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당(黨)’이란 말의 뜻은 곧 ‘상흑(尙黑)’이다. ‘당(黨)’과 ‘당인(黨人)’이란 말은 중국어에서 폄하(貶下)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공자는, “군자는 몸가짐을 씩씩하게 하되 다투지 아니하며 무리와 화목하게 지내되 편당하지 않는다(君子矜而不爭, 群而不黨).” 라고 했다. 이에 대해 『논어(論語)』주석에서는 “서로 돕되 비리를 감추는 것을 당이라 한다(相助匿非曰黨).”고 해설을 달았다. 중국 역사상 정치적 소집단을 가리켜 흔히 사용해온 단어가 바로 ‘붕당(朋黨)’이다. 이는 중국 전통문화 중에서 좋지 않은 개념으로, 이른바 ‘호붕구당(狐朋狗黨)’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당을 결성하는 것(結黨)’과 ‘사리사욕을 도모하는 것(營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왜 근대 중국에서 공산당이 나타날 수 있었으며 또한 세력을 얻어 정권까지 탈취하게 되었는가? 중국 공산당은 끊임없이 중국 인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미지를 주입시켰다. 즉, 역사는 중국 공산당을 선택했으며 인민이 공산당을 선택한 것이므로, “공산당이 없으면 새로운 중국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 인민이 능동적으로 공산당을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공산당이 결당영사(結黨營私)하고 중국인민들을 핍박하여 이를 받아들이도록 한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다만 역사로부터 그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청(淸)나라 후기부터 민국(民國) 초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거대한 외래 충격과 내재적인 변혁을 거치면서, 사회는 혼란과 고통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많은 지식인과 인인지사(仁人志士)들은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국난(國難)과 사회의 혼란 속에서 그들의 우환(憂患)의식은 실망으로부터 완전히 절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비유하자면 병이 들어 아무 데서나 의사를 찾아 치료를 하려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중국 밖에서 이른바 영단묘약(靈丹妙藥)을 찾기 시작했다. 영국식이 안 되면 프랑스식으로 바꿨고, 프랑스식이 안 되면 다시 러시아식으로 바꿔보기도 하였다. 게다가 조급함 때문에 극약처방까지도 주저 없이 사용하면서 하루아침에 중국을 부흥시키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5.4운동은 바로 이런 절망감을 충분히 표현하였다. 어떤 사람은 무정부주의를 주장했고, 어떤 사람은 공자(孔子)를 타도하자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서양문화를 끌어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전체적으로 중국 전통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며, 중용(中庸)의 도리를 반대했고, 지름길을 찾기에 급급하여 일체를 타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 중 급진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자니 그런 길이 열려 있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자신의 이상추구와 확고한 의지에 대하여 전혀 의심이 없었다. 그들은 현실세계는 구할 방도가 없었으므로 오로지 자신들이 나서서 역사적인 발전 계책을 찾아야 한다고 여겼다. 때문에 그들은 혁명과 폭력에 대하여 거대한 열정을 품게 되었다. 같지 않은 기회는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이론, 학설, 노선을 찾도록 하기 마련이다. 마침내 그런 한 부류의 사람들이 소련에서 온 공산당 연락인을 만나게 되었다. ‘폭력혁명으로 정권을 탈취한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그들의 초조한 정서에 맞아떨어졌으며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그들의 소원에 부합되었기에, 공산당과의 만남은 그야말로 찰떡궁합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완전히 생소한 이국(異國)의 사상을 중국에 끌어들이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 제1차 당 대표대회에 참석했던 사람은 모두 13명인데, 나중에 일부는 죽고 일부는 도망쳤으며 또 어떤 사람은 일본에 투항하여 매국노『漢奸』가 되었고, 어떤 사람은 공산당을 탈당하여 국민당에 투항한 반역자 또는 기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1949년 중공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에는, 원래의 공산당 창립멤버 중에서 오직 마오쩌둥(毛澤東)과 둥비우(董必武), 두 사람만이 여전히 중국 공산당에 남아 있었다.