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최근 미국의 북한인권위원회가 발표한 북한의 강제수용소 실태 보고서 작성자 데이비드 호크씨를 작년에 월간조선 김연광 기자가 인터뷰한 것이다.
캄보디아와 르완다의 大학살을 파헤친
인권운동가 데이비드 호크, 「金正日 학살」 조사에 나서다
사실 확인 다음에 책임 규명으로
캄보디아 주재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 출신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정권의 大학살은 3년9개월, 르완다의 양민 학살은 2개월 만에 끝이 났다. 하지만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수십년에 걸쳐 조직적인 학살이 자행됐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벌어지고 있는지 국제사회는 알아야 한다』
미국 워싱턴에 소재한 「북한인권위원회」의 데이비드 호크씨가 지난 8월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보름 동안 한국을 방문했다.
그의 인권운동 활동 경력은 화려하다. 그는 1964년 민권운동 그룹과 교회단체들을 한데 묶어 선거참여 캠페인에 뛰어든 이래 40년 가까이 인권운동을 펼쳐 왔다. 캄보디아 주재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1996년 6월~1998년 1월)을 지냈고,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르완다-브룬디 조사관(1995년 6~7월)을 역임했다. 최근에는 미국의 「지뢰금지협약」(1997년) 가입을 위한 타당성 조사를 주도했다. 학살조사 전문가인 셈이다.
호크씨는 북한의 요덕 정치범 수용소(함경남도 요덕郡)를 탈출한 姜哲煥씨 등 15명의 탈북자들을 만나 정치범 수용소의 위치와 명칭, 수용소 구조에 대해 증언을 청취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관한 기초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月刊朝鮮을 방문한 그를 만났다.
그는 月刊朝鮮에 실렸던 「한국의 아우슈비츠」 기사의 英譯(영역) 자료를 내놓더니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胎兒(태아) 강제 살해, 공개 처형 등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다』며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英文자료들이 생각보다 많아 다행』이라고 했다.
그는 영어로 「교화소」 「관리소」 「道 집결소」 「노동 교화소」의 발음을 적어와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꼼꼼히 묻기도 했다.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북한 정치범 수용소 문제를 끝까지 파고들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1976년의 「헬싱키 협약」이 蘇聯 東歐의 인권 문제 해결에 결정적인 발판이 됐다. 앞으로 북한과의 수교교섭에 나서는 서방 국가들이 북한 인권문제에 관해 쌍무적인 협약을 체결하거나, 집단적으로 협약을 맺도록 만드는 것이 나의 최우선적인 목표다』
그가 몸담고 있는 워싱턴 소재 「북한 인권위원회」는 ▲북한內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 ▲중국과 몽골을 떠돌고 있는 북한 난민들의 상황 ▲북한 식량난에 대한 조사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열흘 동안 15명의 탈북자들을 만났다고 들었다. 북한 내에 20만 명 이상의 정치범이 수용돼 있다는 국제기구들의 판단에 공감하는가.
『내 작업은 이제 겨우 시작 단계일 뿐이다. 그런 판단을 내리기는 아직 이르다. 내가 만난 탈북자들 가운데는 1970년대나 1980년대에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도 있다. 어떤 증언이 가장 최근의 것인지, 어떤 것이 사실에 가까운 것인지 파악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
북한 인권을 쌍무 多者협상 의제로 올려야
―북한 정치범 수용소를 조사하면서 어려운 점은.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에 대해 구체적이고 생생한 증언을 청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 서너 명 이상의 증언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탈북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을 검증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조사를 마치고 미국에 돌아가서 무얼 할 계획인가.
『미국에 돌아가면 북한 정치범 수용소, 노동 교화소 등에 대한 보고서를 영어로 펴낼 것이다. 그곳에서 탈출했거나 풀려난 사람들로부터 들은 강제 낙태, 유아 살해와 같은 이야기를 가감없이 전하려고 한다. 한국에서 입수한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관한 자료를 영어로 번역할 계획이다. 이게 일단 끝나면 최신 정보를 얻기 위해 중국 등지를 다시 여행할 예정이다』
―한국 정부, 특히 통일부와 국가정보원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자료를 계속 축적해 왔다. 한국 정부 측과는 접촉하지 않았나.
『아직 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의 보고서를 여럿 읽었다. 정부 당국자들과 얘기하기 전에 정보를 더 축척하고 소화해야 한다. 그리고 NGO는 정부의 주장과 자료를 비판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독자적인 정보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완전 폐쇄된 북한 정권을 상대로 국제적인 인권기준을 지키라고 압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솔직히 답을 모르겠다(웃음). 1976년 헬싱키 협약 이전에 소련과 동구의 인권유린에 대해 서방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기록을 남기고 그걸 공개하는 것이었다. 북한과 다른 세계와의 접촉이 너무나 제한돼 있다. 북한은 외국의 투자나 지원을 받지 않고 있다. 일상적인 접촉점이 거의 없다.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 그걸 공표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북한의 식량난은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지만, 미국 사람들은 북한에 정치범 수용소가 있는지 그곳의 인권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 북한 정치범들은 한번 끌려가면 죽을 때까지 노동한다. 北으로 끌려온 脫北 임산부들은 강제로 낙태를 당한다. 끔찍한 일이다. 미국 국민들, 미국內의 인권운동 단체들이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 좀더 친밀해지고, 관심을 갖는다면 북한 변화의 단서가 될 것이다』
―인권탄압을 기록하고 알리는 정도로 金正日 정권이 움직이겠나.
