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北核의혹을 조작했다"는 林東源

<이런 워싱턴의 네오콘들의 방해책동에 맞서 우리 민족은 힘을 합쳐 지뢰를 제거하고 '평화회랑' 건설을 위해 매진했던...>

<부시 대통령은 북을 '악의 축'이요 '선제핵공격'의 대상이라며 위협하고, 핵의혹을 조작해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미국은 국제기구까지 동원해 북측을 압박하고, 쌍무회담을 기피하며 북한이 핵문제의 국제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런 워싱턴의 네오콘들의 방해책동에 맞서 우리 민족은 힘을 합쳐 지뢰를 제거하고 '평화회랑' 건설을 위해 매진했던 일을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북한은 흡수통일과 북침의 공포증에 시달리며 생존전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북한정권의 선전물이든지 조총련이나 親北좌익 인사일 것이라 대답할 것이다. 우선 용어가 북한식이다. '네오콘들의 방해책동' '북침의 공포증' '핵의혹 조작' 등등의 용어는 대한민국의 건전한 국민이면 절대로 쓰지 않는 낱말이다.

이 글의 필자는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을 지내고 작년까지 세종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했던 林東源씨이다. 이 글은 '피스메이커'라는 그의 회고록에 실려 있다. 북한정권의 위협으로부터 조국의 안전을 지켜내는 일의 사령탑격인 국정원장 자리에 북한식 용어를 구사하는 인물을 앉힌 것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었다. 세종재단은 日海재단의 후신이다. 日海재단은 김정일이 지령한 아웅산 테러로 죽은 17명의 엘리트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성금을 모아 만든 재단이다. 그 재단 이사회가, 사사건건 김정일을 칭찬하고 그의 정책을 옹호하며 미국을 공격하는 林씨를 이사장으로 뽑은 것은 노무현 정권 시절이었다.

부시가 북한정권을 '악의 축'으로 부른 것은 사실이지만 '선제핵공격'의 대상으로 삼아 위협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미국의 전략개념속에는 먼저 공격하지 않은 집단을 향해서 핵무기로 선제공격한다는 개념이 없다. 부시 대통령이 그런 엄청난 발언을 했더라면 김대중, 노무현, 김정일 세력이 지금까지 입을 닫고 가만히 있었을 것인가? '김정일이 핵실험을 한 것은 미국이 못 살게 굴었기 때문이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김대중씨가 '핵선제공격 위협'을 그냥 지나쳤을 리가 없다. 林씨는 이 엄청난 주장의 근거를 대야 할 것이다.

미국이 핵무기로 선제공격할 수 있는 상황은 특별한 경우이다. 敵이 핵, 화생방 무기로 미국이나 동맹국을 공격한다는 것이 확실해진 순간 자위적 차원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선제공격을 할 수 있을 뿐이다. 林씨는 핵무장도 하지 않은 무고한 북한을 미국 대통령이 선제공격하겠다고 단언한 것처럼 왜곡했다. 북한이 재래식 무기로 한국을 공격하려 할 때는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 核무기 공격을 할 수 없다.


미국이 핵의혹을 조작했다는 주장도 동맹국에 대한 모함이다. 파키스탄 무샤라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파키스탄의 핵기술자 칸 박사가 북한에 우라늄 농축기술과 장비를 넘겨주었다고 시인했다. 우라늄농축에 의한 핵무기 개발 계획이 발각됨으로써 제네바 협정이 파기된 것이지 미국이 핵의혹을 조작하여 일방적으로 폐기했다는 주장은 엄청난 왜곡이다.

<이런 워싱턴의 네오콘들의 방해책동에 맞서 우리 민족은 힘을 합쳐 지뢰를 제거하고 '평화회랑' 건설을 위해 매진했던...>이란 대목의 의미는 김대중과 김정일 정권이 反美공조했다는 뜻이다. 林씨는 이를 '우리 민족은 힘을 합쳐'라고 표현했다. 700만 동족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김정일 정권이 민족반역자인가, '우리 민족'인가? 민족공조인가 민족반역공조인가?

북한이 북침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도 사실과 다르다. 한국과 미국이 북침할 전략과 국가의지가 있는가? 그런 전략과 의지도 없는데 누가 북침하겠다는 것인가? 군인 출신인 林씨가 잘 알 것이다. 황장엽 선생은 '김정일은 북침 걱정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 김정일이 북침을 걱정한다는 말은 남한에서 만든 말이다'고 했다.

국군이 단독으로 북침하는 것을 미국이 좌시할 리도 없다. 韓美동맹은 한국이 공격을 당할 때만 작동한다. 한국인들에게 北侵이란 말은 '6.25 북침설'을 연상시키는 禁忌語(금기어)이다. <북한은 흡수통일과 북침의 공포증에 시달리며 생존전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란 말은, 김정일의 처지를 변호하여 핵개발까지도 자위적 생존전략임을 강변하기 위하여 친북세력들이 많이 써 먹는 억지이다. 그런 이야기를 국정원장을 지낸 사람이 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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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원, 국군포로송환요구를 '냉전수구세력의 방해'라고 표현


좌익들이 쓰는 용어로써 애국자를 비난하는 사람이 對共정보수사기관인 국정원의 원장이었다.
趙甲濟

햇볕정책의 핵심 집행자 중 한 사람이고 對北불법송금 사건에도 일정한 책임이 있는 林東源(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피스메이커'라는 회고록을 썼다. 중앙books에서 나온 이 책의 474 페이지엔 이런 대목이 있다.

