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덕수용소의 '남조선 삐라'

오직 보위부의 처분만 기다릴 뿐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던 암담한 그 시절, 삐라 한 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게 했다.
1985년경 요덕수용소의 산 속에서 처음 발견했던 '남조선 삐라'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신기한 물건인가 싶어 집어든 삐라 안에 남조선 대통령의 사진과 발전된 서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마치 큰 죄를 지은 죄인처럼 손발이 떨렸다.

북한 내에서 방영하는 TV는 물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수용소에서 처음으로 외부와 소통하는 순간이었다. 수용소 보위부는 수용소 안에 떨어지는 모든 삐라는 절대 보지 말고 수거해 바치라고 했지만 산 속에 마구 뿌려지는 삐라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수용소에 수감되는 순간 모든 정치범들은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오직 보위부의 처분만 기다릴 뿐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던 암담한 그 시절, 삐라 한 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게 했다. 함경도 산골짜기 요덕수용소 상공에까지 삐라를 날리는 남조선의 기술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세상에서 숨겨진 요덕수용소에 삐라가 떨어진다는 것은 세상 누군가가 요덕을 지켜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이후 수용소 내에서 삐라사건은 일상생활처럼 됐다. 먹을 것과 의약품, 내의 등도 함께 떨어졌지만 정치범들의 가장 큰 관심은 남한 소식이었다.

1997년 이전 남북한은 체제 선전을 하기 위해 서로 전단지를 날렸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이후 남북한 간 상호비방을 중단하기로 결정되면서 휴전선의 대형전광판은 물론 일체의 대북 전단지 사업도 중단됐다. 북한이 상호비방 중단을 강하게 요구한 것은 남조선에서 보내는 전단지와 대북방송이 내부를 심각하게 와해시켜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식량난으로 수백만 명이 아사했던 1990년대 후반에 남한이 지속적으로 전단지를 북한에 보냈다면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정보가 넘쳐나는 남한에서 북한의 삐라는 대수롭지 않을 수 있지만 일체 외부와의 정보가 차단된 북한에서 일반 서민들이 받아들이는 남조선 삐라는 너무나 의미심장하다. 북한에서 남조선 삐라를 접해본 추억이 있는 탈북자들은 한국정부가 왜 이런 중요한 사업을 중단했는지 이해할 수 없어했다. 그래서 일부 탈북자들은 2003년경부터 단체를 만들어 지혜를 모아 북한 인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은 전단지를 원시적인 풍선에 담아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국방부가 하던 엄청난 사업을 아무런 힘도 없는 탈북자 단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북한당국이 해소해주었다. 남북 군사회담장에 나타난 북한 측 대표들이 삐라 문제를 매번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탈북자들이 보낸 전단지를 내보이며 강력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처리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북한당국이 한국정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탈북단체의 대북 전단지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은 그만큼 북한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은 북한주민들의 심리적 상태와 그들이 어떤 정보를 원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전단지에는 탈북자들이 보고 느낀 자유민주주의와 남조선의 실상이 적혀 있다. 특히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김정일에 대한 비판적 내용도 싣고 있다.

황해도 등 군사분계선 가까운 지대에 밀집한 60만 인민군대와 주민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정보가 더 차단돼 있어 그들은 먹는 음식만큼이나 외부 소식에 목말라 있다. 마침 제9회 서울평화상 수상차 서울에 온 북한인권운동가 수잔 숄티 여사도 풍선을 이용해 북한에 삐라를 보내는 운동을 펼치겠다고 했다. 정부가 못하는 위대한 일을 감당하는 탈북자들의 풍선사업을 정부가 못하면 이제 국민들이 나서서 도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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