奇蹟과 逆轉의 드라마는 계속된다!

한국 현대사는 결국 진실, 正義,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싸움과 건설의 역사였다.
대한민국의 지난 세월을 정리해본다. 한 마디로 奇蹟(기적)과 逆轉(역전)드라마의 역사였다. 한국은 여러 번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벼랑에 섰다. 그때마다 한국인들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통하여 상황을 反轉(반전)시켰다. 위기극복 수준이 아니라 轉禍爲福(전화위복) 차원의 뒤집기였다. 한국은 지금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냉 온탕 오가듯 한다. 이 젊은 稚氣(치기)가 한국 현대사를 전진시킨 力動性(역동성)이었다. 물론 運(운)도 따랐다.

1. 가장 큰 기적은 38선: 아시아에 두 가지 기적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중국이 공산화된 것이 기적이고, 둘째는 한국이 공산화 안 된 것이 기적이란다.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38선이다. 1945년 8월10일 오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한반도에 있는 일본군의 항복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국방부 정책과의 두 장교 딘 러스크(뒤에 국무장관)와 찰스 본스틸(뒤에 주한미군 사령관)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의 한반도 지도에서 가운데를 지나는 38선을 골랐다. 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가 국방부에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도록 선을 그으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육군은 한반도로부터의 멀리 있고, 병력도 부족했다. 따라서 (먼저 한반도에 진입하는 쪽에서 일본군 항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소련이 異義(이의)를 제기할 경우,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파견하기에는 38도선도 사실은 너무 멀리 잡은 것이었다. 소련이 異義(이의)를 제기해서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제때에 보낼 수 있는 거리에다 선을 그어야 했다면, 그 선은 38도선보다도 훨씬 남쪽에 그어졌을 것이다.>

그때 소련군은 북한의 동해안에 상륙하여 破竹之勢(파죽지세)로 南進(남진)하고 있었다. 38선의 북쪽에선 소련군이, 그 남쪽에선 미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자는 미국의 제의를 스탈린이 선뜻 받아들였다. 그가 만약 '소련군이 1주일이면 부산까지 내려갈 수 있다. 한반도내 일본군은 우리가 처리하겠다'고 반대했더라면 미국으로선 달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했더라면 38선은 물론 없었겠지만 우리는 지금 김정일 치하에 살고 있을 것이다. 스탈린은 그때 만주를 점령하고 일본의 북방열도를 차지한 뒤 미국과 함께 일본의 분할 점령에 참여하려는 목적달성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 한반도에서 미국의 제안을 반대하지 않았다. 트루먼의 말대로 당시 미군도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 일을 兩國(양국)이 분담한다는 편의성 이외의 다른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美蘇(미소)가 관심을 딴 데 쏟고 있는 사이에 한반도에 기묘한 균형線이 생긴 셈이다.

2. 李承晩이란 기적: 실용적인 중국이 공산화된 것은 毛澤東(모택동)의 군사적 천재성 때문이고, 관념적인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李承晩(이승만)의 위대한 지도력 덕분이다.

스탈린은 1945년 9월20일 제1극동군 사령관에게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지역에서 우선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의하여 이듬해 북한지역엔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괴뢰정권이 세워져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 체제 수립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토지의 국유화를 통하여 소련은 사유재산을 존중하는 미군정하의 남한과는 전혀 다른 체제를 북한에 세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북분단의 시작이다. 한반도 분단의 의미는 이념과 체제가 달라진 것인데, 북한이 먼저 체제를 달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탈린은 朴憲永(박헌영)과 金日成(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시험문제를 내어 金日成을 북한정권의 지도자로 지명했다. 미군과 소련군 사이의 군사 경계선에 불과했던 38선은 소련군에 의하여 출입금지의 分斷線(분단선)으로 돌변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남북한 통일정부를 세워보려고 애썼다. 李承晩(이승만)은 소련에 의하여 남북 분단이 기정사실화되었으므로 남한에서라도 民主(민주)기지를 구축하여 후일을 기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建國(건국) 노선은 美군정 당국, 좌익, 중도파에 의하여 공격받았으나 세계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내다 본 비전이었다. 1947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이 세계적으로 공산주의 확대 정책을 펴고 있다고 판단하여 對蘇(대소) 포위 정책을 채택한다. 미국과 유엔도 결국 협상에 의한 남북한 통일 정부 수립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李承晩 노선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李承晩은 1948년 3.1절 기념사를 통해서 건국의 당위성을 이렇게 설파했다.