<(2000년) 8.15 이산가족 교환방문 후 9월 초 우리 정부는 화해의 상징으로, 북한에 돌아가기를 원하는 비전향장기수 63명 전원을 판문점을 통해 무조건 송환했다. 분단피해자들의 인권을 존중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성숙한 자세를 과시한 것이다.
당연히 냉전수구세력의 송환반대와 방해가 극심했는데, 이들은 '가치관의 혼란 우려' '북측의 체제선전에 이용당할 우려' 등을 들먹이며 '탈북자 및 국군포로 문제와 연계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송환 반대 여론을 조성했다. 7년 전 이인모 노인을 비롯한 비전향장기수 송환을 반대할 때 들고나온 논리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씨의 용어선택에 문제가 있다. 63명은 비전향장기수이기도 했지만 북한정권을 위해 복무한 간첩과 빨치산 등이었다. 양심수가 아니었다. '화해의 상징'이란 말도 맞지 않다. 간첩과 빨치산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것은 한국과 국민이다. 가해자는 이들과 북한정권이다. 화해는 가해자가 사과함으로써 시작된다. 피해자가 가해자한테 서비스하는 것은 화해가 아니라 굴종이다. '화해의 상징'이 아니라 '굴종의 상징'이란 말이 정확할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분단피해자들의 인권을 존중하겠다면 분단피해자들이 누구인지 定義할 필요가 있다. 임씨는 간첩질과 빨치산 행위를 하여 조국을 뒤엎고 적화혁명을 하려 했던 반역자들을 '분단피해자'로 보고 있다. 이는 북한정권이나 남한 좌익들의 시각과 비슷하다. 정상적인 국민들중 간첩과 빨치산들을 '분단의 피해자'로 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건전한 국민들은 6.25 납북자들, 휴전 이후의 납북어부들,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들을 북한정권의 피해자로 본다. 임씨는 이 피해자들의 인권을 생각하는 이들을 '냉전수구세력'이라고 호칭했다. 그는, 간첩 빨치산을 북송하려면 국군포로를 송환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주장을 한 국민을 '냉전수구세력'이라고 불렀다. 이런 용어사용법은 북한정권이나 남한좌익과 일치한다.

한편, 납북자와 국군포로 등 自國民의 인권을 외면하고 主敵의 부하들 인권만 챙겨주는 행위를 임씨는 '인권을 존중하는 정부의 성숙한 자세'라고 정의했다. 김정일 편에 선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임동원씨가 '냉전수구세력'이라고 표현한 국민들은 자유와 헌법을 소중하게 여기는 애국자들이다. 임씨는 이 애국자들에 대하여 냉소적인, 아주 감정적 표현을 했다. '들먹이며' '방해가 극심' '고스란히 반복'이라는 말이다. 특히 '들먹이며'라는 단어는 비아냥거릴 때 쓰는 말이다. 북한이 불법으로 억류하고 있는 국군포로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애국자들을 비아냥거리고 있는 사람이 체제수호 기관의 책임자였다! 좌익들이 쓰는 용어로써 애국자를 비난하는 사람이 對共정보수사기관인 국정원의 원장이었다.

임씨가 국군포로 송환을 요구한 애국자를 비아냥거리려면 최소한 북한으로부터 국군포로를 한 사람이라도 데리고 나왔어야 했다. 김대중 정부와 임동원씨는 김정일한테 국군포로를 돌려달라는 말 자체를 꺼내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가 북송한 63명 중엔 일본인을 납치해갔던 辛光洙라는 거물 공작원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2002년에 그 2년 전에 북송된 辛光洙를 인터폴을 통하여 국제수배했다. 신광수는 일본인을 납치한 범인이 밝혀진 유일한 경우이다. 신광수는 안기부 조사에서 김정일로부터 직접 납치 지령을 받았다고 자백했었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가 신광수를 일본으로 넘기지 않고 김정일 품안으로 보내준 것은 결과적으로 김정일의 범행 物證을 인멸한 셈이다. 김대중, 임동원씨가 양심이 있다면 납치범 신광수를 보내주면서 납치된 일본인을 돌려 달라고 하든지 生死라도 확인해달라고 요구했어야 했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 윤리가 아닌가?

임동원씨의 논법에 따르면 납치된 사람은 외면하고 그 납치범을 돌려보낸 행위가 '인권을 존중하는 성숙한 자세의 과시'가 된다. 그는 김정일을 기쁘게 하고 애국자의 가슴에 피 눈물이 흐르게 한 행위를 '인권 존중' '성숙한 자세'라고 미화하는 사람이다.

임동원씨가 국정원장 시절이던 2000년 6월 모 국정원 직원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거액의 不法자금을 보냈다. 간첩 잡는 기관을 간첩을 위한 봉사기관으로 전락시킨 임동원씨는 지금도 세종연구소를 운영하는 세종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임동원씨는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기소되었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사람이다. 그는 지난 연말, 대법원에 상고했다가 갑자기 상고를 취하한 지 나흘만에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의하여 사면복권되었다.

反헌법적 對北정책의 책임자인 김대중, 임동원씨의 행적에 대하여 국가적 차원의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확신을 준 것이 임씨의 회고록이다. 이 회고록은 촛불난동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6월에 출판되었다. 우파정권이 들어선 뒤에 낸 책에서 우파, 즉 대한민국헌법 수호세력을 '냉전수구세력'이라고 지칭할 정도이면 임씨는 믿는 구석이 있든지, 한국의 우파를 참으로 우습게 보는 모양이다.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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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보도

2004년 11월21일 세종재단은 최근 이사회를 열어 임 전 장관을 신임 이사장으로 선임했다고 밝혔다. 세종재단은 1983년 버마 랑구운사태를 계기로 일해재단으로 출범했다 6공화국 들어 5공비리청산작업의 여파로 명칭이 바뀐 민간 재단법인이다. 하지만 외교안보분야 연구기관인 세종연구소를 산하에 두고 있어 통일부 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임 이사장은 DJ정부 당시 통일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 등을 역임한 ‘대북햇볕정책의 산 증인’이다.

특히 임 이사장은 2002년 4월 당시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특사로 방북하는 등 북한 고위당국자들과 개인적 신뢰가 깊은 거의 유일한 남측 인사다. 최근 남북관계 경색국면을 해소하기 위해 전방위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정부 입장에서도 꼭 필요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임 이사장의 對北 채널과 국민의 정부 당시 남북관계 노하우를 활용하기위해 참여정부가 그를 기용했다는 설이 나온다. 한 외교 관계자는 “이종석 국가안보회의 사무차장이 세종연구소 출신인 점이 임 이사장 선임과 관련이 있다”고 전했다.

