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帝王學談論 2009,6,11.木) (恒山硏究室 恒山 金 裕 赫)
主題 367호: 살신성인 (殺身成仁)
殺身成仁이라는 말은 論語 15권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온다.
원문(原文)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사 인인(志士 仁人)은 ...뜻이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무구생이해인(無求生以害仁)하고..살아남기 위해서 인덕을 해치지 아니하고
유살신이성인(有殺身以成仁)이라...내몸을 죽여서라도 인덕을 이룩한다.
요즈음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문제를 놓고 政局이 왠지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는 듯이 보도는 이어져가고 있다. 일부 대학의 소수 교수들이 時局선언의 형식으로 집단의사를 발표 하는가 하면 일부 사회단체 및 종교(불교)단체까지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이른바 時局선언문이라고 낭독하는 모습을 TV화면에서 볼 수 있다.
각자의 시국관이 있고 철학이 있으며 또 다른 한편에는 그들 나름의 지향목적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 아이러니 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에 대하여 李明博 대통령은 사과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으니 서울광장을 개방하라는 내용이 어쩌면 천편일률적으로 판에 박은 듯이 꼭 같으냐 하는 점이다.
이는 TV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더욱 보아 넘기기 어려운 장면은 제1야당이라 자처하면서 왜 의사당을 버리고 비가 내리는 서울광장을 선택해서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구호를 외치며 왜 연좌농성을 강행하려는 것인지 그 의도를 알고 싶다.
인터넷에서 전하는 각 정당들이 걸어온 작금의 언동(言動)내용을 時系列的으로 살펴보았을 때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없다는 사실이 여러 군데서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현 시점에 펼쳐지고 있는 언동도 논리에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이 속속 들어나고 있다.
권력은 국민을 지배할 수 있지만 論理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했다. 논리에 어긋나는 언동은 설득력이 없기 때문에 세계 지배는 고사하고 국민도 지배할 수 없으며 권력 장악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국민은 어리석다하여 우민(愚民)이라 하지만 사이버시대의 국민은 어리석은 척 할지언정, 바보스러운 우졸자(愚拙者)는 거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도 국민장으로 이미 끝났다.
그리고 故人의 유서 중에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는 그 유언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경건히 받아들이는 자세로 장례분위기 속에서 이미 국민적 정서로 소화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원망하지 말고, 서로 시기하지 않으며, 서로 화합하기 위한 사회적 풍토 조성에 노력해야 마땅하다.
그러데 이게 왼 일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에 관하여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외침이 일부 정당과 일부 대학교수 및 일부종교단체를 포함한 사회단체에서 들어나고 있으니 그들의 眞意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수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의 경우, 그 외침을 정당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면, 국민장의 의의는 무엇인지? 그리고 故人의 유언은 받들어지고 있는 것인지? 올바른 해답을 찾을 길이 없다.
우리나라 역사상 삼국시대 이래 조선왕조 27대 순종대왕에 이르기까지 216명의 제왕 중 자살한 임금은 고구려 제14대 봉상왕(烽上王) 한 분이다.
극심한 실정(失政)으로 말미암아 퇴출위기에 봉착하자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를 삼국사기에서는 자경(自經)이라 기록하고 있다.
왕의 죽음을 일반적으로 훙(薨)이라 한다.(天子死曰崩, 諸侯死曰薨).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병사(病死)했을 경우에는 병사라 기록하고, 자살했을 경우에는 자결(自決), 목매어 죽었을 경우에는 자액(自縊) 또는 자경(自經)이라 기록하고 있다. 서거(逝去)라는 말을 쓴 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역사상 주요 인물의 自殺에 관한 기록을 한두 가지 소개할까 한다.
우리 겨레가 잊지 못하고 있는 민영환공(閔泳煥公:1861-1905)의 자결(自決)사건은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민영환공은 동 조약의 폐기를 직간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국치민욕(國恥民辱)을 참을 수 없었다.
요생자필사(要生者必死)하고 기사자득생(期死者得生)한다.
나 민영환은 사이불사(死而不死:죽어서도 죽지않는다는 뜻)하여 구천지하(九泉之下)에서도 二千萬 동포를 돕겠다. 동포형제여,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勿少失望)는 동포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것은 1905년 11월 4일 새벽의 일이었다.
민영환공의 정혼(精魂)은 그의 말대로 죽지 안 했다.
그러기에 그의 말대로 자결 후 10여일 뒤에 피 묻은 옷을 숨겨둔 곳에서 푸른 대나무 가지가 마루의 틈새로 솟아났다.
(抽刀自決後 十餘日後 其血衣所貯處 有翠竹數莖 從軒隙而出).
이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동포들의 호국의지를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죽지 안했다는 것을 푸른 대나무로써 보여주었으니 이런 경우를 일컬어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 하는 것이다.