'선거를 통해서 수립된 국회에서 세우는 정부는 통일중앙 독립정부로서 완전무결한 國權(국권)을 세우는 것이니 단독정부란 말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 한 편이 죽어가는 경우에는 살아 있는 편이라도 완전히 살려서 죽는 편을 살리기를 꾀할 것인데, 다른 방책이 없이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면 살아 있는 편까지 마저 죽어버리자는 것으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없는 일이다.'

소련은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이란 유엔 결의까지 거부함으로써 한반도 분단의 책임자가 되었다.

3. 南侵 직전 농지개혁: 건국을 위한 남한의 총선거(1950년 5월10일)엔 공산세력의 폭동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95%가 투표에 참여하여 制憲국회를 구성했다. 이 국회가 수준 높은 토론을 거쳐 대통령 중심제의 헌법을 만들고 이 헌법에 따라 李承晩을 대통령으로 선출, 정부를 구성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合法(합법)국가라는 정통성과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한국인의 저력에 대하여 확신을 가졌던 최초의 대중정치인이 李承晩이었다. '세계정세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꿰뚫어본'(무초 미국 대사의 평) 그가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민족사 최초의 국민국가를 세웠을 때 생존의 전망은 밝지 못했다. 미국은 한국이 死守(사수)할 만한 전략적 가치가 없는 땅이라고 판단하여 1949년에 미군을 철수시켰다. 한국내엔 강력한 좌익세력이 군대, 국회, 지식인 사회, 그리고 산악지방에 포진하여 폭동, 반란, 사보타지 등 利敵(이적)행위를 하고 있었다. 제주폭동, 여순14연대 반란사건, 국회내 프락치 사건이 잇따라 터졌다. 좌익의원들은 남아 있던 미군 고문단(500명)까지 몰아내려는 운동을 벌였다. 李 대통령은 미국에 군사장비 지원을 요청했으나 사실상 거절당했다.

국제환경은 더 불리해져갔다.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의 核독점이 4년만에 끝났다. 毛澤東이 蔣介石(장개석)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을 차지했다. 한 차례 김일성의 南侵(남침) 건의를 거절했던 스탈린은 상황이 달라진 1950년 초 드디어 南侵을 허가하고 毛澤東의 보증을 받도록 했다. 북한이 남침을 준비하고 있을 때 李承晩은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공산주의자였던 曺奉岩(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남북한의 좌익들과 한민당의 반대를 꺾고 초법적으로 실시한 농지개혁으로 약92%의 농민들이 農地(농지)를 갖게 되었다. 地主계급이 사라지고 산업혁명의 길이 열렸다. 6.25가 터지자 이 自作農民들은 자신의 농토를 지키기 위해서도 공산군에 저항하게 되었다. 농지개혁은 <한민당과 김일성의 의표를 찌른 기막힌 병살타였고, 김일성이 노린 인민혁명에 반격의 펀치를 날린 멋진 한반 승부였다>(金聖昊).

4. 트루먼의 결단: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압도적 병력과 장비로 38선 전역에서 기습남침을 시작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인 미조리주 인디펜던스의 집에서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의 전화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그 자식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결단을 내리는 데 30초가 걸렸다고 한다. 한국인이 지옥 문턱까지 갔다가 한 외국인의 결단에 의하여 구출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미국은 한국에 군대를 보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안 보낼 이유는 많았다. 무엇보다도 군부가 한국을 지킬 가치가 없는 땅이라고 규정했었다.

고등학교밖에 졸업하지 않았지만 트루먼은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한국에서 공산군의 침략을 허용하는 것은, 연합국이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체코 침략을 허용한 결과 2차 세계대전을 부른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루먼의 참전 결정으로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워싱턴의 한국전 기념물 銘文) 약5만4000명의 미군이 죽고 약10만 명이 다쳤다. 6.25 남침은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던 대한민국을 확실하게 파멸로 몰고 가는 듯 보였으나 '재앙으로 위장된 축복'임이 드러난다. 남침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1950년대 말쯤 월남식으로 赤化(적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남침이 없었더라면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의 비공식 문관으로 延命하던 朴正熙 전 소령은 장교로 복직하지 못하고 불평분자로서 생애를 마쳤을 것이다.