임 이사장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對北송금사건으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아 칩거해왔다. 하지만 지난 5월 석가탄신일 특별사면 이후 6ㆍ15 남북공동선언 4주년 기념행사에 북측 고위인사를 초청하고 미국의 對北 강경압박정책을 비판하는 강연활동을 활발히 벌이는 등 보폭을 넓혀왔다.

임 이사장은 “남북관계는 정권 차원이 아닌 초당적, 국민적 민족적 관점에서 다뤄야 하기 때문에 정부 자문에도 열심히 응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정상원 기자 ornot@hk.co.kr
입력시간 : 200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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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재단 사이트


<세종연구소를 부설기관으로 두고 있는 세종재단은 1983년 10월 미얀마 랑군 사태 후 순국 외교사절들의 유가족을 돕기 위한 모금운동과정에서 정·재계의 지도급 인사들에 의해 창립되었다. 창립자들은 한민족의 고통과 시련이 궁극적으로 남북한의 분단과 긴장에 기인하고 있으며, 겨레의 염원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이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이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공유하였다. 이후 재단 설립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으며, 그 결과 1983년 11월 25일 창립총회를 갖게 되었다. 이후 1984년 7월 재단업무가 개시되었으며, 1985년에 장학사업이, 1986년 1월에 연구사업, 1988년 아웅산 유가족 소득지원사업이 시작되었다.

법인 명칭이 현재의 '재단법인 세종재단'으로 개칭된 것은 1996년 9월이며, 현재 재단 이사장, 이사회, 감사, 법인사무국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종재단은 '나라의 안전과 남북통일 및 대외관계에 필요한 연구와 교육연구를 통해 나라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설립목적에 따라, 부설 세종연구소를 통한 '연구사업'과 세종 국정과제 연수과정인 '교육·연수사업'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 2008-09-04, 11:09 ]




6‧29선언 이후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급격히 늘어난 노사분규는 6공 출범 후에도 수년간 지속되었다. 6공 이전인 1986년에 276건이던 노사분규는 6‧29선언 이후 1989년까지 3년간 해마다 평균 2400여 건씩 발생했다. 이로 인해 임금은 급상승해 1987년 연(年)9%대였던 임금상승률이 6공화국 기간 중 해마다 평균 16%씩 올라 재임 5년간 115%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그 결과 근로자들의 소득은 두 배 이상 올랐고 이는 중산층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나는 임기 중에 국민들에게 약속한 1인당 GNP 목표(5000 달러)를 2000 달러 초과한 7000 달러를 달성함으로써 중산층을 확대시키고 270만 호 이상의 주택을 건설해 주택가격 안정과 토지투기 억제를 실현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물가상승‧노임상승‧건자재파동 등 부작용이 있었음을 시인하며 이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 또한 당시의 최고책임자로서 겸허하게 수용한다.


5공이 끝나는 시점인 1987년 2백24억 달러였던 우리나라 순외채가 6공이 끝나는 시점인 1992년에는 1백10억 달러로 절반으로 줄었다. 또 1987년 3천2백 달러이던 1인당 국민총소득은 7천2백 달러로 늘어나고 무역 규모도 이 기간 거의 2배로 증대되었음에도 총외채 규모는 5년 전과 비슷한 4백28억 달러 수준이었다.



6공화국 출범 직전인 1987년 현재 우리나라 전체 주택 수는 6백45만 호로 주택보급률은 전국 69%, 서울 56%였다. 당시의 주택건설은 1987년 한 해 평균 24만 호로 1983~87년까지 5년간 1백21만 호가 지어졌다.
그러던 것이 6공화국 기간 중인 1988년~92년 사이의 5년간에 모두 2백72만 호를 지었다. 전국 주택 수의 40%를 5년간에 지은 셈이었다. 연평균 55만 호씩 늘어난 것인인데 이에 따라 서울의 주택보급률이 87년 56%에서 92년에는 67%로 부쩍 높아졌다.
그 덕에 1988년 18%, 1989년 19%, 1990년 38%에 이르던 주택가격 상승률이 1991년에 가서는 마이너스 5%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1977년부터 시작된 국민의료보험제도를 1989년 7월 도시지역 일반주민에게까지 확대‧적용했다. 이처럼 12년 만에 전 국민을 상대로 별 재정적 어려움 없이 의료보험제도를 정착시킨 사례는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해 주었다. 그 결과 1987년 51%에 지나지 않던 의료보험 수혜자가 1992년에는 95%로 증가했다.
다음으로는 국민연금제도의 기반을 구축한 것을 들 수 있다. 1988년에 10인 이상 고용사업장을 가입시키고 1992년에는 5인 이상 사업장에까지 확대‧실시했다. 5인이라고 하면 자그마한 음식점에까지도 국민연금을 적용한 것이었다. 재임 중에 노인복지법을 다섯 차례나 개정해 노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
1988년 67개소이던 노인시설이 1992년 123개로 증가하고 수용 인원도 1만7000 명에서 2만5022명으로 늘어났다. 1988년 초 스무 곳에 불과하던 사회복지관이 1992년 말까지 175곳으로 대폭 늘어났다. 1991년에는 70세 이상 저소득층 노인 7만6000 명, 1992년에는 9만1000 명에게 사상 처음으로 노령수당이 지급되었다. 아울러 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복지 전문요원을 동(洞) 단위로 3000여 명을 고용했다.


장기적인 SOC 투자로 서해안고속도로, 경부고속전철 및 영종도(인천)국제공항 등을 착공했다. 이런 기반시설들은 10여년이 흐른 오늘날 한국인들의 삶을 바꿔놓고 경제가 돌아가는 데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요구되는 신국제공항‧고속전철 등 SOC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곤욕을 겪기도 했다. 야권(野圈)에서는 이것을 정책 프로젝트로 인식해 우리가 마치 정치자금이나 조달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것 같았다. 국회에서 야당이 영종도신공항과 경부고속전철 예산을 무조건 깎겠다고 해서 상당히 애를 먹었다.