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 사람들은 그들이 당시 러시아로부터 청해온 이 ‘신령(神靈)’이 오히려 하나의 사악한 영(靈)이며, 자신들이 찾아 낸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약이 도리어 아주 강력한 독약(毒藥)이었음을 생각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당시 혁명에 성공을 거둔지 얼마 되지 않은 소련 공산당 볼셰비키 정권은 이미 중국에 대해 야심을 품고 있었다. 1920년 소련은 시베리아에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극동(極東) 서기처를 세워 중국 등 다른 나라의 공산당 창건을 책임지게 하였다. 이 서기처의 책임자가 수밀츠키(Sumiltsky)였으며 부책임자는 바로 그리고리 보이틴스키(Grigori Voitinsky)였다. 그들은 천두슈(陳獨秀) 등과 함께 중국 공산당의 창건을 추진하였다. 1921년 6월, 그들은 코민테른에 ‘코민테른 극동 서기처 중국지부’를 설립하는 계획서를 제출하였으며, 이로써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는 지부(支部)가 되었다. 이후 1921년 7월 23일 극동서기처의 니콜스키(Nikolsky)와 마링(Maring)의 조직 하에 중국 공산당이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이때부터 공산주의 운동은 실험적으로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후 공산당은 일체를 압도했고 일체를 정복했으며 그리하여 중국에 끊임없는 큰 재난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공산당 발전사는 국내외 사악(邪惡)을 집대성한 과정 5천년 문명 역사를 가진 중국에, 중국의 전통과 도무지 맞지 않는 공산당을 이식해오고, 외래의 사악한 영(靈)을 끌어들이는 것은 사실 그리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은 공산주의의 유토피아사상으로 민중들과 애국 지식인들을 기만하였으며, 이미 레닌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된 공산주의 이론을 진일보로 왜곡함으로써 공산당 통치에 불리한 일체 전통과 가치를 훼멸시키고, 공산당 통치에 불리한 일체 사회계층과 사회 인사들을 소멸시키는 근거로 삼았다. 중국 공산당은 산업혁명을 끌어 들여와 모든 신앙을 훼멸시켰으며 더 나아가 공산주의를 더욱 철저한 무신론으로 만들었다. 중국 공산당은 공산주의를 도입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했으며 또 레닌의 폭력혁명 이론을 끌어들였다. 이와 동시에 중국 공산당은 중국 역대 제왕(帝王)제도의 가장 나쁜 부분을 계승 발전시켰다. 중국 공산당의 발전사는 점차적으로 중국 국내외의 사악을 집대성한 과정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은 이른바 ‘중국 특유’의 9개 기본 인자를 완성하였다. <9대 기본 인자>란 바로, ‘사악(邪), 기만(騙), 선동(煽), 투쟁(鬪), 강탈(搶), 불량(痞), 이간(間), 소멸(滅), 통제(控)’를 말한다. 이런 기본 인자들은 끊임없이 전승(傳承)되었으며, 게다가 그 수단과 악랄한 정도는 위기 속에서 진일보로 강화, 발전되었다. (1) 첫 번째 기본 인자: 사악(邪)-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악한 허울 마르크스주의가 애당초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폭력혁명으로 낡은 국가기구를 때려 부수고, 프롤레타리아 정권을 수립한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근본적인 사악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은 사실상 적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잉여가치 경제학으로서, 자본주의 발달 초기에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자본주의의 멸망과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단언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역사와 현실 속에서 부정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론은 무력에 의한 통치와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를 주장하였다. 