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는 단지 동독이라는 한 체제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914년부터 시작된 '짧은 20세기'(영국의 좌파 史學者 에릭 홉스봄은 진정한 의미의 20세기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시작돼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끝났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짧은 20세기'라고 표현한다)의 종언, 이데올로기 간의 대립으로 얼룩졌던 '극단의 세기'의 종언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볼프강 베커 감독의 '굿바이 레닌'은 바로 한 세기의 종말을 의미하는 베를린 장벽 붕괴를 다룬 유쾌한 코미디이다.
1978년 동독인 우주비행사 지크문트 얀이 소련의 소유즈 우주선에 탑승, 독일 최초의 우주인이 되던 날, 어린 알렉스의 집으로 기관원들이 들이닥친다. 의사인 아버지 로베르트가 학술회의차 서독에 갔다가 망명해 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알렉스와 아리안느(누나) 자매에게 아버지는 서독의 여의사와 눈이 맞아 가족을 버렸다고 설명한다.
우울증으로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했던 어머니는 이후 학교 선생님으로, 당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파란 스카프를 두른 소년단원들은 그녀의 지휘에 맞춰 '풍요로운 우리 조국∼'운운하는 노래를 부른다. 꼭 '우리는 행복해요','세상에 부러움이 없어라'를 노래하는 북한 주민들을 연상케 한다.
어머니는 사회의 모순(?)을 과감하게 지적하고 시정해 나가는 일에도 앞장선다. 그녀가 지적하는 문제점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화려한(?) 姙婦服이나 중년 여성의 몸매에 맞지 않는 의류들의 문제점 같은 것들이지만….
이러한 노력들을 인정받아 어머니는 훈장을 받고, 동독 건국기념일에는 黨주최 만찬에 초대받기까지 한다.
1989년 10월7일.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일. 호네커 독일통일사회당(동독 공산당) 서기장은 그 해 여름의 대규모 탈출 사태에도 불구하고 동독 사회주의 체제는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대대적인 기념 행사를 갖는다. 곳곳에는 동독건국 40주년을 기념하는 현수막과 구호가 나붙는다. 호네커, 에곤 크렌츠, 빌리 슈토프 등 동독 공산당 지도부와 고르바초프 등이 참석한 열병식에서는 중무장한 동독군이 보무도 당당히 베를린 시내를 행진하고, 전차들이 지축을 울리며 거리를 누빈다.
이 자리에서 호네커는 '베를린 장벽은 100년은 갈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지만, 고르바초프는 '변화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멸망이 있을 뿐'이라고 경고한다.
호네커의 호언장담은 아마 두고두고 역사의 조롱거리로 남을 것이다. 그로부터 열 하루 뒤인 10월18일 호네커는 실각했고, 다시 22일 뒤인 11월9일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녀졌으며, 그로부터 329일 뒤에는 독일이 통일됐기 때문이다.
동독 건국기념일 저녁, 베를린 시내에서는 개혁과 개방,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진다. 알렉스도 여기 참여했다가 경찰에 연행된다. 바로 그 순간, 건국기념일 만찬에 참가했다가 귀가하던 어머니가 이 장면을 목격한다.
아들이 반동적(?)인 시위에 참석했다는 사실에 열혈 공산당원인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 쓰러진다. 이후 8개월 동안 어머니는 혼수 상태에 빠진다.
호네커의 실각, 에곤 크렌츠의 등장, 베를린 장벽 붕괴,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 동서독간 화폐-경제 통합 합의 등 역사의 물결이 거침없이 흘러가도, 어머니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이다.
젊은이들의 변신은 눈부시다. 알렉스의 누이 아리안느는 대학을 그만두고 버거킹 매장에 취직하는 한편, 서독 청년과 만나 동거에 들어간다.
베를린 장벽 붕괴 전에는 무기력하게 벤치에 앉아 술병을 기울이던 알렉스도 자본주의 질서에 나름대로 잘 적응해 나간다. 그가 다니던 TV수리회사는 망하지만, 알렉스는 위성방송수신안테나 판매회사에 취직한다. 처음에는 위성방송안테나를 들고 가가호호 방문해 물건을 내밀다가 거절당하면 하릴없이 물러났지만, 점차 시장경제체제에 걸맞는 요령이 생긴다. 중년 남성 앞에서는 1990년 월드컵 중계방송을, 베트남 근로자들에게는 고국의 TV방송을 볼 수 있다고 선전하는 식이다.
