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란 기사가 나간 이후 19년 만에 재심 선고가 이뤄진다.
1967년에 북한을 탈출, 귀순하였다가 1969년에 한국을 탈출, 홍콩으로 피신했던 李穗根씨. 사이공에서 잡혀와 위장귀순한 간첩으로 기소되어 사형판결을 받자마자 처형된 李穗根씨의 조카 裵慶玉(배경옥)씨에 대한 재심 결정이 내려진 것이 작년 11월. 오는 12월19일에 서울고법은 선고를 한다. 裵씨는 李씨가 여권을 위조할 때 도와주었다고 하여 간첩의 공범으로 기소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징역 20년형을 살고 난 후 출소하여 줄곧 무고함을 호소해왔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작년에 이수근은 위장귀순을 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귀순했으나 정보부가 李씨를 괴롭히는 바람에 제3국에 가서 살려고 탈출한 것이며 김형욱 정보부장이 이 사건을 위장귀순으로 조작한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었다. 이에 따라 裵慶玉씨는 재심을 신청했고 작년 11월 서울고등법원은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확정된 사건에 대하여, 더구나 사형이 집행된 사건에 대하여 법원이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리는 예는 극히 드물다. 확정된 사건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 증인이나 증언 증거가 발견되었을 때라든지 사건이 고문 등에 의하여 조작되었다는 확정적 증거가 나타날 때만 재심을 한다. 기자가 1989년 3월호에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추적 기사를 쓴 것이 이 사건의 진실을 다시 밝히는 시작이 되었다. 법원의 선고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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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울 고 등 법 원
제 6 형 사 부
결 정
사 건 2005재노20 가. 국가보안법위반
나. 반공법위반
다. 공문서위조
라. 위조공문서행사
피 고 인 배경옥 (380811-1★★19210)
주거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165 목련아파트 104- 본적 서울 종로구 장사동 122
재심청구인 피고인
검 사 최진규
변 호 인 법무법인 동호합동법률사무소
담당변호사 이진우
재심대상판결 서울고등법원 1969. 10. 7. 선고 69노451 판결 중 피고인 부분
주 문
재심대상판결에 대하여 재심을 개시한다.
이 유
1. 재심대상판결의 확정
각 판결문 등본의 기재에 의하면 다음의 사실이 인정된다.
가. 재심대상판결의 범죄사실의 요지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에 재직하고 있던 이수근은 1967. 3. 22. 북한 노동당 남조선국장 이효순의 지령에 따라 판문점을 통하여 위장귀순한 후 대한민국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1969. 1. 27.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지령을 받기 위하여 대한민국을 탈출한 사람이고, 피고인은 이수근의 처조카인바,
피고인은, 북한은 대한민국을 전복하여 적화통일을 목적으로 불법 조직된 반국가단체로서 항시 국가기밀탐지, 시설파괴, 양민살상 등 목적수행을 위하여 간첩 또는 공작원을 남파함은 물론 허위선전으로 동조세력 규합, 민심교란, 용공사상의 부식 등에 광분하고 있어 북한 노선을 지지하여 그 허위선전에 동조 또는 그 구성원과 화합하거나 금품을 수수하고 반국가활동에 종사하면 북한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 1968. 5. 3. 경 이수근으로부터, 피고인이 베트남에 가는 도중 홍콩에서 모스크바 경유 북한으로 발송하는 암호연락문을 소련 외무성이나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앞으로 우송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서, 당시 위 암호연락문에는 이수근이 위장귀순한 후 대한민국에서 수집한 정보자료를 제공할 목적으로 접선 공작원 남파를 요청함과 동시에 그 동안 수집탐지한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내용이 들어 있음을 알면서도 이를 수락한 다음, 이수근의 지시대로 위 암호연락문을 성경책에 은닉하고서 1968. 5. 5. 17:00경 비행기편으로 홍콩으로 출국한 후 수신처를 이수근의 지시대로 소련 외무성 또는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으로 하게 되면 당국의 의심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하고 성경책이 한글판이라 모스크바 주재 신부 앞으로 발송하여도 북한대사관에 전달되리라고 판단한 나머지 수신인을 ‘소련 모스크바 중앙천주교회 신부’로 하여 위 암호연락문을 국제소포로 발송하고, 그 무렵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을 경유하여 북한으로 이를 우송전달되게 함으로써 반국가 단체 구성원인 이수근이 북한지령사항 수행을 위하여 국가기밀을 수집탐지한 것을 누설하고 있다는 정을 알면서도 위 암호연락문을 발송하여 간첩인 이수근의 국가기밀 누설행위를 방조하고,
(2) 1968. 7. 17. 베트남에서 귀국한 후 1968. 7 말경 이수근과 회합하여 위 암호연락문발송경위를 보고하고, 1968. 8 중순 이수근과 회합한 자리에서 동인으로부터 “이북에서 이렇게 와 있지만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묶여있다. 당국의 감시가 심하여 자유가 없으니 중립국으로 탈출, 이남의 정치정세를 날조폭로하는 내용의 글을 국제적으로 발표하여 대한민국을 비난 공격하는 한편 북한중앙당에 서신연락하여 북한과 접선하게 되면 북한을 위하여 공작할 수 있다. 그런데 탈출을 위하여 밀선같은 선편을 구할 수 있겠느냐”라는 등 북한의 지령을 받기 위하여 국외로 탈출할 것을 제의받자 밀선은 불가능하나 비행기를 이용하는 여권은 돈만 있으면 발급받을 수 있으니 연구해 보자고 한 후, 그 무렵부터 이수근과 수차례 탈출방법을 논의한 끝에 1968. 12.경 타인 명의의 여권을 위조하여 탈출하기로 하고, 1969. 1. 23.경 미리 오제영 명의로 발급받아 소지하고 있던 여권의 사진첩에 오제영의 사진을 뜯어내고 1969. 1. 25. 그 곳에 이수근의 변장사진을 붙여 여권인 공문서를 위조하고, 1969. 1. 27. 17:00경 위 위조된 여권을 행사하여 김포공항발 시.피.에이(C.P.A) 비행기편으로 이수근과 함께 출국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구성원으로서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여 온 이수근과 공모합동하여 북한 지령에 의해 국가기밀탐지, 국내지하조직체와 비밀통신연락 등 반국가활동을 하고자 북한의 지령을 받기 위하여 대한민국을 탈출하고,
(3) 1968. 12. 초순경 이수근으로부터 “나도 이북방송을 듣고 있는데 앞으로 통일이 되면 필요하니 너도 이북방송을 들어라.”는 요지의 지시를 받고 1969. 1. 25. 및 26. 양일간 각 자정경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소재 약혼녀인 최부전의 집에서 각 약 10분간에 걸쳐 라디오 다이얼을 북한 평양방송 채널에 조정하여 북한 찬양 가곡, 농업생산량보도, 시사문제 해설 등 북한의 선전방송을 청취하여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허위선전활동에 동조하여 이를 이롭게 하고,
(4) 1968. 12. 초순경부터 1968. 12. 말경까지 3차례에 걸쳐 피고인의 집 등에서 반국가단체인 구성원인 이수근으로부터 여권발급 소속비 명목으로 합계 55만 원을 교부받았다.
나. 재심대상판결의 선고 및 확정 내용
피고인은 1969. 3. 22. 위와 같은 범죄사실로 서울형사지방법원 69고11142, 69고11535(병합) 국가보안법위반죄, 반공법위반죄, 공문서위조죄, 위조공문서행사죄로 기소되어 1969. 5. 10. 위 법원에서 그 범죄사실이 모두 유죄로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았고, 1969. 10. 7. 항소심(이 사건 재심대상판결)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그 판결은 상고심(대법원 69도1991)에서 1969. 12. 23. 상고가 기각되어 그대로 확정되었다.
