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6.25 전쟁은 여러 가지 쟁점을 갖고 있지만 특히 그 전쟁이 아직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이른바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그것은 전쟁의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지 않은 데 기인한다. 따라서 휴전이 종결된다는 것은 마침내 전쟁의 승패가 가려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연합군은 독일과 일본을 역사적 법정에 세워 전쟁을 합리적으로 청산했다. 물론 피고를 변호하는 입장에 선 변호인들은 그 재판이 ‘승자의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고, 일본의 우익계 정치인들은 아직도 이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어떤 변론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전쟁을 일으키고 엄청난 살상을 불러 일으킨 쪽이 피고석에 앉게 된 것은 섭리적 관점에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6.25전쟁이 아직 공식적으로 승자와 패자의 판가름이 없어 이에 따른 법적 청산과정이 없었다는 것은 지금에 있어 6.25전쟁 납북자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중 ‘납치’란 명백한 전쟁범죄(War Crime)로서 그 죄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피해를 입힌 가해자에게 물어야 마땅하다. 6.25전쟁의 책임에 대해 수정주의적이고 허무적의적인 여러 견해들이 호도하고 있지만 이 전쟁은 명백히 김일성의 적화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고, 김일성과 그 동료들, 그리고 그의 체제와 권력의 유산을 물려받은 북한의 현 권력자에게 그 책임을 묻는 과정은 아직 역사의 과제로 남아있다. 요컨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야 마침내 이 전쟁은 정당한 종결에 이를 것으로 보고 납북 문제의 최종적인 책임 소재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전쟁 납북문제를 야기시킨 제1원인 제공자는 아닌 것은 분명하나 우리 정부 역시 6.25전쟁 민간인 납북자 문제에 관해서 자유로운 입장에 있지 못한 것 역시 명백하다. 첫째, 국민보호의 관점에서 그러하다. 6.25전쟁 당시 서울이 함락당할 위기에서 한국 정부는 유일한 피난로였던 한강교를 끊어 민간인들의 심각한 재난을 촉발했다. 이 상황에서 납북되어 간 사람들의 대부분은 친대한민국 인사들로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피랍되어 갔으므로 그 책임이 한국 정부에 없다고 할 수 없다. 또한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발언권을 거의 갖지 못한 한국정부는 민간인 납북자들의 송환 의제를 적극적으로 관철시키지 못했고 유엔과 북한에 의해 일방적으로 무마되고 말았음에도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휴전 이후 가족회나 국회, 적십자 등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으나 1964년 조선일보가 주도하여 벌인 납북자 송환을 위한100만명 서명운동을 끝으로 의미 있는 캠페인조차 사라지고, 이 문제는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있었다. 대한민국이 이들 납북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 물음이 무겁지 않을 수 없다.
두번째,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그러하다. 6.25 납북피해자들의 경우 명백한 전쟁범죄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념충돌과 체제경쟁의 소용돌이에서 단지 북한으로 끌려가서 소재한 이유만으로 그 가족들조차 불이익을 당하는, 이른바 연좌제 피해가 더러 있었던 바와 같이 극심한 인권침해의 사례들을 구성한다. 휴전회담 당시 군인, 외국인피랍자의 경우와 달리 회담의 의제에서도 밀려났고 결국 호도되고 말았던 점에서 당시 우리 정부의 무능에 대한 책임 또한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력이 강화되고 체제 안정도가 매우 높아진 현재의 시점에서 대한민국 건국과 체제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가진 그룹에 대해서 여러 가지 특별법을 제정하여 인권의 관점에서 관대하게 처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어떤 정당한 대책이 세워지지 않은 것은 국가의 위신의 측면에서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뒤늦게나마 이 문제가 국회 차원에서 거론되고 특별법이 상정되기에 이른 것은 역사적인 일이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에 이르기 위한 조건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2. 6.25전쟁 납북자 문제의 쟁점 분석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6.25 전쟁 납북자 문제가 문제원인 발생 60년에 가까운 지금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우선 전반적 이해 부족과 이념적 대결 양상에서 비롯된 까닭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발표자는 지금까지 거론되어 온 관련 중요 쟁점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가능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1) 그동안 전쟁 납북자 문제 해결의 장해요인은 무엇이었고, 이 문제가 지금에 와서 부각되어야 할 필요성은 무엇인가?
