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의 <폴크루그먼, 미래를 말한다> (원제 ; The conscience of a Liberal)를 읽었다.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크루그먼은 예일, 스탠퍼드, MIT를 거쳐 현재 프린스턴대 교수로, 뉴욕타임스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저명한 경제학자다. 그는 대표적인 ‘리버럴’, 즉 미국적 의미에서의 진보주의자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리버럴’ 내지 ‘진보주의자’의 책을 그리 많이 읽지 않는 편이다. 가끔 ‘저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 때, 지피지기(知彼知己)차원에서 읽을 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신세대 ‘리버럴’인 바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되고, 미국 민주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한 상황에서 미국의 ‘리버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크루그먼의 책을 택한 것이다.
크루그먼에 대한 실망
이 책에서 크루그먼은 오늘날의 미국을 정치-경제적으로 극도로 양극화(兩極化)된 사회라고 진단하면서, 미국을 뉴딜정책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와 같은 빈부의 격차가 적고 정치적으로 민주-공화 양당이 정치적 이견(異見)이 별로 없이 서로 화합했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그는 감세정책 폐기, 노조의 역량 강화, 전국민 의료보험 도입 등 사회복지제도의 강화를 역설한다.
오늘날의 미국을 극도로 양극화된 사회라고 진단한 것이나, 사회안전망 확충의 필요성을 강조한 부분은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미국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을 공화당과 보수주의자들에게 돌리고, 그들을 향해 저열하고 근거 없는 비방을 일삼는 부분들이었다.
크루그먼은 이 책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미국에서 빈부(貧富)의 차이가 확대되고, 정치적으로 공화당과 민주당이 극단적으로 대립하게 된 원인은 바로 공화당이 극우(極右)보수주의자들에게 장악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그는 약자들을 위한 보호를 폐기하고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공화당이 그동안 선거에서 계속해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화당이 인종차별주의에 호소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때문에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의 느낌은 ‘허탈’ 그 자체였다. 나는 그래도 미국의 리버럴, 그것도 세계 유수의 명문대학 교수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라면, 우리나라의 그 허접한 ‘진보’들과는 뭔가 좀 다를 줄 알았다. 나와 철학은 다르더라도 세상을 보는 통찰력 있는 시각을 보여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책을 반쯤 읽었을 때부터 “‘진보’라는 인간들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 마찬가지군”이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1. ‘보수’를 ‘극우’로 매도
첫째, 크루그먼은 보수주의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극우’라는 표현을 일삼는다. 예컨대 그는 1970년대 이후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발흥에 대해 ‘거대한 극우 보수주의의 음모’라고 표현한다.
크루그먼이 ‘극우’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은 로널드 레이건이나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 조지 부시 현 대통령, 딕 체니 부통령, 부시 대통령의 책사인 칼 로브, 네오콘 이론가인 어빙 크리스톨이나 윌리엄 버클리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고, 국가안보를 중시하며,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시장의 역할을 강조하며, 미국의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미국의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전체주의 일당독재를 수립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크루그먼은 이들 보수주의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극우’라고 매도한다. ‘진보’를 자처하는 국내 좌파들이 애국우파인사들을 ‘극우’로 매도하는 것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2. 낙인찍기 ; 레이건 등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
둘째, 크루그먼은 레이건 이후 공화당을 이끌어온 보수주의자들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몬다.
1960년대 중반 민주당 출신 린든 존슨 대통령이 민권법을 시행, 흑인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자 종래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오던 남부 백인들이 공화당을 지지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또 공화당이 정치적으로 이들에게 접근한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크루그먼은 이러한 개연성을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 레이건 이후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승리, 그리고 공화당의 승리 원인은 거의 전적으로 ‘인종차별주의’에서 찾는다. 민주당의 안보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이나 기독교복음주의자들의 공화당 지원, 경제-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판단 등은 ‘인종차별주의’에 비하면 선거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크루그먼은 되풀이해서 공화당이 의식적으로 인종차별주의를 조장했고,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해 복무하는 정책에도 불구하고 역대 대선이나 의회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는 레이건이 1960년대 중반 흑인인권운동가 세 사람이 백인인종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된 미시시피주 필라델피아의 한 광장에서 1980년 대선 운동을 시작한 것조차 레이건이 인종차별주의를 은연 중 조장한 징표로 내세운다.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히는 순간 정치적 생명이 끝나는 미국에서 크루그먼은 레이건이나 그의 뒤를 이은 공화당 정치인들, 그리고 그들을 지지했던 공화당원들이나 보수적 유권자들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모는 것이다.
그런 크루그먼에게서 나는 애국우파 인사들이나 보수언론, 한나라당 정치인들, 대한민국을 세우고 이끌어 온 인사들을 걸핏하면 ‘친일파’로 모는 국내의 자칭 ‘진보’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봤다.
3. 모든 잘못은 보수주의자 탓으로 돌려
셋째, 크루그먼은 이 책에서 오늘날 미국 정치가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원인은 전적으로 공화당이 보수파, 아니 극우세력에 의해 장악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공화당이 뉴딜정책의 유산을 인정했던 1950~1970년대에는 미국 공화당이나 민주당 간에 별다른 정치적 이견이 없었고, 양당의 화합에 의해 정치가 운영됐는데, 그 망할 놈의(그런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극우세력들 때문에 미국 정치가 엉망이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크루그먼은 민주당과 ‘리버럴’들의 변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같은 민주당이라고 해도 해리 트루먼과 에드워드 케네디 간에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외면한다.
