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94년3월호 월간조선에 썼던 기사이다. 요사이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토론에 참고가 될 것 같아 옮겨 실었다.
대한민국은 전쟁을 결심할 수 있는 나라인가(1)
수도권을 북한 다연장 로켓포의 집중 포격권 아래에 놓아두고도 굳이 [한반도에 긴장은 없다]고 우기는 이상한 반전론(反戰論)엔 역사적 뿌리가 있다. 한국은 김유신(金庾信)의 통일전쟁 이후엔 한 번도 자위적 전쟁을 결단해 본 적도, 자주 국방을 해본 적이 없다. 북핵(北核)문제를, 한국이 책임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한 대각성의 계기로 삼을 때 위기는 호기(好機)로 바뀔 것이다.
<1994년 3월 월간조선>
김유신(金庾信)과 김일성(金日成)의 공통점
김유신(金庾信)과 김일성(金日成)은 1천3백년이란 간격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은 통일을 위한 전쟁을 결심했던 한국 역사상 유이(唯二)한 지도자이다. 신라(新羅)의 김유신(金庾信)은 당(唐)과 연합하여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킨 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唐과 일전(一戰)을 벌여 평양-원산선(線) 이남 지역을 우리 민족의 역사 공간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으로서 1천3백여 년을 살아올 수 있도록 한 토대는 바로 金庾信의 이 전쟁의지였다. 동방의 한 작은 나라가 전성기에 있었던 세계적인 대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결단할 수 있었다는 것, 이로써 우리는 독립국가의 자격증을 얻은 것이다. 군대는 국가 요소의 하나이지만 국가는 그 군대를 딛고서만 존립(存立)할 수 있다.
한국이 독립국가의 자격증을 잃은 가장 중요한 요인도 효과적인 군사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고종(高宗) 19년(1882년) 임오군란으로 재집권한 대원군(大院君)에 대해 일본이 무력 간섭을 할 움직임을 보이자 청(淸)은 오장경(吳長慶)으로 하여금 3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동하게 하였다. 그 목적이 지원이든 간섭이든 일단 외국 군대가 주둔한다는 것은 독립성의 손상을 가져온다. 더구나 오장경(吳長慶)의 청군(淸軍)은 군영을 방문한 이 나라의 실권자인 大院君을 軍亂의 책임자라 하여 납치한 뒤 천진으로 호송해 버렸다. 한 국가로서의 붕괴, 그리고 식민지화는 여기서부터 결정된 셈이다.
전쟁이란 명제(命題)로부터의 도피
신라 통일 이후 한국은 국가체제를 유지하면서 특이한 기록을 남겼다. 수많은 침략을 당하고 강요된 전쟁을 치렀지만 우리가 스스로 전쟁을 결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왕건(王建)이 치른 내전(內戰), 월남 파병·대마도 정벌·여진족 토벌 수준의 전투를 국가 대 국가의 전쟁과 구별한다면>. 조선조 건국 이후의 6백년 동안엔 자주국방의 능력과 의지마저 잊어버렸다. 임진왜란 때는 명군(明軍)의 도움으로, 한국전쟁 때는 남한은 미군, 북한은 중공군의 지원으로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자력(自力)으로 나라를 지켜야 했을 때, 즉 병자호란과 개항기(開港期)에 우리는 실패했다.
전쟁을 스스로 결단해 본 적이 없는 국가는 결투를 해 본 적이 없는 남자와 비교될 수 있다. 전쟁이란 것은 지도층과 국민이 개인적 운명과 체제의 존망을 걸고 국가의 힘을 총동원하는 건곤일척의 승부이다.