1990년 6월, 알렉스가 어머니를 간호하던 러시아 출신 간호사 라라와 첫 키스를 나누는 순간, 어머니가 의식을 회복한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회복은 아니었다. 그녀는 의식은 돌아왔지만 하반신 불수와 부분적인 기억 상실증에,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 상태. 열혈 공산당원인 어머니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서독으로의 흡수통일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생명이 위태로울 판이었다.
여기서 알렉스의 동독 재건작전(?)이 시작된다. 우선 그는 누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누이와 매형이 자본주의적으로 꾸며 놓았던 어머니 방을 부랴부랴 원상복구시키고, 어머니를 퇴원시킨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오이 피클과 커피를 먹고 싶어 한다. 알렉스는 슈퍼마켓으로 달려간다. 슈퍼마켓에 상품은 넘쳐나지만, 그것들은 서독, 네덜란드 등 서방산 제품들이고, 동독산 오이 피클이나 커피는 사라진지 오래다.
할 수 없이 알렉스는 쓰레기통을 뒤져 동독제 오이 피클 병과 커피 봉지 등을 찾아낸다. 이런 그를 보며 이웃집 노인은 한탄한다. '우리 젊은이들이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신세가 됐다'고…. 알렉스는 병과 커피봉투 등을 소독하고 라벨을 새로 붙인 후, 거기에 가게에서 사온 오이피클이나 커피를 담아 어머니에게 올린다.
하지만 어머니의 주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기 심심하니 침실에 TV를 놓아 달라고 한다. 알렉스는 침실에는 TV를, 침실 밖에는 VTR을 설치하고 옛날 동독TV녹화 테잎을 때맞춰 틀어준다.
그러나 알렉스가 침실 안에서 어머니를 속인다 해도 바깥세상의 변화까지 막을 수는 없는 일. 어느 날 어머니는 창밖 맞은 편 건물 벽에 코카콜라 현수막이 내걸리는 것을 보고 경악한다.
그날 저녁 TV뉴스에서는 코카콜라가 1950년대 동독에서 발명한 것으로, 오랜 특허분쟁 끝에 동독측이 승리했으며, 코카콜라 생산 공장이 들어섰다는 뉴스가 나온다. 이 뉴스는 알렉스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영화감독을 꿈꾸는 서독 출신 동료가 만든 가짜 뉴스다.
독일 전역은 월드컵 열기 속으로 빠져들고, 우승을 향해 한발 한발 나가는 독일팀의 善戰을 보며 동서독 사람들은 점차 하나가 되어 가지만, 알렉스는 어머니 침실 안의 DDR(독일민주공화국, 동독)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에 여념이 없다.
통일로 가는 가장 중요한 이정표 가운데 하나인 동서독 화폐통합이 진행되지만, 알렉스 가족에게는 운이 닿지를 않는다. 어머니가 돈을 감춰놓은 장소를 뒤늦게 기억해 내는 바람에 화폐교환마감일자를 놓치고 만 것이다.
어머니의 생일날을 앞두고 알렉스는 어머니가 재직하던 학교의 교장을 찾아간다. 그새 학교에서 해직된 교장은 술에 절어 살면서 '옛날에 우리는 가치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뭐냐'고 탄식한다.
어머니 생일날 조촐한 잔치가 벌어진다. 교장은 黨의 이름으로 어머니에게 선물바구니를 전달하고, 제자들(?)은 '풍요로운 우리나라∼'를 노래한다 (노래를 부른 제자들은 알렉스가 20마르크씩 주고 고용한 국민학생들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의식이 돌아왔던 것처럼, 어느날 갑자기 어머니는 걸을 수 있게 된다. 간만에 거리로 나온 어머니는 거리를 뒤덮은 서독 및 서방제 차량들, 해체되어 헬기에 매달려 가는 레닌의 동상 등을 보고 당혹스러워 한다.