『공산당 선언』은 계급대립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공산당의 역사관과 철학관을 서술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기존의 전통 도덕과 사회관계를 타파하고, 정권을 탈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하여 첫 시작부터 공산주의는 일체의 전통과 대립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인류의 천성(天性)은 보편적으로 폭력을 배척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가운데서 사람은 포학(暴虐)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공산당의 폭력학설은 본질상 인류의 본성을 부정하고 있다. 이는 이전의 어떠한 사상, 철학, 전통과도 모두 실제적인 연원(淵源)관계를 찾아 볼 수 없으며 마치 하늘과 땅 사이, 공중에서 하나의 이름 모를 공포 체계가 떨어져 내려온 것과 같다. 이런 사악한 관념의 전제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이른바 “사람은 반드시 하늘을 이긴다(人定勝天)”는 것으로, 인위적인 세계 개조(改造)이다. 공산당은 “전 인류를 해방 시킨다”는 구호와 “세계 대동단결”이란 이상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일부 나라를 위해 걱정하는 의식을 가지고 일생에 무엇인가를 한 번 해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공산당의 위와 같은 슬로건에 가장 쉽게 기만당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늘이 위에 있음을 망각하고 ‘인간 천국’을 세운다는 그럴싸한 거짓말에 속아 공로와 업적을 세우는 전쟁터에서, 전통을 멸시하고 타인의 생명을 가볍게 보며 또한 자신의 생명마저도 새털보다 가볍게 변질시켜 버렸다. 인위적으로 만든 이른바 ‘공산주의 세계’를 진리로 받들고, 그래서 “뜨거운 피 이미 들끓거니, 진리를 위해 투쟁하리라.”며 떨쳐나섰다. 공산당은 이런 절대적이고 황당한 이념으로 인간과 하늘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렸고, 자신들과 조상 및 민족의 전통적 혈맥을 잘라 버렸으며, 그들에게 공산주의를 위해 헌신하며 공산당의 학살 에너지를 강화하도록 호소하였다. (2) 두 번째 기본 인자 : 기만(騙)-사악은 바른 신『正神』으로 가장하여 기만하기 마련이다. 공산당이 노동자계급을 이용할 때는 그들을 ‘가장 선진적인 계급’, ‘지극히 공평하고 무사한(大公無私)’, ‘영도(領導) 계급’,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선봉대’ 등으로 칭했다. 공산당이 농민을 이용할 때에는 ‘빈농(貧農)이 없으면 혁명이 없고,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곧 혁명을 공격하는 것이다.’라고 찬양하면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승낙하였다. 공산당이 자본가를 이용할 때에는 그들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동반자’라고 하면서 ‘민주공화’를 승낙하였다. 공산당이 국민당에 철저히 포위되어 섬멸될 위기에 처하자 “중국 사람은 중국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국민당의 지도에 복종할 것을 승낙하였다. 하지만 항일(抗日)전쟁이 끝나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일방적으로 공격하여 국민당 정권을 뒤엎었고, 건국 후에는 다그쳐 자본가계급을 소멸시켰으며, 최후에는 노동자와 농민을 철저한 빈털터리 프롤레타리아로 만들었다. 통일전선(統戰)은 공산당의 가장 전형적인 기만술책이다. 예컨대 국민당과의 내전(內戰)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공산당은 지주, 부농의 온 가족을 몰살시키던 이전의 방법을 수정하여, 지주와 부농 같은 계급의 적들에게 이른바 ‘임시 통일전선 정책’을 취하였다. 1947년 7월 20일 마오쩌둥은 “소수 반동분자를 제외하고 마땅히 전체 지주계급에 대하여 온화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로써 적대분자를 감소시켜야 한다.”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공산당이 정권을 탈취한 다음, 지주와 부농은 여전히 집단학살 당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처럼 공산당은 말과 행동이 달랐다. 공산당이 민주당파를 이용할 때는 ‘장기적으로 공존하고, 상호 감독하며, 서로 마음을 열고 영욕(榮辱)을 함께 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 민주인사들이 당에 의견을 제기하자 모두 반당(反黨) 우파란 누명을 씌워 사회적으로 숙청해 버렸다. 진정으로 그것의 사상, 언행과 조직에 조금이라도 동의하지 않거나 부합되지 않는 것은 일체를 불문하고 모조리 소멸시켜 버렸다. 마르크스, 레닌과 중공 지도자들은 모두 말한 적이 있다. 공산당의 정권은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없으며, 공산주의란 첫 시작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독재적인 선천적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그것의 독재성과 배타성은, 정권을 탈취하거나 정권을 장악한 시기이든지를 막론하고, 공산당은 여태껏 다른 정당 및 단체와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다. 