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에 대한 모든것
손 광 주 (통일정책연구소 연구위원, 전 동아일보사 기자)
1. 김정일의 출생과 성장
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 구소련 하바로브스크 인근 브야츠크(바트스코예)에서 출생했다.
북한 당국은 김정일의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으로 못박고 있다. 80년대부터다. 김정일의 전기 <김정일 지도자>(84년 출간)에는 “백두산의 항일유격대 밀영에서 탄생했다”고 나와 있다. 이후 북한에서는 백두산 밀영으로 공식화됐다. <김정일 약력>(95년 출간)에는 ‘양강도 삼지연군에 있는 백두산 밀영’으로 구체화 해놓았다. 그가 태어났다는 백두산 귀틀집은 김일성의 고향인 만경대와 더불어 북한 주민들의 혁명전통교육장이 되어 있다. 이 집 뒤에 있는 산봉우리가 김정일의 이름을 따서 붙인 ‘정일봉’이다. 이 이름은 김일성이 지어준 것이다.
김정일은 스스로 “백두산 폭풍우 속에서 태어나 항일무장 투쟁의 불꽃속에서 혈전을 벌이던 어머니의 등에서 자랐다”고 말한다. 김정일 선전물 중에는 백두산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백두산을 뒤로 하고 백마를 탄 김정일의 모습이다. 이 그림에는 ‘백두산 하늘장수 김정일 대장군’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김정일이 80년대 들어 느닷없이 자신의 출생지를 언급한 배경은 두 가지로 분석된다.
80년대는 김정일의 어린 시절을 아는 사람들이 상당수 세상을 떠난 시기다. 특히 김일성과 항일 빨치산 활동을 같이 한 사람들 중에서 중국과 소련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대체로 이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또 80년대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권력기반을 완전히 구축한 시기이기도 하다.
김정일이 출생지를 백두산으로 ‘창작’한 것은 정치적 상징조작이다. 북한에서도 백두산은 민족의 정기가 서린 성산(聖山)으로 본다. 또 한편 북한으로서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김일성 약력>에는 ‘해방직전 백두산에서 일본군을 쳐부수고 조국을 해방했다’고 나와있다. 이 때문에 김정일이 해방 직전 하바로브스크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김일성 약력과 들어맞지 않는다.
김정일의 출생일도 실제보다 1년 늦은 42년 2월 16일생으로 되어있다. 이 역시 80년대에 들어와 슬그머니 발표한 것이다. 그 전에는 41년 2월 16일 생으로 사용했다.1) 조선중앙방송은 81년과 82년 2월 초순경 2년 내리 ‘지도자 동지의 40회 생일을 맞이하여’라는 기사를 내보낸다. 당시에는 김일성 생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김정일의 생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을 때였다.
생일을 한해 늦춘 이유는 김일성의 생일과 ‘꺾이는 해’(정주년)를 맞추기 위한 것이다. 1912년생인 김일성이 70회 생일을 맞으면 김정일은 40회, 80회 생일을 맞으면 50회 생일이 된다.
북한에서는 5주년, 10주년이 되는 해를 ‘꺾이는 해’로 부른다. 이때는 생일 축하행사가 더 요란해진다. 김정일의 출생과 관련한 사항은 북한 최고의 기밀이다. 70년대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 있던 김일성과 김정일의 해방전 사진과 증거물을 대부분 걷어갔다.
김정일의 어릴 때 이름은 ‘유라’다. ‘유라’는 ‘유리’라는 러시아 이름의 애칭이다. ‘유라’는 하바로브스크의 러시아 사람이 지어 주었다.
러시아에서는 이름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이름, 부칭(父稱), 성(姓)의 순이다. 부칭은 아버지의 이름에서 만들어진다. 아버지의 이름이 ‘이반’이면, 아들의 부칭은 ‘이바노비치’, 딸의 부칭은 ‘이바노브나’로 된다. 이 규칙에 따르면 김정일의 러시아식 풀네임은 ‘유리 일쎄노비치 킴’이다. 김정일이 러시아식 풀네임을 쓴 흔적은 없다. 다만 ‘김유라’라는 이름은 꽤 오래 써왔다.
그의 이름이 ‘김정일’로 불려지기 시작한 것은 남산고중 졸업무렵인 60년 여름부터다. ‘김정일’로 고친 것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53년 스탈린 사망 후 흐루시초프가 정권을 잡으면서 스탈린 개인숭배에 대한 격하 움직임이 일어났고, 흐루시초프는 서방국가들과의 평화공존을 내걸었다. 이는 김일성의 대내외 정책과는 반대방향이었다. 김일성은 흐루시초프를 수정주의자로 몰고 나가는 한편, ‘주체’를 내세우며 소련의 정책에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 이름이 소련식의 ‘유라’라는 사실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아들 이름을 ‘김정일’로 고쳐 부르도록 한 것이다.
김정일이라는 이름도 처음에 ‘正一’로 썼다가 뒤에 ‘正日’로 바꿨다. 김정일이 어머니 김정숙의 ‘정’(正)과 김일성의 ‘일’(日)을 합성해서 직접 만든 이름이다. 이는 김정일 자신이 김일성의 유일한 적자(嫡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그의 이복동생 ‘평일’(平一)과 ‘영일’(英一)은 모두 ‘한 一 ’로 쓰고 있다.
‘正日’로 바꾼 것은 80년 10월이다. 이 해 10월 10일 김정일은 당내 3대 권력기구에 모두 선출된다.