5. 자유의 기적: 기습당한 국군은 후퇴는 했으나 부대 단위의 항복은 없었다. 국군이 서울방어전에서 사흘을 버티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사흘을 허송한 것은 김일성에게 치명적이었다. 急所(급소)를 맞고도 국군이 인천상륙 작전 이후의 북한군처럼 붕괴되지 않은 것은 자유를 맛보아 자유의 소중함을 안 군대인데다가 미군의 참전 약속이 있었던 덕분이다. 6.25 전쟁중 기적적인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미군은 중공군에 쫒기면서도 흥남철수 작전 때 피란민 10만 명을 태우고 남하했다. 후퇴중인 군대가 이렇게 민간인, 그것도 외국인을 구조한 것은 세계전쟁 사상 처음일 것이다. 미국은 반공포로들을 북한과 중국으로 돌려보내면 처형당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자유의지에 의한 송환’을 고집했다. 이 거룩한 인도주의 원칙에 의하여 전쟁은 2년을 더 끌었고, 포로 숫자보다 더 많은 人命(인명) 손실이 있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戰時(전시)임에도 국회를 해산하지 않았고, 언론을 검열하지 않았다. 전쟁중에 신문이 我軍(아군)에 의한 학살사건(거창사건)을 폭로하여 장관들을 몰아낸 예는 민주주의 선진국 영국에서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민주주의의 나이가 다섯 살도 되지 않은 대한민국이 戰時에도 사상최대 규모의 지방선거를 실시했다. 임시수도 부산에선 야당과 육군 지휘부가 미국의 방조 하에서 전쟁 지도자 李承晩을 대통령직에서 몰아내려고 했다가 실패했다. 전쟁중 통화개혁을 할 때 李承晩 대통령은 사유재산권의 존중을 강조하면서 일정 액수 이상 예금의 凍結(동결)에 반대했다. 전쟁은 젖비린내 나는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를 말살한 것이 아니라 단련시켰다. 전쟁이 민주주의를 키우고, 근대화의 主力이 될 국군을 길러냈다.

6. 韓美동맹: 19세기말에 韓美동맹이 있었더라면 한일합병은 없었고, 1949년에 韓美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더라면 6.25 남침은 없었을 것이다. 1952년 여름 부산정치파동 때 야당과 미국이 합세하여 李承晩을 실각시켰더라면 1953년 6월의 반공포로 석방도 없었고, 따라서 한미상호방위조약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한반도에서 휴전하고 발을 빼려는 미국의 멱살을 잡은 李承晩은 처절한 벼랑 끝 도박으로 韓美(한미)동맹을 쟁취하여 자유와 번영의 생명줄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60년의 기적적 발전엔 네 가지 요인이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韓美동맹, 위대한 지도자, 유능한 국민. 李承晩 대통령에 의한 농지개혁, 교육확충, 민주주의 실험, 韓美동맹 결성은 朴正熙에 의한 근대화를 가능하게 한 토대였다.

7. 國軍이란 기적: 李承晩은 建國 및 建軍의 지도자였다. 그 어떤 군인보다도 뛰어난 대전략의 안목을 가졌던 그는 6.25를 기회로 삼아 미군의 힘을 빌어 세계적 强軍을 건설했다. 70만 군대의 장교단은 개방적이고 개혁적이었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이 났을 때 6만 장교중 약10%가 해외유학 경험자였다. 이 비율은 외교관들의 유학비율보다 더 높았다. 천국 같은 미국에서 지옥 같은 조국을 바라보면서 개혁의 의지를 불태웠던 청년장교단이 쿠데타를 통하여 집권한 것은 12세기 武臣亂(무신란) 이후 800년만에 처음 있는 군사정권의 등장이었다. 강력하고 선진된 국군의 조직적 효율성이 5.16에 의하여 국가 전체의 효율성으로 확대되면서 성장과 건설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런 군대를 만든 것도 6.25 사변이었으니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결국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장미꽃이었다. 한 영국 기자가 6.25 전쟁중에 했다는 말,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우려는 것과 같다”는 저주는 전쟁의 속성과 한국인의 저력을 오판한, 그러나 한 세대만에 적중한 예언이었다.

