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씨, 70년대 초부터 매년 방북한 북한 비밀노동당원”
‘친북인사’로 분류돼 귀국할 수 없었던 재독철학자 송두율씨가 지난 22일 입국한 데 대해 한국사회공안질서 붕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청으로 ‘2003 해외민주인사 초청 한마당’행사에 참석키 위해 귀국한 송씨는 30일 ‘한국민주화운동의 과제’라는 세미나에 이어 다음달 10일 ‘세계화시대의 민족개념’이라는 세미나에 기조발표할 예정이다.
그러나 송씨의 간첩혐의에 대한 사법적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된 이번 입법에 대해 송씨 등의 권유로 85년 북한에 가족과 함께 입북, 86년 독일로 탈출했던 오길남 박사는 “송씨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황장엽씨의 증언은 사실이고 이는 북한의 대남사업본부인 평양의 칠보산연락소에서 근무하던 기간 중 확인했다”며 “송씨의 입북은 단순히 대남공작을 하던 한 개인의 고국방문이 아니라 북한의 대남사업본부가 남한 내에서 직접적인 활동을 전개하겠다는 의미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송씨는 권영해, 강인덕, 이종찬, 임동원, 신건 안기부장에 의해‘조선노동당 서열 23위의 정치국 후보위원인 김철수임’이 계속 확인됐고, 지난 99년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는“송두율이 김철수이며 자신이 송두율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밝혔었다.
이후 송씨는 황장엽씨의 증언에 대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으나, 2001년 8월23일 당시 서울지법민사16부(재판장 하광호)는 최근 언론의 보도처럼 “황씨의 증언이 허위임”을 밝힌 것이 아니라“황씨의 증언만으로 송두율이 김철수라는 사실이 입증되기는 어렵다”고 밝혔고 “황씨의 증언은 공익적 목적에서 나온 것이므로 손해배상책임이 없다”고 결론내렸다.
<“기댈 곳은 북한 밖에 없다”오박사 입북유도>
오길남 박사 역시 이러한 황장엽씨의 증언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85년 8월 당시 송두율은 70년대 초 독일유학시절부터 반유신투쟁을 하며 가깝게 지내온 오박사가 경제난과 아내의 병으로 어렵게 생활하자 “기댈 곳은 북한밖에 없다”며 입북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박사는 그의 저서‘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라는 책을 통해 “송씨의 입북권유 이후 재독작곡가 윤이상은 ‘이제 민족통일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오. 그러니 북한으로 가서 그동안 배운 지식을 동포를 위해 썼으면 하오’라는 편지를 썼고, 거듭 ‘고생하지 말고 북한으로 가시오. 거기 가면 오박사는 대접을 받으면서 학문을 이룰 수가 있소’고 권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오박사는 1985년 12월 송두율, 윤이상, 김종한 등의 입북권유로 북한공작원을 소개받아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입북했고 이후 1986년 11월 평양의 칠보산연락소에서 ‘한민전’ 대남흑색선전요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평양 남조선혁명박물관, 송씨가 만든 프래카드 전시돼>
그러나 오박사는 북한에 와서 그곳의 처참한 현실을 깨달았고 아울러 송씨의 실체에 대해서도 확인하게 됐다.
오박사는 평양 칠보산연락소 고문 이창균 등 대남사업본부 고위직 인물들로부터 “송두율이 70년대 초반부터 1년에 북한을 1~2차례씩 왕래해 온 북한의 비밀노동당원이었음을 확인하게 됐다”며 “북한방문은 평소 유럽 외딴 곳으로 휴가를 간다는 외양을 취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오박사는 “86년 2월 평양 용성구역에 남조선혁명박물관에 갔을 때 1975년 프랑크푸르트 송두율이 직접 만들어 시위했던 ‘유신독재 타도하여 민주사회 건설하라’는 프래카드가 유리관에 전시돼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오박사는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의 저서에서 북에서 확인한 송두율의 실체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자신을 철저하게 은닉해 온 송두율에게 깊은 증오를 느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평양에 있었다. 나는 그가 가증스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했다...반정부활동을 한여 모두 북과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독재정권이 반정부인사를 탄압하는 구실이었다. 그렇게 믿고 있던 내게 송두율은 충격이었다”
<1991년 김일성 친견, ‘언 감자국수’ 敍品받아>
송씨의 첫 북한 방문으로 언론에 알려져 있는 1991년 당시에도 송씨는 소위 고위직인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묘향산초대소’에서 김일성의 접견을 받고 그로부터‘언 감자국수’를 접대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노동신문 1면에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됐는데 북한전문가들에 따르면 ‘언 감자국수’는 김일성 항일 혁명당시 고난의 상징으로서 북한에서 최고의 영예로 알려져 있다.
오길남 박사는 “70년대 이래 송씨의 대남사업공적이 신임을 받아 92년 김일성으로부터 일종의 ‘서품(敍品)’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며 “송씨가 당 서열 23위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올라선 것은 바로 1992년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 당시, 조총련계 학자들은 물론 김일성과 친분관계가 두터웠던 독실한 주체사상 신봉자들의 조문이 거절당했을 때도 외국에 있는 학자 중 오직 송두율만 장례식에 초청받기도 했다.
황장엽씨는 2001년 당시 ‘송두율 명예훼손손해배상답변서’를 통해 “장례부문 담당비서였던 자신에게 오직 송두율의 초청을 지시했으며 송두율은 ‘김철수’의 가명으로 김일성 장의위원회 위원으로 등록돼있었다”고 밝혔다.
<송두율 영향력, 이선실 등과 비교 안돼>
송두율은 국내언론에 알려져 있는 것처럼 정식 교수가 아닌 교수자격증(Habilitation)을 소지한 일종의 시간강사(PD : Privatdozent)에 불과하지만, 공안당국은 남한 내 커넥션을 통한 뛰어난 ‘대남사업능력’으로 김정일로부터 최고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오길남 박사는 이러한 송씨의 한국방문에 대해 “조선노동당의 자유로운 활동무대 확보”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오박사는“송씨는 외면적 인격과 능력은 물론 국내 영향력 등 모든 면에서 이전의 대남간첩지휘자였던 이선실, 김낙중과 차원을 달리한다”며 “이러한 송씨가 한국에 오는 것은 친북공작을 하던 한 개인의 고국방문이 아니라 조선노동당 대남사업본부가 공개적으로 한국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오박사는 “송씨 등이 반유신독재투쟁을 위해 74년 독일에서 조직한 민주사회건설협의회에서도 북한과 연계돼지 않은 순수한 민주인사들은 한국민주사회건설협의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떨어져 나왔고 송씨 등은 민주인사를 가장한 친김정일인사에 불과하다”며 “송씨는 김정일과의 연계를 끊고 한국사회에 통절히 사과하기를 바란다”고 덧 붙혔다.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