그 사회의 가치관, 정부와 국민의 총체적 능력과 의지력, 그리고 민족과 국가의 명예를 거는 집단적 고뇌·각오·결단·희생·욕망이 전쟁인 것이다. 이기면 노예가 주인이 되고, 지면 남편이 아내도 지킬 수 없게 되는 전쟁을 통하여 국가·민족이 탄생, 소멸, 성장, 성숙을 거듭해왔다는 것은 역사의 가르침이다. 전쟁을. 통해 민족적인 대각성을 이룬 나라는 선진국으로 성장했고 그러지 못한 나라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한 인간이 어른으로 성숙하는 데 있어서 때로는 주먹다짐이 필요하듯 한 국가로서 존립하고 성장하는 데 있어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명제인 것이다.
위선적 평화론의 지배
그러함에도 한국은 이 命題를 직시하지 못하고 그로부터 도피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그것을 평화를 사랑한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그만이지만 강요된 방어전을 하는 것과 자신의 철학·책임·계산·의지 하에 전쟁을 선택하는 것은 깊이가 다른 행위이다. [스스로의 전쟁 결심 없이 나라를 지켜왔다]는 한국 역사의 특이성은 우리의 민족성 형성에도 크나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책임감과 명예심의 문제=목숨을 걸고 민족과 개인의 명예를 지키고 그 결과에 책임진다는 전통이 없는 지도층에 [노블레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가와 국민 관계의 문제=대외적(對外的)으로는 나약하여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권력은 대내적(對內的)으로는 가혹하게 행사되었다. 바깥에선 얻어맞고 집안에선 동생을 구박하는 형(兄)을 누가 따르겠는가. 국민은 무능하면서도 비열한 권력층을 불신·저주하면서 생존을 위한 요령을 터득해갔다.
19세기 말 한국을 여행했던 영국의 비숍(Bishop) 여사는 [한국 민중은 가난 속에서 보호를 구한다]고 썼다. 돈을 벌면 기다렸다는 듯이 관리들이 몰려와 착취해 가니 [가난 속에 머무는 것]으로서 자신을 보호했다는 뜻이다. 신석기 시대의 패총에는 고래뼈가 발굴되지만 그 뒤 한국 어민들은 포경업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조선조 시대에는 고래가 바닷가에 표착하면 어민들이 몰려나와 바다로 밀어 넣어 보내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관리들이 알면 어민들을 동원하여 고래를 해체시키고 기름을 뽑아낸 뒤 아무런 대가도 주지 않기 때문에 고래를 돈벌이 대상이 아니라 원수처럼 여겼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산업이 발달했겠는가. 유교적인 지배 이데올로기가 천 년을 이어온 이 나라에서 지난 1백 년 사이에 기독교 신도 수가 전국민의 약 4분의 1을 점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배층의 논리와 윤리에 대한 민심(民心)의 이반 때문이었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면 권력의 정당성이 상실되고 그런 권력층과 국민 사이엔 착취·경멸·저주·불신만 쌓인다. 그런 가운데서 올바른 공직자-시민, 정부-국민 관계가 생길 리가 없다. 무사·기사 집단이 나라를 세우고 이끌었던 영국·독일·프랑스·일본의 공직자-국민 관계와 문약한 지식인들이 지배했던 한국의 공직자-국민 관계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의 지배층이 불신 당한 가장 큰 이유는 착취에만 있는 게 아니라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면서, 즉 주는 것 없이 가져가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위선의 논리=한 민족이 전쟁을 결심하거나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행위는 책임을 지는 행위다. 국가는 국가의 명예, 국민의 안전과 복지를 책임지고, 군인은 국민을 책임지며, 가장은 가정을 책임지고, 남편은 아내를 책임지는 것이다. 이 책임과 의무관계 속에서 국가는 국민에게 고통분담을 요구하고 국민은 국가에 따른다. 비로소 떳떳한 국가, 국민, 그리고 국가-국민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지배충의 생존 요령은 변명과 위선이다.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 번도 외국을 침략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게 된다. 전쟁을 결심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평화를 선택했고, 그 평화란 것도 적국(敵國)의 평화이지 우리 민족의 평화는 아니었다(평화를 사랑한 민족이 왜 평화롭게 살지 못했나).