이른바 긴장이 완화된 시기라고해도 상대정당을 대하는 태도는 다분히 위선적이었다. 역사의 교훈이 있다면, 공산당의 어떤 약속도 다 믿을 수 없으며, 공산당은 어떠한 보증도 다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문제에서 공산당을 믿었다면 그는 바로 그 문제로 인해 목숨을 잃을 것이다. (3) 세 번째 기본 인자 : 선동(煽)-교묘하게 증오를 만들고 대중 투쟁을 유발 기만은 선동하기 위한 것이다. 투쟁하자면 반드시 증오가 있어야 하므로 증오가 없으면 증오를 조작해 낸다. 중국 농촌에는 일련의 아주 뿌리 깊은 토지 종족제도가 있는데 이는 공산당이 정권을 수립하는 데 근본적인 장애가 되었다. 농촌 사회는 본래 조화로운 것으로 토지 소유와 임대 관계는 절대적인 대립 관계가 아니었다. 지주는 토지를 농민에게 임대해주고 관리하였으며, 농민은 토지를 임대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임대료를 지불했다. 이리하여 지주가 농민을 살리고 농민이 지주를 살렸다. 이런 일정 정도 상호의존 관계를 공산당은 계급 대립, 계급 착취의 관계로 변화시켰으며, 조화를 적대적이며 원한을 가진 투쟁적인 것으로 변화시켰다. 또 합리적인 것을 불합리한 것으로 변화시켰고, 질서 있는 것을 혼란하게 변화시켰으며, 공화를 독재로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약탈하고 재물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지주와 부농(富農)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죽일 것을 주장했다. 적지 않은 농민들은 이처럼 강제로 빼앗는 것을 수긍할 수 없어서 낮에 가져갔다가 밤이 되면 다시 지주 집에 되돌려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이 공산당 공작대에게 발각되면 계급적 각성이 높지 못하다며 욕을 먹어야 했다. 백모녀(白毛女)는 원래 선녀(仙女)로 압박이나 피착취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공산당 문예창작팀에서 이를 연극, 오페라, 발레로 편집하여 계급적인 증오심을 선동하는데 이용하였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공산당은 항일하지 않으면서도 국민당 정부가 매국하고 항일하지 않는다고 공격했으며, 심지어 나라가 난리를 겪는 중에도 사람들을 선동해 국민당정부를 반대하였다. 한 부류 사람들의 증오심을 선동하여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공산당의 고전적인 수법이다. ‘95% : 5%’라는 계급 분별 공식은 이로부터 온 것이다. 공산당은 후에 일련의 정치운동에서 이 수법을 충분히 운용하고 끊임없이 발전시켜 왔다. 만약 95% 내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면 안전하고 무사하지만 5%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면 투쟁대상인 적(敵)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95% 에 들어가기 위하여 대다수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자신을 보호할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본심을 어기고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사회적인 기풍으로 되어버렸다. (4) 네 번째 기본 인자:불량(틵)-불한당들이 무리를 조성 불량(틵)은 사악의 기초이고 사악하려면 불량(틵)해야 한다. 공산혁명에서는 항상 불량배들이 봉기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공산당의 경전(經典)과도 같은 ‘파리 코뮌’에서는 순전히 사회의 불량배와 난봉꾼들이 살인 방화하고, 때리고, 짓부수고, 약탈하였다. 마르크스 마저도 룸펜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깔보았다. 그는 『공산당선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룸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낡은 사회 최하층의 소극적이며 부패한 부분이다. 그들은 일부 지역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운동 속에 휘말려 들어간다. 그러나 그들의 전반 생활양상은 사람들에게 매수되어, 반동 행위를 더 원한다.” 마르크스 엥겔스는 농민의 천성적인 분산(分散)성과 우매(愚昧)성은 심지어 계급으로 불릴 자격도 없다고 여겼다. 중국 공산당은 사악한 방면에서 마르크스의 것을 발전시켰는데, 마오쩌둥은 “깡패 불량배(Hoodlums and Social Scum)들은 항상 사회적으로 기피하는 무리들이지만 사실 농촌 혁명에서는 가장 용감하고 가장 철저하며 가장 단호한 자들이다.[마오쩌둥의 “후난농민운동시찰보고' (1927년 3월) 에서]”라고 하였다.