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選 재개표! 세계를 뒤흔드는 이란 사태!

호메이니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신정체제가 일단 굴복.
이란의 실질적 최고 통치기구인 혁명수호평의회(The Guardian Council)은 최근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 대하여 문제 지역의 재개표 결정을 내렸다. 1979년 호메이니 혁명이 일어난 이후 최대 규모의 反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런 발표가 나왔다. 이 결정에 대하여 호세인 무사비 후보는 '또 장난 치려 한다. 재선거를 해야 한다'고 반대하였다.

이란 선거관리 기구는 지난 12일 투표 직후 現 대통령 마무드 아하마디네자드가 압도적 표차로 개혁파의 호세인 무사비 후보를 더블 스코어差로 이겼다고 발표하였었다. 무사비 지지자들은 개표 부정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테헤란을 중심으로 군중시위를 벌이고 있다. 외국언론은 대체로 무사비 후보가 이길 것으로 내다보았었다.


최고 통치자인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군중시위에 놀라 투표결과를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하였으나 시위는 더욱 격화되어 어제는 7명의 시위대가 사살되었다. 무사비는 '선거에서 이긴 것은 나다. 표를 지키는 데 목숨을 걸겠다'고 선언하면서 시위를 진두 지휘하고 있다.

이 개혁파의 도전에는 젊은층이 앞장서고 있다. 이란 인구 7000만 중에서 6000만 명이 39세 이하의 젊은 세대라고 한다. 경제불황으로 실업률이 30%에 달하여 젊은 층의 불만이 강하다. 神政체제하의 탄압기구가 언론을 누르는 가운데서도 이란 사회는 개방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여 왔다. 특히 인터넷의 보급으로 젊은이들이 反정부 투쟁에 조직적으로 나설 수 있는 기반이 생겼다. 더구나 열띤 大選 분위기가 反정부 세력을 용감하게 만들었다.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 聖職者들이 혁명수호평의회를 조직하여 혁명수비대와 민병대를 직할하면서 정부를 지도하는 神政체제이다. 팔레비 왕이 이란을 근대화하다가 逆風을 만나 쫓겨난 지 30년만에 이번엔 그 專制 체제에 대하여 젊은 이들이 도전장을 던진 셈이다.

이란은 이슬람 테러조직을 지원하고 핵개발을 하면서 북한과는 거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反美, 反共, 反유태인 성향이다. 이런 나라에서 혁명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은 세계 정세에 끼치는 영향이 막대하다. 한반도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당장 神政체제가 무너질 리는 없으나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체제에 최초의 균열이 간 것은 확실하다. 이란은 中東의 中國으로 불릴 만큰 찬란한 역사와 문명과 거대한 국토, 자원을 갖고 있다. 사우디의 사막에서 일어난 이슬람은 이란의 이런 문명과 결합하여 세계종교로 格上되었다.

여러 번 세계를 뒤흔든 이란이 또 다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숨을 죽이고 이 역사의 激變을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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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혁명 이후의 이란 현대사 전개(자상한-회원토론방)



이란(Iran)은 원래 페르시아라 했다. 1922년 레자 팔레비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팔레비 왕조를 창시했다. 페르시아는 페르시아 족, 바크티아르 족, 아제르 족, 루리 족, 쿠르드 족, 아르메니아 인 등 10여개 종족이 사는데 가장 인구가 많은 페르시아 족(약 50%)의 이름을 따서 페르시아라 했으므로 레자 팔레비는 종족 융합을 위해 ‘아리안의 나라’란 뜻인 이란으로 국호를 이란으로 정했다. 종족 간의 대립은 그다지 없다. 현재 이란 최고 종교지도자인 하메네이가 아제르 족 출신이다. 아제르바이잔 주민이 아제르 족인데 이들은 투르크 계통이다. 소수이지만 유대인도 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세계사 교과서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로마 제국은 남유럽, 프랑스, 아프리카 북부를 차지하는 제국을 이룩한 후 동진만 가능했다. 기후가 척박한 라인 강 이북은 지중해성 기후에 익숙한 로마인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었고, 서쪽은 대서양이 가로막았으며 남쪽은 사하라 사막 때문에 더 남하할 수 없었다. 그러나 로마의 동진은 고대 페르시아의 두 번째 제국인 파르티아에 막혔다. 로마 제국은 파르티아, 그 뒤를 이은 사산 왕조와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는데 대체로 로마가 패배했다. 로마 황제 가운데 전사자가 1명, 포로가 2명이나 나왔다. 동로마 제국은 사산 왕조에 조공을 바칠 때가 많았다.

케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로 이루어진 2차 삼두정치도 파르티아 때문에 균형이 깨지고 케사르의 독재가 가능했다. 로마 제일의 부호로 빚더미에 올라 파산 지경인 케사르를 구원했던 크라수스는 무공을 세우기 위해 파르티아 원정을 갔다가 지금의 시리아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이때 로마인 포로가 파르티아 동부로 배치되었다가 현재의 신강 위구르 자치 구역으로 탈주하여 정착하였다. 최근에 이들의 자손이 유전자 검사로 로마인의 후예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케사르는 크라수스의 재산을 차지하고 사병을 양성하여 폼페이우스를 격파, 로마의 독재자가 되었다. 로마의 위신을 세우려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했는데, 출병 직전에 브루투스 일파에게 암살되었다.