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했다면 우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결단했어야 할 경우가 많았으나 그것을 회피함으로써 평화가 아닌 고통을 맞아들인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국의 역대 지배층을 이루어 온 지식인 사회에서 발견되는 위선적 명분론과 비열함, 그리고 산업·군사 輕視사조는 자주국방과 전쟁이란 거국적 승부를 해 본 적이 없는 집단이란 점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전쟁은 무조건 악이요, 피하고 볼일이라는 사조(思潮)가 북한 핵 문제에 직면한 남한 사회를 풍미하고 있다. 위선적인 반전론(反戰論)이 절대가치처럼 횡행하고 있다. 한국 역사상 주된 지배층이었던 유교적 지식인들은 국제관계의 변동기 때 국방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나라를 유린당하도록 함으로써 아내가 겁탈 당하도록 방치한 남편의 신세가 되었다. 무식한 남편이었다면 아내에게 사죄하고 복수의 칼을 갈았겠지만 논리라는 무기를 가진 지식인들은 달랐다. 겁탈 당한 아내를 부정한 여자라 하여 내쫓거나 자살하게 하고 침략 당한 민족이 침략한 민족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전쟁은 무조건 악이라는 위선적인 평화론을 개발하였다. 이 평화론과 맥을 같이 하는 분위기가 지금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방어용 무기가 북한 자극?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하나의 계기가 있다. 기자는 지난 1월 말 (1994년) 유럽을 여행했다. 거기서 아침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紙)를 사 보았다. 매일 북한 핵 관련 기사가 1면에 실리고 있었다. 미(美)CIA 국장 울시가 의회에서 증언했듯이 북한 핵 문제는 러시아의 물가폭등에 의한 정치불안 및 러시아 대(對) 우크라이나의 核대결 위험과 함께 세계적인 위험성을 가진 3大 주제 중 가장 비중이 높은 쟁점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북한이 지난 수년간 다연장로켓포를 남하시켜 전선에 배치함으로써 서울이 그 사정권 하에 놓이게 됐고, 주한미군(美軍)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할 것을 검토중이라는 보도를 읽었을 때는 불과 며칠 전에 떠나온 서울이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런 느낌을 갖고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사든 신문은 기자를 두 번 놀라게 했다. 핵 관련 기사가 장영자(張玲子) 여인의 사기사건과 돈 봉투사건에 밀려서 [가장 큰 기사감]이 못되고 있는 데 놀랐고, 일부 언론·야당이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논의를 비판적, 음모적 시각으로 다루고 있는 데 놀랐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이 시점에 배치하는 것은 북한을 자극할 위험성이 있다느니 무기상들이 한국에 낡은 패트리어트를 팔아먹으려는 계산 하에서 꾸미는 일이라는 식의 보도가 대종을 이루었다. 우리 정부 당국자도 미국 언론이 한반도의 상황을 과장 보도하고 있는 데 대한 우려를 전달하기로 했다는 식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는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용이다.
항만과 공항 주변에 배치할 계획인 것은 전쟁이 터졌을 때 미군 증원부대가 본토에서 올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이것도 우리 정부가 사는 것이 아니라 미군(美軍)이 자체적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한국과 주한미군, 그리고 미군의 증강을 위해 필요하고 우리로서는 고맙게 생각해야 마땅할 패트리어트 배치에 대해서 일부 언론·야당인사들은 왜 시비를 걸고 있나?
[북한을 자극하여 핵 협상에 찬물을 끼얹을 우려]란 설명은 그야말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방어용 무기로 어떻게 자극을 할 수 있으며, 핵 개발을 하는 나라를 자극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북한이란 집단은 자극을 받아도 세(勢) 불리하면 사찰을 받을 것이요, 자극을 안 해도 세(勢) 유리하면 사찰을 거부할 체제라는 것을 모른다면 평균적인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한쪽에선 주한미군의 잔류와 전쟁시의 신속증강을 애타게 호소하고, 다른 쪽에선 방어용 무기 배치까지도 음모적 시각으로 보고 있는 나라!