8. 輸出立國이란 대전환: 銃口(총구)에서 나오는 권력으로 국가개조에 나선 朴正熙(박정희)-金鍾泌(김종필) 그룹은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나세르類의 민족주의적 열정에 심취하여 한때 자주적 수입대체 정책을 시도하고 통화개혁으로 국내자본을 강제동원하려는 시험도 했으나 실패한 뒤 재빨리 수출입국 戰略으로 전환했다. 이때부터 한국인은 손톱깎이를 만들 때도 동대문 시장이 아니라 뉴욕의 소비자들을 의식해가면서 전력투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수출입국 전략은 모든 한국인을 국제 경쟁체제로 몰아넣어 단련시켰다. ‘시스템 운영의 鬼才(귀재)’인 朴正熙는 李承晩가 기초를 놓은 개방과 실용 노선을 확대발전시킴으로써 한국인의 활동공간을 세계 차원으로 확장했다. 1965년의 韓日국교 정상화와 월남파병, 1973년 이후의 中東(중동)진출은 野性(야성)의 한국인을 세계무대로 풀어놓은 계기였다.

9. 强兵貧國 對 富國强兵: 1968년 1월21일 밤, 31명의 북한 124군 부대 특공대가 朴 대통령을 죽이기 위하여 청와대 담벼락까지 접근했다가 경찰에 의하여 제지당하여 시가전이 벌어진 이틀 뒤 동해상에서는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납치되었다. 그해 가을엔 북한의 무장특공대가 울진, 삼척 지방에 상륙하여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시도했다. 미국은 월남전에서 공산叛軍(반군)의 舊正(구정)공세를 맞아 비틀거렸고, 反戰(반전)운동에 포위된 존슨 대통령은 불출마를 선언했다. 흑인폭동이 잇따르고 마틴 루터 킹 목사,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암살당했다.

1968년 朴正熙 대통령은 국내외의 도전에 직면하여 자주국방 노선을 천명한다. 예비군을 만들고 방위산업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손에 총을 들고 한 손엔 망치 들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는 시대가 열렸다. 1.21 사태는 1960년대의 군사제일주의로 북한군의 戰力이 피크에 달했을 때 터진 사건이었다. 김일성의 북한은 군사력 강화에 너무 많은 자원을 투입하는 바람에 경제를 망치는 强兵貧國(강병빈국) 정책을 썼고, 朴正熙의 한국은 先경제, 後군사 건설, 즉 富國强兵(부국) 정책을 폈다. 청와대 기습사건을 계기로 하여 朴正熙는 자주국방을 선언하고 중화학공업 건설을 시작한다. 김일성의 섣부른 도전이 逆攻(역공)을 부른 것이다.

10. 金大中의 도전과 維新체제의 성립: 1971년 4월 大選(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 90만 표 차이로 승리한 朴正熙는 국민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품게 된다. 대중민주주의의 부작용을 切感(절감)한 그는 다시는 저런 국민들에게 표를 구걸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히더니 1972년 10월17일 두 번째의 쿠데타, 즉 유신선포를 단행했다. 그는 國難(국난)을 맞은 후진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망한다고 생각했다. 朴 대통령은, 민주주의에 대한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건국 후 처음으로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고 말한 사람이 되었다.

朴正熙는 안보와 생존이란 더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선 언론의 비판 같은 작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담아 ‘한국적 민주주의’를 들고 나왔다. ‘國力의 조직화’와 ‘능률의 극대화’가 시대정신이 되었다. 7년간 계속된 유신시기에 정치 코스트는 최소화되었고, 행정과 기업의 효율성은 최대화되었다. 이 시기 한국은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경공업국가에서 중공업국가로 승격했다. 維新시기는 석유위기 시대와 겹친다. 한국호가 荒天航海(황천항해)를 해야 하는 타이밍에 선장이 獨裁官(독재관)을 자임한 셈이었다.