그날 저녁 TV뉴스에서는 서독에서 新나치가 정권을 잡자 혼란과 실업에 지친 서독인들이 부다페스트 주재 동독대사관 등을 통해 대거 동독으로 망명하고 있다는 소식이 방송된다. 대사관 담장을 넘는 동독시민들, 특별열차편으로 서독으로 향하는 동독인들의 모습을 담은 자료 화면을 배경으로 아나운서(사실은 알렉스의 직장동료)는 '호네커 서기장은 서독 난민들을 받아들이기로 결단을 내렸다'면서 '요즘 베를린 시내의 서독 차량들은 서독난민들이 가져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감격한 어머니는 어떻게 하면 서독난민들을 도울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러는 사이에 알렉스는 더 이상 어머니를 속일 수 없다는 누나 아리안느와 갈등을 빚는다.
어느 주말, 시골에 있는 별장을 찾은 가족들은 행복감에 젖는다. 환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어머니는 숨겼던 진실을 고백한다. 아버지는 서독 여자와 눈이 맞아 망명한 것이 아니라, 非공산당원이어서 받는 차별대우에 견디다 못해 망명한 것이고, 자신도 아버지와 함께 떠나고 싶었지만 후환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다는 것, 서독으로 간 아버지는 처음 몇 년 동안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왔지만, 자신이 그 사실을 숨겨왔다는 것 등….
동독 체제뿐 아니라 자기 집안도 거짓에 기초해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여유도 없이, 어머니의 병세는 갑자기 악화되어 병원으로 이송된다.
알렉스는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데려온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앞두고-아울러 독일 통일을 며칠 앞두고- , 알렉스는 그동안의 거짓말의 大尾를 장식할 '세기의 거짓말'을 만들어낸다.
독일이 통일되는 날 저녁 뉴스는 에리히 호네커가 黨서기장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고, 前 우주비행사이자 동독군 장성인 지크문트 얀이 후계자로 지명됐다는 소식을 전한다(얀은 사실 기사 노릇을 하고 있었으나, 알렉스의 거짓말 작전에 동참한 것). 군복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앉은 신임 서기장은 '우리나라는 잘못된 길을 걸은 적도 있지만, 자유와 평등과 사회구성원들간의 조화에 바탕을 둔 체제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서독난민들도 우리 체제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라면서 '서독난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기로 했다'고 선언한다. 동독이 서독을 흡수통일한 것이다!
얀의 연설 속에 나오는 나라는 사실 1989년 당시 많은 동독인들이 추구하던(그러나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였다. 당초 그들이 요구하고 나선 것은 '통일'이 아니라, 보다 개혁되고 개방된, 민주화된 독일민주공화국이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던 나라가 장벽 너머 서쪽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스스로 서독으로의 편입을 희망하게 됐던 것이다.
바깥에서는 독일통일을 축하하는 불꽃이 터지고, 거리로 몰려나온 시민들은 黑赤金 3색의 독일국기를 앞세우고 독일국가를 열창하는 속에서, 어머니는 행복감에 젖어 눈을 감는다.
어머니의 유골을 알렉스가 만든 로켓(겉에는 동독 국가문장을 그려넣은)에 담아 쏘아 올리며, 아버지 로베르트와 자녀들, 알렉스와 아리안느 등을 서로 화해한다.
이 영화 속에는 베를린 장벽 붕괴 전후에서부터 통일에 이르기까지 동독 체제의 모순, 서독으로의 흡수 통일 과정에서 동독인들이 느끼는 희망과 절망 등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자신들이 평생을 지켜온 가치 기준이 무너지면서 기성 세대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역사의 격류 속에서 어떻게든 새로운 흐름에 적응해 나가려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대비되어 있다.
이 영화는 동독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1당 독재가 얼마나 엉터리 같은 체제였는지, 갑작스런 동서독 통일로 동독인들이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는지를 소리 높여 외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웃음 속 곳곳에서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들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배우들이 엎어지고 자빠지고, 억지로 말을 배배꼬고, 욕설을 쏟아내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관객들을 웃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의 역사와는 정반대의 역사를 만들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관객들을 충분히 웃긴다.
'굿바이 레닌'은 재미있고 좋은 영화이다. 물론 통독 과정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라도 갖고 있으면 더 재미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다.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기는 한데, 이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단 두군데 뿐이다. 요즘처럼 복합상영관이 많은 때에 이 영화를 상영하는 곳은 코엑스몰 內에 있는 메가박스(2호선 삼성역)와 김포공항 內에 있는 엠파크9(5호선 김포공항역)에서 상영한다 .
'굿 바이 레닌'
- 배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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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10-28, 0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