1990년 5월 7일 나는 강영훈(姜英勳) 국무총리 등 전 국무위원이 배석한 가운데‘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문’을 발표, 부동산‧물가‧증시문제 등 경제 현안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고 불법 노사분규 등에 대한 정부의 강경 대처 방안을 천명했다.
이어 10월 13일‘국민과의 대화’에서는 특별선언을 통해“국민 여러분이 직접 뽑아주신 대통령으로서 임기 후반을 맞은 저는 국민 여러분의 여망에 부응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일에 정부의 역량을 집중적으로 투입할 것”이라고 말하고“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전면 소탕해 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2) 범죄와의 전쟁-민생치안의 확립

․‘10․13특별선언’을 통해‘범죄와의 전쟁’선포
-발생률 감소, 검거율 증가(주요 범죄감소율 5.9%, 검거율 8.7%증가)
-범죄 기승 분위기 제압, 조직폭력배 320개파 3,509명 및 상습사기범 164명 검거
․경찰력증강 3개년계획(1989~1992) 추진
-경찰관 24,463명 증원, 경찰서 21개소, 파출소 179개소 증설, 112순찰차 1,926대 운용
․시민 자율방범 능력 증진(자율방범대 5,843개 137,868명)
․향토예비군 방범순찰 활동(1991.4.1~1992.5.31)
-현행범 113건 검거, 응급환자 후송 91건, 음주자 귀가조치 183건 등



결국 교육계 인사들이 나서서 설득하고 심지어 학부모와 동문들이 탈퇴를 종용하는 등 나라 전체가 떠들썩하는 소동을 겪은 후에 1만2천 명이던 가입자가 1천5백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끝내 잔류를 고집한 교원들이 징계 해직을 당하는 결과를 빚고 말아 두고두고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지금도 많은 국민들은 앞으로 나라의 동량(棟梁)이 될 아이들을 가르치고 육성하는 선생님들이 노동조합을 하는 것이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옳은 것인지 의문을 갖고 있다.
이제는 전교조가 합법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전교조 결성을 저지하고 와해시켜야만 교육을 정상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생각은 지금에도 변함이 없다.


1백60개국에서 1만3천여명의 선수‧임원이 참가하고 개폐회식 14만명을 포함해 3백50만명이 경기장에 입장해 관람했다. 문화‧예술축전, 청소년 캠프, 국제학술회의 등의 행사에도 전세계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해 화합의 의미를 더 해 주었다.
서울올림픽이 우리의 위상을 얼마나 높여주었는 가는 1백23개국으로부터 1만5천여 명의 보도진이 찾아와 올림픽과 함께 한국과 한국인을 자세히 소개하고 방송사들의 총위성중계시간이 9천2백시간으로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의 3배에 달했던 데서도 실감할 수 있다.




<표 4-10> 줄어드는 노사분규
1987 1988 1989 1990 1991 노사분규(건) 3,749 1,873 1,616 322 234 임금상승률(%) 11.6 19.6 25.1 20.2 16.8


․대통령비서실에‘사회간접자본시설투자기획단’설치(1992.1)
-1991년도 세계잉여금 1조원 투입 등 본격적으로 투자 확충(1991~1992년 수송부문 투자 5조 7천억원, 1989~1990년간보다 2배)
-수도권, 부산권 및 경부축의 수송애로를 타개하기 위해 항만․도로․철도 등 관련부문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재원도 집중 투입
-용지보상제도 개선 등 관련제도 개선 병행 추진
․고속도로 및 국도의 획기적인 확충 추진
-제2경인고속도로 신설, 경인고속도로 확장, 서울-청원 고속도로 확장, 부산 및 광양항 배후도로 등 물류집중 및 수송애로 구간 도로 확충 추진
-국도확장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1992년 말까지 교통애로 국도구간 910km 중 440km(48%)의 교통애로 완전 해소
․항만시설능력 확충
-부산항 3단계 완공(1991) 및 4단계 건설로 (1996) 컨테이너 처리 능력을 3배 이상으로 확대
-광양항 컨테이너부두 건설(1995년 1단계 완료)로 부산과 함께 컨테이너항의 2원화체제 구축
-수도권 항만 적체 완화를 위하여 1991~1993년간 인천항 부두 확장에 이어 아산항을 1994년까지 개발하여 수도권 항만시설 능력을 2배로 제고
․철도수송능력 확대
-서울-구로 3복선 1993년 완공, 구로-부평 복복선 전철사업 1995년 완공으로 경인선 수송능력 2배 확대
-수원-천안 복복선 및 열차 장대화 사업을 1995년까지 추진하여 경부선 수송능력 60% 확대
․경부고속전철 건설 추진(1990년 6월 노선 선정, 92년 6월 착공)
․영종도, 수도권 신공항 건설 추진(1990년 6월 입지 선정 1992년 11월 착공 예정)
․통신시설 확충 및 서비스 개선
-전화시설의 대량공급(872만 회선)
-제주-본토간 해저 광케이블 개통(1990.4)
․2000년대를 대비한 장기 사회간접시설 배치구상 수립 추진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 기반조성
-에너지공급 확대
석유비축 : 1987년 3천 1백만 배럴→1991년 4천만 배럴
전력공급 : 1987년 천 9백만 kw→1991년 2천 1백만 kw

(13) 균형개발-지방화시대의 개막
․서해안 개발사업 본격 추진
-2001년까지 122개 사업 22조 3,600억원 투입
-목포 대불․군장․대산 산업기지 건설
-서해안 고속도로 착공
․지방금융기관 설립 등 지방경제 활성화 시책 추진
․지방교육 육성
-교육자치제 실시 및 지방 교육재정 지원



(2) 민주화와 함께 이룬 경제발전

․1960년대 초 이후 정치민주화를 희생하면서 달성했던 경제성장보다 민주화와 병행해서 이룬 6공화국의 경제발전을 대가도 컸으나 그 만큼 의미가 큼
․과거와는 달리 지난 4년간 고도성장의 가장 큰 혜택이 근로자들에게 돌아감
(노동소득 분배율 1987년 53%, 1991년 60%)