젊은 기자들이 쓴 해설기사는 비판적·음모적 시각이고 같은 紙面의 사설은 옹호적인 언론. 이런 언론에 대해서 주한미군의 정보 부서에선 [아주 특이하면서도 당혹스러운 구조… 같은 날 신문의 한쪽에선 국가적 재앙이 임박했다고 쓰고 바로 그 옆에는 대북(對北) 경제협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실린다]라는 분석보고를 워싱턴에 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자주국방 의식 없는 정치는 공허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런 國論 분열적인 심리상태는 정상이다.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지킬 힘이 모자라 옆집의 힘센 남자를 집안으로 모셔다 놓은 남편의 속마음은 과연 [감사]로 가득 차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열등감으로 해서 그 이웃남자를 질투하고, 혹시 아내를 탐하지 않나 의심도 하게 될 것이다. 자식을 볼 면목이 없을 땐 "저 아저씨는 우리를 지켜주려고 여기 와 있는 게 아니야. 도둑놈을 붙들어 현상금 타려고 와 있는 거야. 미안해 할 것 없어"라고 둘러댈 것이다. 어쨌든 그 家長의 행태는 病的인 것이며 그 집안의 분위기나 夫婦, 父子 관계도 건강하지 못할 것이다. 자주국방을 못하는 나라와 국민들은 정신건강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었던 가장 큰 동기는 "국방을 외국에 의탁한 나라는 독립국이 아니다"라는 절실한 문제의식이었다.
국방을 외국군대에 의존한 나라의 정치는 국가의 생존이란 정치의 제1주제를 놓아버린 공허한 말싸움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늘 있다. 중동에서 오래 근무했던 한 외교관은 "이스라엘과 한국은 비슷한 안보상황이지만 이스라엘은 자주국방으로 책임 있는 정치를 하고 있고 한국은 국가의 생존문제를 도외시한 미숙한 정치를 연출하고 있다"고 비교하였다. 얻어맞기는 일쑤인데 결투신청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인간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미숙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북한은 어떤가. 경제력, 세계사의 흐름, 국제 力學 관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으면서도 저들이 세계 유일의 강대국을 상대로 결연하고 의연하게, 때로는 우월하게 게임을 끌고 가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되는 것인가?
전쟁을 결심해 본 지도자로서의 김일성(金日成), 자주국방을 신조로 삼아온 지배층, 그리고 무력통일을 기약한 국가총동원체제-여기서 우러나는 자존심, 생존의지, 일관성이 미국과 대등한 외교협상을 벌이도록 뒷받침하는 근원일 것이다. 유대인은 원래 文弱한 민족이었다. 나라를 잃고 2천년 동안 세계 도처에서 당하기만 했다. 겁먹은 양떼처럼 수백만 명의 유대인은 나치의 게슈타포에 순종하면서 가스실로 걸어갔다.
그런 민족이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세우고 [민족의 생존권]이란 명제를 직시하니까 [자위를 위한 선제타격], 즉 예방적 공격을 두려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毒種으로 표변했다. 국가의 생존의지는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 그런 국가관이 있는가. 국가관을 논하기 전에 대한민국이 과연 국가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검토해 본다. 국가의 형식은 갖췄으되 그것의 운용 면에선 국가가 아니라 협회나 친목회 같은 사회단체로 보이는 점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한국은 국가인가, 협회(協會)인가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남한은 북한을 흡수통일 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요지의 말을 자주 한다. 한완상(韓完相) 전 부총리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는 흡수통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피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흡수통일이란 무력통일이 아니고 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로 흡수, 통합되는 식을 뜻한다. 대다수 국민들은 흡수통일 이외의 代案을 알지 못한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혼합한, 남한의 자유민주·시장경제 체제와 북한의 신정(神政)체제·폐쇄경제를 적당히 섞은 절충형이 개발됐다는 뉴스는 아직 없다.
