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相千 신임 민주당 대표
趙南俊 월간조선 부국장
朴相千 의원(65)이 절반으로 쪼개진 민주당의 새 대표가 됐다. 鄭大哲 전 대표가 신당에 들어가려고 대표 자리를 사퇴했기 때문에 黨憲(당헌)에 따라 최고위원 선출시, 다음 득표자인 朴의원이 자동적으로 대표 자리를 승계받은 것이다.
朴相千 의원은 민주당 내에서 대표적인 합리적 보수파다.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여러가지 상황을 판단해서 이성적으로 政局(정국)을 볼 줄 아는 민주당 내 몇 안되는 정치인 가운데 한사람이다. 논리정연하고 설득력이 있다.
2001년 8월말, 林東源 통일부장관 해임건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기 직전, 金大中 대통령은 韓光玉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최고위원(金槿泰, 金杞載, 金元基, 金重權, 朴相千, 申樂均, 李仁濟, 張乙炳, 鄭大哲, 鄭東泳, 韓和甲)을 청와대로 불렀다. 林東源 장관의 자진 사퇴를 요구하는 JP(金鍾泌 自民聯 총재)의 말을 들어줘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기 위한 대책 회의였다. 自民聯과의 共助(공조)가 깨지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분위기는 침울했다. 대통령은 공동정부의 한 軸(축)을 이뤄온 JP가 林東源 장관의 자진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지금까지 至善(지선)의 가치로 여겨온 자신의 對北(대북)정책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대통령은 林東源을 對北정책의 상징적 인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챈 최고위원들은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결심이 확고한 것 같은데, 공연히 반대해봤자, 스타일만 구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이때 침묵을 깬 사람은 朴相千 최고위원이었다.
『대통령님, DJP 共助를 깨면 안됩니다』
다시 말하면 JP의 요구를 받아들여 林東源 장관을 「자르자」는 의미였다. 朴최고는 DJP 共助를 깨면 안되는 이유 두 가지를 들었다. 自民聯과 결별해서 與小野大가 되면 정국의 주도권을 야당에게 빼앗긴다는 점,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수층이 등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와 각종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대통령과 獨對 요청의약분업 개선 진언
그러나, 이 건의는 묵살됐고, DJP연합은 깨졌다. 그리고 두달도 못돼서 치러진 10ㆍ25 재보선에서 민주당은 朴相千의 예언대로 전멸했고, 야당인 한나라당은 과반수에서 1석 모자라는 거대야당으로 변모했다. 결국 金大中 대통령은 他意에 의해 민주당 총재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보다 딱 1년 전인 2000년 9월. 朴相千은 金大中 대통령에게 獨對(독대)를 신청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자신이 작성한 두툼한 보고서를 올렸다고 한다. 의약분업의 문제점과 代案(대안)을 제시한 보고서였다. 정치권에서는 어느 누구도 의약분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대로 가면 의보재정이 파탄나는 것은 明若觀火(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의약분업의 폐단을 보완하기 위해 2년간 임의분업을 시행하고 국민들의 공감을 얻어가면서 강제분업으로 이행해야 합니다』
임의분업이란 감기약같은 간단한 처방은 약국에 맡기고, 장기치료가 필요한 질병은 의사의 처방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일본이 택하고 있는 방식이다.
대통령은 결국 『알았다. 그렇게 하자』며 설득력 있고 논리정연한 朴相千의 건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국무총리와 보건복지부장관이 참석한 회의에서 『의약분업을 포기하기엔 너무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로 이 건의는 다시 뒤집어졌다. 이듬해부터 健保재정은 악화되기 시작해, 그해 1조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한데 이어, 모자라는 재정을 메우기 위해 은행에서 거액을 借入(차입)하기에 이르렀다. 健保재정은 갈수록 적자 폭이 커지고 있다. 2002년에도 봉급생활자의 건강보험료는 최고 100% 가까이 올랐다. 여론 형성층인 화이트칼러 계층의 불만이 健保재정의 적자 폭만큼이나 커진 것은 물론이다.
