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윌리엄 쇼 대위

‘아버님 어머님!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평화 시에 한국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한국명 徐衛廉)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대위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 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미국의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태평양을 건너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전쟁에 참여한 동기나 사연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1945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시 PT518 부정장으로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의 한사람입니다. 당시 쇼 대위가 아이젠하우어 연합국사령관과 키크 제독, 그리고 뒤보스끄 중위를 태우고 PT518을 모는 사진이 있습니다.  임무를 마치고 그는 해군중위로 제대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해도 미국 국민이며 제대한 군인이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대한 하등의 의무도 책임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양에 있는 선교사 서위렴 1세(William E. Shaw)의 아들로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나고 고등학교까지 평양에서 마쳤으므로 한국어도 잘 했습니다. 미국에 가서 웨스리언 대학을 졸업하고 역시 목사님의 딸인  주아니타(Juanita Robinson)와 결혼했으며 미 해군장교로 입대하여 복무하고 제대하였습니다.


  미 해군에서 제대하고 난 후 부모님이 계신 한국에 와서 미 군정청 경제협력청(ECA)에 근무하다가 진해 해군사관학교 민간인 교관으로 근무하였습니다. 또 한국해안경비대 창설에도 기여하는 등 대한민국 태동기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에게 배웠던 사관생도들이 현재 생존해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는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가족을 데리고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라이샤워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하여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해밀턴 쇼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부담과 학위에 대한 미련과 부모가 계신 한국, 자기가 태어난 나라, 한국에서 가르쳤던 해군사관생도들 때문에 번민하는 가운데, 요한복음 15: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를 읽고 한국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오하이오에 있는 주아니타 부모에게 맡기고 위싱턴으로 날아가 자원입대 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어와 한국지리, 한국해안 경비 상황에 정통한 관계로 미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 보좌관으로서 해군정보장교로 임명되어 인천상륙작전 수행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미명을 기해 맥아더 장군은 기함 맥킨리를 필두로 순양함, 구축함, 로켓포함을 이끌고 팔미도를 지나 월미도와 인천해안을 강타하면서 상륙작전을 개시하여 오전 6:55분 미해병 스미스 상사가 월미도 꼭대기 나뭇가지에 성조기를 붙들어 매는데 성공하고, 이어 오후 5:31분 해병대 디플라 소위가 인천에 첫발을 내딛는 것을 시작으로 밤새 상륙군이 인천해안에 상륙함으로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완수되었음으로 해밀턴 쇼 대위의 임무는 끝난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자원해서 미 해병대 5연대에 배속되어 서울탈환작전에 직접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9월21일 저녁 5연대 3대대 1소대 윌리암손 중위의 판초에서 같이 밤을 새우고 9월 22일 아침, 미해병 7연대의 서울접근을 위한 적 후방 정찰을 목적으로 록번리에 접근하는 순간,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공산군의 매복조에 저격당하고 말았습니다. 피아간의 총격은 2시간이나 계속되었으며 Item부대가 도착하여 적들을 제압하고 6명의 해병대 구조대가 길 위에 쓰러진 쇼 대위를 구조했을 때는 온몸에 구멍이 수 없이 열려있는 상태로 만신창이가 되어 의식이 없었습니다. 서울탈환을 일주일 앞두고 장렬하게 산화한 것입니다. 그는 서울탈환 후 양화진 묘지에 안장되어 우리 곁에 잠들고 있는지 올해로 58년입니다. 양화진 그의 묘비명에 요한복음 15:13, 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hat he lay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John 15:13이 새겨저 있습니다. 그의 짧은 생애는 이렇게 녹번리 숲속에서 끝났습니다.


  쇼 대위의 전사를 안타깝게 여긴 친지와 단체들이 뜻을 모아 쇼 대위가 전사한 그 자리에 전사기념비를 1956년 9월 22일 건립하였습니다. 건립위원들은 백낙준, 정일권, 김활란, 리관숙, 김용우, 유형기, 김성진, 장용하 등 우리나라의 훌륭한 지도자들이시고 해군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연희대학, 이화여대, 세브란스의대, 배재고교, 이화여고, 광성고교, 정동감리교회 등 중요한 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시의 확장과 도시계획으로 그 기념비는 철수될 수 밖에 없었으며 제자이자 친구인 해군사관학교 제2기생들의 협조로  결국 은평구 응암1동 85-41번지 아파트 숲으로 둘러싸인 어린이 놀이터의 한쪽 구석에 옮겨져 오늘까지 우리 은평구에서 관리 보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졸지에 외아들을 잃은 부친 쇼 선교사를 위로하고 해밀턴 쇼 대위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친구와 친지들이 미국의 고향과 교회에서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금으로 1956년 5월 부활절 대전의 목산 언덕에 윌리엄 해밀턴 쇼 기념예배당이 준공 되었습니다. 그 예배당이 바로 목원대학 채플이며 현재는 목원대학교의 신앙적 요람이 된 것입니다. 당시 기념예배당 기금을 적어도 5,955명이 14,500 달러를 기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의 재력가가 기부금을 낸 것이 아니라 미국 교회의 많은 교우들과 고향친구들이 2달러 3달러씩을 기부하고 토지와 물자를 기증한 한국인을 포함하여 6000명 이상이 기부한 것은 그 당시 쇼 대위의 전사소식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우리의 동족은 아닙니다. 그는 미국 국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태어나고 소년시절을 이 땅에서 보냈습니다. 대한민국 해안경비대 창설에 협력했으며 해사 조교를 하면서 젊은 생도들의 친구로 혹은 선배로서 우정을 쌓았습니다. 진해의 해사 사관생도들에게 인기가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외국인 교관이 세명 있었지만 쇼가 2차 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PT518 함장으로 참여했던 역전의 용사일 뿐만 아니라 한국말과 일본어에 능통하고 유머도 곧 잘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과정의 연구과제도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이었습니다. 그는 장차 한국의 선교사로 갈 것을 결심하고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번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의 부모님께 편지로 자기의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평화 시에 한국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I can not be in good conscience in return to Korea as a Christian missionary in peacetime if I am not first willing to be there to help the Koreans defend their freedom in time of war).ꡑ


