일을 기쁘게 하고 애국자의 가슴에 피 눈물이 흐르게 한 행위를 '인권 존중' '성숙한 자세'라고 미화하는 사람이다.

임동원씨가 국정원장 시절이던 2000년 6월 모 국정원 직원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거액의 不法자금을 보냈다. 간첩 잡는 기관을 간첩을 위한 봉사기관으로 전락시킨 임동원씨는 지금도 세종연구소를 운영하는 세종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임동원씨는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기소되었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사람이다. 그는 지난 연말, 대법원에 상고했다가 갑자기 상고를 취하한 지 나흘만에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의하여 사면복권되었다.

反헌법적 對北정책의 책임자인 김대중, 임동원씨의 행적에 대하여 국가적 차원의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확신을 준 것이 임씨의 회고록이다. 이 회고록은 촛불난동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6월에 출판되었다. 우파정권이 들어선 뒤에 낸 책에서 우파, 즉 대한민국헌법 수호세력을 '냉전수구세력'이라고 지칭할 정도이면 임씨는 믿는 구석이 있든지, 한국의 우파를 참으로 우습게 보는 모양이다.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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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02년 12월호 '김대중 연구 시리즈'중에서 발췌


金賢姬와 이은혜

이은혜. 일본명은 다구치야에코(田口八重子)로서 대한항공 858편 폭파공범 金賢姬가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 일본어 선생이었다. 1989년 봄 기자는 서울 강남의 안기부 시설에서 金賢姬를 내리 5일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기자는 이 인터뷰를 중심으로 하여 金賢姬의 증언과 대한항공 폭파 과정을 그해 月刊朝鮮에 석 달간 연재했다.

金賢姬는 나에게 이은혜와 관련된 이야기를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의 기억력이 상당히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 3월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金賢姬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사부 공작원으로 소환된다.

그녀는 묘향산 골짜기 2지구 2호 초대소에 밀봉수용되어 교육을 받게 되었다. 金賢姬는 1981년 7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는 평양시 용성구역內 동북리 2층 3호 초대소에서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여기서 그녀는 이은혜라고 불리는 일본인 여자와 2년간 기거하면서 일본어 및 풍습 등을 익히는 일본인化 교육을 받았다. 金賢姬는 이은혜로부터 일본 노래도 배우고 일본식 손님대접법과 예절을 익힌다. 金賢姬는 자신이 교육을 받을 당시 이은혜가 25세 가량이었다고 말했다.

1991년에 이은혜의 정체가 일본인 다구치야에코로 밝혀졌을 때 그녀가 1955년 8월생임이 확인됨으로써 金賢姬 기억의 정확성이 입증되었다.

金賢姬가 2년간 함께 생활하면서 지켜본 이은혜는 이런 모습이었다.

<키 165cm에 몸무게는 56kg 정도. 이은혜는 이혼녀인데 해변을 산책하다가 납치되어 끌려와서 공작원 교육기관에서 일본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음. 그녀는 술을 자주 마시고 술을 따르는 데 익숙하여 일본에서 그런 업소에 종사하지 않았나 추정. 밥은 공기를 들고 젓가락만을 사용하여 먹었다. 그녀는 『조선사람은 食後에 입가심을 한 물을 마신다』고 흉을 보기도 했다. 1982년 2월 어느 날 이은혜는 이런 푸념도 했다.

『金正日 동지의 생일 만찬에 일본인 여자로서 특별히 초대되어 갔었다. 나처럼 납치돼 온 것 같은 일본인 부부를 만났는데 이 사실을 절대로 알려선 안 된다』

이은혜는 술에 취하면 멍하니 앉아서 끌려온 신세타령을 하며 자식들이 보고 싶고 일본에 가고 싶다면서 울기를 잘 했다>


다구치야에코와 하라타다아키의 죽음

일본 경찰은 金賢姬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이은혜로 돌변한 피랍 일본 여성을 찾기 위해 몽타주를 만들어 전국에 돌렸다. 몇몇 유력한 실종자의 사진을 가져와 金賢姬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金賢姬가 『바로 이 여자이다』라고 찍어 준 사람이 다구치였다.