예컨대 트루먼은 그리스의 공산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트루먼독트린을 선언했고, 소련의 베를린 봉쇄에 맞서 대공수 작전을 감행했으며, 6-25가 발발하자 즉각 참전을 결정했다.
반면에 에드워드 케네디는 1983년 다음해 대선을 앞두고 소련 공산당 서기장 유리 안드로포프에게 측근을 보내 레이건의 안보정책을 비난하면서, 자신과 안드로포프간의 회담을 제안했다. 일종의 미국판 ‘북풍(北風)’을 획책했던 것이다. 냉전의 마지막 고비에서, 미국 민주당은 국가안보정책에 있어서 소련공산당과 호흡을 같이할 수는 있어도 공화당과는 호흡을 같이할 수 없는 정당이 됐던 것이다.
1950년대에 주요 국내외 정책에서 민주당과 보조를 같이했던 공화당이 민주당과 멀어진 데는 이러한 민주당의 변질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크루그먼은 민주당의 변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공화당 탓, 특히 공화당을 장악한 보수주의자들 탓만 한다. 한 마디로 ‘보수주의자들이 만악(萬惡)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크루그먼의 이런 모습은 1945년 이후 우리 사회의 모든 모순의 원인을 ‘수구꼴통’ 탓으로 돌리는 자칭 ‘진보’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4. 공산주의의 위협 과소평가
넷째, 크루그먼은 과거 공산주의의 위협을 과소평가하면서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선 레이건 등의 분투에 대해 냉소를 날린다.
그는 1980년대 초 레이건이 등장할 무렵 상황을 묘사하면서 “공산주의의 대두에 부들부들 떨었던 모습을 돌아보면 우습기도 하다”면서 “특히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공산주의의 붕괴가 시작되었음을 감안하면 말이다”라고 이죽거린다.
크루그먼은 냉전 시기 공산주의의 위협은 분명한 실체가 있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인간들이 자유와 재산과 생명을 잃었다는 것, 공산주의가 붕괴한 것은 트루먼이나 레이건과 같은 자유의 투사들이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공산주의에 맞섰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외면한다.
대신 그는 공산주의가 땅에 묻힌 후에 “돌이켜보면 공산주의의 위협은 그리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보수주의자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안보를 강조하고 공산주의와의 대결의식을 조장하고 국내 진보운동을 탄압했다”는 식으로 썰을 푼다.
‘진보’를 자처하는 국내 좌파세력들이 6-25남침이나 1-21사태,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사건, 이승복 학살 사건, 8-15저격사건, 아웅산 사건 등 북한의 숱한 대남도발들을 쏙 빼 놓고, 역대 정권이 있지도 않은 북한의 안보위협을 빌미로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했던 것처럼 강변하는 것과 어쩌면 그렇게 똑 같은지.....
5. 양극화 주장
다섯째, 크루그먼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가르고 ‘가진 자’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하며, ‘가진 자’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금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은 ‘소수(少數)의 부자’들 뿐이며, 다수의 국민들이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역설한다. 대신 그는 ‘큰 정부’가 가져오는 폐해나 과도한 복지가 야기하는 사회-경제적 활력의 저하 등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는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 아닌가? 바로 2년 전 노무현이가 열심히 떠들던 얘기다.
‘진보’라는 자들의 공통점
한국과 미국간의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소위 ‘진보’라는 인간들의 행태는 놀랍도록 유사하다. 흔히 ‘리버벌’이라고 하는 미국의 ‘진보’는 한국의 ‘진보’와는 뭐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착각이 일거에 깨질 정도로 양자는 너무나 흡사하다.
이런 유사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크루그먼에게 ‘빈부의 격차가 없는 세상’(그는 ‘중산층 중심의 사회’라고 표현한다)은 절대선(絶對善)이다. 그게 왜 선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이와 함께 크루그먼은 인간이 프로그래밍한대로 세상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제도를 바꾸고, 인간의 의식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고 역설한다. 19세기말~20세기 초 산업화의 진전과 함께 빈부의 격차가 극에 달했던 미국 사회가 뉴딜 정책 이후 빈부 격차가 해소되고 정치적 긴장이 완화됐던 것이나, 보수주의 운동이 공화당을 장악하고 미국을 오도(誤導)했던 것은 모두 제도와 인간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의 결과, 자기가 믿는 ‘진보’를 가로막는 보수주의는 자기와 다른 생각이 아니라 일종의 ‘악(惡)’이다. 당연히 보수주의자들은 그에게는 ‘악당’이다. ‘악당’들의 승리를 이해할 수 없는 그에게 보수주의 운동의 대두나 선거에서의 보수주의의 승리는 인종차별주의 조장 등 저열한 ‘음모’의 결과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편하기도 하려니와 대중을 선동하는 데도 유리하다. 물론 악당들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선동이나 사실왜곡에 대한 죄책감 따위는 없다. 뭐 대강 이런 생각 아닐까?
그리고 이런 사고(思考)구조는 맑스-레닌주의자건, 사회민주주의자건, 미국식 리버럴이건, 한국의 NL이나 PD건 간에 ‘진보’를 자처하는 자들에게 공통되는 것이 아닐까?
<폴크루그먼, 미래를 말한다>의 원제는 'The conscience of a Libera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