그는 한국을 미국과 똑 같이 자기의 조국이라고 생각했으며 아니 미국보다 오히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이었습니다. 그가 1950년 9월 14일 인천을 향하는 함상에서 아버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아버님! 우리는 지금 고향땅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게 될 때는 더 가까이 다가가 있을 것입니다 (We are near home and will be nearer before you get this).ꡑ한국을 자기가 태어난 고향 (home)이라고 썼습니다. 그의 결단은 지도자들의 노블리제 오블리제도 아니고  어떤 보상을 위해서 결단한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우리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고 우리를 돕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그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전사하기 1주일 전 역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던 당시 한국해군 PC-703함장 이성호 중령(후에 제5대 해군참모총장 역임)과 나눈 대화에서 그는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 사람입니다. 내 조국에서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하겠어요. 내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아요”라고 했습니다.

   쇼 대위의 부친 윌리엄 얼 쇼(William Eearl Shaw(서위렴I세))선교사는 아들의 전사소식을 듣고 부산에서 달려와 참혹한 아들의 시신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서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그의 아픔을 대전에서 아들의 기념교회를 건립하고 목원신학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 신앙적으로 이겨냈을 것입니다.  필리핀, 한국에서 40년 동안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61년 은퇴하고 1967년 10월 5일 스텐포드 병원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아들이 묻혀 있는 양화진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 군목제도를 처음 도입하게 한 선교사였습니다. 부인 아델린 해밀턴 쇼(Adelin Hamilton Shaw)는 1919년 7월2일 서위렴 1세와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선교사, 교사로 평양과 서울 대전에서 활동하면서 1971년 5월 8일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하여 역시 양화진에 있는 남편과 아들 옆에 안장되었습니다.


  쇼 대위의 부인 주아니타(Juanita Robinson Shaw)는 1956년 두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다시 돌아와 외국인 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1963년에는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세브란스병원에 의료사회봉사과를 신설하여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주아니타 여사에게 충무훈장을, 미국정부는 은성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1968년 한국을 떠나 지금은 공직에서 은퇴하고 오하이오에 살고 있습니다.

  쇼 대위의 큰 아들 윌리엄 로빈손 쇼(William Robinson Shaw)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버드에서 라이샤워 교수 밑에서 ‘아시아 역사와 언어’로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는 풀브라이트와 덴포스 장학재단 책임자로 1981-1982년에 근무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초빙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유교국가에서 법의 기준’과 ‘한국의 인권’ 이라는 저서를 내었습니다. 1993년 심장질환으로 별세했습니다. 로빈손 쇼의 미망인 캐롤 쇼( Carole Cameron Shaw)는 저명한 미국의 작가로서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1999년에 워싱톤에 있는 한국대사관 기록보관소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국내 학자들은 접근 할 수 없는 중요한 자료들을 토대로 한국의 근대사 연구에 매우 소중한 저서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 Independence'를 서울대 출판부에서 영문으로 출판하여 학계의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쇼 대위의 둘째 아들 스테반 쇼(Stephen R. Shaw)는 1949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67년 서울외국인 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한국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현재 Ohio 주 법원판사로 재직하고 있어 모친 주아니타 여사를 가까이에서 돕고 있습니다. 로빈손과 캐롤의 큰딸 줄리는 1990-1991년 오산의 공군기지에서 장교로 근무하였고 캐롤과 아들 데이비트는 1995년 서울에 살았으며 Yonsei Medical School의 편집자로 근무하였습니다.


  이렇듯 쇼 가족들 모두는 한결같이 한국을 사랑하고 잊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친구들을 위하여 무슨 형태로든지 각자의 처지에서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 봉사하고 한국을 도우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부전자전 부전손전으로 쇼 가족이 3대를 걸쳐서 한국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편 어디에 있더라도 한국을 돕는 일을 생각하고 있을 그들입니다. 양화진에는 이미 주아니타 여사의 묘역(Section F-5)이 남편 쇼 대위(F-6)옆에 예약되어 있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하던 헐버트 목사처럼 한국인의 품성과 기질까지도 사랑한 그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고향땅인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고 또한 그렇게 우리 곁에 잠들어 있습니다. 


  해밀턴 쇼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우리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한국을 고향으로, 우리를 친구로 생각하고 바로 결심하여 우리 곁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목숨 바쳐 우리를 도운 우리들의 진정한 전우이며 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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