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은 중국 공산당의 폭력을 강화하였고 초기 농촌 소비에트 정권을 건립하였다. 공산당의 언어 계통에 의해 정면적인 의미를 부여받은 ‘혁명(革命)’이라는 이 단어는 실은 모든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공포와 재난인 바, 바로 ‘생명(命)’을 빼앗기 위해 온 것이다. 문화대혁명 당시에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토론할 때 공산당은 자신이 ‘룸펜’으로 불리는 것이 싫어서 그냥 ‘프롤레타리아’로 줄여 썼다. 불량의 다른 한 가지 표현은, 무뢰한 것으로 독재시기에 악질 토호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친애하는 선생님들, 당신들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렇습니다. 중국 인민들이 몇 십 년 동안 쌓아온 일체 경험은 모두 우리에게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실행하거나 혹은 인민민주독재를 실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5) 다섯 번째 기본 인자:이간『間』-침투, 이간, 와해, 대체 기만하고 선동하며 불량을 동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공산당은 이간질 시키는 것도 사용한다. 중국 공산당은 침투 기술이 뛰어나다. 지하 공작의 ‘전(前) 3걸(傑)’인 첸좡페이(錢壯飛), 리커눙(李克農), 후베이펑(胡北風), 그들의 실제 지도자는 중공 중앙 특무 2과 과장인 천겅(陳쨨)이다. 첸좡페이는 국민당 중앙조사과 주임 쉬언쩡(徐於曾)의 기밀담당 비서이자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중화민국 정부군이 1차, 2차로 장시(江西)를 포위한 방법과 정보는 첸좡페이가 국민당 중앙조직부의 편지를 이용하여 리커눙을 통해 직접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손에 넘겨주었다. 1930년 4월, 겉으로는 첸좡페이가 지도했지만 사실상 천겅이 배후에서 지도하였고, 국민당 중앙조사과의 서류와 비용으로, 겉으로는 국민당에 속하지만 실제로는 공산당에 속하는 이중스파이 조직을 동북(東北)지역에 건립하였다. 리커눙은 또한 일찍이 중화민국 육해공군 총사령부에 들어가 전보(電報)번역을 맡아, 중국 공산당 보밀국(保密局)의 책임자 구순장(顧順章)이 체포되어 배신했다는 급전을 첸좡페이를 통하여 저우언라이에게 보냄으로써 공산당 스파이 조직이 일망타진될 위기를 모면하도록 하였다. 친공(親共) 인물인 양덩잉(楊登촁)은 국민당 중앙조사과 상하이 특파원을 역임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이 믿을 수 없다고 여기는 당원에 대하여 양덩잉을 시켜 체포, 처단하게 하였다. 허난(河南)의 한 노간부는 공산당 어느 간부에게 실수했다는 이유로 공산당 측 사람이 고자질하여 국민당 감옥에 보내져 몇 년 동안 투옥된 적도 있었다. 해방전쟁 기간에 중국 공산당 정보 전선은 직접 장제스(蔣介石)의 신변과 국방부 작전 차장에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국민당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대권을 장악한 류페이중(劉裴中)이 바로 중공 지하당원이었다. 정부군의 움직임을 국민당 군대마저도 아직 모를 때 공산당 본거지인 옌안에서는 이미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아울러 그에 대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후쭝난(胡宗南)의 기밀담당 비서이자 분신과도 같은 숑샹후이(熊向輝)는 후쭝난의 대군이 옌안을 진공한다는 계획을 저우언라이에게 통보하였다. 때문에 후쭝난이 옌안을 칠 때 얻은 것은 빈 성뿐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전에 이렇게 말했다. “장제스의 작전명령이 군단장에게 하달되기도 전에 마오 주석은 이미 알아차렸다.”라고 (6) 여섯 번째 기본 인자:강탈(搶)-교묘하고 난폭한 강탈이 새로운 질서로 중국 공산당이 홍군(紅軍)을 모아 무장 할거하고 무기를 마련하며, 군인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는 모두 돈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돈을 마련하는’ 것이 홍군의 큰 임무가 되었다. 그러나 ‘돈을 마련’하는 형식은 토호를 공격하고 돈을 빼앗는 것으로 토비(土匪)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예를 들어 리센녠(李先念)의 홍군은 어시(鄂西)일대에서 성안의 부잣집 가족을 납치하였다. 한 사람만 납치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중의 부유한 가정마다 한 사람씩 납치하는 데 ‘산 채로 납치’하도록 했다. 