김정일에게는 바로 밑에 남동생이 하나 더 있었다. 그의 이름은 ‘슈라’다.
우리식 이름이 ‘만일’(萬一)인 그는 북한문헌에 따르면 1944년생이다. 슈라는 47년 여름 평양의 김일성 관저 연못에서 김정일과 함께 놀다 익사했다. 연못의 중간은 네살바기가 놀기에는 제법 깊었다고 한다.
만일(슈라)에 이어 태어난 동생이 김경희(金敬姬)다. 그녀는 김정일의 유일한 친동생이다. 김경희는 해방후 김일성 가족이 귀국한 뒤 태어났다. 김정일은 김경희를 끔찍히 생각해왔다. 김경희는 당 간부로서 별다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도 권력의 온실에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의 남편이 김정일의 핵심 실세중 한명인 장성택(張成澤)이다. 2003년 2월 현재 그는 당 핵심부서인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맡고 있다.
2. 대학생활과 영화취미
김정일은 60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김일성의 자녀들은 모두 김일성 종합대를 졸업했다.
60년대 대학을 다닌 남한의 학생들은 ‘4.19 세대’로 불린다. 이 시기 북한 대학생들은 ‘천리마 세대’다. 당시 북한은 김일성이 내놓은 경제개발 6개년 계획하에 전국적인 ‘천리마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천리마운동은 경제재건을 위한 대중동원운동이었다. 당시 북한의 대학생은 학습과 현장실습, 군사야영훈련이 대학생활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은 대학시절 특별대우를 받았다. 학생들도 ‘김정일’로 부르지 않고 ‘수상님 자제분’으로 불렀다. 대학생활과 동시에 활동영역이 넓어졌고, 이에 따라 김정일을 따라 붙는 호위국 요원들도 늘어났다. 김정일의 대학생활 전반을 ‘관리’한 사람은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인 김신숙이었다. 김신숙은 김일성의 고종누이이자,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의장의 부인이다. 또 정치, 경제, 역사, 철학, 어학 등 주요과목별로 개인교사들이 김정일에게 한명씩 배정됐다. 김정일의 ‘가정교사’들은 대체로 그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인 강좌장들이었다. 북한의 대학 강좌장은 남한의 대학에서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맡는 ‘학과장’과는 다르다. 강좌장은 해당분야 최고의 실력자만이 맡게 된다. 김정일 전기 등에서 김정일이 대학시절 썼다는 논문들은 대체로 이들 개인교사들이 내준 과제물을 후에 다시 정리한 것들이다.
김정일의 졸업논문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군(郡)의 위치와 역할>이다. 내용은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없애고 농촌을 도시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서 군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에 대한 것이다. 김정일 전기들은 이 논문을 대학졸업논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새로운 이론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김정일이 한달 남짓한 기간에 집필했다는 이 논문의 숨은 저자는 그의 지도교수인 경제학박사 전용식으로 알려진다.
전용식은 후일 북한 학계의 최고 영예인 사회과학원 ‘원사’(院士)가 된다. ‘원사’는 나라의 학문발전에 가장 크게 공헌한 인물에게만 주는 최고의 명예칭호다.
전용식은 서울에서 대학교편을 잡다가 월북한 ‘남반부 출신’이었다. 전용식은 78년경 남한 출신 교수들을 대학에서 대거 내쫓을 때에도 김일성종합대학에 그대로 남았다.
대학시절 김정일의 관심을 가장 끈 것은 ‘영화’였다. 그는 매일 중앙영화보급사로 ‘등교’하다시피 했다. 나중에 중앙영화보급사는 김정일을 위해 특별 영사실을 따로 마련해 주었다.
김정일이 영화에 빠진 것은 영화 속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한영화는 보잘 것 없었다. 영화제작의 설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볼만한 영화라곤 소련영화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소련영화를 빠짐없이 보기 시작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서방세계의 지식과 정보도 얻었다.
현재 평양에는 김정일 개인을 위한 필름 라이브러리(영화문헌고)가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는 1만5천여편에 이르는 각국 영화필름이 소장돼 있다. 직원으로는 성우, 번역사, 자막사, 녹음기사 등 2백50명이 일하고 있다. 남한영화 필름도 3백여편을 따로 챙겨 ‘남조선실’에 보관하고 있다. 신상옥-최은희씨의 증언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원본이 상실된 필름도 있다고 한다.
70년대 남한의 영화진흥공사가 홍콩을 통해 남한영화를 싼값으로 동남아에 수출한 적이 있었다. 이때 김정일이 그 필림들을 몽땅 자신의 수중에 넣었던 것이다.
이 필름 라이브러리 관리인은 해외에 나가 필름을 수집하여 외교행랑에 담아오는 것이 주업무다. 서방영화를 들여오는 창구는 모스크바였다. 96년 2월 성혜림 서방탈출사건이 보도되기 전까지는 모스크바에 있던 최준덕이 이 일을 맡았다. 최준덕은 김정일과 김일성종합대 동기다.
모스크바에서 외국영화를 들여오는 것을 ‘백호(No. 100) 물자사업’이라고 한다. 김정일이 직접 지은 암호명이다. ‘백호물자 사업’에는 외국영화 수입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중국의 광주(廣州), 마카오 등지의 북한 대사관에서 전문 카피기계를 차려놓고 필름을 복사하여 평양에 들여보내는 일도 포함돼 있다. 이 ‘사업’은 70년대 초 이종목 외교부 제1부부장이 총괄했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남조선’ 영화, 액션물, 애로물, 중국 무술영화, 일본 닌자물 등 전 세계의 영화가 모두 이 ‘사업’을 통해 평양에 전달된다.