2. 재심청구이유의 요지
가. 재심대상판결은 피고인의 국가보안법위반죄, 반공법위반죄 부분에 대하여 이수근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위장귀순한 자로서 간첩이라는 전제하에 유죄로 인정하였고, 그 판결은 상고심을 거쳐 1969. 12. 23. 확정되었는데, 그 후 이수근이 북한의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이 언론기관 등을 통하여 밝혀졌다. 따라서 이는 피고인에 대하여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이 발견된 것이므로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5호 소정의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나. 또한 피고인은 1969. 1. 31. 베트남에서 체포되어 1969. 2. 1. 중앙정보부로 연행된 후 1969. 2. 11.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영장 없이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고, 그 조사과정에서 수사관들로부터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받았는데,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피고인에 대한 불법구금행위는 형법 제124조 소정의 ‘직권남용 체포, 감금죄’를 구성하고, 고문 등의 가혹행위는 형법 제125조 소정의 ‘독직 폭행, 가혹행위죄’를 구성하여 이는 각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에서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그런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바22 이수근 간첩 조작의혹사건’에서 2006. 12. 19.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 제26조에 따라 ‘진실규명결정’을 하면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피고인에 대한 직권남용감금죄, 독직가혹행위죄가 인정된다고 판단하였는데, 위 위원회의 위와 같은 판단은 형사소송법 제422조 소정의 확정판결에 갈음한 증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결국 재심대상판결에는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소정의 재심청구사유가 있다고 할 것이다.
3. 재심사유에 대한 판단
가. 관련 규정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에는 “원판결, 전심판결 또는 그 판결의 기초된 조사에 관여한 법관, 공소의 제기 또는 그 공소의 기초된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증명된 때”를 재심사유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고, 형사소송법 제422조는 “전 2조의 규정에 의하여 확정판결로써 범죄가 증명됨을 재심청구의 이유로 할 경우에 그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에는 그 사실을 증명하여 재심의 청구를 할 수 있다. 단,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에는 예외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라 함은 유죄판결을 할 수 없는 사실상, 법률상의 장애가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고, “그 사실을 증명하여 재심의 청구를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재심사유가 된 범죄가 있다는 사실의 증명이 있으면 재심의 청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나. 인정사실
피고인이 이 사건 재심사건에서 제출한 증 제1호 내지 증 제30호증, 이 사건 재심대상판결의 증거로 된 피고인, 이수근, 김세준이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각 진술서, 동인들에 대한 중앙정보부에서의 각 피의자신문조서, 공판조서 등의 기재 등에 의하면 다음의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1)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정리위원회’라 한다)의 결정 내용 등
(가)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과정 및 결정 내용
①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행위 등에 의한 인권유린과 폭력, 학살, 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여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국민통합에 기여하기 위하여 2005. 5. 31. 법률 제7542호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되었는데, 위 법에 의하면, 위 법이 정하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과거사정리위원회를 설치하되(제3조) 그 위원은 공인된 전임교수 이상의 직에, 판사·검사·군법무관 또는 변호사의 직에, 3급 이상 공무원으로서 공무원의 직에, 성직자 또는 역사고증·사료편찬 등의 연구활동에 각 10년 이상 종사한 자 중에서 국회가 선출하는 8인, 대통령이 지명하는 4인,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인으로 구성하고(제4조), 직무독립성과 신분을 보장받으며(제8조), 조사 과정에서 자료 등의 제출 요구를 받은 기관 등은 지체 없이 이에 응하여야 하고(제23조 제5항) 출석요구를 받고도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아니한 자에 대하여는 동행 명령장을 발부할 수도 있으며(제24조),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사가 종료되어 진실규명이 된 경우 진실규명 조사결과를 의결로써 결정하며(제26조) 그 활동을 조사보고서로 작성하여 매년 2회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하여야 하며, 그 종합보고서에는 진실규명 사건 피해자, 희생자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국가가 하여야 할 조치사항에 대한 권고를 포함하도록 하고 있다(제32조).
②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피고인이 2005. 12. 2. “국가권력에 의한 고문 등에 의하여 이수근과 피고인이 간첩으로 조작되었으니 진실을 규명해달라”는 취지로 ‘바22’호로 진실규명을 신청하자, 사전조사를 거쳐 2006. 4. 25. 조사개시의결을 하고 그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이수근이 1967. 3. 22. 위장귀순한 후 간첩으로 활동하다가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지령을 받기 위하여 피고인과 공모하여 1969. 1. 27. 대한민국을 탈출하였다는 등의 범죄사실로 이 사건 재심대상판결의 제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항소를 포기하여 1969. 7. 2. 사형이 집행됨), 피고인이 이 사건 재심대상판결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사안에 대하여, ㉮ 이수근의 자백은 가족들의 면회가 금지되고 변호인 접견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장기간 동안 구금된 상태에서 변호인 조력을 받거나 방어권이 제대로 행사되지 못한 상황에서 구타나 강요로 인하여 자백하였을 개연성이 있는 점, ㉯ 중앙정보부 직원들도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라고 진술하고 있으며, 이수근이 간첩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암호명, 난수표 등을 소지하지 않았고, 위 암호연락문도 난수표에 의해 암호화 된 것이 아니며 국가기밀을 담고 있지도 않았으며, 이수근의 운전기사, 중앙정보부의 감찰실 직원들에 의한 동향감시로 독자적인 외부활동이 어려운 상황이어서 국가기밀 탐지행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던 점, ㉰ 중앙정보부는 이수근, 피고인 등을 영장 없이 11일간 불법구금한 채 수사하였으며, 위장귀순을 한 것이 아니라는 취지로 작성된 이수근의 최초 진술서를 수사기록에 편철하지 않은 점, ㉱ 피고인이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중앙정보부 수사관의 구타와 물고문 등의 가혹행위로 인하여 허위자백을 하였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이 사건 재심대상판결의 공동피고인이자 이수근의 조카로서 이수근의 탈출행위를 방조하였다는 범죄사실로 이 사건 재심대상판결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김세준도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중앙정보부 수사관의 구타와 가혹행위로 인하여 허위자백을 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는바, 당시 동인들의 중앙정보부에서의 진술은 자백과 부인의 상반된 진술이 되풀이 된 것에 비추어 동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수사과정에서의 구타, 강요 등이 있었을 개연성이 큰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위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이수근이 귀순하였을 당시 행한 전략신문 결과 위장귀순이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이수근을 중앙정보부의 판단관으로 채용하여 국민승공 계몽사업에 활용하였으나 동인이 중앙정보부의 지나친 감시 및 在北 가족의 안위에 대한 염려 등으로 피고인과 함께 대한민국을 출국하자 당혹한 나머지 이수근을 위장간첩으로 조작, 처형하여 귀순자인 이수근의 생명권이 박탈된 비인도적, 반민주적 인권유린 사건으로 평가된다는 이유로, 2006. 12. 19. 위 법 제26조에 따라 “진실이 규명되었음을 결정한다.”는 내용의 의결을 하였다.
(나)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의 관련자들의 진술내용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① 피고인은, 중앙정보부에서의 수사 당시 남산 소재 중앙정보부 5국 분실이라고 하는 미군 막사인 콘셋 건물에서 고문을 당하였는데, 계속 의자에 묶여있는 상태에서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 잠을 재우지 않은 것을 비롯하여 의자에 묶인 채 고개가 뒤로 젖혀진 다음 얼굴에 수건이 씌워진 후 물을 붓는 식의 물고문을 당하였고, 양손 또는 양발에 전기선을 연결시켜 놓은 채 속칭 228 전화기 손잡이를 돌리는 방법으로 전기고문을 당하였고, 그 외 구타는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지금도 그 휴우증으로 왼쪽 다리는 감각이 없으며, 당시 발로 채인 가슴부위의 갈비뼈가 으스러졌는지 지금도 만져보면 뽀죡한 것이 잡힐 정도라고 진술하였으며, 또한 위와 같은 고문으로 인하여 중앙정보부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검찰에 송치된 후에도 검찰청에서 조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 검사가 서대문구치소로 출장을 나와 소장실 옆에 있는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조사하였고, 조사과정에서 간첩행위를 한 사실이 없다고 하면 검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리고 그 즉시 중앙정보부 수사요원이 들어와 ‘왜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겁을 주고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사는 것 자체가 구차스럽게 느껴져 빨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어 중앙정보부에서 진술한대로 진술할 수 밖에 없었고, 재판과정에서도 중앙정보부 요원이 지켜보고 있는데다 서대문경찰서 직원들이 법정을 둘러싸고 있어서 달리 진술할 상황도 아니었다고 진술하였으며, ② 위 김세준은, 중앙정보부에서 20일간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물고문을 당하지 않았지만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했는데, 마치 갱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여러 명이 삥 둘러서서 한 사람을 축구공 차듯이 이리저리 돌려가며 찼으며, 당시 수사관이 불러주는 대로 진술서를 썼다는 취지로 진술하였고, ③ 베트남 공항에서 이수근 및 피고인을 체포한 사람으로서 당시 주베트남 공사로 근무하였던 이대용은, 체포 당시 이수근은 “김일성의 2.8절 순방시 김일성 뜻에 맞지 않는 보도를 하는 바람에 숙청되게 되었는데 이북에서는 아무리 성분이 좋더라도 숙청은 피할 수 없어 귀순하였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의 감찰실장인 방준모가 1~2주에 한 번씩 감찰실로 불러 ‘이북에 전문을 보냈지’ 하면서 의심을 하고 한 번은 ‘직접 죽여 버리겠다’고 권총을 쏘기까지 하여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 가서 남북한에 관한 책을 쓰려고 한국을 탈출하였다”고 말한 사실이 있으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다”라는 말을 직접 들은 사실이 있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다.