(3) 국제수지 및 외채

․1986~1989년간 흑자기간에는 외부요인에 의해 경상수지흑자 발생
․1991년에 수출은 10% 정도의 정상적인 증가율을 보인 반면 수입은 17%로 크게 증가하여 경상수지적자 유발
․1992년에는 수출이 10%대의 높은 증가율을 유지하는 가운데 수입증가율이 크게 둔화되어 경상수지가 현저히 개선
․순외채는 1987년 224억 달러로 GNP의 17.4%에 달했으나 1991년에는 125억 달러로 GNP의 4.5% 수준으로 감소

<표 4-2> 국제수지 및 외채
구 분 1987 1988 1989 1990 1991(계획) 1992(전망) 경상수지 99 142 51 -22 -87 -50
총외채 356 312 294 317 393 425
순외채 224 73 30 49 125 150
GNP대비% 17.4% 4.2% 1.4% 2.0% 4.5% 5.0%

(4) 국민주거안정의 획기적 전기-주택 200만호 건설

․‘1988~1992년간 205만호 건설계획’초과 달성
-92년 말까지 착공기준 264만호 예상
-주택 가격도 1991년 4월을 기해 10~20% 하락
-우리 국민 약 1,000만명에게 새 주택공급
※ 264만호는 1987년 당시 우리나라 총주택 645만호의 41%에 해당
․주택보급률 : 1987년 69%, 1992년 75%
<표 4-3> 연도별 주택보급 현황
1981~87 1988 1989 1990 1991(계획) 1992(계획) 88~92 155만호 32만호 46만호 75만호 61만호 50만호 264만호

․저소득층을 위한 획기적 주거안정대책 추진
-도시영세민, 저임금근로자 등
-200만호중 70%, 145만호는 무주택 서민에 공급

<표 4-4> 영구임대주택․근로자주택 건설 현황
구 분 계획물량 1991말 1992계획 소요재원 영국임대주택 25만호 17만호 3만호 4조원(재정) 근로자 주택 25만호 10만호 6만호 3조원(국민주택기금)

․전세값 안정 등 서민주거생활 개선을 위한 주택공급 확대
-다가구, 다세대 주택 보급확대(1988~91년간 65만호)
-전국 220개 지구, 7만 6천동 대상 주거환경 개선사업 추진
․수도권 주택난 해소를 위해 5개 신도시 건설 추진
-1992년 말까지 25만호 분양계획
-1992년 말까지 5만호 입주

(5) 제조업 활성화를 위한 종합대책 추진

․산업구조는 건실한 방향으로 변화
-1차산업 감소, 2차산업 28%대 유지, 3차산업 증가
-1991년에 이어 제조업 성장률이 전체 GNP 성장률을 상회

<표 4-5> GNP 성장률 및 제조업 성장률
구 분 91년간 92상 GNP성장률 8.4% 6.7% 제조업 성장률 8.5% 8.2%
-제조업중 경공업 대 중화학의 비율도 1987년 43:57에서 1991년 35:65로 바뀌어 산업구조 고도화
-제조업의 부품산업․소재산업․기계산업 기반이 취약, 자본재와 부품의 대외의존도가 높은 구조




․주한 외국 공관수 대폭 증가
-1987년말 55개 상주 공관
-1992년 10월 현재 83개 공관
․1991~1992년 8월간 21개국과 수교(CIS 10개국 포함)
(1991년) 토고, 마이크로네시아, 마샬군도, 알바니아, 부룬디,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1992년) 앙골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몰도바, 쿠르크메니스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아제르비이잔, 타지키스탄, 탄자니아, 중국


<표 3-1> 사회주의국가와의 수교일지
국 명수 교 현지공관개설주한공관개설
헝 가 리 1989. 2 1989. 2 1989. 2
폴 란 드 1989.11 1989.11 1990. 1
유 고 1989.12 1990. 2 1990. 3
체코슬로바키아 1990. 3 1990. 6 1990. 6
불 가 리 아 1990. 3 1990. 6 1990. 9
루 마 니 아 1990. 3 1990. 6 1990. 7
몽 골 1990. 3 1990. 6 1990. 2
소 련 1990. 9 1990.10 1990.12
알 바 니 아 1991. 8 駐유고대사관 겸임 미설치
중 국 1992. 8 1992. 8 1992. 8
1991년 10월 중 발트 3국과 수교, 1992.1~4월 중 CIS 10개국과 수교





<표 1-1> 민주화 이후 언론매체의 증가
매체수6․29이전 1992.9.30 현재 증가


일간신문 32 121 89


방 송 7 14 7

주간․월간 1,404 6,570 5,166




現代史 세 번의 구조개혁

우리나라는 1948년 8월15일 건국한 이후 지금까지 세 차례 구조개혁을 했다. 첫째가 1948년 체제이다. 조선조적 봉건체제의 잔재와 일제(日帝)의 억압과 공산 전체주의의 도전을 극복하고 탄생한 체제였다. 건국의 주역(主役)인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이 체제의 기본이 되는 헌법과 군대를 만들고 교육 및 농지개혁을 통해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재산과 교양을 갖도록 노력했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국가정체성(正體性)으로 삼은 국민국가로 탄생했다. 민족사에서 최초로 국민들이 국가운영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48년 체제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민주주의 경험자도 없었고, 민주주의에 쓸 돈도 적었으며, 민주적 사회 제도도 전무(全無)했다. 가진 것은 헌법뿐이었다.
더구나 6·25 남침을 당해 국가생존을 건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상당 부분이 실천 보류되거나 제약되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의 3大 요소인 선거의 자유, 언론자유, 사유(私有)재산권의 자유는 명맥을 이어갔다. 지난 60년간 한국은 한 번도 진정한 의미에서 독재였던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의 구조개혁은 박정희(朴正熙) 장군이 주도한 1961년 체제의 성립이다. 5·16 군사혁명으로 국가지도층이 민간정치인에서 군(軍) 장교단으로 바뀌고, 국가제도가 효율적으로 정비되었다. 직업 관료제도·기업·군대가 생산과 건설을 최고의 미덕(美德)으로 삼고 국민들을 끌고 갔다. 군사문화의 효율성과 생산성이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 들었다.
이 체제 하에서 대한민국은 경제발전에 성공해 민주주의의 물질적 제도적 토대를 만들었다. 박정희·전두환(全斗煥) 통치 시절과 겹치는 1961년 체제는 자유를 지향한 권위주의 체제였다. 독재라기보다는 '민주적 권위주의 체제'였다.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고 경제 우선(優先) 발전 전략으로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 체제였다.