3. 집권 과정
* 64년 대학졸업,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처 참사실, 내각 부수상 참사실 근무
* 66년 노동당 중앙위 조직지도부 중앙기관 지도과 책임지도원2)
* 67년 중앙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
* 69년 선전선동부 부부장(27세). 영화로 김일성에게 인정받음. <영화예술론>(노동신문 문예부 동봉섭 대필) 발간. 축구팀 ‘영화’ 창설. 4.15 창작단 결성. 김일성 일대기 <불멸의 혁명총서> 발간.
* 69년 중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 70년-73년 김영주, 김성애 등과 권력투쟁. 73년 3대혁명 소조운동 발기
* 김일성 우상화(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 등)
* 73년 9월 중앙당 조직지도부장, 조직비서(사실상 2인자)
* 74년 2월 정치국 정치위원(후계자 지명?당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3)
노동신문 ‘당중앙’ 공식호칭.
* 74년 4월 당의 유일사상 확립의 10대 원칙 발표4)
* 80년 10월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 위원(당 중앙위 6기 8차 전원회의)
* 91년 12월 인민군 최고사령관
* 93년 4월 국방위원장
* 94년 김일성 사망
* 97년 10월 당 총비서 취임.
4. 정치행태(political behavior)
1) 측근 중심의 밀실정치
김정일은 96년 ‘김일성대 연설’에서 자신의 업무 스타일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 연설에서 김정일은 당 간부들이 무능하여 하는 수 없이 단신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60년대부터 수령님의 사업을 보좌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사업을 똑똑히 도와주는 일군이 없습니다. 나는 단신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이 나의 사업을 도와주지 못할 바에는 있으나마나 합니다.』
김정일은 공식적인 회의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통치스타일을 갖고 있지 않다. 그가 공식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무시하는 이유는 그가 소수의 측근들을 통한 정치를 해왔기 때문이다. 대부분 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및 선전선동부 책임일군들과의 담화형식이며 자신의 의향을 하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측근을 통한 정치는 ‘대중형’이 되기보다는 ‘엘리트형’ 정치를 지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김정일은 소수의 엘리트 그룹에 의존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밀실정치’를 선호하는 것이다.
2) 정보 장악
그의 표현대로 ‘단독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확하고 솔직한 보고,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정보를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5)
정보장악과 함께 김정일은 보고체계를 세웠다. 북한 전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을 신속히 자신에게 보고되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는 ‘3선3일 보고체계’와 김정일에게 직접 보고하는 ‘직보체계’가 있다. ‘3선’은 당 행정 보위부를 의미한다. 세 부문에서 3일만에 한번씩 중앙당 조직지도부에 보고하는 것이다. ‘직보체계’는 비상사고, 인명피해, 유일지도체제 위반과 관련한 사건이 있어나면 즉시 전화 등을 이용하여 당 중앙의 김정일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김정일은 ‘3선 3일 보고체계’와 ‘직보체계’를 전국 당조직과 군, 각급 기관, 기업소에 모두 세우도록 하여 정보를 일사분란하게 장악하고 있다.
3) 용인술
김일성의 인사원칙은 인물 위주였다. 남파공작원을 선정할 때도 김일성은 ‘첫째도 사람, 둘째도 사람’을 강조했다고 한다. 반면 김정일은 ‘당성 우위’다. 사람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우선 당성, 즉 충성심이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궁지에 빠진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거나 계획적으로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은 다음 구출하는 방법으로 자기 사람을 만든다. 이른바 제왕학의 고전에 해당하는 ‘이따이라이’(一打一來) 방식이다. ‘이따이라이’는 김일성이 모택동으로부터 ‘한 수’ 배운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김정일이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이다.
김정일의 ‘이따이라이’는 정계입문 초기인 67년 박금철, 이효순, 김도만의 ‘반당 종파분자’들을 숙청할 때 적절히 사용된 적이 있다. 김정일은 영화예술 부문에서 이 용인술로 자기 사람을 많이 만들었다. 곤경에 처해있던 전 중앙방송위원회 위원장 주현옥, 2.8영화촬영소 총장 차계룡, 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천세봉 등이 김정일에 의해 ‘구제’됐다. 이들은 모두 김정일의 심복이 된다.
87년 오진우의 교통사고 후 김정일이 베푼 ‘은혜’도 폭넓게 보면 ‘이따이라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은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도구로 비밀파티를 이용해왔다. 비밀파티에 참가한다는 것은 바로 김정일의 측근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비밀파티에는 중앙당의 부장급 보다는 부부장급이 주류를 이룬다. 이 역시 김정일의 교묘한 용인술이다. 그는 부부장을 측근으로 삼아 부장과 부부장을 ‘분리 통치’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상하간부들 간의 사적 조직화를 차단할 수 있고, 상호간의 충성경쟁을 유도하는 것이다.
4) 통치스타일
김정일의 통치스타일 중 두드러진 특징이 선전선동이다. 영화, 집단체조, 혁명가극 등은 선전선동의 수단들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선전선동에 뛰어나면서도 대중연설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대중 앞에 나와 공개적으로 ‘연설’한 것은 92년 인민군 창설 기념식장에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이 있으라”는 단 한 ‘문장’이다. TV에 출연한 적도 없다.