『1992년 국제사면위원회가 평양 근교에 있던 정치범 수용소(승호리 26호 교화소)의 존재를 폭로한 후 이 정치범 수용소가 사라졌다. 이번에 한국에서 만난 정치범 수용소 경비원 출신의 탈북자는 이 수용소가 청진 쪽으로 옮겨졌다고 증언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북한 정권이 국제 여론에 反應(반응)한다는 희망적인 증거다』
―헬싱키 조약과 같은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북한 정부를 압박하는 방안도 강구돼야 하지 않겠나.
『물론이다. 미국과 서구 유럽의 국가들은 북한과의 협상 테이블에 북한 인권 문제를 의제로 올려 놓아야 한다.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에 안보를 의제로 올려 놓는다. 북한 核사찰, 미사일 수출 중단, 재래식 군비의 2線 후퇴는 미국의 이해에 부합한다. 안보 이슈는 살아 움직이는 논리를 갖췄다. 인권문제는 아직 그런 기반이 취약하다. 인권문제가 雙務(쌍무) 多者 협상의 의제로 올려졌을 때 분명한 효과가 있었다』
金大中 정부의 침묵은 슬픈 일
―金大中 정부는 對北 유화정책인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나는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 햇볕정책과 남북대화의 작은 결과로 50여 년간 헤어진 가족들이 다시 만나는 인도주의적 조치가 이뤄졌다. 가족들간의 자유로운 결합은 東유럽과 西유럽 국가가 체결한 헬싱키 조약의 가장 중요한 인도주의적 원칙이었다. (한국 정부는) 접촉과 정보 소통이 더욱 확대되도록 해야 한다. 이산가족의 만남이 일회성 쇼가 아니라 진짜 행사(Real Event)가 돼야 할 것이다』
―당신은 캄보디아의 大학살, 르완다의 大학살을 현장에서 파헤쳐 왔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 실태를 조사하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나.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캄보디아의 정치범 수용소와 무척 다르다. 크메르 루즈 정권은 3년 9개월간 통치했다. 농업과 노동력을 집단화하기 위해 全인구를 再배치했다. 毛澤東(모택동)은 大약진 운동을 벌였는데, 크메르 루즈는 「슈퍼 大약진」운동을 했다. 그들은 중국보다 더 빨리 경제를 근대화하고 집단화하려고 했다. 그들은 문화대혁명을 동시에 진행했다. 그래서 재앙도 「슈퍼」였다. 그들은 全인구의 4분의 1 내지 3분의 1을 학살했다. 全 국토가 정치범 수용소였다. 다양한 수준의 「학살 캠프」가 운영됐고, 再교육이나 교정을 위한 정치범 수용소는 없었다. 노동 캠프도 없었다. 조사와 고문, 살해가 학살 캠프에서 이뤄졌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스탈린의 수용소를 연상시킨다』
―캄보디아 전역에 학살 캠프가 얼마나 있었나.
『마을과 지역, 국가 수준에 별도의 학살 캠프가 설치됐다. 정확한 숫자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국가 수준에는 「비밀 滅種(멸종) 캠프(Secret Extermination Facility)」가 있었다. 「S 21」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 캠프에서만 1만4000명이 처형됐다. 이들은 국가의 敵이었고, 마을과 지역의 敵들은 그곳에서 처형됐다. 「비밀 멸종 팀」에 끌려온 이들은 사진이 찍히고, 조사를 받은 뒤 예외없이 「CIA나 KGB의 스파이」라고 자백했다. 고백하면 스파이 네트워크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을 대라고 다시 고문을 받았다. 그 기록이 모두 남아 있다. 이 캠프에서는 오직 7명만이 살아 남았다』
―캄보디아의 경우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은 다 죽었다는 얘긴가.
『그렇다. 이 점이 캄보디아 학살의 가장 독특한 현상이다. 이전 정부의 관리, 군인들은 지위가 높건 낮건 다 학살당했다.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들을 자처했다. 하지만 이들은 스탈린보다는 중국의 4인방에 더 가까워 보인다』(스탈린은 강제노동 수용소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정치범들에 대한 노동교화를 끊임없이 시도했다-편집자 注)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 정권은 농업을 토대로 한 극도의 평등주의를 추구했다. 이 점에서 현재의 북한 상황은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 정권과 유사해 보인다.