대통령 말도 중간에 자르고 자신의 의견 개진
필자는 2002년 1월19일, 그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대화를 하는 동안, 그는 필자에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내가 말하는 그대로 받아 쓰라』, 『그 이유가 두 가지다, 세 가지다』라는 표현을 즐겨썼다. 특히 『그대로 받아 적으라』는 말은 너댓번 되풀이했다. 그가 대단히 꼼꼼하고 세밀한 완벽주의적 성격임을 알 수 있었다.
민주당 출입기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어떤 事案(사안)에 대한 코멘트를 했는데, 본인의 의사대로 표현되지 않았을 경우, 반드시 전화를 걸어 항의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인가는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일면식도 없는 야간 근무자에게 코멘트가 잘못됐다며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으시요. 첫째, 둘째, 셋째』하는 식으로 불러준 일도 있다는 것. 이런 성격때문에 주윗 사람들은 대체로 그를 불편하게 여긴다고 한다.
자기 논리에 맞지 않으면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않고 중간에 말을 가로채 자기의 논리를 펼치는 스타일이다. 심지어 DJ가 야당 총재 시절, 총재의 말도 중간에서 자르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비판이 따른다.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 성장
그는 전남 고흥군 고흥읍 서문리 64번지에서 朴鉎淳-成吉準부부의 5남5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때 동경 법정대를 나와 고교교장으로 퇴임한 인텔리. 어머니는 배화여고 출신이다. 외삼촌 成東準씨는 전남도 교육감, 문교부차관을 지낸 인물로, 중학무시험제를 처음 착안한 주인공이라고 한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朴相千은 어려서부터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고흥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그는 1954년 전국 동일 입학시험에서 경기중에 가더라도 10위 안에 들 성적을 올렸지만, 장남을 객지로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 부모님의 권유로 고흥중으로 진학했다. 광주고에는 2등으로 합격했고, 1학년에 다니면서 수석을 차지했다고 한다.
대학재학중 高試 사법과에 합격한 그는 1965년 광주지법 목포지원 판사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했다. 판사생활은 다혈질인 그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그의 표현을 빌면 『답답했다』고 한다. 이듬해 검사를 지원, 광주지검 검사로 진로를 바꿨다. 그의 22년동안에 걸친 검사생활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서울지검 검사 4년, 부산지검 검사 1년, 서울지검 동부지청 검사 1년을 빼고는 9년간 지방 근무를 했으며, 마지막 7년은 강경지청장, 정읍지청장, 군산지청장, 순천지청장으로 전전했다. 본인은 스스로 『출신지역 때문에 인사상의 불이익을 보았다』고 믿고 있다.
그 때문에 그가 1998년 3월, 金大中 정권의 초대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받았을 때, 특정지역 출신이라고 인사상의 불이익을 줘서는 안되겠다고 굳게 결심, 공정하게 인사를 시행했다고 자부한다. 그 구체적인 예로 둘을 들었다. 전 법무부장관 崔慶元씨는 경기고 출신으로 李會昌 한나라당 총재와 가깝다는 말이 있었지만, 능력과 인품만 보고 법무부 검찰국장으로 있던 崔씨를 차관으로 승진시켰다고 한다. 경북고 출신인 朴舜用씨를 高試 동기생 가운데 최초로 고검장으로 승진시켜 자동적으로 검찰총장에까지 올라가게 한 것도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검사출신인 만큼 朴相千은 검찰 운영 방안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갖고 있다. 그는 검찰이 지금까지 일부 사건에 대해 수사를 잘못한 측면이 있다고 인정한다. 권력층을 봐준 것 아니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
그는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 저하는 권력층이 구체적 사건에 개입, 수사를 제대로 못해서 생긴 측면이 있다고 진단하고, 검찰이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검찰총장이 권력층의 눈치를 보지 않아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검찰총장이 임기를 마친 후, 1년 정도 법무부장관이나 국정원장 등 임명직 공직에 취임하지 못하게 하고, 장관 직속의 「공직 비리 수사처」를 신설, 예산과 인사의 독립을 보장해주면서 권력형 비리와 공직자(정치인 포함)의 부정을 전담 수사케 하면 수사의 공정성이 어느 정도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검사의 마음가짐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검사가 눈치보지 않고 소신껏 수사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없고서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는 얘기다.