도쿄 가까이에 있는 사이타마縣 출신인 다구치는 金賢姬의 추측대로 음식점에 종사한 적이 있는 여성이었다. 북한 측이 최근 일본 정부 조사단에 밝힌 바에 따르면 다구치는 후쿠오카 미야자키의 아오지마 해안에서 1978년 6월29일에 납치되었다고 한다.

북한 측은 「본인이 공화국에 3일 정도 관광을 갔다 오고 싶다고 말하여 특수공작원이 신분을 위장하는 데 이용할 목적으로 그녀를 데리고 왔다」고 일본 측에 알렸다.

다구치는 1978년 6월부터 1984년 10월까지 초대소(공작원 교육시설)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현실체험을 했다는 것이 북한 측의 설명이다. 金賢姬가 이은혜를 만났다는 장소와 시점이 일치한다.

다구치는 납치될 때가 23세였다. 그녀는 6남매 중 막내딸이었고 납치될 때 도쿄 이케부쿠로 지역 음식점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이혼한 상태였다. 세 살배기 사내아이와 한 살짜리 딸을 두었다.

이번에 金正日 정권이 訪北한 고이즈미 수상 측에게 다구치야에코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사실상 金賢姬의 존재와 대한항공 폭파를 自認한 셈이다.

북한 정권은 다구치야에코가 이은혜가 아니라고 변명하고 있으나 이것이 거짓말임은 사태전개의 논리상 누구나 알 수 있다.

북한 정권이 일본 측에 통보한 자료에 따르면 다구치는 1984년 10월에 다른 피랍 일본인 하라타다아키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 하라타다아키는 포항 출신 거물간첩 辛光洙가 납치했다. 납치장소도 다구치의 경우와 같은 규슈 미야자키 아오지마 海岸이고 음식점에서 근무한 경력도 같다.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하라타다아키는 1986년 7월19일에 肝硬變으로 죽었고 다구치는 7월30일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북한 측은 그녀가 남편의 사망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뒤 회복단계에 있던 중 황해도 麟山郡의 고갯길에서 타고 있던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하여 사망했다는 것이다.

북한 측은 승용차에 타고 있던 세 명이 죽고 트럭에 타고 있던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무덤은 麟山郡에 있었는데, 1995년 7월의 홍수로 上月里 댐이 무너지면서 유실되었다는 것이다.

북한 측이 죽었다고 발표한 여덟 명의 피랍 일본인 가운데 여섯 명의 유골이 1995년 홍수로 유실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언론은 이런 북한 측의 발표를 믿지 않고 있다.

북한 측은 다구치를 납치한 이유를 신분위장용이라 주장했으나 신분위장이 되려면 연고자나 직계가족이 없어야 하는데 다구치는 6남매 중 막내였고 이혼한 상태에서 두 자녀를 두고 있었다.

무덤이 유실되어 유골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북측 주장에 대해서도 일본 언론과 對南 공작원 출신 탈북자 安明進씨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공작기관이 피랍 일본인에 대한 관리를 엄격하게 하는데 그런 식으로 죽도록 방치할 이유가 없다면서 살아 있든지 죽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 정부 측에서는 「다구치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곳은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곳인데 충돌사고라니?」라면서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金正日이 일본인 납치 책임을 물어 처형했다는 장봉림 장군은 李韓永 암살 실패로 숙청되었다」

金正日 정권은 일본인 납치를 지휘한 책임자로서 장봉림(사형)과 김성철(15년형)을 처벌했다고 밝혔는데 이 주장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하라타다아키를 납치해 간 辛光洙는 안기부에 붙들렸을 때 『金正日의 직접 지시를 받아 납치했다』고 자백했다. 일본인 납치 같은 중대사를 결정하고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金正日뿐이란 것은 북한 상식에 속한다. 더구나 지난 9월 초 辛光洙는 판문점 북쪽 지역에 나타나 북한 귀환 2주년 행사에서 金正日에 아부하는 발언을 했었다.