11. 석유파동과 중화학공업 건설과 남북逆轉: 1973년의 제4차 중동전쟁으로 촉발된 제1차 석유위기는 원유 값을 넉 달 사이에 네 배로 올렸다. 朴正熙 대통령은 벌여놓은 중화학공업을 포기하지 않고 중동 건설시장에서 돌파구를 뚫었다. 오일 머니가 모이는 호랑이 소굴로 들어간 것이다. 1977년에 가면 한국은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고(북한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수출이 20억 달러를 넘지 못하고 있다), 중동에서 번 달러로 중동에서 석유를 사 오고도 남을 정도가 된다. 1976년을 기점으로 남한의 군사비 지출이 북한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종합국력에서 남한의 절대 優位(우위)가 확보된 것이다. 농촌에서는 자율과 협동에 바탕을 둔 새마을 운동이 농민들을 격동시켰다. 직업 정치인들이 벌이는 소모적 黨爭(당쟁)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하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실천되고 있었다. 언론자유도 이 시기에 부분적으로 제한되었으나 결코 말살, 봉쇄된 적은 없었다. 1970년대는 逆轉(역전)의 시대였다.

12. 30년을 결정한 10.26 사건: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싫증과 다시 덮친 제2차 석유파동이 정치불안, 사회불안, 경제불안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朴正熙 대통령이 정보부장 金載圭(김재규)에 의하여 사살된 사건은 6.25 사변과 함께 대한민국 60년의 가장 충격적인 기억이다. 이날 일어난 일이 前後(전후) 30년을 결정했다. 朴正熙 18년을 정리하고 全斗煥(전두환)-盧泰愚(노태우) 정권 12년을 만들어낸 것이다. 건국 이후 60년 동안 30년을 군인 지도자들이 통치했고 12년간은 군인보다 더 군인적인 大戰略家(대전략가)가 이끌었으니 합해서 42년이다.

군대는 과학 및 경제와 친화성이 있어 동반 발전하고 이렇게 해서 충실해진 國力(국력)과 제도가 민주주의의 토대와 토양이 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를 독재자로 매도하는 것보다 더한 역사 왜곡은 없을 것이다. 全斗煥 그룹이 鄭昇和(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제거한 12.12 사건, 군부로 모인 권력으로 정권 장악에 나선 5.17 계엄확대 조치, 이에 저항한 광주사태는 모두 10.26 사건의 후폭풍이었다.

가슴에 총을 맞고도 태연하게 “난,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영웅적으로 죽어간 朴正熙는 그 최후의 모습으로 국민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는 존재가 되었다. 피로해진 지도자를 제거하고 패기 넘치는 새 지도그룹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金載圭의 ‘패륜적’ 행위는 역사적 평가에선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13. 그때 그 사람 全斗煥: 역사는 거창한 必然(필연)인 것 같으나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우연적이다. 1979년 초 朴 대통령이 全斗煥 1사단장을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하여 10.26 그때 그곳에 있도록 하지 않았더라면 12.12도, 광주사태도, 신군부 집권도 없었을지 모른다. 全斗煥 스스로 이런 행운을 의식하여 자세를 낮추고 ‘單任실천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약속했다. 그는 야간通禁(통금) 폐지, 여행자유화, 서울올림픽 유치 등 개방정책을 추진했다. 李承晩이 시작한 개방과 실용 노선이 流血政變(유혈정변)에도 불구하고 계승된 것이다. 개방과 실용은 민주주의의 내용과 표현이므로 개방과 실용노선을 이어간 세력은 절대로 反민주세력이 될 수 없다.

14. 서울올림픽의 逆轉 드라마: 全斗煥 정권은 사회선진화, 공산권 진출, 對北(대북) 優位를 목표로 하여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준비해갔다. 목표는 초과 달성되었을 뿐 아니라 예상 외의 소득도 있었다. 서울올림픽은 민주화 운동 세력과 정권 세력에 다 같이 과격한 행동을 자제시키는 브레이크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 북한정권은 서울올림픽을 저지하려고 아웅산 테러,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등을 일으켰다가 범인들이 체포되는 바람에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그들은 서울올림픽에 대항하기 위하여 유치한 세계 청년축전 행사 준비에 50억 달러를 투자하는 바람에 무너지는 경제에 회복이 불가능한 타격을 주었다. 역사는 드물게 착한 사람의 손을 들어주고 惡黨(악당)을 응징한다.