다만 검찰의 중립성과 독립성이 중요하다고 해도 대통령이 구체적 사건이 아닌, 마약사범 일제단속, 국민기초생활 침해사범 단속 같은 일반적 지휘권을 법무부장관을 통해 행사할 수는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치에 뜻을 둔 것은 군산지청장 재임 때였다. 관내(옥구, 익산) 농촌지역을 돌아다니며 검사의 힘만으로는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어렵다는 점을 절감했다고 한다. 당시엔 이농현상이 심해 빈 농가가 많았고, 영세업체가 들어선 익산공단의 노동자들은 전국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체제에 도전하는 운동권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법무부장관은 金錫輝씨였다.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없고 서울법대 선배라는 것 외에는 지연이나 학연 등 아무런 연고가 없던 金장관은 검찰총장때부터 朴相千을 잘 봤는지, 서울지검 관내 지청장으로 발령할 테니 검사생활을 오래 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서울지검 산하 지청의 長은 검사장으로 승진하는 영순위 자리다. 그러나 이미 정치를 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희망근무지로 고향 근처인 순천지청장 자리를 적어냈다. 고향의 부모가 연로해서 모시고싶다는 이유를 달았다.
당시 그가 출마할 예정이던 전남 고흥에는 집권당(민정당)의 원내총무인 李大淳씨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
경험있는 대통령 뽑자는 「無事故 船長論」
그는 1988년 4ㆍ26 총선에 출마, 평민당 돌풍을 업고 고흥에서 당선돼 처음으로 금배지를 단 이래 4選을 기록중이다. 이 과정에서 야당 대변인, 야당 원내총무, 법무부장관, 여당 원내총무를 맡아 金大中 전 대통령을 至近(지근) 거리에서 보필했다.
그가 옆에서 지켜본 金 전 대통령의 장점은 정치감각이 탁월하고 부지런하며 문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단점은 행정경험이 없어서 행정의 매카니즘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 협상을 해보지 않아서 그런지 협상기술이 부족한 점 등이라고 했다.
그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장하는 「無事故 船長論(무사고 선장론)」은 경험의 소산이다.한국이라고 하는 배를 끌고 갈 「선장」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안된다는 것이 「무사고 선장론」의 골자다. 항해 경험이 풍부하여 사고를 낼 위험성이 가장 적고, 폭풍을 만나더라도 거뜬히 헤쳐나갈 만큼 유능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朴相千이 바라는 「선장」감은 판단력이 뛰어난 인물이다. 黨(당)을 초월해서 정치력, 설득력, 추진력이 있되 최종적으로는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 차기 대통령으로 뽑혀야 다음 단계의 경제도약과 일류국가로의 진입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판단력이 없으면 사람을 잘 쓸 수 없고, 사람을 잘 못 쓰면 나라가 발전할 수 없다는 논리다.
앞으로 대통령에 나올 사람은 이념적 성향을 분명히 밝히고 구체적으로 나라를 끌고 갈 정책 방향과 실천 방안을 제시, 언론으로부터 철저한 능력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朴相千은 주장한다. 도식화된 식견이 아니라 실천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제대로 방향을 잡아 나라를 끌고 가려면 방대한 행정 매카니즘에 대해 통달해야 한다는 것이 朴相千의 의견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민주당의 李仁濟 상임고문이나 한나라당의 李會昌 총재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행정 경험이 풍부하고 公조직을 운영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선장」노릇을 잘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朴相千 의원이 거론했던 李씨 두 분이 아니라 盧武鉉 대통령이 집권한 상태다. 여러가지 삐그덕거리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을 보면 朴相千 의원의 안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한나라당 朴熺太 의원과 宮合 잘 맞아
金鍾泌 자민련 총재에 대해서는 성격이 원만하고 자신의 소신이 확고해도 정부 전체의 조화를 위해 한발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지혜가 돋보이나, 지지세력이 약하고 5ㆍ16 군사혁명 세력의 일원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고 평했다.