김일성은 언변이 좋은 편이었다. 김일성 연설의 특징은 쉬운 말로 핵심을 잘 전달한다는 점이다. 이를 빨치산 시절에 터득한 능력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빨치산 부대원들이 대체로 교육수준이 낮아 복잡한 이론보다 몇가지 지침을 간단히 전달하는 편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연설 스타일도 그런 쪽으로 굳어졌다는 설명이다.
반면 김정일은 연설형이라기보다 지시형이다. 간부회의시에도 자기가 말을 많이하고 참석자들이 자기 말에 찬성하도록 유도한다. 김일성은 정책결정시 간부들의 의견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단독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고, 자기의 정책이나 노선에 대해 이견을 제기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또 김정일은 자신을 ‘베일에 가려진 인물’로 연출하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그는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듯이 적들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고 자주 말해왔다. 자신을 신비스럽게 ‘포장’해놓는 것이 적들을 불안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김정일이 공개석상에 나타나 연설하고 대중에게 견해를 밝히는 것이 득될 것이 없다는 고도의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일의 ‘자기 연출력’은 여러 군데에서 나타난다.
그는 북한의 최대 명절인 자기 생일날에도 공식석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이 때문에 김정일의 사고설이 나돈다. 김정일은 중요한 시기에 가끔 허위정보를 흘린다고 한다. 허위정보를 날린 다음 그것이 누구를 통해 어떻게 퍼져나가는가를 지켜보며 원하는 정보선을 잡아낸다는 것이다.
그는 생일 때 측근들과 함께 현장지도를 나가는 경우도 있다. 생일날도 열심히 일하는 지도자로 보이기 위한 것이다. 또 문화예술인들을 아침식사에 초대해서 북어국과 콩나물, 두부 등의 반찬으로 소박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 예도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김정일은 밤을 새는 일이 잦다. 새벽 서너시 경에 건설현장이나 행사준비장에 갑자기 나타나거나 간부들에게 전화를 거는 등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일한다는 것을 과시한다.
5) 김정일의 성격적 특징
= 운동성 두뇌 소유자로서의 특성
* 감각적, 순간 상황판단 능력, 손익관계 판단, 예술적 기질 등
* 논리력, 수리력, 통찰력 결여(참고 : 최은희와의 대화록 분석)
= 거시 안목 결여
* 개혁-개방에 대한 두려움
* 체제 도전 세력에 대한 두려움
* 용인술 한계, 밀실정치 선호, 정책결정과정에서 측근 의존
* 종합적으로 국정운영에서 전반적 자질 부족->공포 폭압적 독재체제 구축에 관심
6) 북한 선전선동부의 김정일 이미지 메이킹
= 廣幅정치, 仁德정치
* 통크고 덕이 많은 인물(수령론-봉건주의 사회 지도자상 지향)
* 조선의 대장군(평양시 연못동 3대 혁명전시관-“조선이 없는 지구는 필요 없습니다”)
* 영명한 인물, 탁월한 지도력, 소박하고 불굴의 공산주의자(점퍼착용, 밤 시간 업무 등)
= 신비주의적 기법
* 김정일의 육성을 내보내지 않는다
* 상향식 카메라 앵글 포착
* 김정일을 먼발치에서 본 것만도 영광(관객들 눈물)
* 극단적인 예 : 97년 1월 방송. “장군님이 몰래 서울을 다녀가셨는데, 장 군님이 지나가는 길마다 빌딩이 숲처럼 일어났다.”
5. 내가 본 김정일
1) 황장엽 선생
- 김정일은 자기 자신을 ‘조국’이라고 했다. 그동안 주위에서 자꾸 김정일을 ‘천재’라고 부추기니까 지금은 자기가 진짜 불세출의 천재로 착각하고 있다. 그는 아첨분자들이 말하는 대로 자신이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들을 능가하는 천재적 예지를 지닌 위인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 김정일은 복잡한 논리를 공부할 사람이 못된다. 그런 사람이 수많은 논문과 이른바 노작을 냈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고, 차분히 앉아서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없는 인물이다. 머리는 빨리 도는데 깊이가 없다.
대신 김정일은 사람 장악 능력이 있다. 사람을 다루는 수단이 발달돼 있고 사람을 높였다, 낮췄다 하는 능력이 있다. 매우 악조건에서도 당과 군대를 장악하는 것을 보면 장악력은 있다. 김정일이 독재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는다. 가학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폭군주의적 이기주의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폭군들이 머저리는 아니다. 그는 거짓말을 밥먹듯 한다. 자본론을 3번 읽었다고 하는데 거짓말이다.
- 김정일은 선전사업의 중요성을 안다. 그래서 자신을 ‘조국’으로 부르게 하고 있다. 황당무계한 소리지만 자꾸 훈련을 해놓으면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못한다. 그저 그런가보다 생각하지 따지지 않게 된다. 과거 나찌 괴벨스가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하고 연속적으로 세 번만 하게 되면 거짓말도 믿는다고 했다. 거짓말을 할 바에야 크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더라도 밥만 먹여주면 관계없는데, 인민을 살릴 생각은 않고 굶겨 죽이고 자꾸 전쟁하자고 해서 남한으로 온 것이다.
- 김정일은 결코 환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전쟁을 해서 이길 가능성이 있으면 반드시 할 사람이다. 그러나 전쟁을 하지 못한다. 전쟁을 하면 진다는 것을 정확히 안다. 그래서 안하는 것이다. 김정일은 자기 이익에 철저히 충실한 사람이다. 자기 이익에 맞으면 하고 맞지 않으면 안 한다.