15. 경제호황속의 6.29 선언: 1980년대의 10년간 한국은 연평균 경제성장률 10%를 기록하여 세계1등이었다. 한국경제의 宿願(숙원)이던 물가안정, 무역흑자가 이뤄졌다. 이 경제好況(호황)이 소란스런 민주화운동의 완충제이자 울타리였다. 한 대학생이 고문당하다가 죽은 사건으로 촉발된 1987년의 6월 대시위는 全斗煥-盧泰愚 합작의 6.29 선언에 의하여 ‘평화적이고 점진적이며 타협적인 한국식 민주화’의 길로 수렴되었다. 6.29 민주화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드라마틱하게 받아들인 全-盧 세력은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逆轉勝(역전승)의 주인공이 되었으나, 그 1년 뒤 全(전) 전 대통령은 백담사로 귀양살이를 떠나야 했다. 反轉(반전)이 일상적인 한국에서 승리의 쾌감은 오래 가지 않는다.

16. 전환기의 大戰略: 한국 현대사의 경이로운 力動性은, 민주주의의 본격적 실천이 민주투사가 아니라 군인정치가 盧泰愚 대통령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盧 대통령은 사회의 자율화와 자유화, 선거제의 汎사회적 확산, 노사문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 중단, 그리고 민주화에 따른 욕구의 분출 시대를 열었다. 대중조직운동에 뛰어난 좌파세력이 法治(법치)를 위협하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딛고 북방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바로 그때 소련과 동구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세계사적 대변혁이 일어났다. 안팎으로 二重(이중)의 전환기를 맞은 盧泰愚 정부는 전면적 민주화와 북방진출을 감행하면서도 인천공항, 경부고속전철(KTX), 주택200만호 및 신도시 건설 등 사회 간접자본 투자를 밀고 나갔다. 남북한의 유엔동시 가입과 韓中(한중), 韓蘇(한소) 수교는 냉전 시대엔 사실상 섬이었던 한국을 유라시아 대륙과 다시 연결시켰다. 특히 韓中(한중)수교로 열린 중국 시장은 한국경제의 생명줄이 되었다. 공산권 붕괴와 성공적인 북방정책으로 고립된 북한정권은 核(핵)개발로 돌파구를 마련한다.

17. 좌파得勢 시대의 개막: 盧泰愚 대통령은 三黨(삼당)통합으로 안정적인 보수연합 구도를 만들었으나 그가 후계자로 지명하여 대통령이 된 金泳三(김영삼)이 대구경북 세력과 金鍾泌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해체되었다. 이는 보수분열을 가져와 金大中, 盧武鉉(노무현)의 2代에 걸친 좌파정권이 등장하는 카피트를 깔았다. 金泳三은 또 문민정치를 선언함으로써 군인으로 대표되는 실용과 개방 세력을 소외시켰다. ‘이념 없는 感의 정치’를 해온 그는 대통령이 되자 좌파적 영향권에 들어가 보수분열, 현대사 부정, 군사문화 매도에 앞장서고 전교조 해직 교사들을 복직시키는 등 좌파宿主(숙주) 역할을 했다. 40년 이상 계속되어온 생산과 건설과 실용과 개방의 정치는 위선적 명분론을 앞세운 포퓰리즘적 선동정치에 주도권을 넘겨야 했다. 韓日, 韓美관계도 나빠졌다. 이런 정치가 말뿐인 세계화로 나타나고, 세계화를 방임으로 착각한 정부가 국제금융에 대한 감독의 고삐를 놓은 사이 외환위기가 터졌다. 韓美, 韓日 관계가 좋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IMF行이었다. 1997년 大選에서 보수세력은 패배하고 金大中 좌파정권이 등장했다.

18. 좌파정권의 반역: 대한민국 헌법이 허용하지 않는 친북좌파 세력이 선거를 통하여 정권을 잡고 10년간 한국사회를 좌경화 시켰다는 점은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가 가진 취약성을 노출시켰다. 특히 2000년 6월의 김대중-김정일 회담은 남북한 좌익세력이 결탁하여 대한민국에 도전하는 異狀(이상)사태를 만들었다. 이른바 6.15 선언은 북한정권의 2大 對南전략인 反美와 연방제를 대한민국 대통령이 사실상 수용한 문서였다. 노벨상에 집착했던 김대중은 현대그룹과 국가정보원을 앞세워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계좌 등으로 4억5000만 달러를 주고 사실상 평양회담을 매수했던 것이다.