유엔과 북한이 주 당사자로 진행한 휴전협상에서 유엔군 포로, 피랍 외국 민간인, 국군포로 등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의 가닥이 잡혔으나 남한 출신 민간인 납북자 송환의 경우에는 북한의 완강한 거절로 완전히 유산되고 말았다. 이후 국정은 엄혹한 반공주의 일변도로 운영되어 북한에 소재하는 것만으로도 위험요인으로 간주되었다. 더구나 북한이 납북자를 간첩으로 교육시켜 남파하는 사례가 발견되자 정부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납북피해 가족에게도 연좌제를 적용하여 감시하는 등 각종 불이익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반공을 국시로 한 시대가 가고, 이른바 민주화 시대가 도래했을 때에는 전쟁 납북자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대북 포용정책에 반하는 것으로 보고 정부 차원에서 이 문제를 매우 부담스러운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의원이 북한을 방문했을 시 등 몇 차례 북한 최고권력자와 이 문제를 논의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지만 ‘납북’사실을 북한이 시인한 바는 없고 ‘전쟁중 행방불명자’의 개념으로 이 문제를 다룰 것에 대한 약속이 있었으나 그 성과는 전혀 없다.
노무현 정권 말기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전환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을 때 휴전회담의 미제로서 이 문제가 불가피하게 거론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1953년 정전 당시 희생당한 민간인 납북자 송환문제 해결이 진정한 평화체제로의 전환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노무현 정권은 바라던 바의 평화협정을 맺지 못하고 임기를 완료했으나 향후 정전체제를 해체하고 평화체제로 가야 하는 역사적 과제 앞에서 여전히 이 문제는 간과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2) 전시상황에서 월북 납북을 어떻게 엄밀히 구분할 수 있나?
6.25전쟁은 근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곧 이념간 체제간 전쟁 양상을 명백히 띠고 있다. 더구나 북한은 남침 전쟁을 시작한 지 불과 3개월도 안 되어 부산지역을 제외한 남한 거의 전 지역을 점령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대다수의 좌익성향의 남한 국민들은 승자의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이념적 정체를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당시는 지금의 익명화된 도시 중심의 사회와는 달리 이웃간 소통이 원활했던 시대였던 까닭에 북한당국에 협조하다 월북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대체로 식별이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당시 정부로서는 납북과 월북을 정확하게 구분해 내는 것이 체제 사활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어 매우 엄밀하게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우리 정부가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 1952년, 1954년 3회에 걸쳐 피랍자 명부를 아주 엄격하고 보수적으로 작성해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명부가 납북과 월북 여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에 충분히 훌륭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1956년 대한적십자사에서 수집한 ‘실향사민신고서’에는 일선 행정기관에서 발급한 ‘피랍치자증명원’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한 증명서 발급에 현재 가족회가 소장하고 있는 정부 공인 명부들이 근거 자료가 되었던 사례가 있어 그 신빙성을 뒷받침한다.
6.25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최근 서울 서대문에 위치한 한국연구원에서 찾아낸 한국연감(영남일보사 간행) 1954년 판에는 1952년도 추계 납북자 수(82,959)와 월북자 수(10,271명)가 각 도별로 그래프로 작성되어 비교되어 있다. 그 동안 정부 작성 납북자 명부들이 발굴되어 왔으나 월북자수 통계치가 공개된 자료는 찾아보기 어려웠으므로 이는 매우 귀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보건대 오히려 당시 정세와 사회분위기로 보아서 납북 월북이 무분별하게 조사되었다고는 보기가 더욱 어렵고 이들 명부를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납북사례를 확정할 수 있다고 본다.
(3) 6.25전쟁중 납북자와 전후 납북자가 구분되어 다루어져야 할 법기술적 사유는 무엇인가?
우선 헌법적 보호 책임이 부여되는 ‘국민’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과 국적법이 정하는 바에 따르면 국민에 대한 보호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전후 납북자와 전시 납북자가 개념상 구분될 까닭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전시가 아닌 군사정전후의 국민에 대한 국가의 보호 책임이 강화되는 것은 아닐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 상황은 국가 기능이 사실상 멈추는 상황으로 전후 납북자와 동일한 개념으로 국가에 대한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것이 통념이다.
따라서, 전시 납북자와 전후 납북자가 분리되는 것은 그 대상이 매우 상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측면에서 분리되는 것은 입법의 편리를 위해서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전후 납북자의 경우 납북 과정과 원인에 있어 논란이 적은 편이다. 그러나 전시 납북자의 경우는 대한민국 건국세력과 지도계층 등을 ‘의도적으로’치밀하게 계획하여 납치한 경우(이른바 정치범)에서부터 북한이 필요로 하는 전문인 기술자 등의 경우, 그밖에 전쟁수행 및 전후복구에 필요한 청년 등 여러 가지 경우가 있어 납북의 과정과 원인에 있어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가령 전쟁 중 납북자 신분 통계에 따르면 국회의원 60여 명, 행정공무원 3000여 명을 포함해 경찰공무원도 1600명 이상 납북되었고, 판검사를 비롯한 법조인이 190여 명 납북된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당시 대한민국 지도층이 대부분 납북되었던 셈이다.