- 김정일은 어릴 때부터 정보를 장악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통보과를 전국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정보를 장악한 후에야 지도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그는 꾀는 있는데, 깊이가 없어 북한이 저렇게 됐다.
- 김정일은 무엇이든지 비밀리에 조직하고 비밀리에 생활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이다.
2) 신상옥-최은희
- 김정일은 대중 연설을 할 인물이 못된다. 말을 하는 데도 조리가 없고, 말이 매우 빠르다. 김정일의 통역들이 오래 가지 못한다. 김정일의 말을 통역하고 있는 동안 성질이 급해서 계속 말을 하기 때문에 통역이 따라가지 못함. 이 때문에 김정일 전담 통역이 자주 바뀐다.
# 참고 자료 : 김정일-최은희 신상옥 부부 대화록 분석
1. (김정일이 ‘왜 최은희-신상옥 부부를 북한에 모셔오게(납치하게) 되었나’를 이들 부부에게 설명하는 대목이다).
김정일; 에- 우리 남북교류에서 첫 번째가 뭔가 하면 우선 문화교류다, 문화합작이다, 그렇게 하는데 내 타산(생각)이, 내 타산이 그렇습니다. 이왕 사람들이 이렇게 오고가고 하는 거는 이제 이건 자기 의사에 따라서 가고 오고 하는데 (신감독이) 자기 발로 자기 뜻대로 이렇게 뜻을 가지고 오는 형식을 취할 수 있는 방도가 없느냐, 그래서 우리 동무들과 토론해본 결과에 인제 홍콩거점에서 연락오기를 신감독 형님인가요 저-, (그 무렵 신상옥 감독의 형이 신필름 부도사건으로 5개월간 홍콩에 거주했다) 에, 자주 (홍콩에) 내왕한다는 거, 내왕하고 거기서 영화를 하자고 하는데, 그 본질에 있어서는 남조선에서는 활동은 도저히 할 수 없고 나와서 이제 판을 치갔다(홍콩에서 영화를 하겠다) 하는 게 그때 그 말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그러카는데 이제 그러니까 신감독 문제가 나온 거는 신감독 형님에 대한 문제부터 이야기가 나와 가지고 그래서 인제 신감독에 대한 것을 그럼 요해해보자(알아보자), 그래 그때 쭉 영화들, 영화 그 자료들 다 훑어보니까, 인제 그때 최익규 부부장 동무가 그때 그, 저- 과장할 때입니다. 과장할 땐데 신감독이, 그 남조선에서는 누구를 제일로 꼽느냐 그러나까, 신감독이다.
첫째 조건이 이북사람이다. 하하하..... 그 다음 그 사람이 정서가 정서상태가 지금 말하자면 에, 이건 그저 우리 생각입니다. 그저 우리 생각인데 지금 박정희 밑에서는 아마 남조선에서는 아마 오래 지탱할라고는 안하는 것 같다, 그래 어떻게든지 해외에 나와서 자꾸 할려고 하는 기미가 있다는 거, 그걸 누구한테 들었는가 하면 그 형님한테, 그러니까 신감독도 사실 거기(남한)에 들어가면 상당히 그저 지금 마지 못해 왔다갔다 하는데 진심으로는 앞으로는 바깥에 나와서 할 작정이다. 그런거....
신상옥; 그때 제가 (신필림) 허가 취소를 당했을 때지요.
김정일; 예 예 예. 에- 그래서 좋다. 그럼 그 사람을 한번 데려와야 갔는데, 그런데 그 사람이 데려오는 걸, 남자 데려오는 건 좀 무리다. 그래 무린데 남자 데려오지 말고, 신감독을 유인, 유혹하자면 뭐가 필요한가. 그래서 실제 최선생(최은희)을 이렇게 데려다 놓았습니다.(웃음)
그때 나는 표방하는 게 뭐인가 하면 어떻게 남조선 사람들이 남반부 사람들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공화국 품에 찾아와서 진정한 자유를 가지고 진정한 에, 그 영화하는 데 대해서 자기가 아무 근심 걱정없이 한다는 걸, 하자고 표방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 내 생각은 왠가 하면 내가 그렇게 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2. 다음 대목은 ‘북한영화의 현실’에 대해 김정일이 한 말이다.
김정일; 그런데 우리나라를 보면 우리나라로서는 그야말로 남북이 지금 대결하고 있어, 또 세계에, 세계에 지금 존재하고 있는 존재가, 존재 자체가 뭐인가 하면 어디까지나 지금 우리가 사회주의 국가에만 국한시켜 그저 사회주의 국가에만 나갈 수 있어. 어- 자본주의 국가에는 마음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실제상 일본사람들 하고 우리가 무역 교역은 이렇게 한다고 해도 실제 우리 우리 민족간부 양성하기 위해서 기술 도입하자고 실지 기술자들 보내자면 실제 그 사람들 받아주질 않습니다. 그건 적대관계이니까 어디까지나...
그래서 내가 생각한 거는 그때 나혼자 생각한 것은, 내 의도는 에- 누구한테도 말은 안했고, 내 그렇지 않아도 서방세계에서, 서방세계에서 서방적인 기술을 습득해가지고 자유자재로 이렇게 하던 사람들을 데려다가 우리가 그걸 바탕으로 해가지고 우리 것 하고 합쳐가지고 서방에 침투해야 되겠다. 우리는 지금 동무들, 아니 선생님들 왔가가 보셨겠지만 지금 딱 말하자면 울타리 안에서 자기 것만 보고 자기 것 좋다는 사람들이라구.(웃음) 이렇기 때문에 남하고 대비 안 하고 대비할 줄도 모르고.....
