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은 인간사회에 있어서 가장 높은 정점(頂点)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뭇 백성을 다스리는 최고의 통치자를 말한다. 뿐만 아니라 최고의 통치자는 황제(皇帝)라 부르기도 하고 제왕(帝王)이라 부르기도 하며 그냥 왕(王)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전에서 살펴보면 황(皇)과 제(帝)와 왕(王)은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皇은 하나(一)로 통하는 이치를 밝힐 수 있는 통치자를 말한다. (明一者 謂皇)
帝는 道를 살필 줄 아는 통치자를 말한다. (察道者 謂帝)
王은 德을 통달할 수 있는 통치자를 말한다. (通德者 謂王)
그럼으로 皇帝는 명일찰도자(明一察道者)를 의미하는 것이고, 帝王은 찰도통덕자(察道通德者)를 의미하는 것이다.
백성들로부터 최고 통치자가 존경받는 까닭은, 바로 만물(萬物)에 통류(通流)되고 있는 이치(理一氣萬殊)에 밝고, 바르게 처신할 줄 알며(動而正日道), 모두와 조화롭게 어울릴 줄 아는(用而和曰德) 품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최고 통치자를 만민의 어버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며 백성들을 길러 준다하여 은혜롭게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요(生我者 父母也), 나를 길러주신 분은 임금이요(養我者 君也), 나를 가르쳐주신 분은 스승이다(敎我者 師也). 군사부일체론(君師父一體論)은 이 같은 논리에서 연유한 것이다.
나를 낳아주신 분이 아들딸인 나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고, 나를 길러주시는 임금님이 백성인 나를 속일 리가 없으며, 나를 반듯하게 자라라고 가르쳐주신 스승이 제자인 나를 나쁘게 내몰 리가 없다. 따라서 군사부(君師父)는 나(子女, 國民, 弟子)에게 있어서 신뢰의 영순위(零順位)이며, 존경의 극상적(極上的)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예부터 부모는 자녀들 앞에서 자살할 수 없는 것이며, 제왕은 국민 앞에서 자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승은 제자들 앞에서 자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환갑을 지난 자녀들에게 아침마다 車 조심하라 당부하는 분이 부모이기 때문이며, 호국보민(護國保民)의 최고 책임자가 제왕이기 때문이며, 자살이나 자해 행위는 백행(百行)의 근본인 효도에(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어긋난다고 가르친 분이 스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왕이 자살을 했다면 위에서 언급한 덕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제왕 350명(泰始皇帝로부터 마지막 황제인 傳儀에 이르기까지)과, 일본의 천황 125명(神武天皇으로부터 平成 今上天皇에 이르기까지)과 , 그리고 한국의 역대 임금님 216명(新羅 56王, 高句麗 28王, 百濟 31王, 駕洛 10王, 伽倻 16王, 渤海 14王, 高麗 34王, 朝鮮 27王)을 조사해본 결과, 자살한 제왕은 중국에 5명, 일본에 1명, 한국에 1명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중국 제왕 중 自殺者 제1호는 十六國時代 성한(成漢)의 2대왕인 유제(幽帝, 李期:313~338, 재위4년, 26세 때 自殺)였다. 그는 5명의 왕자 중 넷째였지만 즉위 후 교만하고 사치하고 정적을 많이 살해하다가 셋째 왕자인 이수(李壽)에게 몰려, 어느 지방의 현령(縣令) 별궁에 연금되자 자신의 요대(腰帶)로써 목을 매고 자살했다. (堂堂天子 被降, 還不如死…就用自己腰帶 自縊而死)
중국의 제왕 중 自殺者 제2호는 十六國時代 전진(前秦) 4대왕인 선소제(宣昭帝: 符堅, 338-385, 재위28년, 48세에 自殺)였다. 전쟁에서 패하고 선위(禪位) 압박을 받게 되자 먼저 가솔(家率)을 죽이고 자신은 목매어 자살했다(自縊而死).
제3호 自殺者는 오대십국(五代十國) 후양(後梁)의 말제(末帝)인 주우정(朱友貞:888-923, 재위11년, 36세 때 自殺)이었다. 후당(後唐)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자 자살의 길을 택했다.
제4호 自殺者는 金나라의 9대왕인 애종(哀宗: 完顔守緖, 1198-1234, 재위12년, 37세에 刺殺) 이었다. 蒙古軍에 의하여 성을 빼앗기고 대세가 기울자 서둘러서 金의 末王인 완안승린(完顔承麟)에게 양위하고 哀宗은 自殺했다.
제5호 自殺者는 明나라의 마지막 왕인 숭정제(崇禎帝: 朱由檢, 1611-1644, 재위17년, 34세 때 自殺)이었다. 만주족에 의해서 굴욕을 당할 수 없다하여 亡國恨을 품고 자살했다.
다음 日本의 自殺 天皇은 제81대 안덕천황(安德天皇: 1178-1185, 재위6년, 8세때 投江自殺) 이었다. 정적(政敵)들의 기세에 대항할만한 능력도 없었거니와 천황을 보필해서 정국의 혼란을 헤쳐 나갈만한 인물도 없었다. 혼란 중 친위세력에 의하여 西海로 피해가다가 결국엔 모두가 투강자살을 하게 되었다.