(2) 피고인, 이수근, 김세준 등에 대한 구금과정 및 동인들의 진술 번복 경위 등
㉮ 피고인과 이수근은 1969. 1. 31. 베트남 공항에서 체포되어 1969. 2. 1. 중앙정보부로 압송되었고, 김세준은 1969. 1. 28.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으며, 동인들에 대한 구속영장은 1969. 2. 11. 각 발부되어 피고인과 김세준에 대하여는 1969. 2. 12에, 이수근에 대하여는 1969. 2. 14. 에 각 구속영장의 집행이 이루어졌는데, 중앙정보부로 연행된 후 위 각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동인들은 구속영장 없이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중앙정보부로부터 수사를 받았다. 그 후 동인들은 1969. 3. 22 각 구속기소된 후, 법원으로부터 1969. 3. 25 비 변호인의 접견을 금지하는 내용의 접견금지결정을 받았다.
㉯ 이수근은 중앙정보부에서 1969. 2. 3. 1회 진술서를 작성한 것을 비롯하여 10여 차례 이상 진술서를 작성하고, 10여 회에 걸쳐 피의자신문을 받음에 있어 대체로 범죄 사실을 자백하기는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북한이 아니라 중립국에서 살 것을 염두에 두고 대한민국을 탈출하였다거나(제4회 진술서) 북한의 중앙당 선전부에서는 자신에 대한 숙청을 고려했는데 이를 모르는 문화부에서 판문점 출입기자로 나가 줄 것을 간청하여 숙청을 면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서 귀순한 것이라고 하여 위장귀순이 아니라는 취지로 진술하는(제6회 진술서) 등 범죄사실을 부인하는 취지로 진술하기도 하였는데,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이수근이 중앙정보부에서 수사기록에 편철된 제1회 진술서 작성 이전에 위장귀순이 아니라는 취지로 진술서를 작성하였음에도 그 진술서가 수사기록에 편철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수근은 법정에서도 대부분 범죄사실을 시인하면서도 중앙정보부에서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아서 제3국으로 도피하려고 생각한 것이지 북한에 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는 취지로 진술하였으며, 제1심 법정의 최후진술에서도 “나는 북을 넘어올 때 공산주의를 버렸다”는 취지의 진술을 하였다. 또한 서울구치소 사형수 교화담당 직원이었던 고중열은 언론기관과의 인터뷰에서 이수근이 사형집행을 당하면서 ‘나는 공산주의가 아니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 피고인은 중앙정보부에서 1969. 2. 2. 1회 진술서를 작성한 것을 비롯하여 수차례에 걸쳐 진술서를 작성하고, 2회에 걸쳐 피의자신문을 받았는데, 1회 진술서에는 이수근의 지시에 따라 홍콩에서 모스크바 소재 천주교회 신부 앞으로 보냈다는 위 암호연락문에 대하여 그 내용을 모른 채 이를 홍콩에서 발송하였다고 진술하였다가 2회 진술서 작성시부터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며 진술을 번복한 후 그 나머지 범죄사실에 대하여는 대체로 범죄사실을 자백하면서도 이수근이 위장귀순한 목적은 모른다는 취지로(제1회 피의자신문) 진술하기도 하였다. 그 후 피고인은 1심 법정에서도 대부분 범죄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수근이 귀순한 사람이어서 사상적으로 의심한 사실이 없다거나 자신은 대한민국 탈출 후에 다시 돌아올 생각으로 1969. 1. 23. 최부전과 약혼하였고, 위 암호연락문은 단순히 이수근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로 알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다가, 항소심에서는 범죄사실을 부인하는 항소이유서를 제출하고, 법정에서도 여권위조와 관련된 사항을 제외하고는 전면 부인하였다.
㉱ 김세준은 1969. 1. 28.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후 그 다음날인 1. 29. 진술서를 작성하고, 피의자신문을 받으면서 이수근이 단순히 밀항한 것으로만 알았다고 진술하여 범죄사실을 부인한 후 1969. 2. 1. 피의자신문(2회)을 받으면서도 이수근이 목숨을 걸고 공산주의를 탈출한 것에 비추어 공산세계로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진술하였다가, 1969. 2. 2. 진술서(4회)를 작성하면서 이수근이 위장귀순한 간첩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그 진술을 번복한 후 1969. 2. 4. 피의자신문시(3회)에는 재차 이수근이 위장귀순하였다거나 간첩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그 후 김세준은 1심 법정에서 이수근이 북한의 지령에 의하여 탈출하는 것은 모르고 대한민국에서 배신을 당하여 제3국으로 가는 것으로 알았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항소심에서 범죄사실을 부인하는 항소이유서를 제출한 후, 법정에서도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
다. 판단
위 인정사실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① 이수근은 1969. 1. 31. 베트남 공항에서 이대용으로부터 체포되었을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인 방준모의 지나친 간섭 등을 견디지 못하여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 가서 남북한에 관한 책을 쓰려고 한국을 탈출하였다고 말하였으며, 중앙정보부에서도 최초 진술서를 작성할 때에는 위장귀순이 아니라는 취지로 진술하였는데(위 진술서가 수사기록에 편철되어 있지 아니한 사실은 위에서 본 바와 같다), 그 후 조사를 받음에 있어서는 위 진술과는 상반되게 위장귀순을 하였고, 북한의 지령을 받기 위하여 대한민국을 탈출하였다고 자백한 후 그 후에도 대체로 범죄사실을 시인하면서도 그 자백에 반하는 진술을 하기도 하였고, 특히 1심 법정에서는 중앙정보부에서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아서 제3국으로 도피하려고 생각한 것이지 북한에 가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진술하여 위 이대용 앞에서 진술한 내용과 동일한 취지로 진술을 하였는데, 이수근 등의 자백 진술 외에는 동인이 위장귀순하고 북한의 지령을 받기 위하여 대한민국을 탈출하였음을 직접적으로 인정할 증거가 없어 보이는 이 사건에 있어서, 이수근의 진술 번복 경위 등에 비추어 보면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가혹행위 말고는 이수근이 체포 당시의 진술을 뒤집고 범죄사실을 자백할 만한 사정이 엿보이지 않는 점, ② 피고인은 중앙정보부에서 장기간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음에 있어 대체로 범죄사실을 시인하면서도 그에 반하는 진술을 하기도 하였고, 특히 1심 법정에서는 자백과 모순되는 진술을 하였으며, 1심 판결 선고 이후 전면적으로 그 범죄사실을 부인하였는데, 이수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피고인의 주장처럼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가혹행위 이외에는 피고인이 범죄사실을 자백할 만한 사정을 찾아볼 수 없는 점, ③ 김세준도 중앙정보부에서 장기간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음에 있어 처음에는 범죄사실을 부인하다가 범죄사실을 자백하였는데, 당시 특별히 중요한 증거가 발견되거나 종전 진술을 번복하여 자백할 만한 별다른 사정변화가 없음에도 진술을 번복한 것에 비추어 이는 수사관들의 가혹행위로 인한 것으로 보이는 점, ④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그 조사과정에서 관련자들의 진술 및 여러 정황을 종합하여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피고인, 이수근, 김세준 등에 대하여 가혹행위를 하였을 개연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는데, 그 판단은 직무의 독립성과 신분을 보장받고 있는 위원들에 의하여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서 존중될 필요성이 있는 점, ⑤ 피고인은 이 사건 재심법정에서도 중앙정보부 수사관들로부터 무수한 구타와 물고문, 전기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당하였고 지금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그 진술에 특별히 불합리하다거나 모순되는 사항이 없는 점을 종합하여 보면,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피고인을 영장 없이 불법구금하였고, 그 수사과정에서 피고인에게 구타와 물고문, 전기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하였음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할 것이므로, 이는 재심대상판결의 공소의 기초된 수사에 관여한 수사관이 그 직무에 관하여 형법 제124조 소정의 직권남용감금죄, 제125조 소정의 독직가혹행위죄를 범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피고인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은 것은 1969년이고 그 수사관들의 피고인에 대한 직권남용감금죄의 법정형은 “7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이고, 독직가혹행위죄의 법정형은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이므로 이미 형사소송법 제249조 제1항 제4호에서 정한 5년의 공소시효가 완성되었다고 할 것이어서, 형사소송법 제422조 소정의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수사관들이 피고인에게 고문 등 가혹행위를 함으로써 직무상 범죄를 저질렀음이 증명되었다고 할 것이므로,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에서 정한 재심사유가 있다고 할 것이다.