돈을 받고 김대중의 약점을 잡은 김정일은 對南적화전력문서인 6.15 선언을 들이밀었고 김대중은 헌법과 명백하게 배치하는 문서에 서명하였다. 남한의 좌익들은 이 문서를 일종의 반역면허증으로 악용하여 국가보안법을 사실상 死文化(사문화)시켰다. 좌파정권이 내세운 ‘교류’는 퍼주기였고, ‘협력’은 뜯어 먹히기였으며, ‘화해’는 對北(대북)굴종의 다른 표현이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약100억 달러가 북한으로 들어가 핵개발, 군사력 강화, 對南공작을 도왔다. 1990년대 후반 개혁 개방을 거부함으로써 수백만 명의 주민들을 사실상 굶겨 죽였던 북한정권은 남한에 빨대를 꽂아 붕괴를 모면했으나 북한주민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좌파정권은 북한정권의 핵실험 이후에도 국제사회의 제재를 방해했다. 햇볕정책의 총결산은 主敵(주적)의 핵무장 성공과 한국의 내부 분열이었다.

19. 未完의 보수혁명: 좌파세력의 反국가적 행태는 국민들을 각성시켜 온건한 시민들까지 反좌파 투쟁에 나서도록 몰아갔다. 보수세력이 실용과 개방 노선을 40여년간 견지하면서 國力과 제도를 키워온 덕분에 뿌리를 깊게 내렸던 한국의 민주주의는 좌익 狂風(광풍)을 견디어내었다. 친북좌익들도 헌법과 법치의 제약 속에서 손발이 묶여 언론자유, 선거의 자유, 사유재산권의 본질을 침해할 수 없었다. 좌파 10년간 보수층은 정권의 비호 없이도 체제와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싸우는 진정한 국민으로 변하였다. 그 결과는 2007년 大選과 2008년 總選(보수)에서의 보수압승이었다.

李明博(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그러나 정권교체의 역사적 의미를 망각하고 기회주의적인 ‘이념 없는 실용 노선’을 채택했다가 좌익이 주동한 촛불亂動(난동)사태를 겪어야 했다. 이 사태를 계기로 대통령은 좌익의 본질을 알게 되고 남북문제와 이념문제에 있어서 엄정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으나 참모진과 한나라당은 웰빙체질을 벗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정신을 신념화한, 깨끗하고 용감한 보수정당이 없기 때문에 유권자들이 선거판에서 만들어준 보수혁명은 지금 未完의 상태이다. 좌파정권이 키워놓은 초법적 위원회, 선동방송, 反교육적 전교조, 反헌법적 민노당이 국가이념과 법치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서 젊은 세대를 오염시키고 있다. 李明博(이명박) 정부가 앞으로 4년간 좌익세력을 해체 수준으로 약화시키지 못한다면 2012년엔 그들이 복귀할지도 모른다.

20.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한국은 건국-護國(호국)-산업화-민주화의 4 단계 발전 과정에서 해양정신, 기업가 정신, 尙武정신, 자주정신을 확산시키고 드디어 一流국가 클럽으로 넘어갈 수 있는 高地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물질적 부문(군사력, 과학, 기술, 경제력)에선 이미 一流수준에 올랐으나 정신적 부문(법치, 공직사회의 청렴성, 지도층의 公的 마인드, 국민기강)에선 二流도 버거운 상태이다. 저항이 美化(미화)되고 건설이 貶下(폄하)되는 2류 시대의 논리가 창조와 책임을 중시하는 1류의 논리로 업 그레이드 되어야 한다.

一流국가로 가는 길은 반드시 자유통일이란 關門(관문)을 통과한다. 북한노동당 정권을 평화적으로 해체시키고, 노예상태의 북한동포를 해방시키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이 요구하는 ‘평화적 자유통일’이다. 국가지도부가 먼저 북한노동당정권의 해체를 국가의지로 확인하고 이를 국가목표로 삼을 때만이 국민들은 一流국가에 걸 맞는 一流시민의 자질을 갖게 될 것이다. 어차피 한국 현대사의 흐름은 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李承晩이 29세 청년 시절 옥중에서 예언했던 대로 대한민국은 자유를 근본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이다. 자유는 확대, 확장, 확산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 현대사는 결국 진실, 正義(정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싸움과 건설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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