다음은 주논개(朱論介 ?-1592)의 殺身成仁의 의거사실을 잊을 수 없다.
알려지기는 진주병사(晉州兵使) 최경회(崔慶會)의 애기(愛妓)로 전해지고 있지만 진주성이 함락되자 일본의 적장(敵將) 게다니무라(毛谷村六助)가 승전의 자축연을 열고 있는 곳에 접대를 하기 위한 기생으로 가장하여 참석한 주논개는 술에 취한 적장을 힘껏 껴안고 푸른 물로 함께 투신하여 적장을 살해하는 충정(忠貞)의 의절(義節)을 다 했으니 이는 곧 충정보국(忠貞報國)한 殺身成仁의 고결한 죽음이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일은 이율곡 선생의 부인 노씨부인(盧氏夫人)의 죽음이다. 이율곡 선생은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과 사별했다.
그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는 곽씨 부인을 재취(再娶했다.
곽씨 부인은 계모로서 성격이 완악(頑惡)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율곡은 친어머니처럼 정성껏 효도를 다했다고 한다.
이율곡 선생은 22세 때 노씨부인과 결혼했다.
그러나 소생이 없었다.
다시 김씨 부인을 측실(側室)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역시 소생이 없었다.
또다시 이씨 부인을 세 번째로 맞아서 겨우 아들 형제를 두게 되었다.
두 분의 측실이 있었지만 노씨 부인은 아주 화목하게 집안 분위기를 이끌었다한다.
이율곡 선생은 十萬養兵論을 제기하고 1583년에 작고하였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율곡 선생의 예언대도 온 나라는 쑥대밭이 되었다.
나라 형편이 이렇게 어려워지게 되자,
율곡 선생 집안에서는 남달리 공포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왜병들이 찾아 들어와서 十萬養兵論을 제기한 집안이기 때문에 무차별 살해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집안 사람들이 노씨 부인에게 피란 갈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노씨 부인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선생의 묘소가 여기에 계신 데 우리가 어디를 가느냐?
나는 여기서 선생을 지킬 것이라면서 끝내 자운산(紫雲山) 묘소를 떠나지 안 했다.
나는 8년 전에 이미 하늘을 잃은 사람이다 (予喪天已八年:8년전에 율곡과 사별했다는 뜻) 고로 나에게는 목숨이 없다(故 於我無心命也).
전쟁이 격렬해질수록 가족들의 성화는 더했다.
그러나 노씨 부인은 율곡선생 묘전(墓前)에서 몇 날 밤을 지새우면서 적병에 의한 파묘난동(破墓亂動)이 벌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묘를 지키다가 스스로 자결하고 부군(夫君)의 뒤를 따랐다. 아들 형제를 둔 이씨 부인이 있었지만 노씨 부인이 율곡 선생과 함께 합장되었다.
살신(殺身)은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는 뜻이다.
志士와 仁人은 제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하여 인(仁)을 해치지 않는다.
때문에 몸을 스스로 죽여서까지도 인(仁)을 실현한다.
이를 殺身成仁이라 한다.
殺身成仁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의 의미를 구현해야 한다.
하나는 영원불멸의 大義名分을 지녀야 한다. 다른 하나는 殺身의 의미(價値)가 擴大再生産性을 지녀야 한다.
민영환공은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死而不死)는 것을 푸른 대나무가 피 묻은 옷 있는 곳에서 생장했다는 사실이 말해줌으로써 민족의 정혼(精魂)을 살려냈다는 명분과 죽음의 가치를 확대재생산함으로써 민족의 애국정신을 일깨웠다.
주논개(朱論介)는 기생이라는 미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적장을 죽이는 호국충혼(護國忠魂)을 발휘함으로써 사대부 계층을 비롯한 일반국민들에게 항일투혼(抗日鬪魂)을 고취(鼓吹)시켰다는 명분과 항전사기(抗戰士氣)를 진작시켰다.
그런가 하면 노씨 부인은 이율곡 선생의 양병호국정신(養兵護國精神)을 죽음으로써 지켰다는 여모정열(女慕貞烈)의 표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정주부들까지도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칠 줄 아는 충혼(忠魂)을 선양했다.
30만 大軍의 일본의 침략을 불과 5만의 군사력으로써 대적할 수 없었기에 도처에서 패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년간의 전쟁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義兵들의 봉기에 힘입었음이 컸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전국 도처에서 의병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민영환공과 주논개 및 노씨 부인의 殺身의 대의명분과 그 죽음의 가치가 확대재생산성을 지녔다는 여덕(餘德)에 힘입음이었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
몇 가지 사례를 소개 한 것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의 전통으로 이어져오는 自殺의 정신문화적인 맥락은 혼(魂)이 살아있다는 데 그 본질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殺身成仁의 정신 말이다. (끝)
노무현의 자살과 민영환의 자살
- 김유혁(항산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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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6-12, 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