3. 이근후 박사팀 김정일 심리 분석
이 테이프(60분)를 분석한 이근후 박사팀(이화여대 교수 신경정신과)은 김정일의 스타일을 말의 흐름이 대단히 빠르다, 말의 흐름이 빠를 뿐 아니라 주제의 변화가 자주 일어난다, 음성의 톤이 높고 강하다, 음성의 톤에 변화가 있다. 말하는 도중에 음성의 톤이 눈에 띄게 달라진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간간이 연상이 두절되는 부분이 있다. 대화도중 다른 사람이 말 할 여유를 주지 않고 혼자 이야기를 독점하는 경우가 많다. 간혹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대답을 하더라도 다 듣기도 전에 말을 가로채 버린다 등등으로 파악했다.
이근후 박사팀은 말이 빠른 사람들은 대체로 사고의 흐름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빠르다고 한다. 또 김정일이 중간중간 연상이 두절되는 것은 말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사고의 연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정신의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리서치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이들 분석팀은 각자 개별적으로 두 번씩 녹음을 들은 다음 의견을 종합했다.
이들의 종합적인 분석결과 김정일의 성격은 대략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첫째, 김정일은 선천적으로 대단히 감성적이고, 열정적이며 틀에 매이지 않는 예술가적 기질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후천적으로는 사회체계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확보하고 지켜나가기 위해서 자기통제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터득한 통제적이고, 치밀하며, 계산적이고, 이성적인 측면도 함께 갖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 표현되고 있는 보다 강한 특성은 감성적인 특성이다.
사람은 누구나 감성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이 함께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보다 강하게 표현되는가에 따라 반대편에 서있는 특성은 나타나고 있는 외형적인 특성에 가려져 자칫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실제로 없는 것이 아니고 표현되는 성격특성에 가려져 잠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김정일에게는 감성적인 것이 훨씬 우월하다고 보여진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그가 양면을 모두 갖고 있는 이중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가 하는 오해도 불러일으키지만 적어도 그런 양면을 똑같이 갖고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성격은 정서(기분)적인 측면이 강하고 이성적인 측면이 약한 특성을 갖고 있다.
둘째,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과시적이며, 성격이 급하다. 이런 면은 그의 여러 면에서 충동적인 성격적 특성을 나타내는 원인이 된다. 이런 성격적 바탕은 자아의 통제기능을 잃게 되면 조울증으로 이행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지지만, 적어도 녹음된 대화의 내용으로는 그런 증상을 발견하기 어렵다.
조울증이란 표현보다는 그의 성격이 열정적이고 과격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합할 것같다.
셋째, 갈등상태에 있는 성격이다. 이 갈등상태에 있는 성격은 남을 대단히 불안하게 만든다.
그의 주된 내면적 갈등은 자신의 성격과 연관된 자유분방한 감성적인 면과 그가 오래도록 몸담아온 사회주의 체제에서 훈련되고 조건화된 성격 측면 사이에서 비롯되는 갈등이다.
그는 김일성처럼 철저히 조건화되어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철저히 자유분방한 자신의 특성을 만족하게 발휘하고 살아가는 것 같지는 않다.
그의 특성으로 대표되는 자유분방한 정서는 틀에 짜여 있는 사회주의 체제의 틀속에서 조건화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체의 모순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철저히 자유분방한 자신도 아니고, 철저히 조건화된 사회주의 독재자도 아닌 아주 갈등스런 자아를 갖고 있다고 믿어진다.
어느 쪽이든지 철저히 한쪽의 특성을 지닌다면 적어도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분열은 없다. 이 말은 철저히 자유주의자라면 그 자유분방함 때문에 살아남기도 하고, 또 철저히 독재자적 성격특성을 지녔다면 아무런 갈등없이 독재자로서의 소망을 충족할 것이다. 이 두가지 상반되고 공존할 수 없는 요인이 항상 김정일 내부에서 투쟁을 벌인다면 갈등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 내면적인 갈등의 표출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의 선천적인 체질적 특성이랄 수 있는 예술적 감성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추앙받는 독재자로서의 욕구를 충족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서로 상반되는 것을 동시에 충족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가 예술가로서의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든지, 아니면 독재자로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 그 하나만을 충실히 추구하지 않는 이상 그의 내면적 갈등으로 인한 분열은 피하지 못할 것 같다.
그는 김일성같은 카리스마적인 독재자로서의 이미지보다는 감성적인 쪽으로 스스로를 승화시키는 것이 훨씬 덜 갈등스러울 그런 성격이다. 그런 점에서 김정일은 양쪽 모두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영원한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라는 위기감이 그의 행동을 결정할 소지가 높다.
넷째, 그의 공격성이나 경쟁적 성격, 열등감 보상을 위한 행태, 그리고 전문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오이디푸스 갈등의 문제는 대화에서 증거삼을 만한 내용이 없어서 증거로 내놓기 어려우나 앞에서 서술한 모든 성격특성을 깊이 파고 들어가면 결국은 그런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6. 김정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정치지도자는 그가 이룩해놓은 객관적 결과에 따라 평가된다. 그것은 남한의 역대 정치지도자에게도 적용될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공통적인 평가 잣대이다. 김정일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명백한 사실에 기초한 평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김정일은 70년대까지 김일성 시절 이룩해놓은 자립경제를 그가 공식 지도자 동지가 된 이후 깡그리 망쳐놓았다. 95~97년 사이 굶어죽은 사람이 300만 가량이다. 이것이 북한의 최고 지도자의 책임이 아니라면 누구의 책임으로 돌릴 것인가. 인간의 모든 권리 중에서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기본권리가 먹고 생명활동을 유지할 수 있는 권리이다. 김정일은 인간의 기본권리를 박탈했고, 그에 대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김정일은 당과 군만 책임질 뿐 국가경제는 책임이 없다고 강변하고 있는데,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북한은 당적 영도에 따라 지도되는 국가이다. 김정일은 당 총비서이다.