장봉림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정보가 있다. 지난해 초 月刊朝鮮 앞으로 北京에서 팩시밀리 다섯 장이 도착했다. 月刊朝鮮 禹鍾昌 기자는 「탈북한 북한 로열 패밀리의 최측근」이란 사람이 보낸 이 정보를 확인하여 2001년 2월호에 「李韓永(金正日의 처조카) 살해는 김정남(金正日의 장남) 지시를 받은 李昌善(사회문화부장)이 지휘했다」는 題下의 추적 기사를 썼다. 취재과정에서 이 팩시밀리 내용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提報임이 밝혀졌다.

팩스엔 이런 대목이 있었다.

<金正日의 처조카인 李韓永이 手記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을 펴냈을 때 김정남은 자기의 해외 채널을 이용하여 金正日보다 먼저 책을 입수하였다고 한다. 김정남은 그 후 인민무력부 문화연락실(북한군부內의 對南공작 부서) 장봉림 장군을 만나 李韓永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준다. 그 후 장봉림이 김정남의 명령을 집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김정남은 아버지 몰래 같은 지시를 중앙당 사회문화부 李昌善에게 주었으며, 그 결과 사회문화부에서 「새끼 장군님」의 명령을 집행한 것이다. 장봉림은, 김정남이 인민군 보위사령부 김장성 부사령관에게 지시하여 간첩혐의로 체포, 숙청해 버렸다는 說이 있다>


DJ의 양심에 대한 국제수배?

다구치와 결혼하여 함께 살았다는 하라타다아키는 남한 출신 辛光洙가 1985년 우리 안기부에 검거되어 자신의 여러 가지 범행을 자백하는 과정에서 처음 등장한 인물이다.

납치했다는 사람(辛光洙)과 납치된 사람(하라)이 확인되고 납치범이 자백한 유일한 경우이다. 앞으로 국제법 위반이나 인류에 反하는 범죄 혐의로 金正日과 그 하수인들에 대한 재판이 제기될 경우 하라타다아키-辛光洙 관계는 범죄의 立證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건은 金正日의 개인적인 安危와도 직결된다.

더구나 辛光洙는 金正日을 만나 일본인 납치에 대한 지시를 직접 받았다고 증언했다. 북한 측도 하라타다아키의 자료를 일본 측으로 통보하면서 「辛光洙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이후 법적인 절차가 생기면 제공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1991년 6월4일에 본 기자는 안기부 직원의 안내를 받아 대전 교도소에 가서 무기징역형을 받아 수감되어 있던 辛光洙를 면회하려고 한 적이 있다. 辛光洙는 교도관을 통해서 면회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 안기부 및 교도소 직원은 本人의 의사가 그러하다면 강제로 데리고 나올 수는 없다고 말했다. 기자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있는 일본인 납치범이자 간첩인 그가 민주화 시대에 기본적 인권을 누리고 있음을 확인한 것을 위안으로 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金大中 정부는 일본 정부와 언론의 비판을 무릅쓰고 이 辛光洙를 2000년 9월에 다른 남파간첩 및 빨치산 출신 長期囚와 함께 북한으로 보냈다. 金大中 정부는 그러면서도 辛光洙가 납치해 간 하라타다아키의 生死 확인 등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여러 문명국가 중 납치범을 돌려주면서 그가 납치해 간 사람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은 정부는 아마도 金大中 정부가 유일할 것이다.

金大中 대통령이 辛光洙를 북한으로 보내기 전에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한국정부에 再考를 요청한 사실은 없다. 일본정부는 조사요원을 보내 辛光洙를 면담하고 싶다는 요청은 했으나 한국 정부는 辛光洙가 그런 조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절하고 辛光洙의 공범만 면담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고 한다.

