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오익제씨
기사를 작성한 인물은 2004년 서울에 온 前職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 요원 장철현氏. 張씨는 오익제 납치 당시 북한 공작기관의 계획 수립 및 실행 과정을 직접 지켜본 사람으로서, 현재 안보관련 국책연구기관에 재직 중이다.
張씨는 “소위‘오익제 월북件’은 황장엽 탈북에 대응하는 공작차원에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통일전선부가 자행한 가장 근래의 남한인사 납치극”이라고 증언했고, 신동아는 張씨의 원문(原文)을 게재한 뒤 “다각도의 검증 끝에 신뢰할 수 있다”는 결론을 덧붙였다.
張씨가 오랜 침묵 끝에 진실을 밝힌 이유는 그가 현재 국책연구기관에 재직 중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 노무현 정부의 對北정책에 위반되는 어떤 증언도 공개적으로 할 수 없도록 통제됐다”며 “그럼에도 익명(匿名)으로 공개하지 않은 것은 증언의 신뢰도를 증명하는 차원에서 반드시 실명(實名)으로 증언할 그날을 기다려온 것”이라고 밝혔다.
張씨가 폭로한 ‘오익제 납치사건’은 북한이 저지른 수많은 만행 중 범죄의 발단과 동기부터 진행과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가담자들의 역할과 행적이 상세히 고발된 최초의 경우이다.
북한정권이 저지른 범죄 중 사건의 전모(全貌)가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김정일 독재의 야만적 체질, 테러집단으로서 본질에 대한 역사적 고발로 삼을만하다.
최은희, 신상옥 납치사건은 피해당사자가 납북 후 겪은 일을 탈출해 진술한 것이지만, 오익제 납치사건은 당사자가 아직 억류된 상황에서 실체가 폭로된 기적적인 경우이다.
장철현氏의 진상공개로 대한민국은 세 가지 의무를 안게 됐다.
첫째, 국가보안법상 탈출죄로 기소중지 상태일 것으로 여겨지는 오익제氏를 이제는 전력을 다해 구출해내야 한다. 자신들의 교령(敎領)이 납치된 천도교 입장에선 더욱 절박한 일이 될 것이다.
둘째, 오익제氏 납치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북한의 ‘안경호’ 등을 체포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이들의 범죄는 단순한 국내법 위반이 아닌 국제법 위반이다. ‘안경호’등을 체포, 처벌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셋째, 납치테러범을 대표로 하는 ‘6`15민족공동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관계당국의 검증과 수사가 요구된다. 안경호는 ‘6`15민족공동위원회’의 북측 의장 겸 통일전선부 부부장으로서 한국에도 여러 차례 방문했었다.
장철현氏 증언에도 나오지만, 북한의 통일전선부는 “소위‘통일외교’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시스템을 철두철미하게 적화(赤化)통일 차원에서 역이용하는 이중적인 기능의 부서”이다.
장철현氏는 오익제氏 납치의 진실을 폭로한 이유에 대해 “통일외교를 명목으로 남북관계의 전면에 나서서 노골적으로 혹은 음성적인 방법으로 적화(赤化)목적을 실행하는 통전부의 실체를 정확히 알리기 위해서”라고 적고 있다.
對南적화(赤化)공작의 총책임자이자, 오익제氏 납치를 지휘한 테러범을 共同대표로 하는 ‘6`15민족공동위원회’는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보존을 위해 반드시 검증돼야한다.
아래는 장철현氏의 신동아 기고문을 요약한 것이다.
【황장엽 월남 후 국가보위부,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 35호실, 대외연락부, 통일전선사업부, 작전부 같은 대남공작부서들, 해외공관까지 총동원해서 황장엽 비서를 테러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1997년 3월 김정일은 대외연락부 부장 강관주, 작전부장 오극렬, 통일전선사업부장 임동옥, 35호실 부장 권희경을 불러 ‘황장엽 대응공작’차원에서 그에 버금가는 남한 인사를 월북시키거나 안 되면 납치라도 하라고 지시했다.
