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에는 600년 된 건물들이 많습니다. 칼4세 때가 이 도시의 전성기인데 그때부터 600년간 戰火에 휩쓸리지 않았으므로 이 도시는 여러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하나 하나 추가해가면서 진주 같은 모습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프라하에 오면 슬라브 냄새보다는 독일 냄새가 더 많이 납니다. 체코 민족의 피에는 폴란드나 러시아와는 달리 슬라브 민족과 독일 민족의 피가 섞여 있습니다. 양쪽의 좋은 점을 다 받은 것 같기도 합니다. 슬라브 민족의 양순함, 憂愁, 예술성, 독일민족의 근면과 성실과 치밀함이 융화된 것이 체코의 민족성, 예술성, 그리고 역사의 성격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술과 공업과 맥주로 유명한 체코의 국가적 성격을 만든 것이 아닐까요.
블타바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800년에 걸쳐 건설된 城은 기네스 북에 세계 최대의 城으로 기록이 올라 있습니다. 길이 570미터, 너비 128미터. 그 안에 성당과 대통령궁 등 건물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 城門이 대단합니다. 城門 위에 큰 석조상이 두 개 있는데, 칼과 몽둥이로 사람을 때리고 찔러 죽이는 모습입니다. 우리 여행단의 안내인은 “합스부르그 왕조가 체코를 지배하면서 너희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조각이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 여행단의 일원이 “그렇다고 저런 식으로 피지배민족을 자극해서야 되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 조각상은 1767년-1770년에 만들어진 그리스 신화 타이탄像입니다. 맞아죽고 찔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두 청년인데 그 손동작이 끝까지 칼과 몽둥이를 든 사람에게 저항하는 모습입니다. 이 조각상을 본 체코 사람들은 합스부르그 왕조에 대해서 분노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왔을 것 같습니다.
우리 여행단의 일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여기에 와서 저 조각상을 보았으면 민주화에 역행한다고 중앙청처럼 당장 때려부수어라고 했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조각상이 주는 메시지는 간단했습니다. ‘권력자에게 어설프게 대어들다가는 맞아죽는다’는 뜻.
이 조각상 밑에서 不動자세로 서 있는 두 군인의 옷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분청색깔의 군복인데, 이 옷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체코 출신의 영화감독 밀로시 포르만이 감독한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일생을 그렸습니다. 이 영화는 비엔나가 배경이지만 프라하에서 촬영되었습니다. 민주화 이후 하벨 대통령은 이 영화의 의상담당자를 불러 대통령궁 성문지기 군인들을 포함한 전체 군인들의 정복을 새로 디자인해달고 했다는 것입니다. 분청색 군복은 2차 세계대전 전에 존재했던 체코공화국의 군복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오늘 城은 인파로 붐볐습니다. 한해에 프라하를 찾는 관광객은 6천만-1억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전체 입국 관광객의 열 배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인근 독일지역 관광객들이 하루 만에 돌아가곤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만, 지금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프라하임은 확실합니다. 인구 120만 명의 도시가 관광객 반 시민 반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관광객들이 많으면 소매치기도 많은 법, 종일 여권이 든 호주머니를 감싸고 다녀야 했습니다.
城안에는 옛 王宮이 있습니다. 이 건물 안에는 합스부르그 왕조가 파견한 총독이 근무했던 총독부 방이 있습니다. 1618년5월28일 新敎로 개종한 체코의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 왕조가 파견한 관리들과 그 비서들을 이 방의 창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이들은 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만, 이 사건은 그 뒤 30년간 중앙유럽을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으로 몰아간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독일과 그 주변국가인데 인구의 4분의 1이 죽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평화롭기 짝이 없는 프라하이지만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중의 하나가 여기서 發火된 것입니다.
체코는 1938년 뮨헨 협정의 희생물이 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한 원인으로 제공됩니다. 1968년에는 공산정권하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가 소련군의 개입으로 침묵했지만 1989년11월 ‘우단 혁명(Velvet Revolution)’을 통해서 공산독재를 무혈로 끝장냅니다. 체코 사람들이 보여준 최근의 행태는 현명과 신중과 교양이란 말로 상징됩니다. 실력과 분수에 넘는 행동을 자제하다가 결정적 시기가 오면 결정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역사를 확실하게 전환시키는 힘은, 저의 추측입니다만, 과거의 시행착오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30년 전쟁은 체코 사람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결말이 났습니다. 구교도세력이 이 지역에선 이겼기 때문입니다. 합스부르그 왕조는 다시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고 그들은 신교도들을 再구교화하는 정책을 폅니다. 체코 사람들의 인구는 3분의 1로 줄었다고 합니다. 그런 희생을 거치면서 얻은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는 이야기입니다만, 역사는 그런 셈법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체코 사람들은 30년 전쟁을 통해서 현명함을 체득했고, 그것은 1989년11월 공산정권 타도 때 가장 극적으로 발휘되었던 것입니다.
1989년11월17일 공산당 지배하의 체코정부는 민주화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을 구타했습니다. 여기에 항의하는 시위가 바첼라프 광장에서 연일 계속되었습니다. 한때는 70만 명의 시위대가 이 광장을 메웠습니다. 1989년11월24일 이 광장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국립박물관 발코니에 알렉산더 두브체크(1968년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공산당 서기장)와 바클레브 하벨(뒤에 대통령)이 나타나 공산당 정권 타도를 선언했습니다. 공산정권은 즉시 정부를 인계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오늘 오전 이 민주화의 현장인 바첼라프 광장을 거닐었습니다. 지금은 철거된 우리 중앙청과 거의 같은 크기의 국립 미술관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 국립박물관의 위치가 옛중앙청을 개조해서 쓰던 중앙박물관과 비슷했습니다. 다시 한번 중앙청을 부수어 역사를 파괴한 정치인들의 無知에 흥분하는 목소리들이 자연발생적으로 터져나왔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 지도층은 체코 사람들과는 달리 역사의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고 똑 같은 형식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아주 위험한 경향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교훈을 살리지 못하고 그 뒤 40년 사이에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었습니다. 피할 수 있었던 것을 우리가 스스로 불러들인 전쟁이지요.
6.25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인명을 잃고도 지금 한국은 그 전쟁을 초래했던 金正日 세력에 속고 국내 좌익세력의 발호를 허용하는 바보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한 여행객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당하고도 정신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
유럽여행(8)/바첼라프 광장에서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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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9-26, 01: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