辛光洙의 인권을 이토록 생각해 준 金大中 정권은 왜 이 자가 납치해 간 일본인의 인권과 우방국의 처지는 무시했을까. 우리를 압제했던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랬다면 이는 인종차별주의이다. 金正日이 두려워 그랬다면 이는 반역적 굴종이다.

지난 여름 일본 경찰은 하라타다아키 납치와 관련하여 우선 辛光洙를 여권법 위반혐의로 국제형사경찰기구(ICPO)를 통하여 국제수배하면서 북한당국에 신병인도를 요구했다. 金正日도 이제 이 문제를 적당히 넘길 수 없게 된 것이다.

金正日을 재판정에 세울 수도 있는 결정적 物證을 북한에 보내 준 金大中 대통령의 책임은 무엇인가. 범인 은닉인가? 일본 경찰이 새삼스럽게 辛光洙를 국제수배한 것은 그 성격상 金大中 대통령의 양심에 대한 국제수배가 아닐까. 金大中 대통령이 놓아서 보내 준 辛光洙란 인간은 무슨 짓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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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東源 증언은 金大中 대통령을 對국민 「허위 보고자」로 만들었다!
(월간조선 2001년11월호)




李東馥 前 남북고위급회담대표

올들어 네 번째 되풀이한 말

金大中 정부의 對北정책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논란의 와중에서 태풍의 눈은 결국 金大中 대통령 자신의 對北觀인 것으로 귀착되고 있다.

10월10일 정기국회 본회의에서 정치분야 對정부질문 발언에 나선 한나라당의 安澤秀(대구) 의원이 이 뇌관에 불을 질렀다. 그는 「6·25가 통일전쟁」이라는 金대통령의 발언은 「국가적 망언」이며 金대통령이 이같은 말을 하게 된 것은 「대통령 자신이 친북적인 이념이나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 경우이거나 아니면 비서진이 써 준 연설원고를 이성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없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비난한 것이다.

金대통령은 이번 국군의 날 경축사 이전에도 몇 차례에 걸쳐 똑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金대통령이 이 말을 최초로 한 것은 지난 7월19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민족통일협의회 임원 초청 간담회 때였다. 金대통령은 다시 8월14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광복회 회원 초청 오찬석상에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

金대통령은 또 9월20일 대전·충남 지역인사들과의 오찬석상에서 세 번째로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군의 날 경축사 이전에 있었던 金대통령의 똑같은 6·25 관련 발언은 어째서인지 언론에 의하여 보도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세간의 주목도 끌지 못했던 것이다.

그동안 金대통령의 연설문들을 분석해 보면 한 가지 흥미 있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마치 교향곡에서 일정한 주제가 계속 반복되는 것처럼 일정 기간 동안 동일한 테마가 모든 연설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이 반복되는 동일한 테마는 결국 金대통령이 역점을 두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그 테마에 담겨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금년 7월부터 金대통령의 모든 연설에 빠짐 없이 똑같은 내용으로 반복하여 등장하기 시작한 6·25 관련 발언은 정부·여당 측에서 사후에 주장하는 것처럼 특별한 의미가 없이 우연히 들어간 수사학적 차원의 표현이 아니라 金대통령이 듣는 이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음이 틀림없다. 문제는 金대통령의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金대통령의 6·25 관련 발언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자 문제점은 그가 사용한 객관적 표현이 가지고 있는 가치 중립성이다.

6·25는 북한의 독재자 金日成이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목적으로 舊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확보한 뒤 일요일 새벽을 이용한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적 전면남침으로 일으킨 동족상잔의 전쟁이다.