현 체제는 ‘1987년 체제’

세 번째 구조개혁은 1987년 6·29선언 이후이다. 민주적 구조개혁이었다. 내가 주도하여 만들어 낸 1987년 체제는 탈(脫)권위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였다. 2008년의 한국은 1987년 체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1998년 좌파정권이 등장하고 2003년에는 2기(期) 좌파정권이 들어섰으나 1987년 민주체제의 성격을 바꾸지는 못했다. 1987년 민주체제가 한국의 성숙해지는 사회경제 발전을 반영하고, 그곳에 뿌리를 내린 거목(巨木)이었으므로 그 누구도 이를 자르거나 뽑을 수 없었다. 2007년 12월19일 선거는, 1987년 체제가 10년간의 반(反)민주적 좌파의 도전을 극복하고 재기(再起)했음을 보여 주었다.
내가 이끈 민주적 구조개혁 기간에 전면적(全面的)인 자유화, 개방화, 자율화, 민주화가 일어났다.

1. 대통령 직선제 개헌
2. 정치활동의 자유 보장
3. 언론자유 확대: 신문 출판의 자유화
4. 사회단체 자율적 운영: 농축산 조합 등
5. 노사관계 자율화: 노조에 대한 정부 개입 금지
6. 여성권익 보호 및 사회참여 확대: 가족법 모자보건법 보육법(保育法) 제정 및 개정. 공무원 채용 남녀구분 폐지
7. 지방자치 시작
8. 유엔 가입
9. 한중(韓中)-한소(韓蘇)수교
10. 북방정책: 동구 공산권으로 진출
11. 남북대화와 기본합의서
12.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13. KTX, 영종도 공항, 서해안 고속도로 결정
14. 서해안 개발 시대 선언
15. 5대 신도시 및 주택 200만 호 건설
16. 토지공개념 도입
17. 전(全) 국민 의료보험화
18. 국민연금도입
19. 중학교 의무교육 확대
20. 서울올림픽 성공
21. 전교조 불법화 및 해산
22. 범죄와의 전쟁


1987년 6·29 선언에서 나는 8개항의 약속을 했었다.

1. 대통령 직선제 개헌
2. 공명한 선거관리
3. 김대중 사면 복권
4. 국민 기본권 보장
5. 언론규제 철폐
6. 지방자치와 사회단체의 자율 보장
7. 정당활동의 보장
8. 사회淨化

민족사의 金字塔

재임(在任) 시절의 업적을 보면 내가 이 8개항을 실천하려고 정직하게 노력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6·29 선언으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나 그가 선언상의 약속을 실천했다는 점은 소홀히 한다.
나의 재임 5년은 국내외의 전환기가 겹친 시기였다. 국내에서는 민주화의 소용돌이, 국외에서는 공산체제의 붕괴가 일어났다. 나는 민간부분의 자율과 경쟁을 촉진하고, 북방정책으로써 공산권 붕괴의 호기(好機)를 이용해 국가의 활로(活路)를 찾았다. 2007년 한중(韓中)무역액은 1400억 달러에 달해 전체 무역액의 약 20%를 차지했고 머지 않아 한미(韓美) -한일(韓日) 무역액을 합친 액수를 능가한다. 한중(韓中)수교 15년 만에 이뤄진 엄청난 변화이다.
6·29 선언 실천의 결과로 한국은 경성(硬性)국가에서 연성(軟性)국가로 변했다. 경성국가는 지도자가 실패하면 체제 전체가 위기에 빠진다. 연성국가는 복원력과 유연성이 있다. 지도자가 실패해도 민간부문의 자율과 자생력(自生力)으로 국가와 체제는 위기를 극복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한국은 실패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1987년 체제는 수많은 시행착오(施行錯誤)와 갈등과 타협, 그리고 고귀한 희생과 헌신(獻身)을 통해 만들어졌다. 한국인의 공동작업이 이룬 민족사의 금자탑이었다. 이 일에 피·땀·눈물을 함께 흘린 세대(世代)를 역사는 영원히 기억하고 감사할 것이다. 그런 위대한 한국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나의 행운(幸運)이었다.