4. 결론
그렇다면 이 사건 재심청구는 이유 있으므로 형사소송법 제435조 제1항에 의하여 재심대상판결에 대한 재심을 개시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2007. 11. 7.
재판장 판사 서명수
[ 2007-11-16, 10:05 ]
李穗根의 그늘에서 스러져간 人生
*월간조선 기사
1960년대 말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극적으로 탈출, 귀순 영웅으로 환대받았으나 北韓도 南韓도 다 싫다며 제3국으로 탈출을 시도했던 「위장 간첩 사건」의 주인공 李穗根. 그가 刑場의 이슬로 사라진 지도 어느덧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보도가 잇따라 李씨는 이중 간첩의 누명을 어느 정도 벗었다. 덕분에 그의 탈출을 도와준 죄로 간첩으로 몰렸던 李씨의 처조카 裵慶玉씨도 희망을 갖게 됐다. 그는 죽기 전에 再審을 청구하여 「주홍글씨」를 지우겠다고 말한다
徐喆仁 TOP CLASS 기자 (ironin@chosun.com)
21년 만의 귀환
1989년 12월22일. 크리스마스가 사흘 앞으로 다가온 그날 새벽. 견고하고 육중해 보이던 안동교도소의 철제문이 「철커덕」 하며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성의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날은 아직 어두웠고 간간이 눈발이 날렸다. 그때 작고 아담한 체구의 사내 하나가 아직 어둠에 잠겨 있는 교도소 건물에 시선을 한번 준 후 천천히 문을 나섰다.
싸늘한 새벽 공기가 코 끝을 훑고 지나갔다. 교도소 안이나 밖이나 체감 온도는 같았다. 21년 만에 마주한 세상이건만 사내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무기수에서 20년 刑으로 감형되어 나오는 길인데도 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내의 이름은 裵慶玉(배경옥). 출소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21년의 세월이 담겨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고 볼품없는 보따리가 그의 한 손에 들려 있었다.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한쪽 어깨가 심하게 기운 이 사내는 1969년 위장 간첩으로 단정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李穗根(이수근)의 姨姪(이질: 아내의 조카)이었다.
그해 李씨와 함께 체포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해 온 그의 죄목은 제3국으로 탈출하려는 李씨에게 위조여권을 만들어 준 죄였다. 그런 그에게 중앙정보부(이하 中情)는 간첩 혐의를 씌웠고,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인 30, 40代를 어둡고 차가운 교도소에 감금시켰다. 친구들은 물론 아내와 아이들의 소식마저 모르고 지낸 지 20년.
그의 출소를 기다리는 이는 팔순이 다 된 老母와 자신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중병을 얻은 동생들뿐이었다.
『누구든 마중 나오리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남동생이 와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동생 차를 타고 안동을 벗어나 충북 제천쯤 왔을 때 아침식사로 설렁탕을 먹었습니다. 그런데도 출소했다는 실감이 나지 않데요. 사회참관(재소자들을 상대로 교화 차원에서 사회발전상을 시찰하게 하는 교도소內 행사)하러 나온 것 같았습니다』
그가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은 것은 동생 裵慶壽(배경수)의 집에 도착하고 난 후였다. 동생 집은 경기도 하남시에 있었다. 동생은 직업 군인이었으나 형이 간첩으로 낙인 찍히면서 중위로 강제 예편되었다. 당시 서울 충무로에서 조그마한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동생네는 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았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는데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내일은 뭘 할까 생각했어요. 그때서야 내가 교도소를 나왔구나, 사회참관하러 나왔을 때처럼 다시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날 밤 저는 날이 밝는 대로 月刊朝鮮의 趙甲濟(조갑제) 편집장님부터 찾아뵈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趙편집장은 20년 동안 왜곡되어 있던 李穗根 위장간첩 사건의 진실을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1989년 3월호)는 제호의 기사를 통해 처음으로 밝혀 낸 기자였다. 裵씨는 광주교도소에서 이 기사를 처음 접했다. 그때의 심정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후 그 어떤 단체나 언론 기관도 그의 억울한 인생에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있던 그에게 「결국 진실은 누군가에 의해 밝혀지게 되어 있구나」하는 희망이 생겼다.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진술
<―李穗根이 간첩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지요』
―언젠가는 제가 진실을 밝힐 생각입니다. 그는 간첩이 아닙니다>
1986년 趙甲濟 기자와 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 李大鎔(이대용)씨가 나눈 대화다. 다른 취재 건 때문에 만난 자리에서 지나가는 말로 흘린 李이사장의 한마디가 趙甲濟 기자에게는 위장간첩으로만 알고 있던 李穗根 사건의 진실을 뒤집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李大鎔씨는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서 李穗根과 裵慶玉씨를 캄보디아行 비행기에서 끌어내린 사람이다. 당시 李大鎔씨는 주월 한국대사관의 공사 직함(육군 준장)을 가진 中情 월남 책임자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李穗根이 C-54 한국 공군기 편에 실려 김포공항으로 이송되기 전까지 12시간 가까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李씨가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었다. 李大鎔씨는, 李穗根씨가 『북쪽이 싫어 내려왔는데 남쪽에도 자유가 없다. 정보부 方모씨가 나를 일일이 감시하고 수시로 불러서 북쪽과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면서 때리고, 내 발을 향해 권총을 쏴 위협을 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李大鎔 공사가 李穗根에게 들은 이야기는 裵慶玉씨도 전에 들은 이야기였다. 여권을 부탁할 당시 李穗根은 몹시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그런 그에게 裵씨가 여권이 왜 필요하냐고 하자, 그는 『북한도 남한도 다 싫다. 제3국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아울러 方모씨에게 괴로움을 당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노라는 이야기도 했다. 方모씨라면 金炯旭(김형욱) 中情 부장의 측근 간부였다.
더욱 확실한 증언은 대다수의 中情 간부들이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李大鎔씨는 그것을 金炯旭 부장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했다.
『李穗根이 이중 간첩이라고 발표했는데 그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은 李공사가 더 잘 알지 않소. 그렇다고 李穗根을 살려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나와 당신을 포함하여 몇 사람밖에 안 되니 절대로 보안에 부쳐야 합니다』
사건 뒤 李공사가 金炯旭 부장의 은밀한 부름을 받고 가서 들은 이야기였다.
李穗根과 裵慶玉이 간첩이 아니라는 증거와 증언은 이 외에도 많았다. 말도 안 되게 조작된 암호문이 그렇고, 그 암호문을 북한의 金日成에게 전달하기 위해 홍콩의 우체국에서 보냈다는 것 또한 그렇다. 이 암호문은 기자 출신인 李穗根이 썼다고 하기에는 너무 조잡스러웠고, 제3국을 통해 우편으로 金日成에게 전달하려 했다는 발표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암호문은 재판 과정에서 유일한 물증 자료로 채택되었다.
『모든 건 中情에 의해 철저히 조작되었습니다. 그 암호문은 13일간이나 우리를 수사한 중앙정보부의 1차 수사 발표에는 빠져 있고, 그보다 한 달이 더 지나 검찰이 내놓은 공소장에 나타났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도 제가 재판정에서 모든 것을 인정해 버린 것은 죽어도 좋으니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습니다』
裵씨는 中情에서 보낸 시간들만 떠올리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고 한다. 사각의 콘세트 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당한 물고문, 전기고문의 여진이 아직도 뼛속 깊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보다 더 무서웠던 건 불면의 고통이었다. 中情에서 한 달 넘게 조사를 받는 도중 그는 단 한숨도 편하게 자지 못했다. 조사 담당 직원들이 교대로 근무를 서며 그를 잘 수 없도록 고문한 것이다.