金대통령은 믿어지기 어려울 정도로 제3자적 입장에 서서 가치 중립적 표현을 사용하여 6·25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金대통령은 객관적으로 전쟁의 참상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북한에 의한 6·25 도발 사실을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선 금년 4월24일 청와대에서 국군 창군동우회 회원들을 위해 베푼 오찬석상에서 『6·25 때 공산침략을 막지 못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때도 金대통령이 사용한 표현은 「공산침략」이었지 「북한의 남침」은 아니었다.

이보다 앞서 작년 6·25 50주년 기념사에서 金대통령은 문제의 「공산침략」에 대해 풀어서 설명한 일이 있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남한만 공산화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스탈린의 목적은 당시 취약했던 일본을 포함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공산지배였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金대통령이 지목한 6·25 도발자는 스탈린이다. 金日成이 아닌 것이다.

같은 연설에서 金대통령은 「동족상잔의 전쟁」의 차원에서 6·25를 언급하면서 그 「원인」은 「일제의 지배」로 돌리고 그 책임은 「19세기 우리 조상들의 잘못된 자세」로 돌렸다. 金대통령은 지난 8월27일 3黨 지도부 및 국회의원 초청 만찬에서 『6·25 당시 南도 압록강까지 갔고, 北도 낙동강까지 왔지만 결국은 물러나서 제 자리로 돌아섰다』고 말한 일도 있다.


金大中 증언 : 『現 상태의 주한 미군 계속 주둔에 합의』


작년 6월의 평양방문 때 金대통령과 북한의 金正日 국방위원장 사이에 있었던 남북 頂上회담에서 이루어진 합의사항들은 「남북공동선언」에 5개 항목으로 정리되어 담겨져 있다.

그러나 金대통령은 평양에서 귀환한 후 그와 金正日 사이에는 이 「남북공동선언」에 담겨진 것 말고도 합의된 사항들이 더 있었다고 주장해 왔다.

그 가운데 金대통령이 가장 크게 내세운 것은 「주한미군 계속 유지에 관한 합의」였다. 金대통령은 그가 주장하는 이 「합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동안 국내외를 막론하고 때와 장소는 물론 상대를 가림이 없이 기회만 있으면 반복하여 설명해 왔다. 金대통령의 이 문제에 관한 설명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金正日 위원장에게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설사 통일이 되더라도 주한미군은 있어야 한다. 여기에 주한미군이 있어야 한반도에 세력의 진공상태가 안 생긴다.

미군이 여기 있음으로써 동북아시아의 강대국들이 서로 다투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여기 있어야 한다고 내가 그렇게 말했다.

그랬더니 답변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金正日 위원장이 「나도 남쪽신문에서 대통령이 말한 것을 읽었다. 그리고 어쩌면 대통령이 나하고 똑같이 민족의 장래를 보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가졌다. 사실 그렇다. 우리 주변에는 큰 나라들이 많다. 그래서 주한미군이 있는 게 좋다」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이번에 북한 가서 그 문제를 확실히 한 것이 우리 국민의 안정이라든가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는 문제라든가 우리의 국가이익, 동북아시아의 안정 등을 위해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외국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2000년 9월3일 방송의 날에 즈음한 방송 3社 공동초청 대담 발언)

金대통령은 통일이 될 때까지의 주한미군의 지위는 「현재와 똑 같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한·미 양국의 안보조약에 의하여 주둔하고 있는 것이니까 북한은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金대통령은 『다만 남북 간에 평화체제가 완전히 성립되고 미국이나 중국도 이것을 지지하고 한반도에서 냉전이 완전히 종식되었을 때 북한의 공격에 대비하는 주한미군의 성격은 많이 변화될 것』이라면서 『그렇게 되더라도 주한미군은 있어야 되는 것』이라고 부연하기도 했다.


林東源의 충격 증언 : 『金正日은 주한 미군이 非적대적으로 역할 변경이 된다면 계속 주둔해도 된다고 했다』


이 문제에 관하여 金正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지난 9월5일 金正日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가진 러·북 頂上회담 내용을 담은 「모스크바 선언」에 합의하여 이를 공표했다. 이 「선언」에서 金正日은 주한미군 문제에 관한 그의 입장을 단호하게 밝혔다. 『남조선으로부터의 미군 철수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보장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초미의 문제』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동안 金대통령이 주장한 내용을 일거에 부정한 것이다.

