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는 공원이 참 많습니다. 그 공원마다 전쟁기념탑이 없는 곳이 없어요. 나도 놀랐어요. 태극기가 새겨져 있고 한국전쟁에 대해 죽 설명이 되어있어요. 또 뉴질랜드는 매년 7월에 ‘6·25 한국전쟁 休戰(휴전) 협정 기념식’이라고 해서 국가행사처럼 해요. 한 달에 한 번씩 참전자들이 모여서 한국戰에 대한 토의도 합니다.”
뉴질랜드는 1950년에 勃發(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UN군의 일원으로 한국戰에 참여했다. 약 2년6개월가량 한국戰에서 활약한 이들의 병력은 3794명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그 중 33명이 작전 중 전사하고, 79명이 부상당했다. 뉴질랜드의 ‘6·25 한국전쟁 休戰 협정 기념식’ 행사는 올해로 55주년을 맞았다.
“내가 뉴질랜드로 떠날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6·25 기념행사라는 게 거의 말살되다시피 했었거든요. 그런 걸 보면서 ‘이건 아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혼자 한다고 될 일은 아니겠지만 씨앗이라도 되겠다는 생각으로 2005년도에 귀국을 했어요.”
한국에 돌아온 朴선생은 ‘소위 좌파라는 사람들이 나라와 국가를 위해서가 아닌 私利私慾(사리사욕)에 치우쳐서 일을 하고 있는 세상에서 나라를 위해 할 일이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뉴질랜드로 떠나기 전 참여했던 ‘6·25 참전 유공자회’의 경기도 화성지부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
“제가 전쟁 시기에 겪었던 경험적 지식은 많지만 책을 통한 체계적인 지식은 없습니다. 대형 서점에 가면 종류가 너무 많아서 책을 고르기도 힘들고요. 어느 날 신문을 보니까 광고에 朴正熙(박정희) 전기가 있더군요. 그걸 사서 읽다가 ‘金大中(김대중)의 정체’, ‘盧武鉉(노무현)의 亂(난)’도 읽어보게 되었어요. 정말 ‘나라를 위한 책을 만들고 있구나’하는 것을 느끼고 조갑제닷컴에서 출판되는 책을 모두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金大中이나 盧武鉉은 ‘너희가 6·25전쟁에 나가서 막지 않았으면 통일이 됐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예요. 하지만 사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6·25전쟁에서 싸우지 않았으면 지금 이 나라가 없는 것이거든요. 과거 10년 동안 6·25 참전 용사들이 국가 유공자대우를 받기 위해 수없이 노력했지만, 좌파정권 하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죠.”
2000년에 ‘6·25 참전 용사회’로 시작한 ‘6·25 참전 유공자회’는 2008년 3월18일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개정법’이 국무회의를 통과하면서 구성원들이 마침내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朴正彬 선생은 경기도 화성시지회의 운영위원으로 있다.
朴선생은 최근 조갑제닷컴에서 출판된 20여 권의 책들을 그가 현재 소속되어 있는 6·25 참전 유공자회 서울시지부 서초구지회와 뉴질랜드로 가기 전 활동했던 경기도 화성시지회에 기증했다.
“이런 좋은 책을 읽고 얻은 지식을 나만 알고, 말로 조금씩 전달해서는 도저히 안 되겠더군요. 제가 활동하고 있는 화성시에는 15개 읍면 분회장들이 있습니다. 그 분회장과 사무장들이 이런 책을 읽고 지식적으로 무장해서 지역행사에 갔을 때 전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갑제닷컴에서 나온 책들을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朴선생은 “지금은 작은 書庫(서고) 단계지만, 앞으로 관련 서적을 더 충당해서 화성시지회에 ‘安保文庫(안보문고)’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9월26일에는 화성시에서 올해 준공한 보훈회관에 6·25 참전 유공자회 화성시지회가 입주하게 됩니다. 그때 견학 온 사람들이 화성시지회의 서고를 보고 제 취지에 공감해, 다른 지회에서도 조갑제닷컴의 책들을 배치하고 安保文庫를 만들게 된다면 좋겠습니다”고 이야기했다.
“한 때는 나보다 좀 못한 사람에게 도움을 줘서 인재를 키워볼까도 생각을 했었어요.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사람 마음이란 건 모르는 거니까요. 하지만 이런 활동은 잘되든 못되든 세월이 가면 빛이 발하게 되어 있어요. 나이가 더 들어서 약방 일을 못하게 될 때는 중·고등학생 아이들에게 座談(좌담)형식으로 안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여생을 마칠까 생각합니다. 국가유공자로서 내가 국가에 할 수 있는 보답은 아들, 손자, 조카, 동네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이 이런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그것이 우리가 살아갈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32년 서울시 종로구에서 태어난 朴正彬 선생은 충청북도 청주시 청주농업중학교 4학년 재학 중 6·25가 발발했고 1·4후퇴 때 피난 갔던 부산에서 현지징집을 당해 1950년 1월31일 사병으로 입대했다. 사병시절에는 8사단에 근무하며 지리산 공비토벌·서화리 전투 등에 참가했고, 1954년 5월 간부시험을 통해 장교로 임관, 1959년 12월 중위로 전역했다. 군 생활 중 하사관이었던 부인 엄수옥 씨를 만나 슬하에 네 자녀를 두었다. 제대 후에는 형님 밑에서 가업인 한약방 일을 배웠고, 1967년 검정시험에 합격해 朴선생의 한약방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부인과는 1989년에 사별했으며 자녀들은 모두 출가해 뉴질랜드에서 생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