즉, ‘산 채로 납치하고’ ‘인질을 죽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인질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어야 인질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홍군을 먹여 살릴 돈을 바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홍군을 배부르게 먹이거나 혹은 집이 망하거나 혹은 가족이 죽어 더 이상 짜낼 기름이 없을 때에야 비로소 인질을 석방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인질로 잡혀 있던 도중에 놀라거나 괴롭힘을 당해 사망하기도 하였다. ‘토호를 공격하여 전답을 나누는 것’과 교묘하게 강탈하는 것이 사회로 확장되어 급기야 전통을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로 되었다. 공산당은 크고 작은 온갖 죄악은 다 저지르면서도 선행은 조금도 베풀지 않았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 작은 은혜를 베푼 경우도 있으나 그 목적은 그들을 끌어내어 다른 사람들과 싸우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을 쌓고 덕을 중히 여기는 것(積善重德)은 무너지고 오로지 살인만 할 줄 알면 되었다. ‘공산주의 유토피아(共産大同)’란 사실상 폭력적인 강탈로 간주되었다. (7) 일곱 번째 기본 인자:투쟁(鬪)-전통 종법질서와 국가제도를 파괴 기만하고, 선동하며, 불량배를 동원하고, 이간질하는 것은 모두 약탈하고 투쟁하기 위한 것이다. 공산당의 철학은 투쟁철학이다. 공산혁명은 결코 비조직적으로 때리고 부수고 빼앗는 것이 아니다. 당은 “농민의 주요 공격 목표는 토호와 악덕 지주, 불법 지주 및 각종 종법(宗法) 사상과 제도, 성안의 탐관오리와 농촌의 악랄한 습관들이다.[마오쩌둥의 “후난농민운동시찰보고' (1927년 3월) 에서]”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농촌의 전통제도와 습관을 타파해야 한다고 명백히 지목한 것이다. 공산당의 투쟁은 또 무력과 무장투쟁을 포함한다. “혁명은 손님을 청하여 밥을 먹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짓는 것이 아니며 그림을 그리고 꽃을 수놓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품위가 있을 수 없고, 그렇게 차분하고 예의 있으며, 그렇게 온화하고 공손하게 양보할 수 없다. 혁명은 폭동이고 한 계급이 다른 한 계급을 뒤엎는 폭력행동이다.[마오쩌둥의 “후난농민운동시찰보고' (1927년 3월) 에서]” 이와 같이 공산당은 정권을 빼앗기 위해 투쟁해야 했고 몇 년 후 문화대혁명 중에 똑같은 투쟁유전자(인자)가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데 또 사용되었다. (8) 여덟 번째 기본 인자 : 소멸(滅)-완전한 집단학살이론 체계 창조 공산당이 한 수많은 일들은 모두 아주 잔혹했다. 지식인들에게 유토피아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서 그들을 ‘우파(右派)’로 공격했으며 ‘아홉 번째 냄새나는 놈’ 으로 만들어버렸다. 지주와 자본가의 재산에 대한 박탈, 지주와 부농계급에 대한 소멸, 농촌 질서에 대한 훼멸, 지방정권에 대한 약탈, 부자들에 대한 납치와 갈취, 전쟁포로의 사상과 영혼에 대한 세뇌, 상공업에 종사하는 자본가계급에 대한 개조, 국민당에 대한 침투와 와해, 코민테른에 대한 분열과 배신, 건국 후 역대 정치운동에 대한 청산, 당내의 고압적인 정치에 대해 한 일들이 하나같이 아주 잔혹했다. 이 일체는 모두 공산당 집단학살이론의 기초 위에 건립되었고 역대 운동은 모두 테러리즘의 집단학살운동이었다. 공산당은 초기부터 완벽한 집단학살이론 체계를 창조하고 끊임없이 완성해 나갔다. 이것은 공산당의 계급론, 혁명론, 투쟁론, 폭력론, 독재론, 운동론, 정당(政黨)론 등등으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다 각종 각양의 집단학살 경험과 실천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최대 특징인 집단학살은 사상과 인성(人性), 양심의 말살로서, 이는 그 집단의 근본이익에 부합하는 공포적인 통치방법이다. 당신이 공산당을 반대하면 그것은 당신을 소멸시키고 당신이 공산당을 옹호해도 그것은 역시 당신을 소멸시킬 수 있다. 공산당이 소멸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기면 곧 소멸시키는데 매 사람마다 모두 위기감을 느끼게 하고 모두 공산당을 두려워하도록 하였다. (9) 아홉 번째 기본 인자:통제─당성(黨性)으로 전 당을 통제하고 다시 전체 인민과 사회를 교화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기본 인자는 모두 동일한 하나의 목적을 위한 것인데 바로 테러형의 고압적인 통제이다. 공산당의 사악함은 그것이 모든 사회 세력의 적(敵)이 되게 하였다. 창립한 그 날부터, 공산당은 잇달아 발생한 위기 속에서 몸부림쳤는데 그것의 최대 위기는 바로 생존위기였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바로 공포였고 영원한 위기감이었다. 