그에 비해 생활인으로서 남북 경계선에서 조업중 납북된 어부의 사례가 대부분 포함된 전후 납북자의 경우와는 납치의 원인에서부터 전시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난다. 따라서
귀환자 지원이나 피해자가족 지원 등 전후 납북자 특별법이 중요한 목표로 하고 있는 내용과는 달리, 전시 납북자의 경우 우선 그 실태를 면밀히 조사하여 이 문제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는 작업부터 선행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입법의 목표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나아가서 한국 현대사의 갈등구조 속에 희생양이 되었던 전쟁 납북자들과 그 가족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당 입법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정당한 목표로 보인다. 이는‘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추상적 의미에서의 목표가 포함되어 있는 문제이며, 1948년 건국의 의미를 재확정하는 역사적인 입법이 될 것으로 보인다.
(4) 전쟁피해는 피살 학살 사고사 등 광범위한데 납북만을 구분하여 입법해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
6.25전쟁 피해는 그 대상뿐 아니라 그 양상도 매우 다양하다. 최근에 부각된 노근리 사건이나 거창 사건 등도 이러한 다양한 양상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거듭 밝히건대 식민지시대가 종결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이념적 가치적 대립양상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더구나 6.25전쟁은 아직 아무도 책임지지도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 처해 있고, 궁극적인 책임은 가해자를 확정하는 여러 가지 절차와 함께 물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6.25전쟁 납북자 문제의 가장 큰 심각성은 우선 ‘납치’라는 명백한 ‘의도’하에 자행된 전쟁범죄(제4제네바협약, 전시에 있어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협약)라는 것과 이들 피해자들이 아직 생존 가능성이 있다는 데 있다. 국군포로 생존자가 아직도 상당수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되는 것과 같이 당시 납치되어 간 이들도 상당수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에 대해서까지 법이 찾아가서 일하지 않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6.25전쟁 납북피해 가족들은 휴전 이후부터 가족회를 결성해서 국제적 규모의 캠페인을 벌여왔을 뿐 아니라 2000년 재결성한 가족회도 국가가 감당해야 할 몫까지 감당해 가며 관련자료를 찾고 각계에 호소하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생존 가능성이 있는 납북자뿐 아니라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부모, 배우자, 형제자매 세대까지 연로하여 물리적으로 아주 제한된 시간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이제라도 국가가 나서는 것은 ‘인권’을 존중하는 국가, 무엇보다 건국 과정에 기여한 무고한 국민들을 지금에 와서라도 보호하고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은 선진국을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국격을 위해서도 매우 시급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5) 시행상의 여러 가지 기술적 우려가 있는데 특히 명예회복은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
가족회는 2000년 11월 결성 후 전쟁납북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당시 우리 정부에 납북자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하여 명부를 비롯하여 납북을 입증하는 각종 자료들을 발굴해왔다. 가족회 산하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을 2005년 개원하여 자료 발굴 외에도 납북피해 가족들의 증언을 영상으로 채록해 왔으며 이 채록문과 발굴한 귀중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한국전쟁납북사건사료집1권을 출간하였다. 현재 사료집 2권 출간을 준비하고 있고 부정기적으로 논문이나 발굴자료 및 주요활동 등을 담은 간행물을 발간해왔다.
자료원을 부설로 둔 가족회는 단순한 피해가족들의 모임을 넘어 자료발굴과 연구물을 간행하는 역할도 감당해 온 만큼 이 문제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다. 휴전 이후 가족회의 의미 있는 활동의 유산은 향후 특별법 시행에 있어 정부 차원의 시도와 생산적으로 결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가족회가 당 입법을 통해 개별 피해자 보상보다는 집단적 정신적 보상으로서 추모기념사업을 주장해온 것은 시민으로서도 매우 성숙한 태도로 보인다. 이는 명예회복의 방법론으로 적절할 것으로 보이고, 국가와 시민사회가 협력하여 의미 있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한 사례로서 훌륭한 전범을 이룰 것으로 기대된다.
김미영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연구실장/ 한동대학교 GEA 교수)
납북 관련 법률제정의 시급성과 그 역사적 의미
- 김미영(한동대)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09-02-25, 11: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