韓國史에 있어서 自殺한 제장은 고구려 14대 봉상왕(烽上王: 相夫, 재위9년, 292-299. 13대 西川王의 太子. 15대 姜川王: 乙弗과는 異腹兄弟)이다. 봉상왕은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의심이 많았다(幼驕慢 多疑忌). 재위7년이 되는 해에는 궁실증축을 서둘고 사치스런 화려함을 일삼으며 군신들의 간언(諫言)도 무시하고 이복동생인 을불왕자(乙弗王子)를 죽이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봉산(烽山)에서는 귀신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鬼哭于烽山).
9년째 되는 해에는 궁실을 더 화려하게 수리하기 위하여 국내 남녀 15세 이상 되는 백성들을 동원, 혹사하면서도 민생의 핍박상은 돌보지 않으면 위엄이 없다(君者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無以示威重)생각에서 민생고는 돌보지 않았다.
당시의 승상인 조리(助利)는 直諫하기를 군불휼민 비인야(君不恤民 非仁也), 신불간군 비충야(臣不諫君 非忠也). 즉 ‘임금이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이는 어진 임금이 아니요, 신하로서 임금에게 직간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충신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왕은 신하들이 왕을 폐위시키고 을불(乙弗)을 왕으로 삼기 위한 모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스스로 자살의 길을 택했다. 그 때 그의 왕자 형제도 따라서 자살했다고 한다. (群臣同謨廢之 迎乙弗爲王 王知不免 自縊 二子 亦從而死). 왕이 죽은 뒤에 봉산(烽山)에 장례하고 시호를 봉상왕(烽上王)이라 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살한 제왕들의 공통점은 망국(亡國)의 우(愚)를 범했거나 실정(失政)으로 인한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을 역사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5월23일 이른 아침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450m)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왜 자살했는지 그의 속마음을 아는 이가 없다. 고인은 말이 없기 때문이다. 유언이나 유서도 없으니 그 속내는 더욱 알 길이 없다. 다만 홈페이지에 남겨놓은 12줄 글 속에는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는 등의 글귀가 있었다고 보도는 전하고 있다.
고인이 남긴 주석(註釋)이 없는 한, 그 글귀의 뜻은 論語에서 말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당부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서 보면, 새가 죽을 때 그 울음소리는 정말 슬프고(鳥之將死 其鳴也哀), 사람이 죽을 때 남기는 말은 진정으로 선(善)하다(人之將死 其言也 善)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인의 빈소를 찾는 각계인사 중 선별적으로 조문을 거절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현직인 이명박 대통령의 조화까지도 파손하는 모습이 TV를 통해서 방영되고 있다. 이는 고인의 뜻에도 어긋나는 것이며, 국민장으로 거행하기로 한 장례 정신에도 위배되는 일이다.
임종직전의 유언은 극선적 진언(極善的 眞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인 관례로 되어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유언도 예외일 수 없다. 극선적(極善的) 진언 여야 한다. 그래야만 국론도 하나가 될 수 있고, 국력도 통합될 수 있으며, 사회적 갈등도 풀릴 수 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 되는 국론, 통합되는 국력, 갈등 없는 사회를 마다할 이유도 명분도 없기 때문이다.
조선조 영조(英祖) 때의 일이다.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적극 추진하기 위한 이는 박문수 판서(朴文秀 判書)였고, 그 대립적 상대방에는 영상인 조태채(趙泰采)와 그의 아들 조관빈 판서(趙觀彬 判書)가 있었다. 서로의 관계는 거의 원수처럼 여기는 처지였다.
조태채가 사망하자 박문수는 조문(弔問)을 간다고 알렸다. 그러나 상주인 조관빈은 이를 거절했다. 박문수는 다시 알렸다. 국가의 원로(元老)가 가시는 길에 조문을 안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자 조관빈은 상청에서 홀로 곡(哭)만 하고 돌아가라 했다. 박문수는 상주도 만나지 못한 채 곡만 했다. 그리고 박문수는 호령하듯이 큰소리로 고인의 관을 마당으로 끌어내게 하고 관 뚜껑을 열게 했다. 이처럼 소란이 나자 상주가 뛰어나오고 온 집 사람들이 다 모였다.
그때 박문수는 관 뚜껑에 낫 부러진 쇠가 박힌 것을 지적하면서 나라의 중신을 이렇게 모셔서는 안 되니 관 뚜껑을 다시 짜서 쓰도록 하라 했다. 조문마저 거절했던 조관빈은 박문수의 진심과 성의에 감동하게 되었고, 원수처럼 지냈던 두 가문 간에는 애경사(哀慶事)에 서로 왕래하는 화해의 길이 트였다.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도 고인의 기세(棄世)를 빌미로 하는 사회적 정치적 갈등요인을 만들어 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고인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국민장으로 고인을 보내는 장례 정신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국민장의 의의는 국민적 차원에서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데 있느니 만큼 국민 모두가 경건한 마음으로 장례에 임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장례 전에는 물론이려니와 장례 후에도 고인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만들어 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韓-中-日 역대 帝王의 자살史
- 金裕赫(恒山연구실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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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5-28, 14: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