盧泰愚 대통령 연보


1932월 8월14일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596번지에서 出生 (음력 7월16일)
1951년 7월 경북고등학교 졸업
1955년 9월 육군사관학교 (제11기) 졸업, 육군소위에 임관
1958년 9월 정보학교 영어교관
1959년 11월 美 특수전 학교 심리전과정 수료
1960년 11월 군사정보大 영어번역 장교
1968년 6월 육군대학 정규과정 졸업 (중령)
1971년 11월 보병 연대장 (대령)
1974년 10월 제9공수 특전여단장 (준장)
1978년 1월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준장)
1979년 1월 제9사단장 (소장)
1979년 12월 수도경비사령관 (소장)
1980년 8월 국군보안사령관 (중장)
1981년 7월 전역 (대장), 제2정무장관
1981년 9월 국가안전보장회의 위원에 임명
1982년 3~4월 체육부장관
1982년 4월~1983년 7월 내무부장관
1983년 7월~1986년 5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
1984년 10월~1985년 4월 대한체육회 회장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1987년 6월29일 ‘국민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6·29선언) 발표
1987년 6월30일 6·29선언에 따른 향후 정국구상 논의 위해 청와대 방문
1987년 7월 2일 민주당 金泳三 총재, 신민당 李敏雨 총재, 국민당 李萬燮 총재를 잇달아 방문 (6·29선언 및 全斗煥 대통령의 7·1특별담화 내용을 구체화시키는 방안 등에 관해 의견교환)
1987년 7월 3일 정부종합청사에서 열린 黨政정책조정회의에 참석 (6·29선언의 세부실천계획을 조속히 수립해 주기를 당부)
1987년 7월10일 민정당 총재인 全斗煥 대통령이 총재직을 사퇴함에 따라 민정당 총재권한 대행 취임
1987년 7월29일 민정당 중집위 주재 (黨 개헌요강 확정)
1987년 8월 5일 盧泰愚 대표가 黨총재로 공식 선출됨
1987년 8월 6일 黨총재 취임 후 첫 기자회견 (대통령선거 등 정국운영 견해 밝힘)
1987년 8월31일 改憲협상타결 후 기자간담회 (대통령선거법 개정방향과 관련, 공정성 강조)
1987년 9월 2일 민주당의 金泳三 총재와 첫 단독회담 (10월말경 새 헌법안의 국민대표 실시, 12월 20일 이전 대통령선거 실시 등 앞으로의 정치일정과 민주화 제반조치의 성실한 실천 등 5개항에 합의)
1987년 9월 4일 국민당의 李萬燮 총재와 회담, 정국현안 논의
1987년 9월 5일 중앙위 청년분과위와 서울시 청년분과위의 위원장 경선에 나섰던 입후보자들을 총재실로 불러 격려
1987년 9월12일 후쿠다 前 일본수상의 예방을 받음(6·29선언과 정치발전문제 등에 관해 환담), 미국·일본 방문에 앞서 특별담화 발표(미국의 통상압력과 對日무역역조에 대한 국내 비판 전달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힘)
1987년 9월13일 미국·일본방문 위해 출국(이하 현지시간)
1987년 9월14일 백악관으로 레이건 美대통령 방문(한국의 정치발전, 韓美 통상마찰 해소 등 안보협력 등에 관한 광범위한 의견교환), 駐美 대사관저에서 교민을 위한 리셉션 개최(6·29선언의 배경, 訪美 목적 등 설명)
1987년 9월15일 조지 슐츠 美국무장관과 회담(韓美무역마찰 문제 집중 논의), 워싱턴소재 존스 홉킨스 대학 국제대학원 연설(6·29선언 취지, 서울올림픽, 안보문제 등 언급)
1987년 9월16일 내셔널 프레스클럽의 초청으로 오찬 연설(6·29선언은 국민의 의사를 존중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을 반영한다고 설명)
1987년 9월18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수상과 회담(한반도 주변정세, 무역불균형 문제, 在日한인 법적 지위 개선, 한국의 민주화 정치 일정 등에 관해 의견 교환), 자민당 黨舍 방문(다케시타 간사장, 아베 신타로 총무회장과 별도 면담), 공명당의 야노 준야 위원장과 환담, 在日거류민단 주재 리셉션 참석
1987년 10월 6일 국회 본회의에서 대표연설(자유공정선거로 정통성 시비를 매듭짓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민주화를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힘)
1987년10월 8일 黨舍에서 기자회견(광주직할시의 행정구역 확대, 해직공직자 복직의 긍정적 검토 등을 밝힘)
1987년 10월12일 訪韓중인 제럴드 포드 前 美대통령과 환담
1987년 10월17일 ‘공직사회안정을 위한 종합대책’ 발표(공무원 정년연장, 국영업체 수준 봉급인상 밝힘)
1987년 10월21일 민정당 전남도지부에서 5·18유족회 등 광주사태 관련자들과 간담회(연내에 광주사태 치유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
1987년 10월27일 국민투표에 즈음한 담화문 발표(6?29선언의 실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힘)
1987년 11월10일 기자회견 ‘경제정의실현 6원칙·6시책’ 공약
1987년 11월12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토론회에 초청연사로 참석(12·12사태의 경위에 대해 답변하고 공명선거와 지역감정 해소 논의 위한 ‘4후보회담’ 제의)
1987년 11월16일 중앙선관위에 대통령후보 등록, 집권 후의 정치구상을 망라한 ‘집권기본강령 10장’ 발표
1987년 11월20일 저서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 90년대를 위한 설계와 실천’ 발행
1987년 11월21일~12월13일 대통령 선거유세
1987년 12월4일 KBS-1 TV 연설(비리척결 거듭 다짐)
1987년 12월 9일 KBS-1 TV 연설(중국과 무역대표부 교환 및 소련, 東歐圈의 관계개선 노력 천명)
1987년 12월12일 서울 여의도 유세(집권 후의 국정운용 방향을 밝힌 ‘민주대화합 구상’ 8개항 제시, 중간 평가 약속)
1987년 12월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투표
1987년 12월18일 중앙선관위, 盧泰愚 후보를 제13대 대통령선거 당선자로 확정, 공고
1987년 12월19일 全斗煥 대통령 예방, 제임스 릴리 駐韓 美대사와 환담(레이건 美대통령의 당선축하 친서 전달 받음)
1987년 12월23일 대통령 당선 축하연에 참석, 韓日의원연맹 일본측 회장인 후쿠다 前 수상과 담소
1987년 12월28일 청와대 방문, 全斗煥 대통령 내외와 환담
1987년 12월30일 명동성당으로 金壽煥 추기경 방문
1988년 1월 1일 서울신문과 신년회견(남북한 기본관계협정추진, 정당 초월한 인재등용, 권력독점 병폐해소 등 밝힘)
1988년 1월 4일 중앙당사에서 당직자회의 주재(黨의 권위주의적 체질개선 당부, 정국운영에 대한 의견 개진)
1988년 1월 13일 민주당 金泳三 총재와 단독회담(총선 시기의 여야협의,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등에 대해 합의, 광주사태 치유 위해 민주화합추진위 의견 적극 수렴의사 밝힘)
1988년 1월 16일 金鍾泌 공화당 총재와 회담(총선 시기 및 선거구, 협상 통해 결정하기로 합의)
1988년 1월18일 삼청동 금융연수원내 새 집무실로 첫 출근, 기자간담회(국정운영의 계속성과 초당적 내각구성 강조)
1988년 1월20일 辛道煥 신민당 총재, 李哲承 신민당 고문, 柳致松 민한당 총재, 李萬燮 국민당 총재와 만찬(국정운영방안에 관해 의견 교환)