둘째, 현재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탈북자들이 파악 가능한 숫자만도 10만여명에 달한다. 비공식적으로는 이를 훨씬 상회할 것이다. 김정일은 이들에 대한 보호는커녕 비밀공안들을 보내 잡아들여 쏴죽이고(射刑), 태워죽이고(火刑), 말려죽이고(乾刑), 때려죽이고(笞刑) 있다는 것이 이를 직접 보고 참가한 사람들에 의해 실증되고 있다. 먹을 것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는 이유로 자가 나라 사람들을 죽이는 경우는 중세 때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인민의 지도자가 아니라 인민의 도살자임이 명백한 사례이다.
셋째, 김정일은 인민들이 굶어죽고 있는데도 무기는 사들인다. 무기는 전쟁을 하거나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현재 북한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려는 적은 없다. 북한은 미국이 침략한다고 떠들고 있으나, 미국이 남한과 중국, 러시아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을 침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정일이 진정으로 전쟁을 하지 않겠다면 미사일과 핵과 무기를 주민들의 생존을 위해 쌀과 경제원조와 대외개방으로 빨리 맞바꾸어야 한다. 이것이 증명되지 않고는 김정일이 2300만 인민들을 볼모로 전쟁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낼 수 없다.
넷째, 언론, 집회, 결사의 표현, 종교의 자유가 사회주의 헌법에 명시된 대로 실천되지 않고 있다. 이는 한 국가가 대외적으로 국가임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김정일의 후계자 승계 후 74년 북한의 공식지도사상은 김일성주의로 정식화되었다. 이후 김정일은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사상의 독재를 강화했으며, 북한 전역을 김일성 우상화물로 뒤덮었고, 수백만 인민들의 생명을 김일성 시신을 안치하는 데 들어간 수억 달러와 맞바꿨다.
[미주]
1 ) 2002년 8월 김정일위원장이 열차편으로 러시아를 방문할 당시 김정일과의 만남을 기대했던 아우구스타 세르게예브나(여?73?브야츠크 거주)는 “김정일위원장이 태어난 순간부터 떠난 날까지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김위원장은 1941년 2월 16일 태어났다”고 증언했다. 세르게예브나는 “김일성은 1942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88여단에 소속된 3개 대대중 1개 대대를 지휘했으며, 이웃 주민들을 자주 병영으로 초청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김위원장이 어린 시절 이곳 아이들과 잘 어울렸으며 어릴 때의 이름은 러시아식 이름인 ‘유라’였다”고 증언했다.(조선일보 2002. 8. 23.)
아울러 그는 “김위원장이 쌍둥이로 태어났으며, 동생의 이름은 ‘슈라’이고, 3, 4세 쯤에 우물에 빠져 사망했다”고 증언했는데, 이는 그가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슈라’는 1944년생으로 47년 여름 평양의 김일성 관저 연못에서 익사했으며, 우리식 이름은 ‘김만일’이다.
2) 김정일이 처음으로 맡은 이 긴 이름의 직책이 도대체 어느 정도 요직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노동당 중앙위원회(중앙당) 산하에는 정치국, 비서국, 중앙군사위원회, 검열위원회가 있다. 중요한 곳은 정치국과 비서국이다. 의전서열을 매길 때 정치국과 비서국, 그리고 중앙군사위원회 간부들이 대개 상위에 랭크된다. 정치국에는 상무위원과 위원, 후보위원이 있다. 정치국 상무위원은 북한 권부의 최고 수뇌부다. 북한식으로는 ‘혁명의 수뇌부’에 해당한다. 이들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정책을 최종결정한다. 80년 10월 제6차 당대회 이후 정치국 상무위원은 김일성, 김일, 오진우, 김정일, 이종옥이었다. 88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6기 12차 전원회의에서는 김일, 이종옥이 탈락하고 상무위원은 김일성, 김정일, 오진우 등 세 명이 된다. 그러다 94년 김일성, 95년 오진우가 사망한 이후 2003년 현재 정치국 상무위원은 김정일 혼자다. 정치국 위원은 80년 10월 6차 당대회 이후 14명이었으나, 93년 12월 이후 김영주 등 10여명 선을 유지해오고 있다.
조선노동당 규약 제26조에는 “비서국은 필요시 당 인사 및 당면문제 등 당내 문제를 토의 결정하며 그 결정의 집행을 조직, 지도한다”라고 명시돼 있다. 즉 당의 인사권을 가진 최고중추기관이 비서국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당 우위인 북한에서는 당권장악이 곧 권력장악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당 비서국을 장악한다는 뜻이다. 비서국에는 총비서가 있고, 해당 사업담당 비서들이 있다. 김정일은 총비서이다.
해당 사업담당 비서로서는 당 사업전반을 총괄하는 조직비서와 사상담당비서, 대남담당비서, 국제담당비서, 군수담당비서 등 11명이 있다. 이들 비서들의 업무통제를 받으며 실무를 담당하는 전문부서로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통일전선부, 국제부, 군수공업부 등 22개 부서가 있다. 22개 부서중 선임부서가 조직지도부다. 김정일은 11명의 비서중 선임비서인 조직비서다.