지난 8월29일 국회 통일외무통상위원회에서 있었던 林東源 전 통일부 장관의 증언 내용은 「金大中 傳言」의 신빙성을 깨버렸다. 이날 統外通위원회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의 洪思德 의원은 『그 동안 대통령은 누누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金正日 위원장이 주한미군 문제는 통일 이후에도 양해가 된다는 취지의 얘기를 했다고 말해 왔는데 金위원장이 언제, 어디서 그런 얘기를 했는지 배석했던 사람의 입장에서 말해 달라』고 요구한 데 대해 林장관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이것은 대통령이 먼저 꺼냈다. 이것이 왜 나왔는가 하면 통일문제는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문제와 관련해서 토의를 하다가 「자주적으로 하자고 그러면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밤낮 연결해서 북한에서 말하는데…」 라고 말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과거 우리가 1세기 전에도 강대국의 침략을 많이 받았던 러일전쟁, 청일전쟁을 얘기했다.

「그런 상황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통일된 후의 우리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주한미군은 계속 남아 있는 것이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고 번영·발전하는 길」이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내가 문장 그대로는 기억은 못 하지만 대개 그런 취지의 이야기를 하니까 金正日 위원장이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대통령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을 우리가 읽었고 알고 있다. 내가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대통령은 아는지 모르겠지마는 1991년에 옆에 앉아 있는 용순 동무, 金容淳을 뉴욕에 보내 가지고 美 국무성 누구하고 만났지?」 뭐 이러면서 아놀드 캔터 만나서 최초의 미북 고위급회담할 때 「주한미군은 계속 남아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공화당 정부 때인데 이 민주당 정부 때 그대로 인계가 되었을까?」 이런 말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조건이 있다. 그냥 적대관계에 있는 미군이 있으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미국과 북한 간에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주한미군이 북한에 대한 적군으로서가 아니라 남과 북 사이에서, 또는 주변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주고…」 그러니까 밸런싱 롤을 말하는 것 같았다.

또 안정자 역할, 스태비라이징 롤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역할을 하는 군대로 남아 있어야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또 지정학적 위치가 어떻고 한참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金正日은 역할변경이라는 말을 썼다. 주한미군의 역할이 변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군인데 무조건 남아 있으라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은 여기에 있었다. 金正日이 말한 것은 주한미군의 조건 없는 주둔 계속이 아니었다. 그것이 아니라 주한미군의 지위, 즉 성격을 먼저 바꾸라는 것이었다. 즉, 「미·북 간의 적대관계를 우호관계로 바꾸라」는 것, 그리하여 주한미군은 「북한에 대한 적군으로서가 아니라 우군」으로 한반도에 잔류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금의 시점에서 가능한 것인가? 결국 金正日의 말은 주한미군의 잔류를 말한 것이 아니고 잔류를 미끼로 해서 주한미군의 환골탈태(우리에겐 중립화, 즉 無力化)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金대통령은 이것을 주한미군 잔류에 합의한 것으로 국민에게 보고한 것이다. 문제는 金대통령의 이같은 오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이냐는 것이다. 착각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북한에 대한 無知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밖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의 여부이다.


反테러선언 시도의 문제점


金大中 대통령의 對北觀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표출된 또 하나의 사건이 최근 있었다. 그것은 지난 9월16·17 양일 간 서울에서 열린 제5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남북 공동으로 이른바 「反테러 선언」을 채택하는 문제에 관한 논의를 둘러싼 해프닝이었다.