1988년 1월22일 정부 부처별 업무보고 받음
1988년 2월 4일 고위黨政회의 주재(물가안정 및 치안질서 확립 강조)
1988년 2월11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前 일본 수상 예방 받음(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방안 등 공동관심사 논의), 李賢宰 국무총리 내정자·洪性澈 비서실장 내정자 발표
1988년 2월19일 새정부 내각명단 발표(부총리 羅雄培, 외무 崔侊洙, 내무 李相熙, 재무 司公壹, 법무 丁海昌, 국방 吳滋福, 문교 金永植, 체육 曺相鎬, 농수산 尹勤煥, 상공 安秉華, 동자 李鳳瑞, 건설 崔同燮, 보사 權彛赫, 노동 崔明憲, 교통 李範俊, 체신 吳明, 문공 鄭漢模, 총무처 金容甲, 과기처 李寬, 통일원 李洪九, 정무2 趙敬姬, 법제처 玄鴻柱, 보훈처 全錫洪)
1988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
1988년 2월26일 제6공화국 제1차 국무회의 주재
1988년 3월10일~4월22일 각 부처 및 道政 업무보고 청취
1988년 4월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1988년 5월 7일 개각(안기부장 裵命仁, 내무부장관 李春九)
1988년 5월 9일 청와대 국무회의 주재(4대 國政지표 제시 )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 발표
1988년 9월17일 올림픽 개막식 참가(개회선언), 訪韓한 다케시타 일본수상과 韓日 정상회담
1988년 10월15일 서울장애자 올림픽 개회식 참석
1988년 10월19일 제43차 유엔총회 연설: ‘한반도에 화해와 통일을 여는 길’
1988년 10월21일 레이건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1988년 11월3일~14일 말레이시아, 호주,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방문
1988년 11월 4일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와 정상회담
1988년 11월 7일 호크 호주수상과 정상회담
1988년 11월10일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
1988년 11월12일 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과 정상회담
1988년 12월 5일 개각(국무총리 姜英勳, 부총리 趙淳 등)
1989년 1월17일 연두기자회견
1989년 1월30일 訪韓한 호크 호주수상과 정상회담
1989년 2월27일 訪韓한 부시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1989년 3월20일 중간평가에 관한 담화 발표
1989년 7월19일 개각(안기부장 徐東權, 내무장관 金泰鎬 등)
1989년 9월11일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천명 특별연설
1989년 10월18일 미국 상·하 兩院 합동회의 연설: ‘전진의 동반자-변화하는 세계 속의 韓美 관계’
1989년 11월18일~12월4일 유럽巡訪(독일, 헝가리, 스위스, 영국, 프랑스)
1989년 11월21일 콜 독일연방수상과 정상회담
1989년 11월22일 쉬로시 헝가리공화국 대통령과 정상회담
1989년 11월23일 헝가리 의회 연설: ‘화해와 새 시대를 함께 여는 동반자’
1989년 11월25일 들라므라즈 스위스 대통령과 비공식 정상회담
1989년 11월28일 대처 영국 수상과 정상회담
1989년 12월27일 신설 3부 장관 임명(문화 李御寧, 환경 曺京植, 공보 崔秉烈)
1990년 1월22일 신당창당 합의문 발표
1990년 3월17일 개각(부총리 李承潤등 15개 부처)
1990년 5월 7일 ‘時局과 관련하여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 발표
1990년 5월 9일 3黨 합당으로 민주자유당 총재 취임
1990년 5월25일 일본 국회 연설: ‘변화하는 세계 속의 새 韓·日 관계’
1990년 6월 5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0년 6월 6일 부시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0년 9월19일 개각 (농수산 曺京植, 건설 李相熙, 환경처 許南薰)
1990년 12월14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회담, 모스크바대학 연설: ‘냉전의 벽을 넘어, 평화와 번영을 향하여’
1990년 12월27일 개각(국무총리 盧在鳳 등)
1991년 1월 9일~10일 訪韓한 가이후 일본 수상과 정상회담
1991년 2월 18일 개각(부총리 崔珏圭, 건설 李鎭卨, 서울시장 李海元)
1991년 4월20일 訪韓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회담(제주)
1991년 5월 24일 국무총리에 鄭元植 임명
1991년 5월 26일 개각(재무 李龍萬, 동자 陳稔, 보사 安弼濬)
1991년 6월29일~7월7일 미국, 캐나다 공식방문
1991년 7월 2일 부시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1년 7월 4일 멀로니 캐나다 수상과 정상회담
1991년 9월17일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1991년 9월20일~30일 유엔 및 멕시코 방문
1991년 9월23일 부시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1년 9월24일 유엔총회 연설: ‘평화로운 하나의 세계 공동체를 향하여’
1991년 9월25일 살리나스 멕시코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1년 11월 8일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구축을 위한 선언’ 발표
1991년 12월18일 한반도의 비핵화와 관련한 특별발표
1992년 1월 5일 부시 美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2년 1월16일 訪韓한 미야자와 일본 수상과 정상회담
1992년 3월24일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1992년 6월5일 국가환경선언 선포
1992년 8월14일 回甲
1992년 8월24일 ‘韓中 수교에 관한 특별담화’ 발표
1992년 8월27일 세라노 과테말라 대통령과 정상회담
1992년 9월18일 중립선거관리내각 구성 결단과 관련한 청와대 대변인 발표
1992년 9월20일~25일 유엔 방문
1992년 9월21일 브룬트란트 노르웨이 총리와 정상회담
1992년 9월22일 유엔총회 연설: ‘평화와 번영의 21세기를 향하여’
1992년 9월24일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 아시아협회 초청 연설: ‘새로운 세계질서와 韓美 동반관계’
1992년9월27일~30일 중국 방문
1992년 9월28일 楊尙昆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1992년 9월29일 李鵬 중국 총리 내외 접견, 江澤民 중국 黨 총서기 면담
1992년 10월9일 개각 (국무총리 玄勝鍾, 내무 白光鉉, 법무 李正雨, 공보처 柳赫仁, 정무1 金東益), 공정선거관리를 위한 중립내각 출범에 즈음한 대통령 담화문 발표
1993년 2월25일 대통령 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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