가족들에게 나는 가해자다
출소 이튿날 그는 하남에서 서울로 향했다. 옛날에 식구들과 함께 살았던 종암동 집에 가보고 싶어서였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옥들이 즐비했던 동네엔 주소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빌딩숲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도무지 되돌릴 수 없는 20년 세월에 그는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제가 서울에 살았을 때는 강남이라는 곳은 아예 없었어요. 여의도가 막 개발되고 있을 무렵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서울이라고 해도 공기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20년 만에 와 보니까 숨이 막혀서 걸어다닐 수가 없데요. 적응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변하지 않는 거라곤 가족에 대한 그리움뿐이었다. 특히 네 살배기 아들 輝勳(휘훈)이 보고 싶었다. 스물다섯의 청년으로 자랐을 아들의 모습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빠가 어디 나가려고 하면 용케도 알고 대문 밖에 먼저 나와 기다리곤 했던, 똘망똘망한 그 아들이 기억 속에서 표정도 선명하게 웃고 있었다. 파월 기술자로 월남에 가 있느라 사랑도 제대로 주지 못한 아들이었다. 그런데도 아들은 그를 잘 따랐다. 또 말도 없이 훌쩍 떠나버릴까 봐 어디 나간다고만 하면 그렇듯 악착같이 따라붙곤 했던 것이다.
『딸아이는 서대문 구치소에 있을 때 처음 봤어요. 백일이 되었다며 아내가 데려왔더군요. 그리고 두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게 아내가 대전교도소로 마지막 면회를 왔을 때였습니다. 쇠창살 밖으로 본 철없이 뛰어놀던 두 남매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해요』
그때가 4년째 복역 중이던 1973년이었다. 그러니까 그로부터 17년 동안은 아내도 두 아이도 얼굴은커녕 소식조차 모르고 지냈다. 그래도 그는 서운하다거나 원망스럽지 않았다. 자신에게 씌워진 간첩이라는 누명이 벗겨지지 않는 한 아내와 아이들이 어떤 수모를 당하며 지낼지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간첩의 아내, 간첩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당했을 게 뻔하다. 훗날 그는 정보부 직원들이 이사하는 데까지 쫓아다녔다는 사실을 처제에게서 들었다.
『지금도 가족들에게는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나만 아니었으면 아무 일 없이 단란하고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가족들에게 저는 가해자입니다』
출소 후 한동안 그는 가족을 찾았다. 스물다섯과 스물두 살의 청년과 숙녀가 되었을 남매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처가가 있었던 대전까지 수소문해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내인 朴明玉(박명옥)씨와 결혼 후 분명히 혼인신고를 했는데 접수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지 아내와 아이들의 흔적은 호적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허망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평생 멍에가 될 자신의 姓(성)보다는 차라리 미혼모나 계부의 姓을 따르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설사 아내가 재혼을 했다 해도 그는 아이들에 대해 행사할 어떤 권한도 없다고 생각해 왔던 참이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고, 나름대로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고 생각한 그의 인생은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든 것일까. 그것만 생각하면 그는 지금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할 때는 누군가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꽂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자신을 간첩으로 몰아간 中情 간부들 역시 삶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할 때는 그랬다.
돈 잘 벌던 파월 기술자
生의 한낮인 30, 40代를 감방에서 보내고 황혼이 내려앉는 나이 50에야 세상으로 돌아온 裵慶玉씨. 구속 직전까지도 그는 1960~70년대 외화벌이의 효자였던 중장비 기술자였다. 크레인 정비 기술자로 잘 나가던 그가 당시 근무하고 있던 회사는 사이공에 진출해 있는 미국 건설회사 「퍼시픽 아키텍트 엔지니어(PA&E)」였다.
朴明玉씨와 결혼해 아직 신혼이었던 그가 사이공에 간 것은 1966년 봄이었다. 그는 아내의 첫 출산을 目前(목전)에 둔 채 출국했다.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보수는 잔업 수당까지 月 50만원이었다. 그 정도면 미국에서도 영관급 이상이 받는 고액이었다. 당시 서울의 웬만한 집 한 채 값이 100만원이었으니까 그는 두 달이면 집 한 채 값을 버는 셈이었다.
『몇 년만 고생하면 사업 기반을 다질 수 있는 더 없는 기회였어요. 숙식은 장교 숙소에서 모두 해결했기 때문에 별도로 생활비가 들어갈 일도 없고 해서 월급의 대부분을 아내에게 송금했습니다. 몇 년 동안 그렇게 악착같이 모아서 서울에 중장비 정비소를 낼 생각이었지요』
한국에서 가장 큰 중장비 정비소를 운영하고픈 裵씨의 꿈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투자 개념으로 구입해 대리 운영하고 있는 두 대의 덤프 트럭에서 나오는 수입도 만만치 않았다. 한마디로 목표를 이루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적어도 李穗根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가 李穗根을 처음 만난 것은 1968년 4월, 동생의 결혼식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그 봄날 저녁 裵씨네 식구들은 예고 없이 들이닥친 낯선 손님 두 명을 맞았다. 한 사람은 생사조차 알 길 없는 이모의 남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李穗根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들 가족을 찾아 李씨를 집까지 안내해 준 정보부 직원이었다.
李穗根과의 만남
李穗根이라면 월남에서 지낸 裵씨도 잘 알고 있었다. 1년 전, 그러니까 李씨가 판문점을 통해 남한으로 귀순한 직후였던 1967년 3월 그는 파월 미군들이 보는 한 잡지에서 李씨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인 李穗根이 판문점에서 유엔군 측 영국군 대표 벤크러프트 준장의 세단차에 뛰어올라 극적으로 월남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裵씨는 친한 동료와 함께 불과 20초 만에 북한 경비병의 사격망을 뚫고 북한을 탈출했다는 李씨의 얼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건 그저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흥미 위주의 관심일 뿐이었다. 때문에 李씨의 존재는 그의 머릿속에서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로부터 꼭 1년 후 그때 잡지에서 보았던 인물이 자신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裵씨로서는 지극히 非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저 사람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어요. 남북으로 갈린 후 이모의 생사도 모르고 지내왔는데, 느닷없이 얼굴도 성도 모르는 남자가 찾아와 자신이 이모부라고 하면 실감이 나겠어요? 그렇다고 냉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쓸데없이 거짓말할 리도 없으려니와 눈빛이 선해 보였거든요』
늘 막내 동생의 안부를 걱정하던 어머니는 李씨를 붙들고 이모 소식을 접하곤 눈물 바람을 했다. 막내 이모라면 그의 기억 속에도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어린 그의 손을 붙들고 나들이를 하던 이모의 곱디 고운 얼굴이 어슴프레 떠올랐다. 이모는 서울大 사대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내내 서울에서 식구들과 함께 생활했던 그 이모가 홀로 北에 떨어져 지내게 된 것은 학교 졸업 후 교편을 잡고 나서부터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모는 가까운 서울 학교들을 놔두고 자청해서 개성에 있는 학교로 떠났다. 외조모와 외조부는 물론 삼촌들까지 반대하고 나섰는데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南과 北이 갈렸고, 6·25 전쟁으로 왕래하기조차 힘들어지자 이모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이모부라는 사람이 나타났고, 이모가 결혼해서 아이 셋을 낳아 잘 키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가족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처음과 달리 시간이 갈수록 이모부를 미워했어요. 北에 남은 이모와 조카들 걱정 때문이었지요. 저 역시도 나름대로 사정은 있겠지만 가족을 두고 온 이모부가 좀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순 당시 언론에 보도된 李穗根의 북한 탈출 이유는 머지않아 숙청당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보도에 의하면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李씨는 그해 2월8일에 있었던 北韓軍 창립 제19주년 기념행사 취재를 맡은 책임자였다. 그런데 그는 金日成의 연설 내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이 일이 문제가 되어 黨 중앙위원회로부터 조사를 받았고 숙청을 면할 수 없게 되어 탈북했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기사에는 북한 고위급 인사들 사이에서 黨으로부터의 숙청은 죽음보다 더한 형벌로 받아들여진다는 북한전문가의 보충 설명까지 곁들여 있었다.