북한의 핵심 권력자들은 직책이 중첩되는 경우가 많다. 김일성이 사망 전 맡았던 직책이 ‘당 총비서겸 국가주석,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공화국 대원수’였다. 김정일의 직책은 ‘당 정치국 상무위원,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공화국 원수’다. 당은 중앙위원회뿐 아니라 각 시, 도, 군, 리까지 있다. 평양에는 평양시당이 있고, 평남에는 평남도당이 있다. 편제는 대동소이하다. 북한의 모든 기관 공장, 기업소 등에는 당 비서를 포함하여 당 일꾼들이 있다. 최말단이 ‘당 세포’다.
따라서 김정일이 66년 스물네살 때 맡았던 당 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은 최고의 노른자위에 해당된다. 그것도 중앙기관 담당이다. ‘중앙당 책임지도원’이라는 직위는 북한사회에서는 막강한 자리이다.
3) ‘당 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가 어떠한 성격의 회의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노동당의 의결기관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노동당의 최고의결기관은 ‘당대회’다. 당대회는 5년마다 열리며 필요시 조기소집 또는 연장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을 선출하고 주요정책이 결정된다. 당 중앙위원회는 정위원과 후보위원을 포함하여 통상 2백여명으로 구성된다. 5차 당대회는 70년에, 6차 당대회가 80년에 열렸으나 2003년 현재까지 7차 당대회는 열리지 않고 있다.
당대회를 대신하여 6개월에 1회 이상 열리는 회의가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다. 전원회의에서는 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당 중앙위원회 정위원과 후보위원 전원이 참석한다. 여기에서 당의 핵심인 총비서, 비서, 정치국 상무위원, 위원, 후보위원,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중앙당 부장들이 선출된다. 따라서 ‘당 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란 70년 5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당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전원 참석하는 여덟번째 회의라는 뜻이다.
당 전원회의를 대신하여 수시로 열리는 회의가 ‘정치국 회의’와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다. 정치국 회의는 상무위원, 위원, 후보위원 전원이 참석하는 회의다.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는 상무위원만 모여서 의결하는 기구다. 결국 최종적으로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북한의 가장 중요한 정책이 결정되는 것이다. 2003년 현재 김정일만 유일한 상무위원이다.
4) ①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물들이고, 이를 위해 목숨 바쳐 투쟁하자. 주체사상의 승리를 위해 끝까지 싸우자.
② 위대한 김일성동지를 충성으로 모시자. 수령을 모시는 것을 최대의 영예, 최대의 행복으로 알자.
③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김일성의 권위와 위신을 해치는 것은 사소한 일이라 해도 끝까지 투쟁하여 권위를 사수해야 한다.
④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을 신념으로, 그의 교시는 신조로 삼자. 김일성의 모든 활동과 생활지침을 신조로 받아들이자.
⑤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교시는 무조건 준수하고 집행하자. 김일성의 교시는 법이자 지상명령이다. 무한한 헌신성과 희생정신으로 무조건 관철하자.
⑥ 위대한 김일성동지를 중심으로 사상의 통일과 단결을 이룩하자. 사상의 통일단결은 혁명승리의 확고한 뒷받침이다.
⑦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공산주의적 풍모와 혁명적 사업방법을 따라 배우자. 이는 모든 당원과 근로자의 신성한 의무이다.
⑧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신임과 배려에 충성으로 보답하자. 그가 주는 신임에 목숨을 바쳐 보답하자.
⑨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영도 아래 모든 기관조직이 하나가 되자.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교시, 명령, 지시를 전 기관이 한몸처럼 되어 실천하는 유일영도체계를 세우자.
⑩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혁명위업은 대를 이어 완성하자.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영도 아래 당중앙(김정일)의 유일적 지도체계를 확립하자.
‘10대원칙’은 각 조항마다 평균 6~7개씩, 도합 64개의 시행세칙까지 자세히 제시하고 있다.김정일은 ‘10대원칙’을 통해 김일성의 절대신격화와 자신의 완전한 권력승계, 그리고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이 ‘10대 원칙’이 오늘날 북한을 통치하는 실질적인 ‘법률’로 군림하게 된다.
5) 김정일은 정보보고와 관련하여 중요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88년 봄의 일이다-(이하 북한외교관 출신 탈북자 증언).
김정일의 집무실에 계응태 당 비서와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조직지도부 부부장 등이 모인 가운데 회의가 열렸다. 김정일은 국가안전보위부가 당 중앙에 사실을 정확히 보고하지 않는다고 나무랐다.
“나는 정확하고 솔직한 것을 좋아한다. 당신들은 나치 독일의 제국안전 총국장이었던 칼텐브루너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히틀러에게 항상 간단명료하고 정확하게 보고했다. 부총통 히믈러가 히틀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거짓보고 하면 바로 그 앞에서 ‘그것은 사실과 맞지 않다’고 말한 배짱있는 인물이었다. 직속상관 앞인데도 그랬다. 나에게는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동무들이 독일의 칼텐 브루너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김정일의 지시가 있자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칼텐 브루너 되기 캠페인’이 벌어졌다.김정일은 히믈러와 칼텐 브루너 등이 등장한 <17일 동안에 있은 일> <검과 방패> <토성으로 가는 길> <토성의 종말> 등 구소련의 영화들을 국가보위부에 보내주고 영화평가 모임을 가지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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