국민이 바라지 않는 것은 급작스런 흡수통일이지 흡수통일 그 자체가 아니다. 바라지 않지만 흡수통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통일하는 수밖에 없다. 남한이 손해를 본다고 통일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손해 보면서는 합병이 안 되는 기업간의 관계이지 민족국가의 행동윤리가 아니다.
흡수통일 반대론은 코너에 몰린 북한과 남한의 일부세력이 만든 허구의 논리인데, 6공 정부 때부터 정확한 단어 선택의 고민도 없이 공직자들까지 막연하게 편승하고 있다. 흡수통일 반대론에는 북한 주민들의 고통에 대한 일부 남한 사람들의 이기적인 냉담이 끼여 있기도 하다.
월간조선(月刊朝鮮) 3월 호에 소개돼 있기도 하지만 한국 정부는 북한국적의 동포들을 극히 선별적으로 귀순시키고 있다. 북한국적을 유지하느라 숱한 고생을 하면서 중국에서 살다가 고향을 찾아온 한 여인에게는 일단 내주었던 주민등록까지 취소했다. 그 여자는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는데 1심에선 패소했다. 중국의 조선족이 한국으로 몰려올 것을 두려워하여 그런 정책을 세웠단다. 조선족은 외국인이고 북한국적자는 북한 주민으로 취급해야 하는 게 아닌가.
러시아에서는 지금 벌목장을 탈출한 북한 노동자들 수백 명이 유랑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 대사관에서 망명신청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탈출한 북한 청년이 우리 대사관에 망명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 외국배에 몰래 숨어 들어가 인천으로 귀순한 적이 있다. 그런 목숨 건 모험을 한 북한사람들만 할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대한민국은 과연 통일을 하자는 나라인가. 북한 탈출자를 다 받아들이면 남한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 명분인데, 그런 부담도 감수 못한다면서 2000만 주민을 어떻게 통일하겠다는 것일까. 통일의 날이 다가오면서 남한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이기심은 좌익세력의 反흡수통일론과 뒤섞여 국가와 통일의 기본 논리를 혼란시키고 있다.
자위권 천명에도 뭇매 가해
이인모(李仁模) 노인의 인권문제는 북한이 먼저 제기하고 남한의 언론이 이에 따른 뒤에 우리 정부까지 빠져든 경우이다. 李仁模 노인보다 더 심각한 오길남(吳吉男)씨의 재북(在北)가족(부인과 두 딸)에 대해서는 정부와 언론이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는 1986년에 북한을 탈출했던 吳씨의 在北 세 가족을 양심수로 지정하고 북한에 대해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송환을 요구했었다. 외국의 사설단체가 우리 정부보다 먼저 관심을 기울였는데 우리 정부는 그 뒤 성명서 한 장 내지 않았다. 신문·방송에서도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북한이 제기하는 인권문제에 대해선 관심을 기울이고 자국민에 관해서는 냉담해 버리는, 그러면서도 李仁模 노인의 북송을 남한 정부의 도덕적 우월성이라고 선전하는 병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군은 왜 한국에 와서 戰死者 유골을 발굴하고 있는가. 국민에 대해서 국가는 저승까지 찾아가 보호해 준다는 믿음을 심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이 우러나오지 않겠나.
무탄무석(無彈無石)이란 말은 대한민국이 국가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공권력의 최루탄은 합법이고 시위대의 투석은 불법이다. 합법과 불법, 공권력과 폭력을 동등하게 대우하면서 투석도 나쁘지만 최루탄도 나쁘다고 보는 언론의 시각은 국가를 사회단체의 하나 정도로 취급하는 자세이다.
통일원은 지난해 한 교수를 통일원 기관지 [통일문제연구]의 편집위원으로 위촉하였다. 그 교수는 [한국전쟁의 침략자는 북한이 아니고 미국이었다. 북한 정권이 더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 이다. 통일원이 지향하는 통일은 [無이념형]이 아닐진대 차라리 북한 노동당 간부를 편집위원으로 모시는 게 더 좋을 뻔했다.