그렇더라도 남은 가족들이 어떤 고초를 당할지 뻔히 알면서 탈출한 이모부를 裵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한 번 보고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 곧바로 사이공 일터로 귀환했기 때문에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
가방 하나 때문에 달라진 인생
그가 李穗根을 다시 만난 것은 같은 해 여름이었다. 동생 결혼식 때문에 한국에 다녀간 지 몇 달 안 된 그해 8월 그는 트럭 사업 문제로 급히 귀국했다. 트럭 운영권을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믿고 맡겼는데 자꾸 문제가 생겨 해결하러 온 것이다.
『사이공 경기가 좋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트럭 사업을 정리한 후 아는 동생과 함께 사이공에서 식당 사업을 벌여 볼 생각이었습니다. 여권만 분실하지 않았다면 계획대로 되었을 겁니다. 그날 여권만 분실하지 않았으면…』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그날 일을 떠올리면 자꾸 그런 회한이 밀려든다. 그도 그럴 것이 裵씨의 운명은 그날 여권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180도 다른 방향으로 꼬이고 엮였다. 만약 그날 여권을 분실하지 않았다면, 아니 택시에 두고 내린 가방을 누군가 돌려주었더라면 그는 지금쯤 남부럽지 않은 행복을 일구며 단란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들과 함께.
『홍콩에서 온 한 知人을 배웅하기 위해 공항으로 가던 중 택시 안에 가방을 두고 내리는 바람에 잃어버렸어요. 배웅 후 돌아오는 길에 외무과에 들러 만료 기간을 좀 연장하려던 참이었는데…. 분실 직후 방송국과 시경 교통과에 얘기해 택시를 수배했습니다. 가방 안에 값나가는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여권에 분명히 제 주소가 기재되어 있어서 곧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분실한 지 닷새가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8월27일자 동아일보에 분실한 여권을 찾는다는 광고까지 냈지만 여권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재발급 신청을 했다. 그런데 새 여권 역시 쉽게 나오지 않았다. 결국 사이공에서 함께 사업을 해보자고 했던 동생에게 사업 자금과 짐을 먼저 보냈다.
그리고 하루 빨리 여권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 종암동 집으로 놀러온 李穗根을 만났다. 그날 이후 그는 李씨와 서울 근교에 있는 산과 절에 다니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자잘하고 잡다한 일상사여서 쉽게 증발해 버린 듯하다.
李穗根: 『중립국으로 가고 싶다』
이모부와 처조카로서 제법 가까워지고 있던 어느 날 李씨가 『왜 다시 월남으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고, 여행사에 부탁해 놓았기 때문에 곧 여권이 나올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얼마 후 이모부가 미아리 집에 한번 들러 달라고 연락을 했어요. 특별히 바쁜 일도 없고 해서 찾아갔죠. 집에는 식모만 있더군요』
李穗根은 술을 마셨는지 좀 취해 있었다. 그 즈음에는 밖에서도 몇 번 봤는데 만날 때마다 술 냄새를 풍겼고 뭔지 모르지만 굉장히 힘든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北에 두고 온 가족 때문일 거라 짐작했다. 종암동 그의 집에 오면 부인과 아이들에 대한 자랑을 은근히 늘어 놓곤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로 결혼한 부인과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말도 들은 터였다.
『그날 이모부는 저를 앞에 앉혀 놓고 아주 진지하게 물었어요. 여행사에 부탁하면 자신도 여권을 만들 수 있느냐고요. 대답을 하기 전에 저는 왜 여권을 정식으로 만들려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얼굴은 알아보는 이가 많아서 여권을 만들어도 나가기가 힘들다고 하더군요. 아울러 자신은 중립국에 가고 싶고, 그곳에 가서 책을 쓰고 싶노라 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때가 李씨의 수기 「장막을 헤치고」가 출간되자마자 中情의 압력에 의해 회수된 시기라는 걸 그는 나중에야 알았다. 金炯旭 부장의 추천글까지 게재되었을 정도로 中情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출간된 이 책이 판금조치된 것은 남한 체제에 대해 비판한 부분 때문이었다.
이 책이 나올 무렵은 朴正熙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한 3選 개헌이 은밀하게 추진되고 있을 때였다. 게다가 中情에는 그의 천적과도 같은 인사가 하나 있었다. 귀순 당시부터 그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온 方모씨였다. 자유를 찾아온 李씨와 뭐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 사사건건 부닥쳤던 方모씨는 확실히 악연이었다. 오죽했으면 출국 당시 李씨가 金炯旭 부장 앞으로 쓴 편지가 온통 方씨에 대한 불만들로 채워져 있었을까. 단적으로 李씨는 方씨의 감시와 통제, 굴욕적인 언사가 싫어서 남한을 떠난다고 했다 한다.
위조 여권 수속을 돕다
집 앞에 方씨의 감시망이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생활이 통제되었던 李씨에게 자유 때문에 가족까지 포기하고 온 남한은 또 다른 감옥일 뿐이었다. 裵씨는 그런 李씨가 목마른 자유를 찾아 제3국으로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하든 돕고 싶었다.
『이모부는 중립국인 스위스로 가서 자신이 경험한 南韓체제와 北韓체제의 장단점을 글로 쓰고 싶다 하셨어요. 그렇게만 되면 北에 있는 가족도 데려올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제3국에 가서 글을 쓰면 北韓이나 南韓이나 서로 유리한 내용을 담아 달라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들어줄 거라는 거였어요. 위법인 걸 알면서도 이모부가 위조 여권을 습득하도록 도와준 것은 가족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이모부의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홍콩을 경유해 李씨는 스위스로, 그는 월남으로 각자 갈 길을 가기로 하고 출국한 게 1969면 1월27일 오후 5시30분이었다. 李씨의 여권에는 吳濟寧(오제녕)이라는 이름과 가발을 쓰고 콧수염을 단 자신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공항까지 배웅을 나온 그의 막내 여동생 裵仁香씨조차 李씨를 전혀 못 알아볼 정도로 완벽한 변장이었다.
직항로가 없는 관계로 일본과 대만을 거쳐 홍콩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두 사람은 다음 날 전화로 유럽行 비행기 편을 알아보았으나 표가 없었다. 홍콩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불리하다는 걸 알았기에 스위스로 가려던 애초 계획을 수정했다. 중립국인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함께 간 후 그곳에서 헤어지기로 한 것이다.
다음날인 1월29일 오후, 두 사람은 캄보디아로 가기 위해 홍콩 카이탁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탑승하기 위해 개찰구로 향하던 중 한국 영사관 직원들에게 붙잡혀 홍콩 경찰에 넘겨졌다. 이때 李穗根과 영사관 직원 간의 몸싸움으로 李씨의 팔이 탈골되었고 가발과 콧수염이 떨어져 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는 두 사람의 격투 장면을 보지 못했다.
공항에서 소란을 피운 죄로 홍콩 경찰에 연행된 두 사람은 홍콩법을 어긴 건 아니어서 곧 풀려났다. 하지만 얼마 후 사이공을 거쳐 프놈펜으로 가는 비행기에 탔다가 미국 CIA의 지원과 李大鎔 사이공 공사의 지략으로 체포되었다.
『홍콩에서 그런 일이 있은 후 내내 마음이 불안했어요. 점점 더 큰 죄를 짓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사이공에 도착했는데 한국인 두 사람이 올라오더군요. 첫눈에 영사관 직원들이라는 걸 알고 자수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여권을 위조해 준 죄밖에 없었으므로 그것에 대한 처벌만 받으면 된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을 했던 겁니다』
지독한 고문
裵, 李 두 사람은 한국 공군 전용기 편으로 사이공을 출발해 다음날 아침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 길로 남산에 있는 中情으로 이동했다. 이후의 과정은 기억하기도 싫을 만큼 무섭고 끔찍했다.
『물고문, 전기고문 등 별의별 고문을 다 당했습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요. 그래도 가장 견디기 힘든 고문은 잠을 재우지 않는 거였습니다. 잠을 안 자니까 미칠 것 같더군요. 책상 위의 빗금이 꿈틀거리는 뱀처럼 보이더라고요. 사형선고가 내려져도 좋으니 조사가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습니다』
中情 5국 조사실에 머문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분명한 건 中情에서 받은 고문은 그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한 완벽한 조작 과정이었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검찰은 공소장에 裵씨가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고 어렵게 살다 李穗根을 만나 경제적으로 많은 지원을 받은 것으로 기록했다. 돈 때문에 간첩인 李穗根에게 포섭되었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그는 본가가 경기도 여주의 지주 집안이어서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다. 만석지기였던 조부는 마름을 두고 농사를 지었다. 땅이 넓어 마름은 말을 타고 다니며 관리했다. 그의 기억 속에 조부는 자동차를 타고 다녔고, 겨울이면 원산에서 사온 명태가 마당 가득 널려 있곤 했다.