공작기관들은 오익제 外 두 명을 월북시키거나 납치하겠다는 대책안을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오익제를 거론한 이유는 북한 평남 성천에 있는 처와 딸 때문이다. 류미영 천도교 청우당위원장은 1993년 10월 서울 평양 교환방문 및 동학혁명 100주년기념행사 공동주최 협의를 위해 중국 베이징 방문 시 오익제에게 이들의 안부를 전해주기도 했었다.
공작기관의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세 명으로 분산시키지 말고 한 명을 분명하게 선택해 실수 없이 끝내라고 지시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황장엽 탈북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것이라고 했다. 김정일은“이번 기회에 당 대남공작 부서장들의 능력을 검증하겠다”는 친필사인을 하는 등 압박했다.
임동옥은 조국평화통일서기국 안경호 국장을 실무 책임자로 임명했고, 對南공작부서장들은 퇴근 없이 의암초대소에서 숙식하며 공작을 지휘했다. 안경호는 조평통과 각 연락사무소 내의 우수인력들로 실무진을 구성하고 김정일에게 이번 작전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결의문까지 작성해 다른 부서들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공작기관원들은 평남 성천에 거주하는 오익제의 본처와 딸, 노모의 사진을 찍게 했다. 평양시 중구역 련화동에 101연락소에는 오익제 본처와 딸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도록 지시했다. 이 일을 담당한 사람은 101연락소 5국19부(시문학 부서)의 박철이었다.
<화장실에서 그는 한 시간을 울었다>
妻의 편지엔‘단 한 번도 재가하지 않고 통일의 그날을 기다려 노모를 모시고 남편을 기다린 한 여성의 기나긴 수십 년 세월’‘그동안 어머니가 과부의 설움과 눈물을 씹으며 할머니를 모시고 홀로 고생한 이야기’을, 딸으 편지엔‘아버지 얼굴을 모르고 자란 자식의 비극적 심정’을, 노모의 편지엔 ‘죽기 전 한 번이라도 아들 얼굴을 보고 싶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익제 부인이 두 번이 결혼했던 사실, 딸 역시 그 때문에 성을 두 차례 바꿔야 했던 말은 적지 않았다. 월남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박대 받은 것은 편지에 단 한 글자도 반영되지 않았다.
1997년 5월경, 통전부의 편지글이 對外연락부 공작선(線)을 거쳐 남한 내 현지 35호실 공작선을 통해 오익제氏에게 전달됐다. 오익제氏가 훗날 북한에 들어온 후 고백한 바에 따르면, 그 편지와 사진을 보고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한 시간을 울었다고 한다.
35호실 공작선은 이후에도 오익제氏에게 “본처와 딸을 중국으로 내보내겠으니 한번 만나보라”고 유혹했다. 마침내 오익제氏가 모녀와의 상봉을 희망한다는 메시지가 전달되자, 안경호는 실무본부를 즉시 중국으로 옮겼다.
납치의혹을 피해 자진월북으로 위장하자면 그가 중국으로 오는 과정이 문제였다. 통전부의 오익제 납치공작팀은 납치를 자진월북으로 위장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은 물론 오익제氏의 전화를 이용해 불필요한 통화를 여러 번 서울과 하게하는 등 치밀함을 보였다.
막상 오익제氏가 중국에 오자, 공작원들은 북한보위부가 월남자 가족이란 이유로 국외여행을 통제하기 때문에 못 오고 중국-북한 국경선 근처에서 모녀가 기다린다고 설명했다.
단둥 지역에 도착한 오익제氏는 모녀가 여권 문제 때문에 열차에서 내릴 수 없다는 보위부 직원의 말만 믿고 주저하던 끝에 북한 열차에 올랐다. 오익제氏가 열차 안에서 본처와 딸을 만나던 그 감격적인 순간에, 열차는 서서히 국경을 넘고 있었다.
<그 순간 열차는 서서히 국경을 넘고 있었다>
북한 땅을 달릴 때까지만 해도 이를 의식하지 못했던 오익제氏는 창밖의 낯선 풍경에 놀라 이 열차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냐고 소리를 질렀다. 안경호는 “평양으로 가고 있으며 오익제 선생은 지금부터 민족종교 교류와 남북통일사업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담당해주어야 하겠다”고 설명했다. 그 첫 말에 오익제씨는 거세게 항의했다고 한다.