1991년 봄, 이종구(李鍾九) 당시 국방 장관은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엔테베 작전 같은 특공 작전도 검토할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너무나 당연한 이 발언에 대해 언론과 야당은 뭇매를 때렸다. 냉전적인, 호전적인 발언이란 것이었다. 냉전이 계속되는 한반도에선 냉전적인 발언이 정상이며, 국가의 자위권을 천명한 발언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음에도 전쟁은 악이며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위선적 평화주의자의 허위의식은 한국의 지식인과 정치인을 포로로 삼고 있다(李장관의 발언은 세련되지 못했다는 점에선 비판받을 만했다. [북한이 핵 개발을 계속하면 우리는 국가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 정도로만 이야기하면 언론이 [무력사용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고 알아서 써줄 것인데 너무 직설적인 표현을 했었다).
아웅산 사건에 보복 자제한 대가(代價)
정부와 언론, 그리고 일부 정치권은 [북한을 너무 자극하면 도발을 자초하게 된다]는 논리를 애용하고 있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은 지난 년초(年初)에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전쟁은 일전불사의 자세로써만 막을 수 있다. 깡패가 한판 붙자고 하는 데 이쪽에선 말로 하자고 대결을 피하면 계속 눌려 사는 수밖에 없다. 이쪽에서도 샌드백 치고 로드워크를 해서 한판 붙을 자세를 보이면 깡패도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나도 이빨 나가고 머리 터지겠구나 하는 계산을 하게 되고 그러면 말로 하게 되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선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북한의 행태를 관찰해 보면 그들을 통제하는 수단은 [자극을 않겠다]는 저자세가 아니라 武力을 앞세운 고자세였음을 알 수 있다.
대북(對北) 유화론과 저자세는 연속적인 도발만 자초하였다. 1968년 1·21 청와대습격 기도사건, 푸에블로호 납치를 묵인한 대가로 돌아온 것은 그 해 11월의 삼척·울진 공비침투 사건이었다. 우리는 대통령의 부인이 북한 공작으로 암살되어도 보복하지 않았고 아웅산 폭파사건으로 국가지휘부가 거의 전멸했는데도 저들을 자극하지 않았다. 국가 원수와 그 측근들의 암살을 노린 이 사건은 명백한 개전(開戰) 사유였다. 1차 세계대전도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에서 비롯되었었다.
우리 정부는 미국의 압력과 서울 올림픽 개최라는 계산 하에서 보복을 자제했으나 북한은 별로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4년 뒤에 KAL 858 공중폭파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아웅산 사건 때 한·미 양국이 압도적인 무력을 배치시킨 뒤 원산항(또는 주석궁) 같은 곳을 보복 폭격했었더라도 북한은 감히 전쟁을 기도하지 못했을 것이다(승산 없는 전쟁을 신경질 차원에서 하는 나라는 없다). 그랬었다면 KAL858편 사건의 희생자 115명의 목숨을 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반면 1976년 8월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때는 미군이 局地戰까지 각오하고 나서자 김일성(金日成)이 사과 친서를 보내는 저자세를 보였다. 북한 지배층 입장에선 국가 원수를 노린 여러 번의 공격에 대해서도 [자제]로 일관해온 한국 정부가 국가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내비치고 있는 남한에 대한 군사적 자신감과 정치적 경멸감에는 이런 역사적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국가적 수모를 연속적으로 당하고도 "보복하자"는 여론이 일어나지 않는 나라는 대한민국을 빼고는 달리 없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 정권이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이란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文民정부 하에서 북한 핵 개발이란 더한 위기에 처해서도 군사적인 대응을 요구하는 여론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한민국은 전쟁을 결심할 수 있나(1)
-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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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9-17, 23: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