『저는 부족한 것 없이 자랐습니다. 그리고 이모부를 만났을 때는 월남에서 번 돈도 많았고 트럭 사업도 잘 되고 있어서 오히려 제가 썼으면 썼지 손 벌린 적 없어요. 그런데 공소장에는 제가 힘들게 살아서 어렸을 적부터 사회에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그려져 있더군요. 그래서 간첩 李穗根의 주체사상 교육에 쉽게 동화된 것처럼 조작되어 있더라고요』
인간으로서 한계를 느끼게 하는 지독한 고문은 그를 상습적인 여권위조범으로 만들었고, 北의 지령을 받아 공작활동을 한 간첩으로 만들었다. 파월 기술자로 사이공으로 향하던 그의 여정을 순식간에 入北 行路(행로)로 둔갑시킨 것도 中情이었다. 左右 이념이 뭔지도 모르는 그가 지독한 공산주의자로 몰린 것이다.
지옥 같은 고문의 나날 속에서 그는 「사람이 이렇게 해서 미치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 즈음 서울구치소로 옮겨졌고, 그의 가슴에 수인번호 2200번이 붙었다. 꼼짝 없이 모든 죄를 뒤집어쓴 채 마지막 刑을 집행하기 위한 재판 과정에 들어선 것이다.
『저희가 출정하는 날이면 교도소 직원은 물론 관할 경찰관들과 정보부 요원들이 비상근무를 하듯 삼엄하게 경계를 서곤 했어요. 그러고도 심리가 끝나고 나올 때는 법정 뒷문으로 나와 도망치듯 차를 탔습니다. 모든 게 보안 때문이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다 진실이 누설될까 두려워서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외부인과의 접촉 기회를 철저히 차단한 겁니다』
李穗根이 서둘러 처형된 이유
조작된 조서와 증거에 대한 최소한의 의심도 없이 재판은 진행되었다. 그나 李穗根은 모든 걸 포기한 듯 재판에 응했고, 결과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대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런데 李穗根은 항소를 포기, 刑이 확정된 지 두 달도 안 되어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일은 종범인 裵씨와 다른 피고인들의 항소가 서울고법에 계류 중인 가운데 主犯의 사형이 집행되어 사법 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 기록되었다. 무엇 때문에 재판부는 사형 집행을 그토록 서둘렀던 것일까.
『中情의 압력 때문이었을 겁니다. 당시 정보부 직원들은 재판장은 물론 구치소까지 철저히 감시했어요. 그 때문에 변호사도 제대로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모부의 경우 항소를 포기한 게 아니라 아마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거예요』
李穗根은 朴正熙 정권과 中情이 장기 집권을 위해 어떤 계략을 세우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정보 요원들이 소홀한 틈을 타 탈출에 성공하기까지 했다. 때문에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은 金炯旭 부장에게 묻도록 되어 있었다. 金씨는 이 위기를 李穗根에게 이중 간첩 누명을 씌움으로써 오히려 호기로 삼고자 했던 것 같다. 李穗根이 朴正熙 정권의 3選 개헌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홍콩으로 가기 전 조카 김세준씨 손에 쥐어 준 편지 내용에서 드러났다. 그 편지는 李씨가 한 야당 총수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삼양동 고갯마루
『미아역에서 내려 7번 출구로 나오십시오. 거기서 10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오시면 됩니다. 제가 나가면 되는데, 이 누추한 곳에 뭐 볼 게 있다고 부득불 오시겠다는 건지…. 미안합니다』
1989년 출소 직후 잠깐 동안 동생 집에 얹혀 산 것 외에는 내내 홀로 지내왔다는 裵慶玉씨. 최근 분당의 영구 임대 아파트에서 이사한 그의 새 거주지는 서울 삼양동이었다. 그래서일까. 문득 30여 년 전 李穗根 내외가 신접 살림을 차린 바로 그 동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우연치고는 참 묘한 인연이라 생각하며 지하철 4호선을 탔다. 그리고 미아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길 건너편에 신일고등학교 교문이 보였다. 지금의 신일고등학교 자리는 李穗根이 짧게나마 가정을 꾸렸던 곳이다. 李씨는 탈북 1년여 후 中情의 주선으로 우석대학교 물리치료과 李江月(이강월·당시 36세) 교수와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 1주년이 채 되기도 전인 1969년 7월2일 서울구치소 사형장에서 生을 마감했다.
필자가 내린 곳은 삼양동에서 정릉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부근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미리 전화 통화를 했던 터라 裵씨가 종점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방이 비좁은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사는 곳이라 깨끗하지도 않아요. 나중에 흉보지 마십시오』
165cm가 될까 말까 한 키에 왼쪽 어깨가 불균형적으로 기울어 보이는 初老의 사내. 악수를 하기 위해 내민 그의 손이 막노동을 하는 사람의 것인 양 거칠었다. 게다가 손가락 마디에는 큼지막한 혹까지 나 있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관절에 이상이 생겨 그렇다고 했다. 그런 裵씨가 자신의 집이라고 안내한 곳은 5층짜리 다세대 주택 옥상에 자리잡은 옥탑방이었다.
『누추하지만 좀 앉으시지요. 건물 주인이 사무실로 쓰려고 만든 방이어서 바닥이 좀 차가울 겁니다. 보일러 설치가 안 돼 있거든요. 수감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저는 차가운 데 익숙합니다만, 불편하지 않으실지 모르겠어요』
『독방에 있으니 발음이 제대로 안 됐다』
집주인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 월세나마 싸게 구했다는 방은 두 평 남짓한 넓이였다. 화장실은 따로 있었지만 부엌은 없었다. 게다가 여기저기 옷가지며 생활 도구들이 쌓여 있어서 방은 겨우 한 사람 눕고 나면 앉을 데도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바닥에는 밑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아 볼 심산이었던지 야외용 은박 돗자리를 빈 틈 없이 깔아놓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돗자리 때문에 생각보다는 덜 차가웠다. 하지만 밤이 되면 등이 시릴 듯했다. 이렇게 좁고 추운 공간에서 겨울을 어떻게 나느냐고 걱정했더니 그는 웃기만 했다. 집도 없이 길거리에서 지내는 노숙자도 많은데 그만하면 자신한테는 궁궐이라는 것이었다.
『20년 넘게 교도소 생활을 해서 그런지 남들보다는 추위를 덜 타는 편입니다. 처음에 출소해서 동생네 집에서 묵을 때는 방바닥이 너무 더워서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물론 저도 지금은 추운 것보다 따뜻한 게 더 좋습니다. 추우면 몸 여기저기가 더 쑤시고 아프거든요』
오랜 교도소 생활로 단련된 것은 추위 뿐만이 아니다. 하루 종일 아무도 찾지 않는 이 좁은 방에서도 그는 적적함을 모른다. 面壁(면벽) 수도를 하듯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노라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지나간다. 그는 외로움이 뭔지 잊어 버렸을 정도로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독방 생활을 오래한 까닭이다.
『사상범인데도 이상하게 독방 생활을 많이 했어요. 남들 다 나가는 작업 현장에도 못 나가 짧은 운동 시간 외에는 도무지 바깥 바람을 쐴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같은 수형자들과도 접촉할 수 없도록 특별관리되고 있었어요. 독방에 오래 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입에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더군요. 나는 제대로 발음한다고 하는데 실제 소리는 말더듬이처럼 더듬거리거나 웅얼웅얼하는 것으로 들리는 겁니다. 무서웠습니다. 영영 말을 못 하게 될까 봐 혼자서 작은 창을 보며 미친 듯이 중얼거리곤 했어요』
저녁에는 사회과학 서적이든 인문과학 서적이든 가리지 않고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 습관 역시 독방 생활을 하며 몸에 밴 것이다. 자신이 너무 무지해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거라며 자책하듯 읽어대기 시작한 책이 한 트럭 분량은 될 것이라고 한다. 덕분에 마르크스와 레닌이 품었던 생각도 알게 되었다. 도대체 정치가 뭐고 이념이 뭐기에 죄 없는 한 사람의 운명을 이리도 가혹한 生의 궁지로 몰아넣었나 궁금해서 들여다본 책이었다.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裵씨는 두 번이나 대수술을 받았다. 한 번은 탈골된 어깨뼈를 잘라내는 수술이었고, 또 한번은 복부에 자란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이었다. 어깨뼈 수술은 팔을 비틀고 잡아당긴 고문 후유증으로 살을 에이는 듯한 통증을 오랫동안 참고 참다 감행한 것이었다. 의사는 탈골 상태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한 나머지 빠진 어깨뼈 틈으로 살이 들어차 뼈를 잘라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수술로 인해 그의 어깨는 한쪽이 짧은 기형이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은 온통 멍투성이입니다. 골병이 들었지요. 그나마 이렇게 버티고 사는 건 워낙 건강 체질인데다 나름대로 자기 처방을 하며 살아서 그래요』
그는 필자의 요청으로 상의를 벗어젖혔다. 온몸이 뜸자국이었다. 그가 말한 자기 처방이란 뜸 뜨기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스스로 민간요법을 배워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갖가지 통증을 완화시키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가 화가 치밀어 오를 땐 먹을 갈아 한국화를 그린다고 했다.