남북 간에는 작년 12월 평양에서 있었던 제4차 「장관급 회담」 이래 9개월 간의 대화공백 상태가 계속되어 왔었다. 그런데 8월30일 있게 될 국회 본회의에서의 林東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표결을 하루 앞둔 8월29일 북측은 예고 없이 평양방송을 통해 방송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림동옥 부위원장 명의의 방송통지문을 통해 「남북 당국 간 회담」 개최를 제의했다.

이같은 북측의 돌연한 행동은 어느 모로 보나 하루 뒤로 임박한 林東源 장관 해임안에 대한 국회 본회의 표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목적이 있는 정략적 제안이었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다음 날 있었던 표결에서 林東源 장관의 해임안은 가결되었고 정부는 「당국 간 회담」이 아니라 「장관급 회담」을 속개할 것을 수정 제의하여 9월16·17일의 제5차 「장관급 회담」이 성립되게 되었다.

회담을 5일 앞둔 9월11일 미국에서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뉴욕과 워싱턴에서 아랍계 테러리스트들이 공중납치한 여객기를 자살 특공기로 사용,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빌딩과 국방성 건물로 충돌시켜 수천 명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 엄청난 테러 사건을 저지른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은 즉각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 테러 사건에 대한 북한의 반응은 이중적인 것이었다. 북한은 사건 발생 하루 뒤인 9월12일 외무성 대변인이 조선중앙통신과 회견하는 형식을 빌어 이번 사건을 「유감스럽고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북한은 『유엔 회원국으로 온갖 형태의 테러와 그에 대한 어떠한 지원도 반대하는 공화국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는 원론적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북한의 언론매체들은 이 테러 참사에 대하여 「테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습격」(영어로는 Attack)으로 표현하면서 논평 없이 사실보도를 하는 데 그쳤다.

반면, 서울에서 金大中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와 통일부에 대해 제5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남북 공동으로 「反테러 선언」에 합의하여 발표하는 문제를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金대통령의 이같은 지시는 金대통령의 對北觀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첫번째의 문제는 북한의 수락 가능성이었다. 이번 사건에 관하여 북한 외무성이 기자회견의 형식으로 밝힌 원론 수준의 반응은 작년 북한이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와 합의하여 발표한 「反테러 선언」의 수준을 지킨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원론적 선언의 차원에서 하는 것은 몰라도 북한이 구체적으로 테러 행위에 대한 반대 입장을 천명하고 이에 실제로 구속을 받는 데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둘째로는 이념적 차원에서 「폭력」에 대하여 북한이 가지고 있는 기본 입장의 문제가 있다. 참고로 북한의 조선로동당의 직할 출판사인 「사회과학출판사」가 발행한 「정치사전」(1973년판;1166쪽)은 「폭력」이라는 항목을 따로 설정,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폭력에는 혁명적 폭력과 反혁명적 폭력이 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 「…피압박 인민들의 해방투쟁은 외래 제국주의자들과 그들과 결탁한 국내 착취계급의 반동적 독재기구를 전복하는 혁명적 폭력이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야 하며 혁명적 무장력으로써 반혁명적 무력을 격파하여야 한다>(김일성 저작선집, 5권 244쪽)

요컨대, 「폭력」 즉 테러는 북한을 지도하는 공산주의 교리가 공인하는 합법적 행위인 것이다. 이같은 교리에 입각하여 북한은 그동안 수없이 많은 테러 행위를 저질러 왔다.

美 국무부가 작년에 펴낸 「1999년 세계 테러리즘 유형 연례보고서(Patterns of Global Terrorism, 1999)」는 「북한이 (이번 미국에서의 테러 사건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 및 그의 테러 조직과 연계(Links)를 유지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었다. 금년 초 발간된 「2000년 세계 테러리즘 유형 연례보고서」는 북한과 빈 라덴과의 연계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고 있으나 「아직도 북한이 테러 조직들과 연계를 유지하고 있고 1970년 일본 항공기를 납치한 일본 적군파 요원 일부를 아직도 보호하고 있으며 테러 조직들에게 직·간접으로 무기를 판매한 증거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對南 테러 행위에 면죄부 줄 뻔