위기 속의 공포는 공산당의 최고 이익, 바로 당의 집단 존재와 권력을 간고(艱苦)하게 유지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공산당은 어쩔 수 없이 늘 표면적인 갱신으로 자신의 부족한 힘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의 이익은 개별 당원의 이익이 아니고 또한 모든 개체 이익의 총합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산당 집단의 이익으로 개인의 일체보다 높다. ‘당성(黨性)’은 공산당이라는 이 사악한 영(靈)의 가장 두려운 본질 중 하나로, 무한히 확장하여 인성을 집어삼켜 버리며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변화시키는 강제능력을 구비하고 있다. 저우언라이와 쑨빙원(孫丙文)은 동지였다. 쑨빙원이 죽은 후 그의 딸 쑨웨이스(孫維世)는 저우언라이의 수양딸이 되었다. 문화대혁명 중에 쑨웨이스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쑨웨이스의 가족은 그녀가 죽은 후 그녀의 머리에 긴 못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체포장에 서명하고 동의한 사람은 바로 저우언라이였다. 중국 공산당의 초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런비스(任弼時)는 항일전쟁 시기에 아편전문가였다. 아편은 열강이 중국을 침략한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반(反)민족주의라는 거대한 비난을 무릅쓰고 넓은 면적에 아편을 심기 위해서는 확실히 당성을 필요로 하였다. 이 문제가 극히 민감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비누’를 ‘아편’이란 말의 대용으로 사용하고 국경 밖으로 송출하여 비용을 충당했다. 중국 공산당의 새로운 지도자는 런비스 탄생 백주년을 맞아 한 연설에서 “그는 고상한 품격을 지닌 모범적인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신념을 단호히 하고 당에 대한 사업에 무한히 충성하였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당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 다른 당성 모범인 장쓰더(張思德)를 보자. 중국 공산당은 그가 벽돌 굽는 가마가 무너지면서 희생되었다고 하지만 민간에서는 그가 아편을 굽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가 묵묵히 중앙 경위단(警衛團) 사병으로 있으면서 승진을 구하지 않자 중공은 그의 죽음이 “태산보다 무겁다”며 포상을 하였다. 그와, 후에 또 다른 전형적인 당성모범이자 ‘혁명기계의 영원히 녹슬지 않는 나사못’으로 이름 높은 레이펑(雷峰)은 오랫동안 전 중국인들을 교육시키는데 사용되었고 그들처럼 당에 충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마오쩌둥은 “모범의 힘은 무궁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산당의 무수한 영웅모범인물은 모두 이렇게 당의 강철같은 의지와 당성 원칙을 강화시키는 모델이 되었다. 정권을 탈취한 후에 공산당은 사상통제 유전인자를 더욱 광대하게 발양시켰다. 공산당은 성공적으로 몇 세대에 달하는 당의 ‘도구’와 ‘나사못’을 만들어 냈다. 당성(黨性)은 일관적인 사유방식과 똑같은 행위방식으로 강화되었으며 전 중국과 전체 인민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당성 행동방식은 국가라는 명분을 이용했고, 당성 사유방식은 전 인민들의 자아를 세뇌시켜 사악의 매커니즘에 복종하고 협조하도록 만들었다. 중국 공산당의 부끄러운 과거사 중국 공산당은 자신의 역사를 “승리(勝利)로부터 끊임없이 다른 승리로 걸어 간” 휘황한 역사라고 한다. 중국 공산당이 이렇게 자신을 미화(美化)시키는 이유는 공산당 정권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사실 공산당의 과거사는 조금도 명예롭지 못했다. 그들은 사악, 기만, 선동, 투쟁, 강탈, 불량, 이간, 소멸, 통제라는 이 9대 기본 인자에 의거해서만 비로소 최종적인 정권을 탈취할 수 있었다.
도대체 역사의 어떤 힘이 공산당을 선택했는가? 왜 다른 것을 선택하지 않고 중국 공산당을 선택했는가? 우리는 세계에는 두 가지 세력, 두 가지 선택이 존재함을 모두 알고 있다. 하나는 낡은 것, 사악한 세력이고 그것은 악하고 부정적인 것을 선택한다. 다른 하나는 바르고 좋은 세력으로, 좋은 것, 선한 것을 선택한다. 공산당은 바로 낡은 세력의 선택이다. 공산당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 동서고금의 모든 사악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사악의 집중(集中)이자 대표(代表)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것은 사람들의 선량함을 이용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오늘날의 세력을 만들어 왔다. |
그들은 사악, 기만, 선동, 투쟁, 강탈, 불량, 이간, 소멸, 통제라는 9대 인자에 의거해 정권을 탈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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