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모-'在日북한공작원'이 ' 민주인사'로

정부가 사업예산을 지원하는 민주화 운동 기념사업회가 소위 해외민주인사 초청 행사의 초청자 명단을 50명 발표한 적이 있다. 宋斗律씨 부부 이외에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다.

[정경모, 부인]이라고 적혀 있는 인물이다. 이 기념사업회가 작성한 소개서엔 이렇게 되어 있다.

[1970년 박정희 군사독재에 반대하여 일본으로 망명, 반체제 인사로 입국 불허. 1973년 일본의 세카이(世界)에 시사평론가로 글을 싣기 시작한 이후 일본에서 한국 시사평론가, 문필가로 활동. '씨알 어학숙' 설립운영, '씨알의 힘' 잡지 발행 시작. 1980년대 5월광주항쟁 당시 성명서 발표 및 시위전개, 한통련 활동에 참여. 1989년 늦봄 문익환 목사와 방북 4.2공동선언 발표에 참여함]

위의 내용을 검증한다. 1970년 朴正熙 정부는 군사독재 정부가 아니었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민선 정부였다. 1972년 유신 이후의 박정희 정권을 독재정권으로 규정할 수는 있으나 1970년은 아니다.

그가 글을 기고했다는 世界는 친북좌파 잡지이다. 이 잡지의 편집장 야스에란 인물은 김일성을 몇 번 인터뷰했다. 그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면 야스에의 시각은 언론인이 아니라 김일성의 대변인임을 알 수 있다. 世界는 또 朴正熙 정권의 인권탄압만 공격하고 북한정권의 인권탄압엔 침묵했다. 정경모씨는 친북좌파 매체에 자주 글을 썼다는 이야기이다.

그가 1980년대 한통련 활동에 참여했다고 하는 점이 중요하다. 한통련은 재일한국민족통일운동연합의 약칭이다. 그 前身은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이다. 이 단체는 북한정권의 공작으로 만들어진 단체로서 우리 대법원은 反국가단체로 판시했고 지금도 유효하다. 한민통이 추대한 초대 의장은 金大中씨였다. 김대중씨가 1980년에 군사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반국가단체의 수괴였다는 점이다. 이 재판은 재심에 의하여 거의 무효가 되었지만 김대중씨는 재심을 신청하지 않아 그 부분은 유효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1980년에 駐日한국대사관이 작성한 한민통 관련 보고서에 정경모 부분이 나온다.

[정경모(민족시보 주필). 1973년초경 통혁당연대위 위원장 박덕만 소개로 배동호와 접촉. 1973년말경 조총련을 통해 김일성으로부터 민족시보의 문필에 대해 찬양을 받음. 1973년7월13일 김대중으로부터 민족시보 주필을 맡아달라는 권유를 받고 수락. 민족시보 주필로서 각종 反韓 기사 및 북괴 찬양 기사 수시 게재]

1989년 文益煥씨가 밀입북하여 김일성과 만난 사건을 위의 자료는 마치 민주화 운동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가 발표한 수사결과의 핵심은 이러했다.

[이 사건은 북한의 치밀한 사전계획 아래 추진돼 온 정치공작으로서 북한의 재일 정치공작원인 鄭敬謨씨(당시 65. '씨알의 힘' 발행인)가 劉元琥씨(59)를 연락 공작원으로 하여 꾸민 對南 선전선동 전술의 일환이다]

이런 정경모씨를 민주인사로 분류한 근거를 알 수 없다. 친공인사로 분류함이 마땅하다. 노태우 정부 시절 한국의 국가정보기관이 북한의 공작원이라고 본 사람을 노무현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정부계열의 민간기관은 민주인사라고 주장한다. 그 사이에 혁명이 일어난 것인가, 반란이 일어난 것인가.

정경모씨는 입국 전 일본서 이뤄진 조사과정에 불만을 품고 입국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한국에선 거대한 음모가 이뤄지고 있으며 여기에 노무현 지지세력, 노무현 정권, 노무현 외곽세력이 직간접으로 간여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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