안경호는 이미 준비한 ‘오익제 월북’관련 조선중앙통신사 보도 자료를 보여주었고, 오익제氏는 기차 안에 외신기자가 없는지 소리를 질러가며 찾았다. 모녀는 아버지에게 매달리며 다시는 헤어져 살지 말자고, 이대로 돌아가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한다고 울며 애원했다.
안경호는 “장군님이 선생님을 꼭 모시고 오라는 믿음을 주셨다”며 총리 대우를 해주겠다거나 남북 종교교류의 일선에 모시겠다고 거듭 설득했다. “오익제 선생이 다시 서울행을 희망하실 경우 언제든 돌려보내드리겠다”는 약속도 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약속에 오익제氏는 한 시간 동안 생각할 여유를 요구했다. 그 시간에 모녀는 그에게 매달려 눈물로 대화를 나눴다. 오익제氏는 반세기를 홀로 살았다는 본처와 딸의 순정어린 호소에 못 이겨 마침내 통전부가 써준 각본대로 평양역에서 짧은 월북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공작이 마침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거의 사형수나 다름없는 취급을 당했다>
오익제氏는 월북 성명을 발표한 후 곧바로 평양시 대동강구역 청류2동 문수초대소로 이송됐다. 오익제氏는 이 초대소를 관리하는 무장(武裝)경비에 둘러싸여 1년 동안 조사를 받았다.
조사관은 잠 잘 시간까지 그를 불러내는 등 노골적으로 괴롭혔다. 그는 “북한이 말하는 남북 종교 교류와 남북통일 기여라는 게 이런 범죄자 취급이냐”며 첫 조사부터 강력하게 항의했다. 결국 그는 서울로 돌려보내달며 단식에 들어갔다. 본처와 딸이 손수 만든 음식도 그를 돌려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느 날 통전부 제1부부장 임동옥이 안경호와 함께 “오익제 선생의 노여움을 풀어주라”며 김정일이 보낸 음식이라고 목란관에서 만든 요리를 가져왔다. 그런데 그가 김정일이 보냈다는 음식까지 거부하자 그때부터 오익제氏는 거의 사형수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무장인력이 침실에까지 버티고 지켜서 있었고 모녀와의 만남도 단절시켰다. 이후 북한당국의 압력으로 선전을 위한 외부출입이 이뤄졌다. 그러나 TV를 통해 오익제氏의 관광뉴스를 보던 김정일은 김용순을 찾아 “오익제 인상이 왜 저렇냐? 저 얼굴 보면 누가 자진월북이라고 하겠는가? 내일부터 TV에 내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다음날부터 오익제氏는 더는 초대소 밖을 외출할 수 없게 됐다. 그때부터 오익제氏는 사상공세를 받게 됐고 지금까지도 구속이냐 다름없는 철저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고 있다.
북한에 자진월북했다는 사람들치고 월북 성명서를 스스로 읽지 않은 사람이 없다. 고 신상옥 감독이 그랬고 그의 아내 최은희씨도 마찬가지였다. ‘오익제 월북사건’은 실은 황장엽 탈북에 대응하는 공작 차원에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통전부가 자행한 가장 근래의 남한인사 납치극이다.
<김대중씨가 무슨 말을 할 지 궁금하다>
오익제 공작 이후 안경호는 노력훈장과 국기훈장 1급, 기타 다른 성원들도 2급 훈장을 받았다. 오익제 부인 명의의 편지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았던 101연락소의 박철은 5국19부 부장에서 5국 국장으로 승진했다.
북한은 체제홍보나 김정일의 만족을 위해 많은 남측 인사나 일본인을 납치해왔고, 지금도 그러한 국가적 범죄를 은폐하기에 급급하다.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김정일 정권에 대해 유화책으로 일관하며 정상회담까지 했던 김대중氏는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인사가 바로 그 김정일 정권에 의해 납치당해 현재도 감금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 못내 궁금하다. 】
북한의 관영매체들은 평양행 이후 오익제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과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고문을 겸임하고 있으며, 2003년에는 최고인민회의 11기 대의원에 당선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오씨의 북한행 이후 북한 당국의 참관없이 만난 남한 인사는 찾을 수 없고, 남북 천도교 교류 행사에서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정도로 남한 인사들과의 접촉에 제한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