『캄보디아가 더 극단으로 간 경우다. 캄보디아에서는 나무에 달린 열매, 물 속의 고기도 국가의 재산으로 규정했다. 열매를 따먹거나 물고기를 잡으면 국유재산 탈취로 처벌을 받았다. 크메르 루즈는 먹는 것도 집단화했다. 가족들은 함께 식사를 못했다. 가족용 취사도구는 압수됐다』
사실 확인 다음은 학살의 책임 규명
―캄보디아와 북한에서의 학살에 다른 유사점은 없나.
『폴 포트는 사회주의 원칙에 충실하게 농업 생산을 조직하면 생산력이 폭발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잔재를 모두 없애고 농업 집단화에 나섰다. 북한 역시 사회주의의 이질 요소만 골라내면 사회주의 체제가 잘 굴러 갈 걸로 믿고 정치범 수용소를 양산했다. 하지만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다 이론이다. 두 나라 모두 점점 더 많은 쌀을 외국에서 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학살은 똑같이 미친 생각에서 시작됐다』
―르완다의 학살은 어땠나.
『르완다의 학살은 두 달 만에 끝났다. 후투族과 투치族의 종족 분쟁으로 알려져 있지만, 두 종족은 엄밀한 의미에서 다른 種族(종족)이 아니다. 두 종족간의 혼인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르완다는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후투族이 지배적인 사회다. 1960년대에 쫓겨난 목축 중심의 투치族 반군이 우간다 내전에서 활약했다. 쫓겨난 투치族들이 무장을 한 것이다. 이들이 다시 애국전선을 형성해서 30여년 만에 조국을 침범했다. 이들은 아주 잘 조직된 군대였다. 전쟁에 질 것을 두려워한 후투族이 투치族 양민을 학살했다. 르완다의 학살은 軍이나 보안군에 의해 자행되지 않고, 보통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후투族은 AK 소총이나 로켓포가 아니라 칼로 자기의 이웃들을 찔러 죽였다. 많은 투치族은 교회로 피신했다. 후투族은 교회를 둘러싸고 일주일 또는 열흘간 돌을 던지고, 뛰어들어가 학살했다. 국가 공권력이 동원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북한과 캄보디아의 학살과 큰 차이가 있다』
호크씨는 1980년 태국에 머물면서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으로 몰려나온 캄보디아 난민들을 상대로 「킬링 필드」의 참상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그는 유엔과 국제사면위원회를 대표해 50만 명의 캄보디아 난민을 구호하는 국제적십자사와 NGO를 지원했다.
그는 캄보디아의 被학살자들이 매장된 곳을 발굴하고, 학살관련 서류들을 입수했다. 또 생존자들을 직접 인터뷰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을 토대로 보고서를 만들어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출했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캄보디아의 난민 단체, 인권단체들에 대한 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그는 캄보디아 현지에서의 조사를 바탕으로 그 후 10여년간 대학살의 책임자를 규명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집단학살 방지 협약」 당사국들이 크메르 루즈 정권을 사후적으로나마 법적으로 단죄하도록 로비활동을 벌였고, 1991년 체결된 캄보디아 평화조약에 강력한 인권 조항을 삽입시켰다.
호크씨는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에서 펼쳤던 대학살에 대한 「사실 규명」 작업을 북한으로 무대를 옮겨 벌이고 있는 것이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정밀한 조사작업은 곧바로 학살 책임 규명작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캄보디아의 성공사례
―캄보디아 평화조약에 인권조항을 삽입한 것이 효과를 내고 있는가.
『캄보디아 정부도 평화조약의 한 당사자여서 인권조항의 규제를 받고 있다. 지금 캄보디아에는 마을과 지역 수준에서 NGO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부에 비판적인 인권단체와 자유 언론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아주 초보적이기는 하나, 정부의 인권탄압을 견제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경제수준을 감안할 때, 큰 성과라고 믿는다』
―그와 똑같은 일을 당신은 북한에서도 이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결과적으로는 「그렇다」이다. 金正日 정권이 당장 어떤 변화를 선택할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金正日이 살아 있는 한 큰 변화가 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프랑코 총통이 죽고 나서야 스페인은 변하기 시작했다. 독재자도 영원히 버틸 수는 없다. 북한의 정치 경제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 金正日이 上海의 천지개벽에 놀랐다고 하지만, 金正日은 자신이 고르바초프가 될까 겁내고 있다』
―미국 정부가 중국과 몽골의 탈북자들에게 자금 지원을 할 것이라는 보도가 최근 나왔다. 이런 조치가 북한 정권에 압박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의 NGO들에 대한 예산 지원이 이뤄지지 않을까 싶다.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는 아주 적다.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지켜보면, 다음에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지 대답이 나올 것이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상황을 개선할 방법은 없겠는가.
『북한 수용소에 억류된 정치범들의 참상을 국제사회와 유엔에 알리고, 국제적 압력을 가하는 것이 金正日을 움직이는 유일한 길이다. 직접적인 접촉이 불가능하지 않나. 우리는 끊임없이 발언해야 한다』
데이비드 호크 인터뷰
- 金 演 光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03-10-24, 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