『그림은 대전에서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후 배웠어요. 종교를 갖듯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아 시작했는데 소질도 있는 것 같고, 나름대로 재미도 있더라고요. 시간도 잘 가고요. 제법 맛을 안 겁니다. 덕분에 전문가들과 겨루어 상도 받았어요』
한국화 그리며 삭혀 온 분노
그는 1985년 전남지역 교정상품 전시회 한국화 부문에서 동상을 받은 데 이어 1988년 광주직할시 미술大展에서 입선하는 영광을 안았다. 누가 봐도 그의 그림 솜씨는 수준급이었고, 지금 당장 전시회를 가져도 좋을 만큼 완성된 작품들이 많았다. 100호가 넘는 대작도 많았고, 병풍용으로 그린 연작도 비좁은 방 안 가득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대부분 산수화였다.
『오랫동안 수감 생활을 해서인지 저는 사람보다 자연이 더 좋아요. 교도소에 있을 때는 겨울 아침 하얀 성에가 내려앉은 창문의 산수화를 넋을 놓고 바라보곤 했습니다』
아침이면 덮고 잔 담요가 입김 때문에 얼어 있을 정도로 추웠다는 감옥에서 붓을 쥐고 산수화 삼매경에 빠지곤 했다는 裵慶玉씨. 그는 출소 후에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팔자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림 그리기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어서였다. 옥중에서 열관리기능사 2급 자격증까지 땄건만 그는 어디에도 취직할 수 없었다. 신원조회를 하면 나오는 「빨간줄」 때문이었다. 출소 직후 신문·방송 매체들이 앞다투어 그의 간첩 누명을 벗기는 기사를 쓰고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법적으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사는 「죄인」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중장비 정비라면 금세 기술을 익힐 수 있을 것 같아 몇 군데 취직할 만한 데를 알아봤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습니다. 나이도 많은데 신원조회에서 걸리니까 다들 부담스러워하더라고요. 오랜 복역 생활로 아는 데도 없고, 한동안 동생이 운영하는 인쇄소 일을 거들었는데 그쪽도 형편이 어려워져서 막노동을 했습니다. 그 일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고요』
막노동판에서도 지치고 나이 든 그를 달갑게 생각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일거리가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다녔다. 더 이상 동생들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건 당시 김포공항에 배웅 나왔던 막내 여동생 仁香씨는 평생 동안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단순히 배웅 나온 걸 가지고 간첩 탈출을 방조한 중죄로 몰아붙여 원래 있던 심장병이 치료 불능의 상태로 악화된 것이다.
『바로 아래 누이 동생은 이혼까지 당했어요. 간첩으로 낙인 찍힌 처가 때문에 아이들 앞길까지 막힐까 봐 매제가 모질게 관계를 끊은 거죠. 제가 수감된 후 저희 집 식구들과 이야기만 나누어도 정보부 요원의 감시를 받았다니 매제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저 같아도 그랬을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대상을 알 수 없는 욕지기와 분노가 수시로 솟구쳐 올랐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고 있노라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씻은 듯이 가셨다. 그렇게 가슴속에 응어리진 恨을 풀어내듯 한 장 한 장 완성한 작품이 40여 점에 이르렀다.
그는 표구는 물론 접지도 안 된 작품들을 수도 없이 보여 주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아들 이야기를 꺼내며 눈물을 흘렸다. 아들 輝勳은 자신을 닮았던지 그림에 소질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輝勳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
가슴에 맺힌 恨 풀고 죽을 터
출소 후 그는 어디론가 숨어 버린 아내와 아이들을 찾았다. 그러나 호적에도 오른 적이 없는 아내와 아이들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정보부 요원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던지 그의 부인 朴明玉씨는 前남편이 아이들을 단념하고 살기를 바랐다.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가 20여 년 만에 나타난다면 아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이 될 거라는 거였다. 그 이야기를 그는 우연히 만난 처제에게서 들었다.
『처제에게서 나 없는 사이 아내와 아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죽 들었습니다. 아내는 여전히 혼자였고, 아이들은 둘 다 아내 호적에 올라 박씨 성을 쓰고 있더군요. 아내는 생활고 때문에 두 아이를 처가에 맡기고 일본에 가서 돈을 벌어오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 아내는 제게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그냥 남남으로 지내자고 했대요. 그게 아이들 장래에도 좋을 거라고요』
인연을 끊고 사는 게 서로에게 좋겠다는 아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을 더 이상 찾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출소 이듬해인 1990년 여름, 느닷없이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리곤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만날 날이 올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아들은 전화를 끊었다. 다섯 살 때 이후 처음 들어본 목소리였다. 장학생으로 혼자서 대학을 마쳤을 뿐만 아니라 총장 추천으로 취업까지 했다니 참 대견한 아들이었다. 아들에게 그가 한 말은 『미안하다』는 말 단 한 마디뿐이었다.
아들은 통화 후 1주일 만에 죽어
그렇게 아쉬운 통화를 한 지 1년쯤 되었을까. 그는 처제에게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아들 輝勳이 1년 전 여름에 친구들과 무주 구천동에 갔다가 익사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사건 이후 아내는 실성하다시피 했다고 했다. 우연이었을까. 죽었다는 날짜를 꼽아 보니 그와 통화한 지 꼭 1주일 후였다.
『제 생각에는 아들이 꼭 자살한 것 같아요. 그 즈음 아들은 결혼 문제로 고민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오래 전부터 사귀어 온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집안에서 반대를 했었나 봐요. 여러 모로 집안 형편이 많이 기운다고 생각했겠죠. 그런데다 없는 것으로 알았던 아버지가 간첩 사건에 휘말려 20년 넘게 옥살이를 하다 이제 막 출소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면 여자 쪽 집안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겠죠. 자격지심인지는 몰라도 저는 아들이 그 일로 자살을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익사한 지점이 沼(소)가 있는 곳이라는데, 왜 하필 그 위험한 곳에서 수영을 했겠어요』
결국 그는 다섯 살 이후의 아들을 끝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냥 다섯 살 때의 모습으로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그날 이후 그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늙고 병든 몸, 죄 없는 자식까지 앞세우고 더 살아서 무엇 하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고도 그는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가 악연이라고 생각한 이승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나는 공산주의자도 간첩도 아니었다」는 진실을 법적으로 밝혀 자신은 물론 식구들의 恨을 푸는 것이다.
『교도소에 있을 때부터 언젠가는 내 손으로 모든 진실을 밝히겠다는 각오로 자료를 준비해 왔습니다. 당시 제가 받았던 공소장은 물론 법무부 장관에게 보낸 탄원서도 가지고 있고, 당시 中情에 의해 조작된 상황을 증언해 줄 분들도 확보된 상태입니다. 그분들이 더 늙기 전에 재심을 청구할 생각이에요』
그는 요즘 가족들 몰래 혼자서 재심 청구 준비를 하고 있다. 가족들이 알면 펄쩍 뛸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들은 그동안 얼마나 시달렸고, 피해 의식이 컸던지 그저 조용히 살기를 바란다. 이미 겪은 고통이니 그냥 묻고 살자는 것이다. 가족들은 괜히 지난 일을 파헤쳤다가 또 다른 덫에 걸리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진실이 법적으로 공인되지 않는 한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가족들의 가슴에 맺힌 恨은 결코 풀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위장귀순' 李穗根 사건 재심 선고 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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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2-16, 1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