동로마와 수백 년간 상쟁하던 사산 왕조는 651년 경 신흥 이슬람 세력에 멸망되었다. 이후 4대 칼리프인 알리를 추종하는 시아파가 이란에 기반을 두고 탄생했다. 무하마드의 사촌에다가 사위였던 알리는 이란 여자도 처로 맞이했으므로 이란인들이 추종할 만 했다. 소수파가 된 시아는 나름대로 국가 탄압 속에 생존하기 위해 교리를 발전시켰다. 1501년 사파비 왕조가 탄생하면서 국교가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파비 왕조와 정면 대결을 선언하였다. 이처럼 이란의 시아파는 국가 기구의 탄압 속에 버텨왔으므로 나름대로 조직이나 교리 면에서 혁명성을 띠게 되었다. 민중 장악력은 국가 기구보다 월등했고 이것이 결국 엄청난 대중을 동원하여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다.




1979년의 이란 혁명은 여러 면에서 놀랍고도 특이한 혁명이었다.

종교 집단이 혁명을 주도한 것, 민중들의 혁명 참여가 이전의 어떠한 혁명보다 광범위했다는 것 등, 여러 가지 특징이 있다.



시아파 성직자의 서열은 그랜드 아야톨라가 최고인데 1979년 당시에는 호메이니, 샤리아트마다리, 탈레가니 등 3인이었다. 이 가운데 정교일치로 성직자가 직접 정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호메이니가 했다.

호메이니의 공식 후계자는 아야톨라 문타제리였다. 호메이니가 15년간 망명 생활을 하였으므로 이란 국내의 시아 조직을 보존하고 키웠던 것은 문타제리였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정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고위직이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메네이는 1981~88년 사이 대통령이었고 라프산자니가 국회의장, 무사비가 총리였다. 장관들도 8년이 보통이고 10년 이상 재직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전직 대통령 하타미도 11년간 문화공보부 장관이었다.

또 다른 특징은 종신직인 최고 종교지도자의 역할이다. 최고 종교지도자는 마르자에 타클리드라 불리는데 이론상으로 완벽한 지성을 가져 이슬람의 원칙에 맞게 주요 정책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최고 종교지도자에게 결정권이 있다. 마르자에 타클리드는 직선으로 선출된 대통령 해임권이 있다. 호메이니가 한 번 행사한 바 있다. 초대 대통령 바니 사드르가 1981년 권력 내부의 암투로 궁지에 몰리자 스스로 사임하고 프랑스로 망명을 갔다. 자진 사임이었지만 실제로는 호메이니가 해임한 것이었다.

호메이니가 종교일치를 주장한 것은 플라톤의 철인정치론에 기반을 둔 것이다.

1989년 2월 혁명 10주년 기념식에서 문타제리는 혁명의 과오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는데 호메이니가 권고하여 4월 후계자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대통령을 지낸 아야툴라 하메네이가 겨우 48세의 나이로 후계자가 되었다. 서열이 훨씬 높은 아야툴라가 수백명이나 되는 그가 마르자에 타클리드 계승자가 되어 지금도 문제이다. 호메이니는 6월에 사망하고 하메네이가 마르자에 타클리드가 되었다.

대통령이던 하메네이가 최고 종교지도자가 되었고 국회의장이던 라프산자니가 89년 선거에 승리 재선하여 1997년까지 8년간 대통령을 지냈다. 개혁파의 기수로 아야툴라 하타미가 당선되었으나 하메네이의 제동으로 그다지 업적이 없었다. 2005년 라프산자니가 다시 출마하였으나 혁명수비대 사령관 출신 아흐마디네자드에게 결선투표에서 졌다.




지금의 보혁 대결은 좀 기묘하다.

무사비는 호메이니 통치기 내정을 맡은 총리였고(1989년 개헌으로 총리 직 폐지), 아흐마디 네자드는 혁명수비대의 일개 장교였다. 대통령 하메네이 밑에서 하타미는 문공부장관이었다. 라프산자니는 국회의장이었다. 혁명동지라 할 하메네이와 하타미, 라프산자니는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호메이니 가문은 완전 개혁파가 되었다. 현재 손자와 손녀딸이 활동하고 있는데, 손자 2명은 성직자이지만 하메네이가 이란을 교도소로 만들었다고 누구보다 신랄하게 비판한다.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에 살고 있는 전 국왕 무하마드 레자 팔레비의 아들과 화해하기도 하였다. 손녀 가운데 하나는 국회의원인 하타미 남동생과 결혼하였다.




한 가지 사족으로 덧붙인다.

중동 문제가 발생하면 외대 교수들이 전문가라 하여 각광받지만 웃기는 이야기이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터키 어 세 가지 가운데 최소한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 되는데 현역 교수 가운데 하나도 없다. 동시통역도 가능한 사람은 교수 정치에서 져서 생계를 걱정하고 산다. 외대 출신 가운데 외대라면 이를 가는 사란이 적지 않다.

터키 어에 유창한 이희수 교수는 한양대에 자리를 얻었는데 공개적으로 모교인 외대를

비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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