朴正熙 前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功過를 구분하는 편이다. 경제를 발전시켜 우리나라를 절대 빈곤의 수렁에 건져낸 공로를 인정하지만, 독재정치는 비판한다. 워낙 「비벼볼 언덕」이 없는 형편이었으니까, 무리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수긍한다.
朴相千 의원을 말할 때, 흔히 對比(대비)시켜보는 사람이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朴熺太 의원이다. 둘 사이는 相似點과 相異點이 엇갈린다. 남녀로 친다면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할까.두 사람은 다 밀양 朴씨이고, 서울법대를 나와 1961년 高試 사법과(13회)에 합격, 오랫동안 검사생활을 했다는 점, 같은 해에 군에 입대, 대위로 제대한 것, 1988년 13대 국회에 처음 진출한 이래 4선을 기록중이며, 당 대변인, 원내총무, 법무부장관을 지낸 것까지 똑같다.
그러나 다른 점도 많다. 朴相千 검사는 한직으로만 돌아다니다 지청장에서 옷을 벗었고, 朴熺太 검사는 승승장구하여 검사장에까지 순탄히 승진했고 부산고검장으로 퇴임했다.
성격 또한 대조적이다. 朴熺太는 재치가 넘치고 유머가 뛰어나다. 朴相千은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과 진지함이 돋보인다. 朴熺太는 느긋하다. 말도 천천히 한다. 朴相千은 다혈질이다. 말도 빠르다. 평검사 시절, 두 사람은 모두 촉망받는 신예였다고 한다. 朴相千의 수사보고서는 외국의 판례까지 인용한 20~30쪽의 성실한 논문 한편이었다면, 朴熺太의 수사보고서는 2~3쪽짜리 메모지였다는 것. 朴熺太는 「열흘간의 법무부장관」으로 短命(단명)이었으나, 朴相千은 14개월간을 재임했다.
한나라당 총무로서 徐淸源 의원은 朴相千과 같이 다혈질이지만, 솔직하고 정의감이 강해 말이 잘 통했다고 한다. 한나라당을 탈당한 李富榮 의원과는 처음 한달 동안은 막말까지 하며 싸우는 앙숙이었지만, 접촉을 오해하면서 깊이 이해하는 사이로 발전했다고 한다. 중반 이후부터는 한차례의 날치기와 국회파행이 없을 만큼, 대화와 타협이 잘 이뤄졌다고.
保安法 폐지는 절대 반대
朴相千의 이데올로기적 색채는 확실한 보수주의다. 국가보안법 하나만 놓고 봐도 민주당내 主流와는 길이 다르다. 그는 국보법 완전폐지는 절대 반대다. 이 법이 폐지되면 非폭력 국가전복활동에 대해 처벌할 길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다만 너무 애매모호해서 인권유린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개정하자는 쪽이다.
金大中 전 대통령의 對北(대북)정책에 대해서는 균형적 자세를 취했다. 남북 頂上회담을 성사시킨 것은 분단 역사에 큰 진전을 이룩한 업적임을 인정한다. 다만 북한에 끌려다니는 듯한 對北 협상기술의 미숙과 북한으로부터 유연한 자세를 끌어내지 못한 것은 아쉬워했다. 對北 협상전문가를 양성하지 못한 것도 비판대상이다.
朴相千이 국가인권위원회를 독립기관이 아닌, 법무부 산하 특수법인으로 둬야 한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설치가 2~3년 늦어졌다. 그가 장관을 물러난 후에 독립기관으로 발족했다.
그가 법무부장관으로 취임한 1998년 3월초엔 전국적으로 100여건의 불법파업이 일어나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다. 주한 외국인 상공회의소가 『한국에 투자하지 말라』는 보고서를 낼 정도였다. 그는 「합법 保障(보장), 불법 必罰(필벌)」의 기치를 내걸고 불법파업을 철저히 단속했다. 그와 함께 부당노동행위를 한 사용자도 120여명을 구속했다. 이때부터 불법파업및 시위로 인한 최루탄 사용이 없어졌다는 것이 朴相千의 자랑이었다.