아니나 다를까 「장관급 회담」에서 북측의 김령성 단장은 매우 매끄러운 논법으로 남측 洪淳瑛 수석대표의 「남북 反테러 공동선언」 제의를 일축해 버렸다. 『「상급 회담」(「장관급 회담」의 북측 호칭)은 민족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이지 국제문제를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만약, 북측이 남측의 제의를 받아들여 남북 공동으로 「反테러 선언」을 채택·발표했다면 그것은 지난 반세기 동안 수없이 자행되었던 북한에 의한 對南 테러 행위들에 대해 「면죄부」를 부여하는 결과가 된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과연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이냐는 것이다.

1992년 남북이 합의하여 공포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남북기본합의서」로 약칭) 전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아니지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특수관계」, 즉 「준 국가 간 관계」이다.

그런데, 국가 간에 발생하는 테러 행위에 대해서는 국제법이 요구하는 조치 수순이 있다. 즉, 1) 시인 2) 사과 3) 처벌 4) 재발방지 조치 강구 등이다.

비록 남북관계의 현실이 아직도 이같은 규범의 적용이 이루어지는 상황에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과거에 발생한 여러 건의 테러 행위들도 이같은 국제법이 요구하는 수순에 입각하여 조치가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남북 쌍방이 합의하는 내용으로 처리가 되어야 하는 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임기를 불과 1년여 남겨두고 있는 金大中 대통령이 필요한 입법조치의 뒷받침도 없이 그동안 북측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 행위들에 대한 「면죄부」 발부에 상당하는 행위가 될 「反테러 선언」을 북한과 공동으로 채택한다는 것은 실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金大中은 美北 사이에서도 중립인가?


金대통령의 「중립적」인 對北觀은 한·미 양국 간의 對北정책 공조에도 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금년 초 미국의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한·미 양국 간의 對北정책 공조 문제는 큰 관심사였다. 이 때문에 金대통령은 시기상조론을 무릅쓰고 아직 對外정책 분야의 정부 요직 인선도 끝내지 못한 부시 대통령을 상대로 3월7일 한·미 頂上회담을 개최했고 이 자리를 빌어 그 나름의 포괄적 對北 협상안을 부시 대통령에게 제시했다. 이에 대응하여 부시 대통령은 6월6일 그 나름의 포괄적 對北 협상안을 공표했다. 지금 우리 정부와 미국 부시 행정부의 對北정책 사이에는 매우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金대통령의 對北觀이 갖는 중립성이다. 金대통령의 포괄적 대북 협상안은 北에 대해 세 가지를 요구한다. 첫째로는 핵 개발 의혹과 관련하여 「1994년의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라」는 것이고, 둘째로는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고, 셋째로는 「남한에 대한 도발 포기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金대통령은 미국이 특히 중요시하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에 대해 「합의의 이행」과 「해결」을 北에 요구하고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이행하고 어떻게 해결하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 두 가지 문제, 「무엇을」과 「어떻게」에 관해서는 지금 미국과 북한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미국 방식과 북한 방식이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金대통령은 이 문제에 관해서는 미국과 북한 가운데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6월6일자 포괄적 對北 협상안도 역시 북한에게 세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핵 문제에 관하여 1994년의 제네바 합의의 단순한 이행이 아니라 「합의 내용의 개선과 개선된 내용의 이행」을 요구하고 있고, 둘째로 미사일 문제에 관해서는 「검증이 가능한 방법에 의한 통제」를 요구하고 있으며 셋째로는 「재래식 군사력의 감축」을 요구하고 있다.

세 가지가 모두 「무엇을」과 「어떻게」를 명시하고 있다. 가치 중립적 입장에서 「제목」만 나열한 金대통령의 협상안과 「제목」뿐 아니라 「내용」까지 언급하고 있는 부시 대통령의 협상안 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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