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대표는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敗亡(패망)한 후 재건과정에서 나치세력을 일소하고 공산당을 不法化(불법화)했다. 세계 공산주의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이 집권하고, 1970년대에는 빌리 브란트 수상이 東方政策(동방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동방정책은 金大中의 햇볕정책의 모델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두 정책의 차이점으로 첫째, 서독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서독은 동독과 단 한 번도 정상회담을 하지 않았고 철저히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추진했다. 그러나 金大中(김대중)과 盧武鉉(노무현)은 우리 헌법에서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북한과 정상회담을 해, 헌법을 파괴하며 햇볕정책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 서독은 1972년 브란트 연방총리와 각 주의 총리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공산주의와 나치 협력자들이 공무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는 동독과의 본격적인 대화와 교류에 앞서 내부 단속을 철저히 하는 의미로, 對北경각심 허물기를 먼저 한 햇볕정책과 차이를 보인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金大中·盧武鉉 정부의 무조건적인 퍼주기와는 달리 서독은 공짜 지원은 하지 않고 철저히 대가를 받아냈다고 했다.
趙대표는 폴란드에 선거로 민주정권이 들어선 것이 공산권이 무너지는 雷管(뇌관)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2세 교황이 국제적으로 폴란드의 자유노조를 지원했고, 폴란드 공산당은 민주화 시위 진압을 포기했다. 공산권에서 시위를 진압하지 못하면 공산당의 통치가 끝나는 것이다”고 이야기했다.
“헝가리는 1989년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해 동독 주민들이 서독에 입국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동독 내에서 소요가 시작되었습니다. 1989년 라이프치히에서 시작해 수십만의 동독 국민들이 민주화 시위를 시작했고 동독의 비밀경찰은 진압을 포기했습니다. 당시 동독에는 50만의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고르바초프는 절대 개입하지 말라며 방관했습니다. 동구권 공산국가는 소련 군대의 힘에 의해 유지되었기 때문에, 동독의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는 사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9년 11월9일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의 자유를 무제한 허용한다’는 誤報(오보)가 TV로 방송되었고, 이를 본 수십만의 동독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趙대표는 “독일 통일의 결정적인 요인은 동독 내부의 변화에 있었다. 공산당은 ‘국가 영토항목’을 헌법에서 삭제했다. ‘서독의 기본법 체제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통일한다’고 공약한 보수당이 동독 주민 80%의 지지를 받아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 ‘民族自決主義(민족자결주의)’로서 독일통일이 이루어졌고 남북통일도 이에 근거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통일의 교훈은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이룩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독일통일은 서독의 헌법인 기본법 체제 하에서 동독의 5개 州(주)가 독일연방공화국에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흡수통일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헌법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남북통일과정에서 헌법 개정이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베트남은 통일과정에서 300만 명이 죽었고, 예멘은 연방제 통일 후 내전을 겪은 뒤 다시 통일했습니다. 반면 독일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통일했습니다. 세계 외교사상 가장 성공적인 통일입니다. 남북통일은 독일통일을 모델로 삼아야 합니다.”
그는 “1990년대 이후 좌파들은 ‘독일식 통일은 비용이 많이 들고, 통일 후 독일경제는 엉망이 되었다. 절대로 독일통일의 모델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왔다. 이런 주장을 가장 많이 한 것이 바로 金大中씨다. 독일은 통일 후 경제침체를 겪기는 했지만 경제가 엉망이 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현재 독일은 경제 부분에서 세계 3위를 차지한 나라이다. 좌파는 가장 성공한 통일을 가장 실패한 통일이라 말하고 있다. 좌파가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은 결국 분단 고착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서독은 戰後(전후) 민주주의를 착실히 발전시켰고, 나치 시절의 과오를 솔직하게 시인했습니다. 또한 외국에 援助(원조)를 많이 해 인심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통일의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결정적 시기에 주변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는 국가가 평소에 쌓아온 民心(민심)에 달려있습니다. 과연 한국은 그렇게 하고 있는지 自問(자문)해 봐야 할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