소모적 政爭은 정부-여당에 더 큰 책임 있다
검사 출신이지만, 朴相千 의원은 법률, 정치 분야 뿐 아니라, 경제, 외교, 통상, 과학기술 쪽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다. 金大中 대통령 재임시 한 말이지만, 지금의 盧武鉉 정부에서도 귀담아 들어둘 만한 정책 방향도 적지 않다.
외교는 우리와 혈맹관계인 對美(대미)외교를 주축으로 하되, EU, 동남아 등지로 다변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본다. 특히, 중국은 경제와 對北관계 양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파트너이므로 당장의 이익에 급급하기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이해관계를 넓혀나갈 필요가 있다고 그는 진단했다.
교육은 개혁이 필요하다는 쪽이다. 중학교까지는 성장기인 만큼 지식 전수보다는 건전한 신체와 성품과 기르기 위해 평준화를 유지해야 하지만, 고등학교부터는 경쟁체제를 도입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평준화교육은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私교육의 기회를 갖기 힘든 서민 자녀를 위해 교과서만 철저히 공부하면 대학입시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이 시대의 목표는 일류국가로의 도약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55개로 집계된 세계적 일류상품을 500개 이상으로 늘려야 하며 IT(정보기술), BT(생명기술), NT(나노기술) 인구를 육성해야 한다는 것.
朴相千은 우리 정치가 이런 식의 소모적 정쟁을 일삼은 것에 대해 솔직히 정부와 여당의 잘못이 더 크다고 자인한다. 야당을 나무랄 자격이 없다고 자아비판했다.
그래서 사회불안과 갈등을 야기했고 경제가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가 즐겨 쓰는 말 중에 「경제라는 나무는 안정이라는 물을 먹고 자란다」는 격언이 있다. 불안하면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투자를 하지 않게 마련이다. 국민들도 앞으로는 검증된 인물을 찍어 자질높은 정치인만이 정계에 진출하도록 선거를 통한 정계의 변혁에 앞장 서 줄 것을 희망했다.
fact(事實)를 追求하는 골초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행정 테크노크라트 같은 느낌을 주는 朴相千. 그의 별명은 「법안 제조기」. 추곡매입가격, 매입량에 대한 국회동의제를 부활시켰고, 수세를 폐지했으며, 공직자윤리법을 개정, 재산을 공개토록 했다.
수사검사 출신답게 팩트(factㆍ事實)를 추구한다. 사진찍기와 동물 다큐멘타리를 즐기는 것은 꾸미지 않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골프는 애버리지 핸디캐퍼(핸디18=90타). 야구, 축구, 육상경기는 보는 것을 즐긴다. 희비가 엇갈리는 선수들의 얼굴 표정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하루 흡연량이 두 갑이 넘는 애연가라는 것도 朴相千의 특이한 점이다. 담배를 그렇게 피워도 전혀 이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담배가 체질에 맞는 모양이라고 했다. 술은 총각생활을 오래하면서 1주일에 3~4차례 술자리를 가질 정도로 자주 마셨으나 과민성 대장염 때문에 의사의 권유로 끊었다.
좌우명은 有志竟成(유지경성ㆍ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감명깊에 읽었고,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 가곡 「비목」이 애창곡이다. 재산신고액은 21억원이며, 후원금 모금 규모는 국회의원 가운데 톱10에 들어갈 정도이다.
부산지검 검사로 재직 중이던 36세때 소개로 만난 10세 연하의 부산출신 金琴子씨(55ㆍ부산대)와 결혼, 2녀1남을 뒀다. 장녀 裕善양(27ㆍ이화여대 신방과)은 현재 서울방송 프로듀서로 근무중이고 차녀 敏善양(24ㆍ이화여대 디자인과)은 최근 의류회사 타임에 입사했다. 독자 台熙군(20)은 대학 2학년.
결혼이 늦어진 이유를 묻자 그는 『만일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더 늦어졌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장인은 부산에서 사업을 하는 사업가였다. 큰 처남은 뉴욕주립대 부총장을 거쳐 연구교수로 재직중이다.
朴相千 신임 민주당 대표
- 趙南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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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9-22, 10: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