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대전현충원에서 서해교전 전사자들의 묘소를 찾다가 한 묘비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육군상병 노경천의 묘'
묘비 앞에는 일가족-환하게 웃고 있는 20대 후반 내지 30대 초반의 남자, 그의 아내, 10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 5~6세 가량의 남자아이-의 사진과 두 자녀의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편지는 코팅을 해 놓았더군요.
묘비 뒤를 보니 故 노경천 상병은 금년 1월29일 서울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더군요. 아마 결혼을 무척 일찍했고,학업이나 가사로 인해 입대를 연기하던 끝에 뒤늦게 兵으로 입대했다가 유명을 달리한 모양입니다.
국립묘지에 가족들이 남긴 편지들 치고 가슴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만, 故노경천 상병의 딸이 쓴 편지를 읽고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빠!
주인공 없이 보내는 첫 생일이야. 이번에 보니까 바로 내 생일 다음이더라고. 내 생일은 양력, 아빠 생일은 음력으로 따지잖아.
내 생일날 아빠 정말 많이 아파도 몸살이 나도 꼬박꼬박 잘 챙겨줬는데... 나 이번엔 정말 잘 해 주고 싶었는데....
아빠, 나 말야 아빠 생각이 잘 안 난다. 울지도 않고 너무 행복하게 보내는거 있지....
나 두려워. 이러다가 정말 아빠 잊어버릴까봐...
어떻하지...
대전에 가도 이젠 웃음까지 나고 추석에 아빠 생각도 좀밖에 안 나.
미안하다는 말 밖에 나오질 않아.
처음엔 아빠가 너무너무 미웠는데, 이젠 아빠가 날 미워할 것 같아. 실망하고...
어제(추석) 대전 갔다가 올 때만 6시간 걸렸어.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허리 아프고, 뒷목 아파하고, 어깨 아파하고, 다리도 아프다고 하고...
다 아빠 책임인거 알지? (中略)
엄청나게 건강했던 아빠가 갑자기 간게 아직도 난 믿어지지 않아. (中略)
아빠, 생신 축하해요. 내가 아빠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2003년 9월12일
아빠 생신을 맞아 푸름이가>
컴퓨터 워드로 친 누나의 편지와는 달리 비뚤빼뚤한 글씨로 연필로 쓴 동생의 편지에는 아버지와 흑산도에 갔었을 때 자기가 제일 큰 고기를 잡았었다는 회고, 그리고 '엄마는 내가 지켜줄테니 걱정말라'는 제법 어른스러운 다짐도 있더군요.
뭐라고 할 말이 없더군요. 문득 제가 아직 결혼 안 한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졌습니다.
노경천 상병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갔다가 처자식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했다고 짐작할 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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